“이상이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들 입니다.”
갑옷을입은 무장 상충이 주광비를향해 보고했다.
그는 주광비가 준가르에서 주둔하고 학살을 벌일때도 같이 행동했던 측근중에 한명이며 직속부대의 팔기군 무장이다.
이번에 진행된 요동사령관 엄세번을 심문하고 그의 부하인 한탁주를 데려다 고문하는것도 감독했다.
엄세번은 고통스런 고문을 버티면서도 입을 닫았지만 부하인 한탁주가 모든것을 자백하는 바람에 끝장난 것이다.
이후 상충은 한탁주를통해 모든것을 진술받았다.
이것을 보고서로 작성해 천기대신 주광비에게 올린것이다.
다만 한탁주는 자신이 살기위해 모든것을 엄세번이 하였고, 자신은 엄세번의 명령에따라 했을 뿐이라고하며 애걸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철종이 홍상준의 특수부대를 이용해 지르칼손과 팔기부대를 박살낸건 사실이다.
하지만 한탁주는 거기에더해 몇년간 만주지역의 요동군에 일어났던 불미스런 사건이나 팔기군들의 행방불명, 그리고 팔기군이나 한족병사들이 사망한 것들까지 모두 조선의 소행이라고 거짓말과 MSG-까지 퍼부어버린 것이다.
이처럼 한탁주는 조선을 대청제국에대해 반항하는 국가로 탈바꿈 시켰고 이런 내용들이 적혀진 보고서를 읽어보던 주광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본관이 준가르에서 대청제국에 반역하는 버러지들의 목을베고 내장을 끄집어내고 살점을 벗기는 사이에, 동쪽에있는 조선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이런 짓거리를 벌여?”
쾅! 주광비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둔중한 굉음이나며 탁자 중앙에 금이 새겨졌다.
그러자 모여있던 사람들도 찰나간 움찔했다.
그럴것이 주광비는 북경에서도 이름을 날리던 장수였다.
특히 적에 대해서는 인정사정 봐주지않는 흉폭함이 있었다. 준가르에서 그는 인간백정 또는 도살자라는 악명과함께 공포의 존재였다.
준가르에서 벌인 학살과 만행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숫자만도 족히 20만은 넘어갔다.
비공식으로 따지면 30만, 40만에 이른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때문에 청나라를향해 반기를들며 싸우던 준가르 지역은 주광비가 무차별 학살을 벌이면서 반란군의 씨가 말라버렸다.
이런 악명이 있다보니 주광비가 북경에 돌아왔을때 둘째황자인 혁흔의 세력조차도 한동안 엎드려야했다.
“속국과 노예국인 놈들이 대청제국의 팔기군을 건드리다니, 조선놈들의 간덩이가 부었나 봅니다.”
“그놈들은 병자년에 대청제국의 영웅이신 홍타이지 폐하에게 머리를 숙인걸 잊었나 봅니다.”
“그때 홍타이지 페하가 온정을 베풀어 삼전도에서 조선왕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만 받고 조선왕의 목숨을 살려주니까, 이제는 그 은혜를 모르고 대청제국에 이빨을 드러내는 군요.”
“천기대신 각하! 당장에 용맹한 팔기군들을 소집해,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불태워 버리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준가르에서 했던 것처럼 2-30만명정도 조선놈들의 목을치고 내장을 끄집어내면 그뒤에는 수백년동안 감히 대청제국을향해 덤벼들지도 못할겁니다.”
강경파 무장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주광비도 일정부분 무장들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다.
반항하는 적들을 쓸어버리고 학살하는건 그의 주특기중에 하나였으니 말이다.
그때 관복을 입고있는 부하중에 한명이 나섰다.
주광비가 준가르에서 활동할때는 무장들이 그의 부하들이였다.
하지만 북경에서 천기대신이란 자금성의 실권자가 되자, 조정내에있는 각부서의 상급 관료들도 그에게 줄을섰고 부하들이 되었던 것이다.
“자네는 혹시 다른 의견이라도 있는가?”
“대신께서도 알다시피 조선따위는 대청제국의 군사력에는 물론이고 정예의 팔기부대에게도 금방 무너지는 보잘것없는 속국일 뿐입니다. 따라서 군을일으켜 조선을 정벌하는건 이후에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문제는 현재 연경(북경)내의 상황을볼때 성급하게 대군을 움직이는건 다른 세력들에게 빈틈을 보일수 있습니다. 동시에 조선은 과거 수백년전 병자년에 벌어졌던 조선정벌을통해 지금까지도 청제국을향해 속국으로서 머리를 숙여오던 국가였습니다.”
“그런 놈들이 대청제국의 팔기군을향해 도전을 해?”
“듣기로 최근에 조선에서 새로운 국왕이 등극했다고 합니다.”
“흥! 속국따위에 새로운 왕이 나온게 뭐가 대수인가? 대청제국을향해 노예역활만 충실히하면 되는것이지.”
“그러하옵니다. 다만 조선에서 새로나온 국왕이란 놈이 강화도란 섬에서 농사나짓던 일자무식의 수준이였다고 합니다.”
“크하하핫! 조선은 그런 놈을 왕으로 세울정도로 미개한 국가였단 말이냐?”
주광비가 광소를 터뜨렸다.
처음에는 조선에대한 분노로 살기를 뿜어냈다가 이제는 조롱과 비웃음을 토해내는 중이다.
“어쨌든 이제갓 약관에 불과한 어린 놈이고 왕의 실권조차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전대국왕의 조모(租母)였던 대비가 수렴청정을 진행중이고, 상당수의 권력은 조정내 권신들이 갖고있다는 소문입니다. 따라서 이처럼 보잘것없는 속국인 조선이 대청제국을향해 반역을 시도했다는건, 과거 조선이 대청제국을 주인으로 모셨던 부분을 생각하면 약간 이상한것도 사실입니다.”
“그럼 자네의 계책은 무엇인가?”
“일단 조선으로 사신을보내 어떻게된 상황인지 알아보고, 그뒤에 대군을 일으켜 정벌하는것도 늦지않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조선에는 이 부분을 숨기는게 좋겠습니다.”
관료의 말을듣자 주광비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부렸던 무장들은 때려부수고 죽이는데 능숙하지, 저런 계책은 내놓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주광비가 만족한것은 아니다.
“좋은 생각이군. 그렇다해도 조선이 이번에 일으킨 사건은 대역죄에 해당한다. 이것을 그냥 놔두란 뜻인가?”
“당연히 아니될 것입니다. 이번기회에 조선을향해 대청제국이 조선의 주인이란 부분을 확실하게 만드는것이 중요합니다. 이번에 파견된 본국의 사신을향해 조선왕이 과거처럼 바짝 엎드리며 용서를빌고 한다면 그것으로 대청제국의 위신은 세워지는 것입니다.”
“천기대신 각하!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조선왕을 이곳 연경(북경)으로 데려와 황제폐하 앞에서 잘못을빌고 용서를 구하도록 시켜야 합니다.”
“흠. 확실히 그것이 더 좋겠군. 조선왕이 자금성에서 폐하를향해 엎드리는 상황이 나온다면, 대청제국의 권위와 폐하의 위신이 더 높아질 테니까. 그리고 혹시라도 제국을향해 반기를품는 놈들의 기세를 꺽을수도 있고.”
주광비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였다.
“대신각하! 조선이 과거에는 대청제국을향해 엄청난 공물들을 매년 바쳤는데, 전대 황제들께서 조선에 온정을 베풀어 공물의 양을 줄이거나 또는 그냥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번기회에 조선의 버릇을 고쳐놓기 위해서라도 막대한 공물과함께 조선의 공녀 5000명은 바치도록 해야합니다.”
“확실히 조선의 계집들은 얼굴이 반반하기로 소문이났지.”
주광비가 음흉하게 웃었다.
이윽고 호부쪽의 상급관료가 다른 의견을 내었다.
“알다시피 대청제국은 얼마전 벌어졌던 양이들, 영길리국과의 전쟁때문에 상당한 피해와 금전적인 손해를 보았습니다.”
“크윽! 그놈들에대해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주광비가 주먹을 쥐었다.
몇년전 벌어졌던 아편전쟁은 청나라에게 대굴욕을 주었다.
청제국이 자랑하던 팔기군이 개박살났고 영국과 남경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을 끝냈다.
이 조약에서 청나라는 홍콩을 양도하는것.
그리고 영국에게 1200만달러에 이르는 배상금, 그리고 몰수했던 아편에대한 배상금 600만달러와 기타비용까지 도합 2100만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돈을 배상해야했던 것이다.
1840년대에 2100만달러는 21세기의 돈으로 계산해도 족히 2-300조원을 넘어갈 엄청난 거금이다.
“수년전 대청제국이 양이 놈들과의 전쟁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었고, 지금도 그때문에 자금성의 내탕고와 호부쪽의 재정이 넉넉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따라서 이번기회에 조선을통해 그중 일부를 보충하는것도 한가지 방법이 될수있습니다. 듣기로 조선에는 금과 은이 꽤 산출된다고 했는데, 조선을 쥐어짜서 대청제국의 국고를 튼튼히 하는것도 필요합니다.”“역시 좋은 생각이다. 어차피 조선은 대청제국을위해 봉사할 노예국이자 속국일 뿐이니까.”
“당연합니다. 조선놈들은 대청제국의 명령을 거부할수도 없을 것입니다.”
“좋아! 그대들의 요구사항을모아 폐하께 아뢰고, 허락을 받도록 하겠다. 물론 이후에 조선에서 공녀들을 보내고, 막대한 공물과 배상금을 보내오면 자네들에게도 충분하 포상이 주어질 것이다.”
“감사합니다. 대신각하.”
거기모인 부하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조선의 어린 공녀들을 품을 생각, 조선을 쥐어짜서 얻게될 막대한 재물에대한 기대감으로 입이 찢어지는 중이였다.
* * *
“군졸로 생활하다가 저런 황당한 꼴을보다니!”
“쉿! 자네 큰일나고 싶어?”
동료가 송재순의 옆구리를 찔렀다.
두명은 비변사에 소속된 병사들로서 관청의 정문을 지켰다.
그런데 조금전 그들앞에서 벌어진 상황은 믿기지 않았다.
김좌근과 안동김씨, 그리고 간신들 세력이 비변사에 모여서 술을퍼먹고 놀고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오늘은 추가로 한양내 기녀들까지 불러들인 것이다.
낮에 이런일이 벌어졌다면 끔찍했지만 김좌근과 안동김씨들도 눈치가 있는지 어둑해지는 밤에 기생들을 부른 것이다.
그래도 공적인 업무를보는 관청에 기생들이 들락거리는 상황이라니?
군졸이였던 송재순은 부아가 치밀었다.
처음에는 비변사에 소속되면 녹봉도 괜찮고, 대우도 좋다는 말에 들어왔지만 이제는 비위가 상해서 때려치고싶은 기분이였다.
“제길. 더러워서... 퉷!”
송재순이 바닥에 침을 뱉으면서 투덜거렸다.
* * *
“호호홋! 나리. 어서 드시고 저에게도 한잔 따라주시와요.”
“크하핫! 물론이지.”
기생들을 옆에끼고 사내가 소리쳤다.
비변사 내부의 회의실에는 술판이 벌어졌다.
상석에앉은 김좌근을 중심으로 그의 패거리들이 모여있었다.
“이판대감! 오늘따라 술맛이 좋습니다.”
“아무래도 호판대감이 가져온 청국의 명주가 제몫을 하는구려.”
“그것도 있지만 이판대감이 조선을 태평성세로 만들어서 그런것이 아니겠소?”
“맞습니다. 이나라의 주인은 이판대감인거 같습니다. 대감이 없으면 국정이 위태로울 지경이니 말이요.”
“허허, 과찮이요.”
김좌근이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측근들이 조선의 주인이라고 치켜세워주는 말에는 기분이 좋아졌고 입까지 찢어지는 중이다.
‘조선의 주인이라, 하긴 조선에서 나를향해 대적할 놈이 있던가?’
김좌근이 술잔을 들이키며 확신했다.
기분좋게 즐기던중 형조판서가 뭔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이판대감.”
“뭔데 그러시요?”
“오늘 조회때 예조판서가 가져온 서신말이요. 청국에서 보냈다는 것인데.”
“예판 그자가 조회때 읽은대로 청국에서 조선으로 사신을 보낸다는 것인데 뭘 그러시요?”
“서신내용에 대해서는 저도 들었습니다. 다만 좀 이상한건, 청국에서 갑자기 조선에 사신을 보내는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지요. 본래 상국과 조선사이에 사신이 왕래하는 관례에 의하면 내년쯤에 올것이라 예상했는데.”
그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의문을 표시했다.
이에대해 김좌근은 여유로운 모습이다.
“허허. 경들은 아직도 소식이 느리군요.”
“무슨 뜻입니까?”
“올해초 상국인 대청제국에서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였소.”
“그것이 사실입니까?”
“우리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김좌근 패거리가 놀라고 있었다.
자금성과 북경에서 새황제인 혁저(함풍제)가 등극한건 얼마되지 않았고 중국에서도 이제 소식이 퍼지는 중이다.
따라서 조선에있는 그들이 모르는건 당연했다.
하지만 김좌근은 조선내의 권신답게 청나라쪽에 연결고리를두고 청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소식에 대해서는 빠르게 들을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문에 김좌근은 자신의 정보력을 부하들에게 자랑했다.
“역시 이판대감의 수완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우리들이 대감을믿고 의지하는것도 이런거 때문이지요.”
“그저 청나라쪽에 중요한 첩보를 전하는 소식통들을 좀 만들어둔것 뿐이요. 어쨌든 이번에 상국에서 조선으로 서신을 보내고 사신을 파견하는건, 연경에서 새로운 황제폐하의 등극때문인거 같소이다. 과거에도 대청에서 새황제가 등극할때마다 신하국인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 그것을 알렸으니 말이요. 물론 조선에서는 사신을 영접하는데 지극정성을 다하고 새로운 황제폐하를위해 공물을 준비하고 바치는것이 관례였으니 이번에도 그렇게하면 모든것이 순탄할 것입니다.”
“이판대감의 말씀을 들으니 안심이 됩니다.”
참석자들의 표정이 밝아지며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김좌근이 덧붙였다.
“병조판서께서는 믿을만한 측근을골라, 그에게 100명의 병졸들과함께 보내도록 하시요. 그에게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올 대청제국의 사신들을 영접하도록 하시요. 대청제국의 사신들이 한양까지 오는동안 어떤 불편함이 없도록 호위하고, 사신들이 거쳐가는 각지방의 수령들에게는 사신들을위해 계집과 술을 충분히 준비하도록 하는게 중요합니다. 동시에 사신들이 지나갈 지방의 백성들을 동원해서 도로를 정비하고, 사신들에대한 환영회를 준비해야 될겁니다. 사신단을 융숭하게 대접하는것이 청제국을 상국으로 모시는 우리 조선이 해야할 일이요.”
“맡겨만 주십시요.”
병조판서를 포함한 김좌근의 부하들이 대답했다.
* * *
콰두두! 배동석이 말을타고 달렸다.
얼마전 한양에서 출발한 그는 북방지역을향해 이동하는 중이다.
‘이 서찰을 간도 정찰대장에게 전해주고, 나의 지시사항을 일러주게’
배동석의 뇌리로 임금이 한말이 스쳐갔다.
하루아침에 조선왕이된 이원범을따라 한성(한양)까지온 배동석이다.
그뒤에 배동석은 철종의 배려로 한양에서 생활하며 경험도 쌓았다.
또한 그는 강화도를 떠나기전 아버지가 한말도 명심했다.
임금을 보필하기위해 신명을 바쳐라.
이후 자신의 몫을 해내기위해 수련도 쌓으면서 준비를 하였다.
그뒤에 철종이 비밀리에 설립한 비호국의 요원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도 실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던중 배동석은 철종의 호출을받고 희정당으로 갔다.
처음에는 그간의 생활이나 이런저런 것들을 이야기했다.
잠시후 철종은 배동석에게 중요한 임무가 있다고 말했다.
한장의 밀서를 내놓았고 그것을 간도정찰대의 지휘관에게 전달하라는것.
동시에 이번 임무에대한 몇가지 부분을 알려주었다.
그것을듣자 배동석은 경악했다.
그러나 임금이 생각중인 엄청난 계획을듣자 충분히 이해했다.
* * *
“이것이 전하께서 보낸 서찰인가?”
“그렇습니다.”
배동석이 박민준에게 대답했다.
간도정찰대를 지휘하는 박민준은 비호국 요원이 찾아왔다는 말에놀랐고 황급히 만나러갔다.
간도정찰대는 철종이 조직한 특수부대들중에 하나다.
잠시후 박민준이 건네받은 서찰을 읽었다.
표정이 수차례 변하였고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그럴것이 임금이 박민준에게 보낸 서찰, 그안에 적혀있는 내용들은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다.
“전하께서는 이번에 조선으로 오는 청나라 사신들의 기세를 완전히 꺽어놓으실 작정이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