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화. 모든 것의 시작(2)
* * *
다만, 바다에 에른스트의 힘이 있는 이상 접점은 피할 수 없으니 바닷속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당부는 해둬야 하지 않겠는가.
단지 그뿐이었다.
"일단 되도록 조용한 방향으로 할 거지만, 이 소식을 전해야지. 대비는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편이 좋잖아?"
[…대장, 있지. 이 몸이 생각하기에 이거 마지막 인사 같은데, 그런 거 아니지?]
꼬리를 만지작거리던 아라가 불안함을 드러내며 당장 하벨을 끌어안았다.
"절대 아니지, 아라야. 왜 마지막이야? 나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하벨은 아라를 토닥였다.
"귀인이여."
여하가 하벨을 불렀다.
"그래, 여하야."
"내가 보기에 바닷속에 있는 그 힘에 도달할 때까지 귀인의 힘을 아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싶소. 맞지 않소?"
[맞아! 여하 말이 맞아!]
아라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거짓말을 말할 수 없어 하벨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에른스트가 남긴 힘은 바다 아주 깊은 곳에 있었으니까.
"내가 버틸 수 있을 만큼 귀인을 데려가겠소. 바다에서 인어족만큼 빠른 존재는 없소."
여하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하벨이 인어족을 위해 여기에 왔는데 그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벨이 힘을 아끼는 데 도움을 주는 게 맞지 않는가.
이 정도는 허락하리라 생각했다.
"지금……."
"이건 따라가는 게 아니오. 귀인이 힘을 보충하기 위해 돕는 것뿐이오. 버티고, 안 되면 거기서 멈추겠소."
[그다음은 이 몸이 할게!]
아라가 얼른 앞발을 뻗었다.
[이 몸은 지금 망토 덕에 여하보다 더 버틸 수 있어!]
"너희들 지금……."
"귀인이여. 잘 생각하시오. 효율을 높이는 게 우선이오. 어쭙잖은 감정에 휘둘릴 때는 아니지 않소?"
'…와.'
하벨은 자신이 설득당하고 있는 사실이 새삼스레 신기했다.
여하는 갑자기 자신의 이마를 가리켰다.
"왜 인어족의 왕이 계속 세습되는지 아시오?"
"모르겠는데?"
"이 보석 덕에 내가 제일 빠르기 때문이오. 내가 여기서 제일 강하기 때문이오."
여하가 자신감을 드러냈다.
"귀인이 귀인이어야만 하듯, 귀인을 저 바닷속으로 데려가는 건 나일 수밖에 없소. 내가 인어족을 대표할 자격은 충분하오. 그러니 귀인을 돕겠소."
"훌륭하네."
하벨이 씩 웃었다.
"날 설득한 건 아마 네가 처음이지 않을까."
멀리서 인어족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 보며 하벨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보글보글.
물거품이 점점 일어났다.
저들을 이동시킬 물보라가 나타났다.
"좋아. 저들부터 옮긴 뒤에 한번 가보자고."
* * *
"…하여 저는 이 자료를 토대로 레놀드 왕국에서 나타난 틈의 세계가 비정상적임을 언급합니다."
크로니안은 클로저의 회의에 참석한 레놀드 왕국의 귀족은 물론 왕족을 천천히 살폈다.
자신이 그들에게 내어준 자료는 자신의 능력을 토대로 만들어진 자료였다.
틈의 세계가 나타나면 마나가 줄어든다는 사실은 비공개로, 클로저 내부에만 알려진 사실이었기에 이번에 드러내려면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대체 어디에서 받아야 하나 막막하던 그때, 라르웬이 자료를 건네지 않는가.
―달님한테 받았습니다. 도움이 될 거라던데요?
이걸 대체 어디에서 받았는지, 슬쩍 레놀드 왕국 마법사 협회에 문의한 결과 협회장이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들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걸 어떻게 알았을까. 달님의 손길이 어디까지 뻗었는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그래요. 절 위해 시선을 끌어줘야겠습니다. 그럴 뻔뻔함은 지니고 있다고 보여서 말이죠.
어쨌든, 이 자료 덕에 정말로 달님이 꺼내던 말 그대로 크로니안 자신이 레놀드 왕국의 시선이란 시선은 다 흡수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먼지가 가득 낀 권리를 들먹여 막무가내로 이곳에 들어오긴 했지만, 결코, 이유가 없는 게 아니었다.
―혹여나 레놀드 왕국에 도착해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다면 언제든지 물어보십시오. 그게 무엇인지 말해줄 테니까요.
달님이 들먹였던 것처럼 자신 역시 레놀드 왕국에서 벌어진 일이 궁금했고, 특히 마나가 레놀드 왕국 중심으로 더 많이 사라진 걸 확인한 후엔 그 궁금증이 더욱 커졌다.
대체 누가 틈의 세계를 부른 걸까.
이건 달님 주변에 틈의 세계가 나타났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레놀드 왕국에서 나타난 틈의 세계는 단순히 왕국으로 퍼진 게 아닌, 왕실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크로니안은 자신을 주목하는 시선을 즐기듯 말을 이어나가려다가 잠깐 멈췄다.
저 시선 중에 참 거슬리는 게 있었다.
샤넬리움.
자신을 불쾌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제법 노골적이니 왜 모를까.
"저는 이를 통해 왕실에 있는 누군가가 틈의 세계를 부른 게 틀림없다고 주장하겠습니다."
크로니안이 던진 말은 파급이 강했다.
이 자리에 모이게 된 클로저들도, 귀족과 왕족도 믿지 못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되네!"
"아니, 대체 누가, 아니, 어떻게 틈의 세계를 부른단 말인가?"
'…누구긴 누구겠어, 에른트스지.'
라르웬은 자연스레 팔짱을 꼈다.
크로니안이 레놀드 왕국에 자리를 잡는 건 좋았지만, 제법 무거운 안건을 들고 올 줄이야.
"그 발언은 지금 틈의 세계가 나타난 뒤로 모두가 알고 있던 개념을 바꾸는 정도라는 걸 이해하고 말한 건가?"
에른스트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물론입니다, 저하. 그만큼 위중하기에 클로저가 이곳에 머무는 것이며 이를 위해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크로니안은 조금은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이를 어떻게 반박할 셈인지 조금 기대가 되었다.
"이게 만약에 위증이라면 어쩔 텐가?"
에른스트의 말에 분위기가 갑자기 돌변했다.
조금 전까지 놀란 표정을 하던 이들이 표정을 달리하지 않는가.
'인원수로 누르겠다는 건가?'
크로니안은 우스웠다.
"그럼, 사과하고 돌아가겠습니다."
"사과? 나라에 멋대로 쳐들어와서 한다는 게 고작 사과인가?"
"어쩌겠습니까. 그게 클로저인 것을요. 오히려 다행이지 않습니까? 이 나라에 그 괴물을 부르는 끔찍한 존재가 없어서 말입니다."
"좋네."
에른스트는 곧 언제 눈을 날카롭게 떴냐는 듯 활짝 웃었다.
"형님, 누님, 저는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태연하게 팔짱을 꼈지만, 에른스트의 말에 라르웬은 조바심이 났다.
'…지금쯤 막내가 왔을까.'
일부러 회의장에 있던 이들을 지치게 하려던 건지 몰라도 크로니안은 요점을 말하지 않고 빙글빙글 도는 바람에 회의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어쨌든, 지금 크로니안이 요점을 언급했으니 곧 질문을 받는 시간만 지난다면 귀족과 왕족의 회의는 끝이 날 거라 생각했다.
이제 클로저들끼리 회의가 시작되지 않을까 싶었기에 더욱 마음이 조급했다.
'아직 내 회의는 안 끝났는데.'
라르웬은 크로니안을 바라보았다.
부디 회의가 짧길.
"벌써 가십니까?"
크로니안이 아쉽다는 표정을 하자 에른스트는 싱긋 웃었다.
"아버지께 여러 가지 일을 전달하는 건 내 몫이라 먼저 일어나네. 아마 지금쯤 엄청 궁금해하고 계실 테니 말일세. 그럼."
에른스트는 회의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천천히 표정이 굳어져 갔다.
'…뭐지?'
기분이 너무도 이상했다.
꼭 무언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만 같지 않은가.
클로저가 왜 하필 이 시기에 온 건지.
어떻게 틈의 세계가 벌어졌다는 걸 눈치챈 건지.
무엇 하나 거슬리지 않은 게 없었다.
까드득.
에른스트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대체 누구야? 대체…….'
분명 모든 건 잘 흘러가고 있을 텐데.
초조함에 불쾌한 기분만 맴돌았다. 다시 처음부터 확인해야 하는 걸까.
'아니.'
지금은 그러기에는 자신을 향한 시선이 많아졌다.
자리를 비우면 티가 나겠지.
정체 모를 놈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아닌지 모르는 이상 무언가를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다.
'…모습을 드러내. 드러내라고!'
신이 되기 전에 필요한 여러 조건만 아니었어도 당장 찾아내 죽여버렸을 텐데.
자신의 존재는 너무 커 조금만 움직여도 이 세계를 간섭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찍혀버린다면 신이 될 자격을 박탈당하는 셈이라 오랫동안 나서지 않고, 꾹 참지 않았던가.
실제로 한 번 박탈당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세계를 합쳐 자신의 행동을 지웠고, 그 뒤로 찾아온 가장 큰 위기는 정령왕이었다.
그저 가둔 것만으로도 세계의 간섭이 턱밑까지 몰려왔으니.
까드득.
에른스트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야.'
오래 굶주린 짐승의 눈빛을 드러내며 에른스트는 왕에게 향하는 걸음을 내디뎠다.
얼마나 갔을까.
여유롭고, 태평한 샤넬리움을 연기하던 에른스트의 몸이 갑자기 앞으로 휘었다.
딸랑딸랑.
귓가에 경고음이 울렸다.
"…저하?"
근처를 지나가고 있던 시종이 에른스트에게 다가왔다.
"…하."
에른스트가 흘린 비웃음에는 짙은 살기가 가득했다.
"저, 저하?"
에른스트는 잠깐 웃는 낯짝을 한 가면을 벗고 시종을 바라보았다.
시선만으로 모든 걸 압도하자 시종이 그대로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놈이.'
에른스트는 분노가 들끓었다.
'계속 나를 방해한 그놈이…….'
방금 느낀 그 감각은 저 깊은 바다에 묻어둔 자신의 힘에서 나는 경고였다.
언제인지 몰라도 이전에도 몇 번 느껴봤기에 평소라면 무시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아주 깊게 느껴졌다.
몰라서 건드린 게 아닌, 대놓고 건드리는 게 티가 났다.
딸랑딸랑하는 소리가 아직도 울리지 않는가.
'내 힘마저 건드린 거야?'
대체 어떻게.
그 바닷속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금세 에른스트가 내뿜던 살기가 잦아 들어갔다.
천천히 눈동자가 흔들렸다.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용왕?'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었다.
에른스트는 당장 발길을 돌렸다.
확인해야 했다.
그놈이 누구인지 바로 확인해야 했다.
세상을 손에 넣은 뒤 처음으로 두려움이 꿈틀거렸다.
용왕이 이제 와 나타났다면 어쩔 건가.
과거에 용왕을 죽여 신이 될 자격을 박탈당하고, 세계를 합쳐 없던 일로 만들었지만, 이다음은.
'안 된다.'
절대로.
'너만은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꿈틀거리던 두려움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에른스트는 발걸음을 또 멈춰야 했다.
마나를 집어삼키며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 감각은…….'
틈의 세계였다.
'누가 감히.'
자신이 틈의 세계를 열라고 명령한 적 없었다.
'젠장.'
에른스트는 틈의 세계를 향해 다가갔다.
* * *
"…이만 가겠습니다."
왕은 하벨에게 고개를 무겁게 숙였다.
이곳의 왕이기에 가장 늦게 떠나야 한다는 핑계로 마지막까지 남아 하벨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하벨이 만든 물보라를 통해 인어족 모두가 안전하게 그곳으로 들어갔다.
제일 처음 문하가 들어갔다가 나오며 안전하다는 걸 알려준 공 역시 잊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왕은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오래된 고민을 하벨이 단번에 없애주었으니.
"조심히 가고, 나하고 한 약속은 잊으면 안 돼."
하벨은 왕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인어들을 설득하고 돌아온 왕에게 자신이 요구한 건 세계를 위해 싸워 달라는 부탁과 함께 용이 가져올 안건에 서명해달라는 말을 꺼냈다.
―저 역시 세상이 평화롭길 바랍니다. 용께서 살아 계실지 몰랐지만, 그분이 내린 안건에 기꺼이 동의하겠습니다.
왕은 생각보다 빨리 동의를 해주었다.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왕은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변변찮은 음식 하나 대접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됐어. 이런 상황에 음식이 넘어가겠어?"
어딜 봐도 주변에는 까만 풍경만 그려졌다.
햇살도 닿지 않은 깊은 바닷속에서 대체 어떻게 지내온 건지.
그저 미안했다.
"…용왕이시여."
왕은 물보라로 들어가기 전에 하벨을 불렀다.
문득.
갑자기.
현실에 지쳐, 왕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많기에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이제는 얼굴마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흐릿해진 아버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자신이 왕이 되던 날, 인어족 대대로 내려온 그 말이 비로소 머릿속에 차올랐다.
"제가 늙어 잊어버리면 안 될 사실을 잊고야 말았습니다."
여하에게 들려줘야 할 말이기에 수없이 떠올리고, 혼자서 말하고 했던 그 말은, 갑자기 여하가 사라져버린 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게 되어버렸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깊은 바닷속에 있는 오염된 물을 건들고 생겨버린 흉터 탓이지 않을까.
"응?"
하벨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여하야. 너도 잘 듣거라. 이 아비처럼 결코, 잊어버리면 안 될 말이니."
하벨을 바라보는 왕의 눈빛이 깊어졌다.
"바다의 왕이자, 모든 물의 어버이가 죽었다."
왕이 꺼낸 말에 하벨은 어깨를 천천히 떨어뜨렸다.
"바다와 모든 물의 거대한 슬픔이 세상을 덮쳤지만, 어버이가 파멸을 막았다.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었고, 그분의 가장 소중한 존재였으며, 그분의 모든 것이었다. 하여 우리는 그분을 기억해야 한다."
'…이게 무슨 말이야?'
하벨은 왕이 꺼내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억하라니.
[대장 이야기야! 이 몸은 바로 알았어!]
아라가 꼬리를 흔들며 기뻐했다.
"세상이 바뀌었지만, 우리는 그분을 기억해야 한다. 바다를 보며 기억하라.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보며 기억하라. 그분께서 이름이 없어 다시 돌아오셔도 무어라 부를 이름이 없지만, 물과 함께 오시리라. 바다가 기뻐하며 흔들릴 테니 그분을 정성껏 맞이하거라."
'그러니까 이게…….'
하벨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기억하다니.
'대체 어떻게?'
아무도 용왕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했는데.
"왕이 다음 왕에게 전하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왕이 될 때도 아버지한테 들었던 말입니다."
말을 마친 왕은 다시 하벨에게 고개를 숙였다.
"…당신이셨습니다."
저 말을 들었을 때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했다.
이름이 없기에 대체 누구인지, 용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몰랐다.
하지만 왕은 이제야 알았다.
어떻게 죽어버린 존재가 다시 돌아왔는지 몰라도 하벨이 자신이 기억해야 할 존재였다는 걸.
―너희의 왕. 너희가 밟는 모든 걸 주었으며 세상을 구한 왕이었지.
다시 생각하니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조상들이 왜 저 말을 남겼는지 왕은 이해했다.
위험한 걸 알면서도, 자신들을 향해 과감하게 손을 뻗는 그 모습에 대체 왜 흠모하지 않을까.
"환영합니다, 저희의 왕이시여. 저희는 내내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왕은 지나온 모든 인어족을 대표해 말을 꺼냈다.
하벨의 눈동자에 잠깐 눈물이 차올랐다.
아라가 얼른 하벨을 껴안았다.
토닥토닥.
[괜찮아, 대장.]
"…고마워."
하벨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런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모두가 자신을 잊은 게 당연해서.
평행한 두 세계까지 합쳐버린 걸 알았을 때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너희를 버렸는데, 너희가 나를… 기억해줬을 줄이야.'
절망감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을 꼭 용서하는 말 같았다.
"정말로, 고… 마워."
하벨은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꾹 참고, 왕을 향해 웃어 보였다.
이곳에 와서 참 다행이었다.
이토록 행복한 소리는 영원토록 듣지 못했을 테니까.
정말로 다행이었다.
하벨은 눈을 깊게 감고 떠 검게 물든 바다를 보았다.
무거웠던 어깨가 가벼워진 기분에 휩싸였다.
'이제 너를 구해주마.'
바다 역시 자신을 기억해주지 않았던가.
계속 자신을 부르며 구슬퍼하고 있었다.
저 울음을 어떻게 외면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