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화. 유렌
* * *
저기 나뒹군 유렌을 보자 하벨은 막혔던 속이 조금은 뚫린 기분이 들었다.
하벨은 앉으라고 놓은, 바람에 밀려 쓰러진 의자를 세우고는 우아하게 앉았다.
"반가워. 아, 들리려나 모르겠네. 류아 너는 언제나 반갑고."
얼이 빠진 표정을 하는 류아를 향해 웃어준 뒤 하벨은 해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 해연아. 나도 모르게 주먹부터 나가버렸네."
"…그."
해연은 너무도 당황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지적해야 하는지 몰랐다.
정신 사납게 뛰던 심장과 긴 시간 동안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얼굴을 본다 생각해 일어난 긴장감이 확 날아갔다.
"해연아 나도 미안한데, 아주 좋은 인사라고 생각해. 아주 좋았는데?"
류아가 뒤늦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유렌이 해연의 아버지라는 걸 왜 모를까.
"너도 어서 와, 해연아."
하벨은 다정한 목소리로 손짓했다. 하지만 그는 채 가라앉지 않은 연기를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음. 그냥 여기 서 있을래요. 그쪽으로 갈수록 뭔가 숨이 콱 막힌다고 해야 하나. 왠지 용왕님이 달라 보이네요."
연기가 가라앉자마자 하벨에게 느껴지는 날카로운 기세에 해연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베일 것만 같지 않은가.
"해연아. 그간 네가 속은 거야."
류아가 낄낄거렸다.
"속아?"
"그래. 네가 본 용왕님은 진짜 차분해지신 모습이야. 처음에 얼마나 망나니 같았는데. 말 한 번 걸었다가 물벼락을 맞았지. 햇빛 가린다고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까칠한 고양이인 줄 알았다니까."
"그거야 날 건드렸으니까. 난 날 건드린 자들이 너무 싫거든."
유렌이 걸어오고 있었다. 하벨은 증오를 담으며 놈을 쳐다보았고, 한껏 여유를 담은 입은 가볍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 모순이 주변을 더 차갑게 만들었다.
"너희야말로 아주 악동이나 다름없었으면서. 그때 대장 놀이에 심취했잖아?"
아무렇지도 않게.
먹잇감을 노리려는 짐승처럼 하벨은 유렌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가만히 있는 나한테 덤벼서 깨진 주제에. 내가 그때 대장이 됐던 거 기억 안 나?"
"기억나죠. 그런데 들어봐, 해연아. 그때 용왕님은 아는 게 하나도 없었어. 나랑 태련이랑 무날이랑 용왕님을 가르친다고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알아? 특히 내가 용왕님의 글자를 가르쳤단 말이지."
류아 역시 하벨의 상태를 알기에, 어쩌면 이 대화가 마지막이 될 수 있기에 한껏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하벨은 귀를 때리는 저 말에 잠깐 입술을 꽉 다물었다.
사실이었으니까.
정말로 그때는 바다가 뭔지, 해가 뭔지, 달이 뭔지 땅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던 상태였고, 저들이 자신을 가르쳐주었다.
배움의 기쁨을 저들 손에서 느끼지 않았던가.
"솔직히 우리만 가르친 게 아닌 게 특공대, '란' 얘들까지 전부 다 용왕님한테 하나씩 가르쳤어. 그래서 용왕님이 우리 막내인 거야."
"어휴."
해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저 소리였다. 설마하니 이렇게 들을 줄이야.
"저 소리 내가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르지? 술에 아주 진탕이 되면 내 볼따구 잡고는 맨날 하던 소리인데? 새삼스레."
"…뭐?"
하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 긴장감이 풀어졌다.
"모르셨어요?"
도리어 놀란 건 해연이었다.
"모르셨겠지. 술자리에 있다가 빨리 가셨으니까. 분위기에 취하면 원래 성격이 드러날까 무서워서 도망친 거야."
"시끄러워."
류아가 실실 웃으며 꺼낸 말에도 하벨은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기마저 지워나갔다.
"…너무하십니다."
터덜터덜 걸으며 유렌이 다가왔다.
어긋났던 뼈들이 맞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용왕님한테 맞으면 진짜 죽는 걸 알면서 진심으로 때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 각오도 안 했다니. 유감이네. 그 배때기를 뚫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해."
하벨은 코웃음을 치며 유렌을 노려보았다.
곧 손을 올려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지금 내 머릿속에 네놈을 어떻게 죽이면 좋을까 계속 생각하고 있으니까."
"변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유렌은 내동댕이쳐진 탁자를 밟으며 하벨 앞으로 걸어왔다.
그대로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잠깐, 하벨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절 죽여주십시오. 용왕님의 옥체에 감히 손을 댄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앗아간 이 쳐죽일 놈을 죽여주십시오."
"너도 자안처럼 세뇌에 걸렸다고 말하게?"
하벨은 발을 까닥거렸다.
자신이 생각했던 만남이 아니라 불쾌했다.
"저는 죄인입니다."
"일단 일어나서 해연이부터 봐. 내내 널 기다렸을 테니까."
"…볼 낯이 없습니다."
"정말 이렇게 하게?"
"저는 죄인입니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죄인 말입니다."
자신의 재촉에도 끄떡없이 엎드려 있는 유렌의 모습에 하벨은 물을 불러 당장 유렌의 멱살을 잡고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해연 앞에 데려가자 유렌은 일렁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껴안고 싶은 감정이 눈에 비치자 해연 역시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였다.
낯선 모습을 한 그때와 달리 정말 아버지였다.
몸은 괜찮은지.
아픈 곳은 없는지.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수많은 질문이 유렌의 눈을 통해 전해졌다.
"…아버지."
해연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유렌은 고개를 숙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멱살이 잡힌 채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게 전부였다.
"왜… 그러셨어요."
해연의 입에서 원망이 어린 목소리가 나오자 유렌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떤 변명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어떤 말도 내뱉어서는 안 된다는 것 역시 알았다.
지금 용왕이 바로 옆에 있는데 무슨 변명을 할까.
"…에른스트한테 세뇌당한 거야."
하지만 대답은 하벨한테서 들려왔다.
유렌은 눈을 떠서는 하벨을 바라보았다.
"자안처럼 뭘 받았겠지. 그게 뭔지 모르겠는데, 아마 에른스트가 참을 수 없는 유혹을 던졌을 거야."
그랬다.
"네 아버지는 그 유혹에 넘어갔고."
용왕이 꺼내는 말이 다 맞았다.
유렌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무얼 변명할까. 무얼 아니라고 부정할까.
"대답해봐, 유렌."
답을 요구하는 용왕의 말에 거짓말처럼 무거웠던 입이 벌어졌다.
"…맞습니다."
유렌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물이 천천히 유렌을 내려주었다. 발이 땅에 닿자 유렌은 또다시 하벨을 바라보며 엎드렸다.
"맞습니다, 용왕님! 제가… 너무도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내가 자안을 만난 뒤로 고민을 정말 많이 했어. 이걸 어떡하면 좋을까. 유렌 너는 어떤 모습일까."
하벨은 유렌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이 유렌을 때리며 부서져 버린 곳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아득했다.
소용돌이치던 마음이 또 흔들렸다.
유렌에 대한 믿음이 강했기에 하벨은 가슴이 아팠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짧게 말해봐."
처음 각오와 달리 하벨은 기회를 주었다. 예상했던 만남과 달랐기에 그 끝이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듣고자 했다.
해연을 위해서.
"수족과의 접전이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보일 때, 매번… 용왕님께서 상처를 입은 몸으로 전쟁터로 나가셨을 때, 놈이 제게 왔습니다."
요약했지만, 끔찍했던 순간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았을 때이며 유일한 희망인 용왕마저 지치고, 늘어나는 부상에 비틀거릴 때였다.
자신은 용왕이 세운 나라, 해화의 참모였다.
―절망스러운가.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 그럼, 내가 알려주지.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접근한 존재를 어떻게 믿겠습니까?"
―나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알아. 필요하면 나를 찾아와. 너를 기다리고 있으마.
하지만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용왕님이 전투 중에 쓰러지셨을 때, 저는… 아무 생각도 못 하고 놈에게 달려갔습니다."
유렌은 벌벌 떨었다.
유일한 태양이며 모두의 희망인 용왕이 쓰러졌을 때 받은 그 충격은 사람을 바보로 만들었다.
머리가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전략을 쥐어짰어야 했지만, 실패할까 두려워 놈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정말로 승리했습니다."
품에서 꺼낸 건 손바닥보다 더 큰 등불이었다.
하벨은 등불을 보자마자 역함이 밀려왔다.
에른스트의 힘이 담겨 있질 않은가.
"이… 등불에 불을 붙이면 놈이 방법을 알려주겠노라 말했습니다."
"대체 왜 그랬지?"
하벨의 목소리가 날이 섰다.
저토록 짙은 불길함이 넘실거리는데 이걸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용왕님을 돕고 싶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안겨드리고 싶었습니다."
맹세코 정말이었다. 오직 그뿐이었다.
그 어떤 사심도 없었다.
이미 용왕은 자신의 햇살이었으며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가장 사랑하는 딸, 해연을 구해줬는데 뭘 망설일까.
용왕을 죽일 때 자신이 꺼낸 말은 다 사실이 아니었다.
그건 자신이 아니었다.
용왕이 목숨보다 더 소중히 지킨 백성을 인질로 잡고 협박했던 그 모습은 자신이 아니었다.
"오직… 그뿐이었습니다."
대답을 들은 하벨은 숨을 내쉬며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찬찬히 쓸어올렸다.
무척 지쳐보이는 하벨의 모습에 류아는 괜히 입이 바짝 말라 갔다.
짝.
그때, 무언가를 때리는 소리에 류아의 시선이 옮겨졌다.
"어쩌자고 그걸 손대?"
해연이 주저앉아 유렌을 때리며 서러움을 터트렸다.
"이상한 걸 알았으면 멈췄어야지! 아니면 나한테 말했어야지!"
원망이 쏟아지는 해연의 말에 유렌의 두 주먹이 부르르 떨리며 이따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진짜 바보야! 그런 거 없어도 이미 대단한데 왜 그랬어? 용왕님이 아버지를 얼마나 믿었는데. 얼마나 아꼈는지 알면서 그랬어?"
해연은 유렌을 치다가 그를 안았다.
그리운 냄새가 몰려왔다. 햇살을 품은 냄새였다.
독하게 마음을 먹었어도 자신의 아버지였다.
그 감각이 찔러와 자신을 괴롭혔다.
"참 그래."
하벨이 숨과 함께 토한 말에 유렌이 고개를 올렸다.
"이 장면만 본다면 너도 딱하고, 나도 딱해."
하벨이 걸어오고 있었다.
유렌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계속 이상하다고 생각한 게 있어."
하벨의 목소리에 묻어난 감정이 점점 죽어갔다.
"죄책감이 밀려와서 날 살린 거야? 아니면 네가 신의 그릇이 되는 운명을 벗어나려고 날 이용한 거야?"
싸늘한 시선과 함께 하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동정심은 잠깐이었다.
지금 자신이 궁금한 건 바로 진실이었다.
"어느 쪽이야? 난 이게 진짜 궁금했어."
하벨이 쪼그려 앉아 유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둘 다 아니었습니다."
유렌의 고개가 아래를 향하자 하벨은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날 봐야지. 그렇게 고개를 박으면 날 비웃을지 아닐지 어떻게 알겠어?"
가슴을 찌를 것처럼 날이 선 말에 유렌은 엎드린 채로 고개를 조심스레 올렸다.
하벨을 보자마자 한없이.
끝을 알 수 없이.
아주 짙은, 그런 죄책감이 눈동자에 어렸다.
"제… 세뇌는 짙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제 딸을 버릴 정도로 너무도 짙었습니다."
말을 꺼냈지만, 피부가 하나씩 벗겨지는 것처럼 괴로웠다.
"그래서?"
"저는… 세계의 멸망을 수없이 지켜보았습니다."
"틈의 세계에 얽힌 이들을 바치고?"
"예……."
"그 끝은 어땠지?"
"놈은. 놈은 신이……."
아주 잠깐이지만, 유렌의 입가에 지독한 혐오가 섞인 비웃음이 어렸다.
"신이, 되지 못했습니다."
"왜?"
하벨의 물음에 유렌은 그때 느꼈던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떠올렸다.
"놈은 절 신의 그릇으로 사용하고자 몸을 차지했고, 신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마치 세계의 끝을 직감한 것처럼 바다가… 오염된 바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벨은 이게 무슨 소리인지 싶었지만, 유렌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벨은 귀가 따끔거렸다.
"그리고 비가 내려왔습니다. 그 비를 맞은 이들 모두 세뇌가 씻겨 내려가 싸우던 이들이, 전쟁이 멈췄습니다."
아득함이 유렌의 눈동자에 드리웠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정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신의 기적이라 할 만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놈은 이미… 신이 될 의식을 시작한 뒤였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평화가 찾아오니 어떻게 신이 강림하겠습니까?"
평화로 인해 '절망'이라는 요소가 사라진 게 아닌가.
신의 강림은 실패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럼 세상을 멸망시킨 건……."
"예. 에른스트입니다."
유렌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매번, 매번 똑같이 반복되던 그 끝에 언제나 에른스트가 분노하며 세상을 파괴하고 있었다.
"놈이 세상을 멸망으로 끌고 갔습니다. 몇 번이나요. 저는 계속 놈의 그릇이 되었고, 세상은 멸망했습니다."
"과거를 안다면 피하면 되잖아."
"과거를 알아도… 모두가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 흐름이 달라져도 저는 이미 놈에게 붙잡힌 상태였습니다."
자신의 영혼에 에른스트가 기생해 있었다.
이 방법을 풀지 않는 이상 이 운명을 영원히 피할 수 없었다.
"처음 회귀는 제 처지를 바꾸기 위해서였습니다. 회귀하고, 또 회귀하고, 얼마나 시간을 되돌렸는지 모르겠지만, 매번 바다의 오염이 사라지더군요.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대체 누가 매번 똑같은 일을 하는 건지요."
하벨을 바라보는 유렌의 눈동자에 강한 희망이 엿보였다.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불쾌감이 어리다 말고 하벨은 생각을 멈췄다.
설마.
"나… 였어?"
"예. 용왕님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류아가 질겁했다.
지금 유렌이 꺼낸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용왕님은 죽었다고!"
류아가 자신을 대신해 소리쳤다.
"이번처럼 빙의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개소리냐고!"
류아의 언성이 점점 올라갔다.
"내 영혼이었던 거야?"
하벨이 잔잔히 던진 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류아는 숨조차 쉬지 않았다.
애초에 물이 사라지는 걸 막은 것도 하벨이었으니까.
"예. 용왕님의 영혼이었습니다."
"…하."
하벨은 기가 찼다.
정말로 끝까지 희생만 하다가 사라져버렸다니.
정말 역했다.
"그래서 놈이 세상을 파괴해버린 겁니다. 신이 될 수 없으니까요. 저는 용왕님의 영혼이 항상 놈의 계획을 망쳐버린 뒤에 물이 사라졌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쩌어억.
에른스트가 자신을 차지했을 때, 아직 의식이 있을 때, 놈이 세계를 파괴해버리며 사라진 물을 보았을 때,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마지막에 세뇌가 깨졌습니다."
무너지는 세상을 바라보며 사라지는 의식을 느끼며 자신은 얼마나 울부짖었는지 몰랐다.
기억들이 조각조각이 되어 자신을 죽이고, 또 죽이는 그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밀려오는 감정이 얼마나 참담했는지, 그 죄책감이 얼마나 컸는지는 유렌은 말하지 않았다.
"다시 회귀한 이후에, 저는… 용왕님을 찾아다녔습니다. 용왕님의 시신을 안고 미친 듯이 움직였죠."
유렌은 감정을 억누르고, 참아보고, 삼켜봐도 말을 하면 할수록 몰려오는 죄책감에 금방이라도 오열할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찾았습니다."
자신이 안은 용왕의 시신이 반응했던 날.
모든 곳을 뒤져도 발견할 수 없어 절망하던 그때 시신이 반응하고야 말았다.
"틈의 세계 안에서. 해연이, 어인족이 보호하고 있다는 걸요."
유렌의 시선이 해연에게 향했다.
덩달아 하벨의 시선마저 향하자 해연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하벨의 시선이 너무도 절박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며 말해달라는 그 눈빛에 해연은 아무도 모르는, 계속 숨겼던 사실을 조용히 꺼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