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96화 (396/415)

396화. 회의

* * *

바안이 나가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샬과 룬델이 같이 들어왔다.

"아버지."

하벨이 룬델을 반기며 성큼 다가오자 룬델은 기쁨을 드러냈다.

"너와 같이 회의장으로 가려고 미리 왔단다."

"정말요?"

하벨이 실실 웃었다.

"라르웬하고 넬시아는 언제 이곳에 오더냐?"

[아라는?]

세렌이 이어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물었다.

"형님은 지금 크로니안과 함께 있어요. 아무래도 전해야 할 게 많으니까요."

유렌을 만나 자신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 그가 경고했다.

―…용왕님. 아직 세뇌가 풀리지 않은 대신들은 에른스트의 편입니다. 제가 틈의 세계를 최대한 막아보겠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놈들이 가진 무기에는 에른스트의 힘이 담겨 있습니다.

그 경고가 거짓이 아니라 생각했기에 라르웬에게, 클로저에게 자신의 힘을 넘겨주었다.

자신의 힘이 대신들의 공격을 막기 위한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지금 크로니안은 그 힘을 클로저들에게 나눠주고 그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누님께서는 지금 정령들과 함께 반영구 정화제를 계속 배치하고 있어요. 그 모양이 꼭 원 같네요."

하벨은 미소를 살며시 그렸다.

정령들이 제멋대로 놓은 반영구 정화제를 하나씩 파악하는 건 룬델이, 이를 다시 제대로 배치는 건 넬시아가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형님하고 누님은 잘 있어요."

하벨은 이어 세렌을 바라보았다.

"지금 아라는 시엘느에 가 있어. 신관들을 데려와야 하거든."

아라가 무얼 하는지 어쩌고 있는지 사방에 떠도는 물을 통해 보였다.

[아라가… 신관들을 다 옮긴다고?]

"아니. 내 힘을 주었어. 지금 아라가 지친 게 보여서."

하벨은 곧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러더냐?"

룬델이 묻자 하벨은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 샤르비에가 여기에 도착했네요."

"…레놀드의 왕이요?"

카샬은 장신구를 달아주다가 깜짝 놀랐다.

"맞아."

"대체 어디까지 보이시는 겁니까?"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하벨은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실실 웃다가 룬델을 안았다.

카샬의 손이 갈 곳을 잃었다. 또 달지 못한 장신구가 그의 손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음에도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저 고개를 돌렸다.

사실 룬델이 자신을 먼저 안아줬기에 카샬은 숨만 깊게 내쉬었다.

"보고 싶었어요, 아버지."

하벨은 룬델이 너무도 그리웠다.

언제나 다정한 그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이 손길이 너무도 그리웠다.

곧 하벨은 손을 들어 랜턴을 흔들었다.

"하벨 티에라도요."

룬델은 하벨을 감싸 안았다.

토닥토닥.

품에 안은 온기가 밀려오자 룬델은 카샬한테, 때론 라르웬한테, 또 넬시아한테 들었던 하벨의 행보가 귓가에 맴돌았다.

절박함에 온몸으로 비명을 질렀을 그 모습이 생각이 나 주책맞게 흐르는 눈물을 감춰야 했던가.

바닷속은 무섭지 않았는지.

유렌을 만났을 때 얼마나 괴로웠을지.

하벨을 덮치고, 휩쓴 모든 풍파에 얼마나 아팠을지.

룬델은 그 모든 걸 묻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등을 토닥여주며 괜찮다고 말하고, 또 말해주었다.

"아버지."

하벨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가 활짝 웃고 있었다.

"그래, 하벨아."

"저는 괜찮아요. 아니, 오히려 기뻐요."

하벨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 감정을 무어라 말하면 좋을까.

하지만 하벨은 말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이 앞에 닥칠 일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꼭 말해야만 했다.

"내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이 나를 아껴줬어요. 나는 그걸 몰랐고요. 두 번째 삶에서 그걸 알게 됐어요."

하벨의 눈동자 잠깐 바닥으로 향했다.

"아버지랑 누님, 형님이 제 덕에 비로소 가족이 다시 돌아왔다고 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천천히 꼼지락거리던 손을 하벨은 꽈악 붙잡았다.

손가락이 빨개졌다.

"원래도 가족이었어요. 그저 오해로 잠깐 서먹해졌을 뿐이죠."

그 오해가 깊어 흘러가야 할 시간이 길어졌을 뿐이었다.

언제고 다시 풀릴 오해였다.

"가족을 다 잃어버린 제게 아버지가, 형님이, 누님이 저를… 가족으로 받아줬어요."

하벨은 천천히 고개를 올려 룬델과 마주했다. 룬델의 눈에 그려진, 그가 숨긴 슬픔이 보였다.

룬델은 유렌의 손에 막내를 잃었다.

하벨 티에라가 자신을 본인 몸에 빙의시켜 또 막내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저는 가족이, 막내가 되었어요."

하벨은 손을 들어 룬델의 손을 쥐었다.

이제 막내는 자신이었다.

룬델이 얼마나 두려울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저는 사라지지 않아요. 그럴 일은 없어요. 그러니 괜찮아요, 아버지."

룬델을 위로하고, 하벨은 자신의 각오를 내뱉었다.

"제가 가족을 지킬게요.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테니, 아버지."

룬델은 잔잔한 파도가 치듯 하벨을 바라보았다.

저 말이 너무 고마웠으니.

"어떤 희생도 하지 마세요. 절대로, 사라지면 안 됩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위기에 처한 자신을 구하기 위해 누군가 달려온다고 가정했을 때, 가장 확률이 높은 건 룬델이었다.

세렌은 아라처럼 물의 길을 열 수 있으니 그 긴 거리를 단숨에 찾아오겠지. 마지막 막내인 자신을 또 잃어버릴 수 없을 테니까.

하벨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룬델이 다치지 않게 자신의 힘을 불어넣을 생각이었다.

"약속하세요."

자신답지 않게 억지로 강요했다.

"제 아버지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당신이에요."

신이 자신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가 자신을 아들이라 불러도 자신의 아버지는 룬델이 유일했다.

"그러니까 약속해주세요. …제발요."

룬델은 그 부탁에 먹먹함을 삼켰다.

저토록 애절하게 비는데, 저토록 간절하게 말하는데 대체 어떤 아버지가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까.

'하지만 하벨아.'

룬델은 깍지를 낀 새끼손가락과 달리 다른 결심을 했다.

'네가 내 목숨보다 소중하단다.'

하벨의 손가락이 빨개질 정도로 쥐었지만, 룬델은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어 안쓰러움에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너를 위해서라면 몇 번이라도 내 목숨을 버릴 수 있구나.'

하벨이, 제 아들이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사라지는 그 모습을 어떻게 볼까.

볼 수 없었다.

이미 이토록 가슴이 미어지는데.

'아버지가… 무능해서 미안하구나.'

처음부터 티에라 가문이 움직였다면 하벨의 몸에 새겨진 상처가 저렇게 생길 이유가 없을 텐데.

모두를 지키겠다고 생각한 그 행동이 자식 하나 지키지 못한 변변찮은 아버지로서 남은 건 아닐까, 두려웠다.

"아버지."

하벨이 다정한 목소리로 룬델을 불렀다.

하벨의 미소가 포근하게 감겨왔다.

"이건 제 선택이에요."

"…아주, 잘나셨습니다."

툭 치고 들어오는 카샬의 말에 하벨은 웃었다.

"이제 가요. 여하가 떨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벨은 손을 내리며 카샬이 넘긴 가면을 손에 쥐었다.

어떤 심경의 변화인지 몰라도 여하는 그토록 도망을 다니던 왕위를 받아들였다.

―내가 인어족의 대표로서 참석하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싸우지 않겠소. 뭐라 그래도… 일단 참아보겠소.

"준비는 되셨죠?"

하벨의 물음에 룬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란다. 정령들이, 모두 아라의 말에 모였으니."

"그럼 이렇게 기쁜 날 이안이 빠질 수 있겠습니까?"

하벨은 아직 혼자 있을 정령왕을 떠올렸다.

이제는 그를 혼자 내버려 둘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동안 쭉 참았는데.

정령들을 지키고자 그토록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하벨이 씩 웃었다.

"…도련님?"

카샬은 참다 참다 혈압이 차올랐다.

"진짜 일부러 이러시는 겁니까? 이럴 거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거적때기를 입겠다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와락 구겨지는 얼굴을 따라 카샬은 더는 참지 못했다.

진짜 화가 났다.

"달님으로 등장하시겠다고 그러셔서 지금 저 혼자 화장이며 장신구며 다 하고 있는데 계속 이러실 겁니까?"

"…잠깐이면 되는데. 먼지 하나 안 묻히고 올게. 진짜야."

하벨은 카샬을 보며 멋쩍은 미소를 날렸다.

손을 옆으로 뻗자 물보라가 일어났다.

"잘 봐봐, 카샬."

하벨은 조심스레 물보라로 발을 내디뎠다.

물보라 밖으로 나왔을 때, 까만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하벨은 무언가를 쥐는 흉내를 냈다.

[…요, 용왕님?]

이안이 하벨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허공에, 아니, 물을 밟은 채 떠 있었다. 옷을 제대로 차려입어서인지 몰라도 책에서 나오는 왕족 같기도 했다.

다친 곳은 괜찮은 건지, 그렇게 물어야 하지만, 대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부터가 의문스러워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거기 가만히 있어. 다칠라."

[아니…….]

하벨이 찡긋하며 입을 열어도 이안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은 하벨의 배때기를 뚫은 에른스트의 힘이며, 다급히 찾아온 아라였다.

―이안! 이아안! 제발, 제발, 이 몸한테 힘을 넘겨줘어어! 대장을 구해야 해! 바닷속에 조금마안. 아주 조금만 버티면 될 정도만 줘어어!

아주 서럽게 울며 아라가 오지 않았던가.

하벨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이 분명했지만, 자신은 이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었다.

그게 참 서러워, 참 슬퍼 무능함을 한탄하지 않았는가.

"미안해."

하벨의 손아귀에 물이 모여들었다.

검게 물든 바다가 하벨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깨끗한 물로 변해갔다.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저 현상이 이안에게는 달리 보였다.

말도 안 되는 힘이었다.

"내가 너무 늦게 온 건 아닌지 모르겠어."

물은 곧 삼지창으로 변해갔다.

하벨은 이안을 가둔 새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를 새로 여긴 것도 아니고 새장이 무엇인지.

'쓰레기보다 못한 새끼.'

하벨은 힘껏 삼지창을 던졌다.

삼지창 옆에 물보라 덩달아 일어나서는 아주 작은 구슬처럼 변해갔다.

"씹어 먹어버려라!"

하벨의 분노를 따라 물이 거칠게 움직이며 새장을 향해 돌진했다.

콰아아아앙!

건물이 무너져내린 것처럼 큰 소리가 일어나며 요동치는 바람과 함께 바다가 힘껏 파도를 일으켰다.

새장이 부서졌다.

그토록 요란하게 일어난 물살에도 하벨에게는 단 한 방울의 물도 튀지 않았다.

하벨은 이안에게로 내려왔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그를 안았다. 폭신함이 밀려와 하벨은 고개를 파묻었다.

"많이 기다렸지?"

[…아, 아닙니다.]

"가자."

[…어딜 가야 합니까?]

"밖으로."

[밖… 이요?]

이안에게는 너무도 낯선 말이었다.

"이제 너를 가둔 새장은 사라졌어. 네가 지켜야 했던, 네가 지켰던 정령들을 보러 가야지?"

하벨의 손짓과 함께 물보라가 일어났다.

[가도… 되는 겁니까?]

"날 믿어, 이안. 모두가 보고 싶잖아."

[보고 싶습니다.]

이안은 조심스레 한 발, 한 발 옮기다 물보라 앞에서 멈췄다.

[꿈… 입니까? 제가 눈을 감으면 사라지는 걸까요?]

"아니. 나는 널 데리러 왔어."

휘어진 하벨의 눈웃음과 함께 벌린 손에 이안은 그를 안았다.

그제야 밀려드는 온기를 느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꿈일 리가 없었다. 아니, 만약에 꿈이라고 해도 이안은 절대로 깨고 싶지 않았다.

[용왕님 저는…….]

"거기까지. 눈물은 아껴두자고, 이안. 그 눈물은 내가 아니라 너의 백성한테 흘려야지."

하벨은 손을 뻗었다.

"먼저 가. 나는 뒤따라갈 테니까. 아. 도착하면 내 아버지랑 집사가 있으니까 놀라지 말고."

가다가 뒤를 돌아보고.

또 가다가 뒤를 돌아보는 이안의 불안함을 알기에 하벨은 손을 흔들어줬다.

"자 이제 해볼까, 애들아?"

―벌써 머리카락이 헝클어졌어요. 털도 묻었고요. 돌아가면 카샬한테 혼날 거라고요.

―맞아요. 그렇게 꾸미고서 움직이는 게 어딨어요?

―하지만 용왕님은 언제나 아름다우세요.

―너어? 너, 진짜 치사해!

―맞아! 완전 치사한데? 이러면 우리가 뭐가 돼?

―에이, 왜들 그래? 용왕님이 이렇게 아름다운 건 한두 번도 아니고. 그러니까 옷매무새가 헝클어지지 않게 살살…….

"너희 다 카샬한테 말투가 옮았어?"

―카샬이 태어나기 전부터 저희가 맨날 말렸다고요!

"하긴 그랬지. 잔소리쟁이들."

―용왕님을 고집불통이라고요!

"그래서 자, 여길 부서트리자고."

하벨이 실실거리자 물은 흐물흐물해진 것처럼 땅바닥에 기었다.

―진짜 귓등도 듣질 않아. 서럽다, 서러워.

―그러니까. 물로 태어나서는. 어휴.

하벨의 손이 하늘을 향하자 물이 허공에 모였다.

"눌러버리자고."

―네에.

―넹.

힘없이 대답하거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너무도 익숙해 하벨은 즐거웠다.

물이 손처럼 모습을 바꾸더니 손바닥으로 후려칠 때, 하벨은 아라가 주고 간 정령수를 이용해 바람을 추가로 이용했다.

쿠우우우웅!

칼리우스가 중력을 이용한 것처럼 묵직한 무게가 함께 짓눌리며 이안이 있던 그 자리가 부서져 내렸다.

쪼개지고 갈라지는 땅의 모습을 보며 하벨은 대충 머리카락을 바로 잡은 채로 물보라로 들어갔다.

"…짠. 바람에 머리카락만 휘날린 게 전부야. 멀쩡하지?"

하벨의 등장에 카샬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저토록 좋아하는데 뭐라 그럴까.

"예. 아주 자랑스럽습니다. 정말요."

"카샬."

룬델이 목소리를 내자 카샬은 조금 뻣뻣해졌다.

"예, 가주님."

"미안하네. 내가 대신 사과하지."

룬델은 어느덧 이안의 털을 매만지고 있었다.

"매번 고생이 많아."

말과 다른 행동에 하벨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도련님 나 왔……."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조용히 이안에게 향했다.

[반갑습니다.]

"우와아."

칼리우스가 짓는 눈빛이 달라졌다. 아주 멋진 사자였다.

분명 아라가 말한 이안이 틀림없었다.

"안녕, 이안! 나는 칼리우스고, 용이야."

용이라는 소리에 이안의 눈동자가 커졌다.

용이라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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