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화. 움직인다(3)
* * *
"워워, 됐습니다. 충분합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크로니안은 숨이 막힐 만큼 많이 나오려는 가면단을 말리며 차분하게 숨을 내쉬었다.
"달님 씨. 당신은 무얼 목표로 합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삶, 맘대로 살아가는 거, 뭐, 이런 것들을 합치면 결국 하나겠죠."
하벨이 씩 웃었다.
"자유입니다."
배신당해서 죽었고, 하벨 티에라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을 때부터 바랐던 것이었다.
무엇도 책임지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을.
하지만 과거에 얽매 있는 자신이 자유로워지고자 한다면 에른스트가 죽어야 했다.
과거의 망령들을 지워나가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니까.
"좋네요."
크로니안이 등을 돌리자 하벨이 그를 불렀다.
"크로니안 씨."
"예?"
"자유를 바라십니까?"
"바랍니다. 망할 틈의 세계가 다 닫혔으면 합니다."
"닫힙니다. 반드시."
유렌이 죽는다면.
하벨은 그 전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저도 자유를 빌어보죠."
크로니안이 싱긋 웃었고, 다시 돌아가려는 모습에 하벨은 태연하게 웃으며 손을 앞으로 뻗어서는 흔들었다.
"아직 악수 안 했잖습니까."
"아. 가장 중요한 걸 잊어버렸네요."
화합의 기본은 악수였다.
크로니안은 하벨과 악수해서는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크로니안 씨."
크로니안이 돌아가려던 차 하벨이 다시 그를 불렀다.
크로니안의 눈썹이 잠깐 위를 향했고, 라르웬은 불안함에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이거 그런 거 아니죠?"
"어떤 거 말합니까?"
크로니안의 물음에 하벨이 되물었다. 천연덕스러운 말투에 크로니안은 함부로 단정 짓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똥개 훈련 말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말해야 하는 걸 잊었을 뿐입니다."
처음 반짝이던 눈빛과 달리 크로니안의 눈에 의심이 어렸지만, 그는 여전히 싱글거렸다.
"말씀하세요."
"혹여나 레놀드 왕국에 도착해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다면 언제든지 물어보십시오. 그게 무엇인지 말해줄 테니까요."
신뢰 관계가 이제 막 구축되었고, 자신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기에 가장 자연스럽게 세계에 벌어지는 일에 접근할 방법은 스스로 직접 느끼는 것뿐이었다.
'연락은 오게 되어 있다.'
예민하다면, 아니, 저 힘만 있다면 레놀드 왕국에 펼쳐진 이상함을 알아채고 고민할 게 뻔했다.
그 끝에 자신이 생각날 게 뻔하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진짜 갑니다?"
크로니안은 얼떨떨함을 느끼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조심히 가세요. 아무래도 야생동물이 많을 테니까요."
은밀한 만남을 위해 일부러 숲속에 만나기로 했기에 걱정이 되어 하벨은 손을 씩씩하게 흔들었다.
"…뭔가, 죽으라는 말로 들리는데?"
라르웬이 목소리를 낮추며 하벨에게 속닥였다.
"에이, 그럴 리가요."
하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식으로 결과가 좋게 흘러갈지 몰랐어요."
"나는 반쯤은 생각했어. 네가 클로저들을 위해 해준 게 있는데, 그래도 뭐가 있지 않을까 하고. 결과적으로도 잘 됐잖아? 지금까지 네가 했던 일들의 보상인 거지. 어쨌든, 빨리 와야 한다."
라르웬은 자꾸만 뒤를 쳐다보는 크로니안의 시선에 마지 못해 발걸음을 떼었다.
자신이 하벨과 같이 가는 게 얼마나 이상해 보일까.
'…아. 좀 불안한데.'
라르웬은 발걸음을 내딛다 하벨을 이곳에 두고 간다는 게 참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어서 가자, 라르웬. 크로니안이 너한테 뭐라고 할지 빤히 예상되잖아. 괜히 의심 사지 말아야지.]
루룸이 라르웬의 머리카락을 살짝살짝 당겼다.
'그래도 칼리우스라도 있으니까……. 음, 그래도 아라가 있으니까……. 아니. 역시 걱정되네.'
라르웬은 칼리우스와 아라 둘 다 생각하니 어느 쪽이든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저렇게 하벨을 내버려 두고 와도 될까 싶은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라르웬이 대장이 걱정되나 봐. 자꾸 쳐다보고 있어.]
아라가 실실거렸다.
"대체 뭐가 그렇게 걱정인지 모르겠네."
하벨은 뒷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아라 너하고 용용이가 있는데 말이야."
"그래서가 아닐까?"
칼리우스는 눈동자를 돌려 아라와 하벨을 바라보았다.
곧 눈동자가 하벨한테 멈췄다.
여기서 제일 걱정되는 건 이상하게도 하벨이었다.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 해.'
칼리우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이 여기서 제일 나이가 많았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하벨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칼리우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 돌아가는 거 맞지? 헤레스한테 딱 크로니안만 만나기로 약속했잖아."
"이렇게 나왔는데. 하나 더 해봐야지. 아니다, 두 개인가?"
[어엇! 지금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
아라가 깜짝 놀라며 털을 바짝 세웠다.
"레놀드 왕국에 벌어진 폭파 사건은 누가 그랬으며, 이곳에 깔린 세뇌의 힘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야지."
하벨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시간 싸움이기에 무리하더라도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에른스트가… 알게 되면 어떡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해도 모자랄 행동이었다.
두려움으로 가득한 칼리우스의 눈빛에 하벨은 그를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 이건 나밖에 모르는 힘이야."
[대장. 대체 뭘 하려고 그래?]
"물의 기억을 읽어야지. 여기서는 어떻게 해도 정보를 얻을 수가 없으니까."
[이 몸은 할 수 없어? 이 몸도 물을 부를 줄 알아!]
아라가 하벨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아라야. 이건 할 수 없어."
애초에 이 힘은 신이 자신에게 건네준 것과 다름없었다.
오직 자신만 쓸 수 있게.
그러니 아라는 할 수가 없었다.
[이 몸이 이안한테 나머지 힘까지 다 받아도 안 되는 거야?]
"이건 뭘 해도 안 되는 거야, 아라야."
[왜 이 몸은 못 하는 거야?]
"나한테만 허락된 권능이니까."
계속 단호한 말에 아라는 시무룩함을 숨기지 못하고는 꼬리에 얼굴을 묻었다.
[이 몸도 이 몸의 권능이 뭔지 안다면 대장을 도와줬을 텐데. 그럼, 대장의 걱정을 이 몸이 가져갈 수 있을 텐데.]
하벨은 자신을 생각하는 아라의 저 마음씨가 너무 예뻤다.
"아라야. 너는 자연을 다룰 수 있잖아? 각자 영역이 있을 뿐이야. 나는 네가 아니면 건드릴 수가 없잖아."
"그럼, 도련님. 이거 아픈 거 아니지?"
칼리우스는 가면을 벗어서는 간절함을 담아 하벨을 바라보았다.
하벨은 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문을 흐렸다.
"그건, 어, 나도… 으음, 잘 모르겠네."
"앞으로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도련님이 그랬잖아. 그러면 아프면 안 되잖아."
"이게 진짜 시작이야. 네가 가진 권능을 사용하려면 미리 판을 깔아놔야 하니까."
무언가를 심판하는 힘.
카르밀조차 모르는 힘이었지만, 에른스트가 그토록 용을 죽이려고 애를 쓴 걸 보면 범상찮은 건 분명했다.
"…판을 깔아?"
칼리우스가 멍하니 하벨을 바라보았다.
각 종족의 대표를 뽑고 어쩌고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래. 판을 깔아놔야지. 세상의 수호자가 되고 싶다며, 용용아?"
"하지만 그건 내가 해야 하는 거잖아. 내가 못 하니까 도련님이 대신하는 거잖아. 나는……."
"그런 거 아니야, 용용아."
하벨은 칼리우스의 생각을 잘라냈다.
"누가 뭘 하든 더 간절한 사람이 하게 되어 있거든. 나는 간절해, 용용아. 아마 너보다 더. 이 세상 누구보다 더."
그냥 제발.
"나는."
제발, 부탁이니.
"에른스트를 증오해. 내 모든 영혼과 온몸을 다해 놈을 증오해."
그냥 에른스트가 죽었으면 했다. 그냥 사라졌으면 했다.
눈앞에서, 자신이 밟고 있는 이 세계에서 사라져서 더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았으면 했다.
"더는…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아."
세계에서 쏟아지는 슬픔이 영혼을 얻을수록 물을 통해 전해져 내려왔다.
힘을 쓸 때마다 어깨가 짓눌리고, 그 슬픔에 휩쓸릴 것만 같았다.
세계가 울부짖는 게 느껴졌기에 괴로웠다.
또 머리 위에 왕관이 놓이는 기분이 들어 도망치고 싶은 마음 역시 있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눈을 떼어버린다면 다 잃어버릴 게 뻔했기에 이를 악물고 나아가야 했다.
무언가를 잃는다는 그 감정은 세상에서 제일 끔찍하니까.
"너희가 너무 소중해."
하벨은 자신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더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의자에 앉아 그 지옥 같던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게 변하는 와중에 자신만 멈춰 있는 것 역시 질색이었다.
와락.
아라가 하벨을 안아주었다.
[이 몸은 지금 대장이 얼마나 슬픈지 전해져와.]
물이 흔들리고 있었다.
분명 하벨이 힘을 쓰고 있지 않음에도 주변에 있는 물이 머금은 슬픔이 느껴졌다.
토닥토닥.
[괜찮아, 대장. 다 괜찮아, 대장.]
저 작은 손길에 하벨은 또 위로를 받았다.
자신의 손에서 탄생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심판은… 내가 할 거야, 도련님. 이건 내 권능이니까 이건 내가 해야 해."
칼리우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예전에는 하벨이 자신보다 컸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작았다.
어렸다.
이게 선명하게 느껴졌기에 칼리우스는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하벨보다 형이니까.
"물의 기억을 읽는다고 그랬지? 도련님이 나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도 물의 기억 때문인 거 맞지?"
"맞아, 용용아."
무얼 생각했는지 몰라도 칼리우스의 눈빛에 깊음이 느껴지자 하벨은 싱긋 웃었다.
"도와줄게. 도련님이 아프지 않게 내가 더 잘 이끌어줄게."
[이 몸도 더 힘낼 수 있어! 이 몸은 정령왕이니까!]
"고마워, 둘 다."
하벨은 칼리우스도 아라도 둘 다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가장 많이 성장했고, 가장 많이 달라졌으니까.
[아, 대장! 이 몸이 있잖아, 얼마 전에 아벨에 갔다 왔잖아?]
"맞아. 내가 기절했을 때 갔다 왔다고 그렇게 들었어."
[그때 이 몸한테 또 뭔가 소리가 들렸어.]
"무슨 소리?"
[으드득? 그런 재미있는 소리였어.]
"…으드득?"
마치 무언가가 벗겨지는 소리처럼 들려오지 않던가.
하벨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라를 쓰다듬으며 잠깐 생각했다.
'몸이 또 성장하는 건가?'
아라는 불안정하게 태어났기에 이미 한 차례 성장을 한 상태였다.
몸집은 커지고 있어도 두 번째 성장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다.
하벨은 입가를 핥으며 숨을 짧게 내쉬었다.
"아무래도 두 번째 성장하는 중인가 봐, 아라야."
[진짜? 이 몸이?]
아라의 꼬리가 흔들렸다.
점점 커지는 눈에 박힌 반짝거림은 햇살을 닮아있었다.
[이 몸이, 이제 더 어른이 되어가는 거야?]
하벨은 저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아라를 쓰다듬기만 하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슬슬 시작할게."
찰랑.
귀를 기울이자 물소리가 들려왔다.
오염된 물이 모든 곳에 퍼져 있지만, 세뇌가 담긴 힘은 모든 곳에 퍼져 있는 게 아니었다.
찰랑.
물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는 걸 알기에 하벨은 따라 걸어갔다.
찰랑.
물소리가 물소리와 만나 더욱 청아한 소리가 들리자 하벨은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하벨은 손바닥을 아래로 향했고, 칼리우스가 숨을 잠깐 멈추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내게 모습을 보이거라."
하벨의 명령에 땅에 있던 물들이 순식간에 솟구쳐오르더니 하벨 앞에 얌전히 모여들었다.
[우오오오옵!]
아라는 정말로 이곳에 있던 물들이 하벨 앞으로 모이는 것과 함께 자연이 놀라며 출렁거리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기에 그 모든 것이 신기했다.
찰랑.
물의 경쾌한 소리와 함께 하벨은 용왕의 힘을 끌어왔다.
―왜 여길 오는 거예요?
―진짜로 올 줄 몰랐어요. 어서 돌아가라고 한 입으로 말하고 싶었단 말이에요.
―여기 위험해요. 아시잖아요? 우리 몸이 이상해요. 뭔가가 주입되었어요.
물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자신을 향한 걱정부터 쏟아졌다.
물이 대체 무얼 걱정하는지 알기에 하벨은 이를 바로 잡고자 다시 명령을 이어나갔다.
"이 땅에 남은 기억을 보여주거라."
―우리 몸에 뭔가가 주입되었다니까요?
물은 하벨을 위해 저항해보나, 이미 몸은 하벨의 손바닥으로 향했다.
물인 이상, 용왕의 힘을 거부할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되돌려줄 테니까. 나만 믿어."
자신만만한 그 말에 물은 무어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벨은 물에서 흘러들어오는 기억을 읽어내려갔다.
목에 핏대가 섰다.
땅에 새겨진, 물이 보았던 기억이 많은 만큼 머리가 욱신거렸다.
용이 보였다.
이 땅에 살던 용들의 활기찬 모습이 보이자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이건 너무 오래됐어.'
하벨은 기억들을 빠르게 넘겼다.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따끔따끔.
통증이 어디선가 느껴졌다.
이미 온몸에 다 퍼진 통증 속으로 거칠게 밀려오는 전혀 다른 통증은 처음부터 자신이 느끼는 통증이 아님에도, 그저 기억을 읽는 것임에도 다리가 휘청거릴 만큼 너무도 컸다.
'…이거다.'
하벨은 그제야 기존 통증은 물을 오염시킨 어떤 힘이라는 걸 알았고, 새롭게 몰려오는 저 힘이 에른스트의 세뇌라는 걸 파악했다.
물속에 글자가 나타나더니 긴 문장이 눈앞에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