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411화 (411/415)

에필로그. 즐겁게(3)

* * *

* * *

물보라가 사라지자 하벨은 산꼭대기에 적당한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 왔어, 하벨 티에라."

[이 몸도 왔어.]

아라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직 허전해서 좀 그런데. 조만간 뭐가 막 들어설 거야. 지금 누님이랑 형님이랑 여러 말을 나누고 있거든."

하벨은 품을 뒤져 타르트들을 내려놓았다.

"네가 좋아한다며. 뭘 좋아하는지 왜 말을 안 했어?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걸로 다 골랐지."

하벨 티에라가 알려준 가게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테스베이의 하루.

"그 가게 진짜 맛있더라. 네가 왜 그 가게를 선택했는지 알겠어. 자주 갈게."

손을 뻗어 하벨은 에그타르트를 하나 쥐었다.

[어……?]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대장이 먹어? 하벨 티에라를 위해 사 왔잖아.]

"그거야 뭐어, 사이좋게 나눠 먹는 거지. 사이 좋게."

[거기서 이미 먹었는데에?]

"그래도 맛있잖아."

바사사삭.

하벨은 입에 번져가는 부드러운 맛에 저절로 웃음이 났다.

"세상은 평화로워. 정화제가 이제 필수품이 아니게 됐고, 나는 비를 맞아도 괜찮아. 전쟁이나 뭐 그런 낌새도 없어. 만약에 있다면 내가 그놈을 죽여놓을게."

살벌한 말과 어울리지 않는 하벨의 미소에 아라는 하벨 앞에 앉아 금화 초콜릿을 꺼내려다 슬쩍 봤다.

"화 안 났어, 아라야."

[아니. 대장이 슬픈가 싶어서.]

아라는 자신의 머리 위를 맴도는 꽃 왕관을 만지작거렸다.

"안 슬퍼. 나는 이제 진짜 괜찮아."

바사사삭.

입안에 이렇게 맛있는 에그타르트가 들어가는데 뭐가 슬플까.

"그냥 누가 이 평화를 부순다면 용서 못 할 것 같아서. 우리가 어떻게 지킨 건데."

[맞아! 이 몸도 용서 안 할 거야! 이 몸도 마구마구 때려줄 거야!]

"그러니까, 하벨 티에라. 안심하라고. 이 말 하려고 왔어. 봐, 달도 진짜 예쁘네."

하벨은 다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바사삭.

에그타르트가 하벨의 입에서 먹히고.

날름.

초콜릿이 아라의 혀에 녹을 때쯤, 갑자기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하벨이 눈길을 돌리며 달과 별이 박혀 반짝이는 하늘 바라보다 방긋 웃었다.

"좋네."

[응응! 이 몸은 밤놀이가 너무 좋아.]

"쉬잇. 알지?"

[응! 쉬잇. 이 몸은 알아!]

아라는 입가에 초콜릿이 묻은 얼굴로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비밀이었다.

"나 이번에 들키면 진짜 엄청 혼날지도 몰라. 그냥 혼나는 게 아니라 반성문을 쓸지도 몰라."

[반성문을 쓰는 게 무서워?]

"무섭지. 뭘 잘못했는지 쓰는 건데, 사실, 으음."

사실 잘못한 건 한 줄인데 이걸 어떻게 여러 장으로 늘려 쓸지 고민하는 게 무척이나 무서웠다.

"어……?"

하벨이 에그타르트를 먹으려다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왜 그래, 대장?]

"카샬이야!"

바사삭!

하벨은 나머지 에그타르트를 입안에 넣었다.

[아, 아앗! 빨리, 빨리! 빨리, 대장!]

아라가 초콜릿을 쥔 채로 허공에서 다리만 바쁘게 움직였다.

물보라가 아라와 하벨을 휘감았다.

"먼저 갈게! 짧게 왔다 가서 미안해!"

하벨은 우물거리며 손을 흔들다 그대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 바람이 살며시 다가왔다.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잠깐 퍼져나간 것만 같았다.

바람은 그 자리에 머물고, 또 머물다가 조용히 타르트를 건들고 조용히 모습을 감췄다.

* * *

"…으음."

하벨은 눈을 찌푸렸다.

찌푸려진 미간을 레디나가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왜 그러세요? 너무 추우세요?"

하벨은 잠깐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목도리에, 모자에, 귀마개에, 장갑에, 이불까지.

그냥 아예 침대를 배 상판으로 가져와 자신은 누워 있었다.

아니.

왜 배 위에 있을까.

"…나, 왜 여기 있는 거야? 나… 방에서 잤는데?"

"아침 해를 보고 싶으시다고 하셨잖아요. 아쉽게도 한 번 놓쳤지만, 내일 또 기회가 있으니까요."

레디나가 실실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하벨은 첨벙거리며 물속에 뛰어노는 아라와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라르웬과 넬시아까지 있자 하벨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제 나 카샬한테 걸려서……."

"예. 제가 좀 잔소리를 했습니다."

카샬은 음식이 올려진 카트를 밀고 오며 가볍게 말을 놀렸다.

"그래서 나 반쯤 울면서 잤거든."

"도련님. 자꾸 거짓말하시면 키 안 크십니다."

카샬은 웃기지도 않은 말을 가볍게 흘리려다 심통이 난 하벨의 표정에 속이 또 끓어 올랐다.

"애초에 멋대로 나가신 건 도련님이십니다. 그럼 그 눈물은 후회의 감정을 담아 흘리셨습니까? 원망을 가득 담으셨습니까?"

"…원, 아니, 후회지. 후회. 암. 후회하고말고."

하벨은 걸어오는 헤레스의 등장에 시선을 내렸다.

"나 이제 괜찮아, 헤레스."

하벨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상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도련님. 보세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도련님이 한 번도 깨지 않으셨다는 건 그만큼 누적되어온 피로 때문이 아니겠어요?"

헤레스는 단호함과 동시에 안경을 올렸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잖습니까? 도련님께서 지금까지 정신력으로 버텨오셨고, 이제 구르셨던 그 흔적이 찬찬히 여러 증상으로 나오고 있다고요. 기억하시죠?"

"기억… 하지."

하벨은 괜히 머쓱했다.

에른스트가 죽은 그날, 물의 저주는 사라졌다. 아마 모두가 그랬겠지.

감기에 걸려 나아가는 과정이 괴로운 것처럼 자신의 몸도 그랬다.

나아가는 과정인지 시시때때로 앓는 일이 있었다.

헤레스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며 그 과정이 생각보다 길어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거 누가 생각한 거야?"

하벨은 고갯짓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내가 그랬단다."

룬델의 목소리가 들리자 하벨은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가요?"

"겨울 바다라 아직 춥지 않더냐. 상처가 덜 나아 바닷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편안하게라도 봤으면 했단다."

"바다에 들어가도 돼……."

"안 됩니다."

헤레스가 단칼이 끊어냈다.

"물이 여기만 안 젖게 할 수 있어."

하벨은 자신을 부르는 바다의 소리에 뭔가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서 들어가고 싶었다.

"감기에 걸리지 않겠다 약속하시면 얼마든지 가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반성문 몇 장이 될지 저도 모르겠네요."

뒤가 두려워지는 카샬의 제안에 하벨은 입가를 핥아서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행복에 찬 웃음소리와 바다를 뛰노는 저들의 모습이 보여 너무 부러웠다.

자신도 그랬으면.

'…아니, 그러면 되는 거잖아?'

하벨의 눈동자가 잠깐 반짝거렸다.

"지금 딴생각하셨죠?"

레디나가 조용히 목소리를 내자 하벨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저, 오늘 도련님의 그림자가 될 생각인데요."

"아니, 이건 치사하……."

카샬이 카트에 밀고 온 음식들을 덮은 뚜껑을 열었다.

하나씩 열리자마자 하벨은 말문을 닫았다.

"치사하십니까?"

"아니. 전혀."

하벨의 광대가 높이 올라갔다.

죄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벨은 자신을 감싼 이불 더미에서 벗어나 손을 발굴해 흔들었다.

"너무 좋은데?"

"밥을 먹을 때, 바다를 보면 좋지 않을까 싶었단다."

룬델은 바다를 바라보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어디가 가장 예쁠까 생각하면서 여기저기 살핀 결과, 여기가 가장 좋았단다. 해가 지는 것도, 뜨는 것도 정말 예쁘지 않겠더냐?"

"혹시 오늘 다 여기서 자는 거예요?"

에이 설마.

하벨은 그런 생각을 하며 물었다.

"그럼."

룬델이 눈웃음을 지었다.

하벨은 그 말에 뭔가 뭉클해졌다. 안이 편할 텐데. 몇 번을 생각해도 안에서 자는 게 편해서 이러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대자아아앙!]

아라가 바다에서 날아왔다. 털들이 다 젖어 있어 물이 뚝뚝 떨어지자 하벨은 손가락을 움직여 깔끔하게 물을 없애주었다.

[오늘 여기서 다 같이 잔대! 이 몸은, 이 몸은 정말 좋아서! 너무 너무 행복해서 신나! 엄청 신나!]

이러다가 꼬리뼈가 나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라의 꼬리가 요란하게 움직여 보이질 않았다.

"나도 방금 들었어. 바닷물이 차갑지 않았어?"

[에헴. 이 몸은 위대한 정령왕이라구! 바닷물을 따뜻하게 했어!]

"그럼, 그럼. 정령왕님께서 못 하시는 건 없지."

하벨은 이를 긍정하며 또 물에 흠뻑 젖은 채 날아오는 칼리우스를 말려주었다.

"위대한 용은 어때? 춥지 않았어?"

"나도 괜찮아! 나는 위대한 용이니까! 도련님, 바다가 이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곳인지 몰랐어!"

[맞아아! 바다가, 바다가 너무 예뻐! 정말 예뻐!]

흥분한 칼리우스의 목소리를 이어 아라 역시 좀처럼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하벨은 하나씩 차려지는 밥을 보며 포크를 쥐었다.

"바다는 예쁘지. 언제나 정말 예뻤어."

바다를 바라보는 하벨의 눈이 아득해졌다.

푸르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세계가 돌아왔음을 눈으로 담자 그렇게 어여쁠 수가 없었다.

"하벨아."

룬델이 그 눈빛을 보더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상처가 닿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바닷속에 들어가렴."

"…가주님?"

"가주님?"

헤레스와 카샬이 놀란 듯이 물었다.

"미안하네, 헤레스, 카샬. 하지만 나는 하벨의 저 눈빛을 보고도 더는 말릴 수가 없다네."

눈앞에 하벨의 모든 것이자 전부였던 곳이 이렇게 펼쳐져 있는데 이걸 참으라는 말부터가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하벨은 한껏 웃음을 참은 표정을 지으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반짝거리는 바다만큼이나 그의 눈동자도 빛이 났다.

"그럼, 내일 아침에 갈게요. 이 정도는 되겠지, 헤레스?"

하벨은 포크로 고기를 힘껏 찍었다.

바다가 돌아왔다.

자신의 사랑스러운 바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설렘이 너무도 좋았다.

* * *

날이 저물었고, 저녁을 먹었고, 정말로 하벨의 침대 주변에 모두가 이불을 깔아 누웠다.

하벨은 그 광경이 참 웃겼다.

"왜 자꾸 웃어? 아침 해 보려면 일찍 자야지."

라르웬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하벨을 쳐다봤다.

"좋아서요. 너무 좋아서요."

자신이 꺼낼 수 있는 대답은 오직 하나였다.

"나, 있잖아요. 에른스트한테 가슴이 쥐어뜯길 때요."

그 이야기가 하벨의 입에서 흘러나왔을 때 조잘거리던 소리마저 사라져버렸다.

"안도했어요."

하벨은 달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냈다.

"나는요. 욕심이 없어요. 물욕도 없고, 권력욕도 없고."

태생일 수도 있고, 이미 다 가진 채로 태어났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딱 한 가지는 욕심이 있었어요."

다 가졌지만, 다 가질 수 있었지만, 한 가지만큼은 영원히 애를 써도 가질 수 없었다.

"가족이요."

하벨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드리웠다.

"그래서 내 가족이 죽었을 때 너무 슬펐어요. 왕으로서 해야 했던 모든 걸 버리고 도망쳤어요. 매일, 매일 울었어요."

웅크려 있던 아라가 고개를 들어 하벨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가족이란 단어가 내 마음에 깊냐면요."

하벨은 잠깐 웃었다.

―…이제부터 우린 가족이야!

류아의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아름답고, 기쁜 단어는 처음이라서 그래요. 아무것도 없던 저한테 처음 생긴 울타리라서 그래요. 내가, 왕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라서 그렇기도 해요. 모든 건."

찬찬히 하벨은 눈을 감았다.

"내 모든 건 그때 시작됐거든요."

누군가 손을 뻗어 잡아주었다.

넬시아였다.

"아버지가 저를 아들로서 받아 들여줬을 때 기뻤어요. 형님이 나를 동생이라 불러줬을 때 행복했어요. 누님이… 내 손을 잡아줬을 때, 따스했어요."

다른 쪽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라르웬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구했을 때 행복했어요. 모두가 죽지 않아서."

잠깐 하벨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다시, 과거가 반복되지 않아서."

일렁거리는 하벨의 눈동자에 별이 총총 박혀왔다.

"기뻤어요. 아주 많이요."

하벨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누구인지 알았다.

룬델이었다.

포근함이 덮쳐왔다.

"…고맙구나. 이제 어서 자렴."

별거 없는 그 말에 뭐가 그렇게 안도가 됐는지 아주 잠깐만 눈을 감았다가 떴다고 생각했는데 얼굴로 어느덧 빛이 스며들었다.

―…용왕님?

―이제 일어나야 해요.

물이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뜨자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하벨은 뭔가에 이끌리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벅터벅 걷다가 달렸다.

이끌림이 자신을 잡아당겼다.

물을 타고 바닷속으로 부드럽게 들어갔다.

퐁당.

'이 느낌이다.'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죽어간 자신이기에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이었다.

뽀글뽀글.

물거품이 일어났다.

물에서 해가 일렁거리는 게 보였다.

하벨은 가슴이, 속이 덩달아 흔들리는 걸 느꼈다.

꺄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밑에 있는 인어족이 보였고, 살아 숨 쉬는 생명이 제 손에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다가왔다.

천천히 바닷속을 살펴본 하벨은 위로 올라왔다.

해가 올라오고, 바다가 보석을 박은 것처럼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빙의한 후부터 계속 보고 싶었던 풍경이 그려졌다.

퐁당!

누군가 뛰어든 소리가 들리자 하벨은 물을 움직였다.

"예쁘다."

넬시아가 옆에서 웃으며 말을 꺼냈다.

"이게 네가 보고 싶었던 풍경이구나."

"네."

하벨은 이어 바닷속에 뛰어드는 소리에 한 명씩 해를 볼 수 있게 물로 앉을 곳을 만들었다.

왼쪽을 보고.

오른쪽을 봐도 옆에 누군가 가득했다.

이 기분이었다.

이렇게 보드라운 감정이 가득 차는 이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류아야.'

그때처럼.

'태련아.'

가장 행복했던 그때처럼.

'무날아.'

다시 그 장면을 또 이렇게 그려볼 줄이야.

'…너희도 해를 보고 있을까.'

이 물음은 결코, 슬프지 않았다.

자신이 그들에게 찾아가면 될 테니까.

하벨의 눈이 어여쁜 빛깔을 품으며 살포시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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