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90화 (390/415)

390화. 이거 어쩌나

* * *

나를 불렀는가.

빛과 함께 신이 목소리를 냈다.

엘라힘은 깜짝 놀랐다.

신의 은총이 상대적으로 작기에 신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자신이 듣던 목소리 중 더 크게, 가장 크게 들리지 않는가.

하벨이 신의 아들이기 때문일까. 무엇이 되었든 가슴속에 다시 믿음이 차올랐다.

"내가 답을 원해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하벨이 목소리를 냈다.

열쇠의 수호자여. 이곳은 위험하구나. 쫓겨났던 신이…….

"압니다. 급하니 바로 묻겠습니다. 신이었던 자가 신이 되려면 무얼 조심해야 합니까?"

하벨은 카샬을 의식해 바로 물었다.

신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 목소리를 냈다.

세계에 어떤 간섭도 해서는 안 된다.

"구체적으로 말해주세요. 그 간섭이 뭡니까?"

세계는 반드시 있어야 할 존재들이 있구나. 너를 포함해 정령왕과 용 같은 존재가 그러하지. 이들을 죽이게 된다면 세계에 간섭한 셈이 되어 신이 될 자격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미 한차례 일어났잖습니까?"

세계가 합쳐져 다른 세계가 되었기에 그 사실 자체가 없는 게 되었구나.

"…와아."

하벨은 잠깐 숨을 삼켰다.

에른스트가 세계를 합친 진짜 이유가 바로 저거였다니.

고작 그 이유로.

고작 그따위 이유 하나만으로 희생되었던 목숨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벨은 꾹 참았다. 지금 감정에 사로잡힐 때가 아니었다.

"그럼, 그 외에는요? 가령, 세계를 위협할만한 재해를 퍼트린다든지, 간접적으로나마 사람들을 죽이는 행위 말입니다."

그 또한 지속적이면 세계에 간섭한다고 받아들일 수 있지.

'그럼… 지금 아슬아슬한 건가.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가.'

하벨은 그제야 과거에도 지금도 에른스트가 왜 제 손을 더럽히지 않았는지를 알아버렸다.

'분명 불안했던 거겠지.'

자신을 없앨 수 있을지 아닐지도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확신하고 덤벼들겠는가.

그래서 자신을 없앨 수 있는 확실함이 들기 전까지 수족들과 유렌 뒤에 숨어서 직접 개입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빌어먹을 자식.'

하벨은 그제야 왜 에른스트가 마지막에서야 자신을 죽였는지를 이해했다.

그 정도로 신중한 놈이었을 줄이야.

감정을 삼켜보지만, 분노가 치밀었다. 결국, 모두가 에른스트 손아귀에 왜 놀아난 거라니.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놈이 직접 개입하지 않는 거였어.'

신이 되고자 가장 위협이 될 자신을 제거하고, 세계를 합쳐 박탈당한 자격을 되돌려 자신만 깨끗한 척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그 뻔뻔함에 이가 맞물렸다.

하벨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목 밑까지 올라온 분노를 삼켜야 했다.

"…이게 신입니까? 이렇게 더러운 놈이 신이었다니."

신은 그저 세계의 법칙이 허용하는 선 안에서 지켜보며 조용히 말을 거는 자란다.

"화가 나십니까?"

그저 슬프구나. 너무 슬프구나. 모든 걸 다 버리고 간섭하고 싶을 정도로 슬프구나.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엘라힘이 눈물을 흘렸다.

신을 따르는 신관이기에 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슬퍼하지 말거라, 나의 종이여.

신이 엘라힘을 위로했다.

"혹시 지금이라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버리십시오. 그건 안 됩니다."

하벨은 냉정하게 신을 말렸다.

적어도 에른스트와 비교하면 지금 신이 훨씬 나았다.

사라지면 또 다른 신이 이곳을 노리게 될 텐데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왕으로서 끝까지 모든 물과 바다를 버리지 않은 것처럼 당신 역시 우리를 버리면 안 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말입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나는 이 세계를 너무도 사랑하니. 너 역시 그러하다.

"그럼 계속 묻겠습니다. 신과 신의 힘은 어떤 관계입니까"

하벨은 바닷속에서 보았던 것들을 토대로 가설을 두었다.

과거 자신이 에른스트를 보았을 때 그가 자신의 힘에 녹는 걸 보았다.

바닷속에서 다른 힘들을 잡아먹으면서도 오직 자신의 힘만은 건드리지 못했다.

하지만 신의 힘이 담긴 신의 은총은 변질된 힘인 오미너스에게 효과가 있지만, 에른스트의 힘인 오염된 물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하벨은 이 차이를 알고 싶었다.

신을 죽일 수 있는 건 오직 신뿐이지. 하지만 세계를 품은 신은, 세계를 품은 신에게는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법칙이 존재하는구나. 이는 그 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세계를 품은 신이 다른 세계를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지.

"하지만 에른스트는 지금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말이 다르다고 생각하는데요?"

누가 보아도 에른스트는 세계에 간섭하지 않는 선에서 본인의 힘을 이용해 세계를 잡아먹었다.

물의 오염.

이게 세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가.

저 말에 따르자면 물의 오염은 애초에 일어나서는 안 될 힘이었다.

그래서 에른스트는 아주 영악한 놈이구나. 에른스트는 자신의 겉껍질을 버리고 '정체 모를 자'로서 세계에 침범했다.

"…그러니까 에른스트의 육체가 없는 게 원래 그런 게 아니라 에른스트가 버렸다는 겁니까?"

너의 말이 맞구나. 에른스트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지.

"이게 신의 은총이 놈의 힘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것과 연관된 겁니까?"

합쳐져서는 안 될 세계가 합쳐졌기에 이 세계에 오류가 발생했고, 놈은 이를 이용했다. 이 허점으로 세계가 정한 '정체 모를 자'라는 사실을 바꿔, 이 세계에 속하는 존재가 되었구나.

하벨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애초에 오류가 발생한 이 땅에 겉껍질을 버릴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이겠는가.

"설마 틈의 세계… 입니까?"

하벨 본인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에른스트는 유렌의 영혼에 같이 묶여 몸을 얻은 상태였다.

―에른스트와 유렌. 이 둘은, 쿨럭.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에른스트는 몸이… 없습니다. 이 세계에 살아 있을 수 있게, 이걸 유지해주는 매개체 같은 존재가, 바로 유렌입니다.

자안이 자신에게 말하고 싶은 게 그런 의미였을 줄이야.

틈의 세계가 그런 존재로 이용당한 거라니.

너의 말이 맞구나.

하.

하벨은 신의 대답에 기가 찬 소리부터 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말로 소름이 돋아났다. 에른스트가 이 땅에 저지른 패악 중 이유가 없는 게 없었다.

정말 신이 말한 것처럼 에른스트는 영악했다.

아니, 그냥 미쳐버린 놈 같았다.

"…그냥, 정말 그냥 혐오스러운 놈이 아닌 모양입니다."

카샬의 귀에 신의 말이 들리지 않지만, 하벨이 꺼낸 이야기를 대충 맞춰본다면 하나부터 다 에른스트가 이용하지 않은 구석이 없다는 소리로 들려왔다.

"…하."

하벨은 너무도 증오가 들끓어 눈물이 핑 돌았다.

고작 그 이유로 자신의 사람들이 얽매여 있었다.

고작 바라보는 게 전부인 신의 자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당하고 죽어버렸는가.

"그럼, 내가."

하벨은 잠깐 말을 멈췄다. 속이 너무 답답해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신을 죽일 수 있습니까?"

불가하구나.

하벨은 입술을 세차게 깨물었다.

"그럼 용이 가진 힘으로 에른스트를 추방할 수 있습니까?"

용이 가진 권능은 법칙에 적힌 거란다. 법칙에 적혀 있는 부분은 무엇이든 가능하다.

가능하단 소리에 하벨의 눈빛이 짙어졌다. 기세 역시 날이 섰다.

"그럼, 이 세계에 여전히 속해 있는 채로 추방당한 에른스트를 제가 죽일 수 있습니까?"

세계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만 있다면 네가 죽일 수 없는 존재란 없구나.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열쇠의 수호자여, 나의 아들이여.

빛줄기가 하벨에게 손을 뻗는 것만 같았다.

이 땅에 중심이 물이기에 너의 힘이 에른스트가 가진 힘보다 위에 있을 수도 있으나, 에른스트가 가진 힘은 신의 힘이다. 조심하거라. 부디, 또 생을 잃지 말거라.

또 죽지 말라는 말에 하벨은 그 빛줄기를 잡았다.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되겠습니까?"

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가 죽으면 또 다른… 용왕이 탄생하는 겁니까?"

용왕의 영혼은 오직 하나뿐이다. 나의 손에 왔다가 다음 그릇을 향해 찾아가는 게 순리였다.

'…사실이었다.'

지금 하벨 티에라는 정말로 용왕을 위한 그릇일 뿐이었다.

신은 잔인한 사실에 슬퍼하는 하벨의 눈가를 쓰다듬어주었다.

나의 아들이여.

신이 먼저 말을 걸었다.

더는 슬퍼하지 마렴. 세계가 합쳐 일어난 이 상황은 내 범위 안에 있으니. 무거운 짐은 내게 주거라.

세계가 합쳐 일어난 상황은 무엇이겠는가.

틈의 세계였다.

틈의 세계를 해결할 수 있다는 소리에 하벨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고맙… 습니다."

순식간에 올라온 이 복잡한 감정을 뒤로 한 채 빛이 사라지는 걸 마지막까지 보았다.

손을 움직여 랜턴을 쥐었다.

'에른스트.'

손가락 끝이 빨갛게 변했다.

'너는 이 사실을 알았구나.'

하벨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날이 섰다.

영혼을 쪼갠 건 에른스트였다. 자신의 영혼이 신의 손에 가지 못하도록 막아버린 것이었다.

'기뻐하거라, 에른스트.'

하벨의 입꼬리마저 서늘하게 올라갔다.

'내 평생 이런 증오는 없었으니.'

얼굴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하벨의 입꼬리는 더욱 올라갔다.

'온 힘을 다해. 내가 갈려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너를 죽이마.'

* * *

'틈의 세계가… 왜 하필 그때 나타난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에른스트는 이를 알 수 없었다.

탁.

낯선 소리에 에른스트는 고개를 돌렸다.

"…아니, 하벨 공."

에른스트는 지팡이를 짚고 오는 하벨을 보자 잠깐 얼이 빠진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그 뒤에 물비린내가 나던 기사가 있었다.

"저하를 뵙습니다."

하벨이 배를 잡고 평소의 반만 끄덕였다.

"날 부르지 그랬습니까?"

"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찾아오는 게 맞죠."

"불렀으면 내가 갔을 겁니다."

"저하."

"그래요."

"제게 힘을 주겠다고 하셨습니까?"

하벨의 눈동자가 서늘해졌고, 에른스트의 눈이 살짝 휘었다.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절, 아무도 건들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만들어주세요."

하벨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 살이 떨려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내가 검은 달을 없애줄까요?"

에른스트가 아주 기분 좋은 얼굴로 물었다.

"아뇨. 건들지 마세요. 그건 제 겁니다."

이제야 새롭게 탄생한 검은 달을 건들게 들 수야 있나.

―임무 60% 달성 중. 바퀴벌레가 너무 많음. 하지만 즐거움은 가득. 추신, 만약 깨어난다면 가만히 계세요. 가만히. 가만히 아시죠? 모르시면 제가 사방에 '가만히'라는 글자가 박힌 액자를 붙일 거예요.

어제저녁에 엘라힘이 간 뒤에 레디나한테 보고가 온 사실을 카샬이 알려주었다.

정작 보고 내용보다 추신이 더 길어 얼마나 웃었는지 몰랐다.

'레디나. 나는 지금 얌전히 있는 거야. 산책하러 왔거든.'

짐승 새끼의 목을 딸 준비를 위해.

"알겠어요."

에른스트는 대수롭지도 않게 대답했다. 오히려 더욱 즐거워했다.

"그럼, 언제 준비할까요, 하벨 공?"

"어차피 제가 하는 건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하. 이미 다 알게 된 거 무얼 숨기겠습니까?"

"정말로 하는 게 있어서 드리는 말이에요. 하벨 공께서는 가장 찬란할 순간에 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게 엄청난 일이니까요."

에른스트는 벌써 황홀함을 눈동자에 그려나갔다.

오미너스를 세상에 알리고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을 때, 범인을 마법사 협회로 지목하고 마법사 협회와 더불어 오미너스까지 하벨이 없앤다면 이제 출발점에 선 셈이었다.

오미너스의 위협을 알리는 사건이 이제 더 많이 일어난다면 틈의 세계보다 더 위에 서게 되는 게 아니겠는가.

'…다만, 틈의 세계가 불안해졌어.'

에른스트는 얼마 전에 일어난 틈의 세계에 신경이 바짝 가 있었다.

자신이 레놀드 왕국에 틈의 세계를 일으키라 지시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당분간 하벨 티에라의 주목도를 위해 틈의 세계가 열리는 빈도를 줄이라고 지시를 내리지 않았던가.

마침 마음이 불안했기에 하벨 티에라가 자신에게 건네는 제안이 너무도 반가웠다.

"그럼 언제 할까요?"

"준비는 이미 다 되신 거 아닙니까?"

하벨 티에라의 날카로운 질문에 에른스트는 살짝 싸한 느낌을 받았다.

'원래 분위기가 이랬던가.'

어딘가 달라졌다고 느껴졌다.

무언가 낯설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는가.

'머리카락 색도 더 옅어진 것 같고.'

에른스트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체 무엇이 이상한지 몰랐기에 다시 하벨을 제대로 바라보자 조금 전 느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치 자신이 착각한 것처럼.

"저하…? 제 몰골이 그렇게 엉망입니까?"

하벨이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이 봐도 얼굴이 좋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정화제가 떼고 온 터라 당장 쓰러질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지금 하고 싶어요?"

"예. 빠를수록 좋지 않습니까?"

"좀 달라지셨습니다."

"습격이 무언인지, 사람을 다르게 만드네요."

하벨은 비웃음을 띤 얼굴로 잠깐 웃었다.

"그럼, 저하. 허락하신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저를 가장 높은 곳까지 끌어당겨 주십시오."

하벨은 말과 함께 다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나는 널 저기 밑까지 끌어당겨 주지.'

에른스트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려면 그가 레놀드 왕국을 비워야 했다.

자신이라는 좋은 먹잇감이 있으니 안 따라오고 배기겠는가.

하벨은 고개를 올리며 그대로 등을 돌렸다.

탁.

'물의 오염을 막겠다는 회의는 곧 열릴 테고.'

탁.

'레놀드 왕국의 세뇌는 내가 물에게 지시를 하면 풀리며.'

탁.

'바닷속에 있는, 이 모든 오염을 일으키는 에른스트의 힘 역시 내 지시에 바다가 움직이며 풀리겠지.'

우습게도 바닷속에 에른스트의 힘을 막고 있던 건 바다였다.

모든 물이 연결됐다는 사실을 알고는 얼마나 웃겼는가.

물이 연결되었으니 모든 흐름이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다는 걸 그만 잊어버렸다.

'그리고 마법사 협회에 오미너스는 없어.'

물론 그 근처에도 없었다.

'내가 그걸 가만히 둘 것 같아?'

하벨은 에른스트하고 떠나는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 너무도 기대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