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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58화 (358/415)

358화. 움직인다(2)

* * *

'너, 이거 기선 제압하는 자리가 아니야.'

라르웬은 당장이라도 하벨을 뜯어말리고 싶었다.

사실 이 만남은 정말 즉흥적이었다.

물의 길을 이용해 무날과 태련을 찾아 마차에서 나간 하벨을 오기만으로 기다리던 중에 갑자기 연락이 오지 않았던가.

―아, 저예요. 무능력한 당신들의 대표요.

크로니안이 태연하게 연락을 걸어왔다. 얼마나 놀랐던가.

―레놀드 왕국으로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저도 그쪽으로 왔어요. 만나고 싶어요. 달님을 불러줄 수 있나요?

솔직한 심정으로 이 만남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거절하기에는 이미 하벨에게 여러 가지를 듣지 않았던가.

클로저와 친해지겠다, 클로저가 필요하다는 말을. 그냥 흘리기에는 무거운 말이었다.

"고마워요. 사실대로 말해줘서요. 사실 저라도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크로니안은 웃음을 멈추고 겨우 말문을 열었다.

"여긴 제 호위인 펜랄이에요."

"반갑습니다."

펜랄이 무뚝뚝한 말을 꺼냈다.

"시간이 없을 테니, 간단하게 말할게요."

짧게 말을 꺼낸 크로니안의 미소가 길어졌다.

무엇이 그렇게 자신만만한지 하벨 역시 궁금해졌다.

"클로저는 가면단과 손을 잡겠습니다."

"이렇게 쉽게요?"

하벨은 크로니안을 의심하고, 라르웬은 정말 놀랐다.

"클로저는 가면단에게 큰 은혜를 입었고, 이를 갚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의심스럽습니다."

단호한 하벨의 말에 크로니안은 자신이 성급했음을 알아차리고는 어깨에 힘을 뺐다.

"클로저에서 벌어진 살인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살인만 있는 게 아니죠. 방화에, 약탈에, 사실 도둑이라 할 수 있는 짓거리를 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자, 잠시만요."

라르웬이 말을 더듬으며 크로니안을 멈춰 세웠다.

크로니안은 여전히 웃는 상이었다.

"놀랐습니까, 라르웬 씨? 클로저가 참 역겹지 않습니까? 하지만 탈퇴하지 말아 주세요. 인재가 떠나는 건 무척 괴롭잖습니까."

"왜… 이런 걸 말하는 겁니까?"

크로니안은 얼굴을 구기는 라르웬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사실이니까요. 클로저는 이만큼 더럽습니다. 라르웬 씨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요?"

하지만 하벨은 태연하게 물었다.

뭐 어쩌란 건가.

이런 태도에 크로니안은 기껏 잡았던 분위기를 다 놓아주었다.

"저 더러운 것들이 세력을 잡았지만, 달님 덕분에 깨끗하게 청소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은혜를 갚으러 달님을 찾아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하벨 자신이 그때 드러낸 클로저의 살인사건이 클로저 내부에 큰 충격으로 와닿았고, 이게 자정 작용까지 하게 됐다는 말이었다.

"미리 말하기 전에 제가 말하겠습니다. 사태가 이 모양이 될 정도로 아무것도 못 한 저는 무능력합니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어떻게 올랐는지 압니까?"

크로니안은 하벨을 살짝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당신이 처음 우리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났던 그곳에 틈의 세계가 열렸습니다. 두 번째 역시 마찬가지고요. 과연 이 모든 게 우연일까요?"

'…첫 번째는 몰라도 두 번째는 용용이가 막았을 텐데?'

하벨은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예. 우연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저에게는 감지 능력이 있습니다. 세 번째, 네 번째에도 이어진다면 저는……."

"그만하시죠."

이어지는 크로니안의 말에 펜랄은 그를 말렸다.

"아니요. 이래야 합니다. 내 감을 믿어봐요."

마치 무언가를 걸고 도박하듯 크로니안의 목소리에 어떤 간절함이 섞여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이유는 제 머릿속에 지도가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지도가 그려진 건 아니라 완벽하다고 하긴 어렵지만, 큰 힘들의 대체적인 흐름을 알 수 있어요."

달님을 본 순간, 자신의 감이 움직였다.

이건 해봐도 되는 승부에 가까웠기에 크로니안은 달님의 환심을 사고자 자신의 절반을 걸어보았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실시간으로 펼쳐진 지도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 힘으로 틈의 세계가 열렸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뭐, 그런 마법이죠."

전투에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 어쩌면 쓰레기 마법이라 할 수 있지만, 클로저라는 위치에 있으면 전혀 다른 힘으로 바뀌었기에 그 쓰레기들에게 휘둘리면서도 버틸 수 있었다.

자신보다 사태 파악을 빨리할 수 있는 이는 없으니까.

"이걸 왜 말하는 겁니까?"

하벨은 한눈에 봐도 평범한 힘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오히려 탐이 났다.

저 힘은 누군가에게는 쓰레기보다 못한 힘이 될 수 있지만, 적어도 자신은 달랐다.

하지만 하벨은 섣불리 접근하지 않았다. 이런 건 으레 독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그래서 이런 힘이 있으니 협박이라도 하러 온 겁니까?"

협박이라는 말에 라르웬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만약에 정말 그렇다면 자신이 용서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자신의 인생 절반쯤을 바쳐온 클로저라도 하벨을 건드리는 걸 볼 수 없었다.

"아뇨. 은혜를 갚으러 왔습니다. 이게 당신에게 필요한 힘이란 감이 들었거든요."

다행히도 크로니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할 만큼이요?"

경계심이 많은 달님의 행동에 크로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때론 누군가의 가벼운 위로가 인생에서 가장 큰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달님 씨께서 해주신 그 행동이 달님 씨에게는 작을지 모르겠지만, 저한테 있어서는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 무척 컸어요."

"그럼 묻겠습니다. 레놀드 왕국에 어떤 힘이 도는지 느꼈습니까?"

하벨은 한 가지를 시험해보고자 넌지시 질문했다.

―큰 힘들의 대체적인 흐름을 알 수 있어요.

실시간 지도 같은 거라고 했지만, 사실 크로니안의 힘은 전혀 모르는 힘을 파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정령들과 칼리우스도 알지 못한 사실을 과연 크로니안이 알까 싶은 마음도 들었어도 하벨은 어떤 가능성이든 놓을 생각이 없었기에 크로니안의 대답을 기다렸다.

"예. 흐릿하나, 거대한 힘이 돌며 그 힘이 방금 약해진 걸 봤습니다. 혹시 그간 왜 침묵했냐고 절 비난할 겁니까?"

"아뇨.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계속 말씀해보세요."

그저 이렇게 날을 세운 건 크로니안이 어떤 존재인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과연 얼마만큼 진심인지 확인해야 이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지금은 어떤 단체든 필요했다. 에른스트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단체.

클로저라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처음 보는 종류입니다. 사실 이걸 뭐라고 받아들여야 하나 싶어 난감했습니다. 이 정도의 힘이라면… 음, 레놀드 왕국을 잡아먹었다고 봐야 하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예리한데? 바로 알아차렸잖아?]

루룸이 입꼬리를 올리자 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레놀드 왕국에 벌어진 일이랑 똑같아! 대장은 크로니안한테 에른스트가 레놀드 왕국을 세뇌했다고 말해줄까?]

[아마 안 할걸? 말해봤자, 믿지 못할 테니까.]

'정확한데?'

예리한 루룸의 지적에 하벨은 당장이라도 그렇다고 대답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크로니안에게 저 힘이 있다면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찬찬히 알게 될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이 지금 바라는 건 크로니안이 가진 저 힘이 아니라 클로저였으니까.

"반갑습니다, 달님입니다. 이쪽은 가면단의 일원인 햇님이입니다."

잠깐 칼리우스를 슬쩍 바라보다 하벨은 크로니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크로니안의 미소가 길어졌다.

"이렇게 선뜻 마음을 열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혹시 저에게 바라는 게 있습니까?"

"어떤 걸 말하는 겁니까?"

"무엇이든."

"있습니다."

"말해보십시오."

"저희 클로저의 적이 누굽니까?"

크로니안은 검은 달이라는 단체를 들었고, 조사했고, 알아낸 결과 암살자 집단이라는 걸 알았다.

암살자 집단은 주가 될 수 없었다.

애초에 암살자는 누군가 자신들을 고용하기에 존재할 수 있는 집단이었으니까.

달님으로 보러온 목적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의 쓰임을 내비치고 그로 인해 검은 달 뒤에 있는 자를 알아내는 일을.

달님에게서 살짝 웃음소리가 났다.

"검은 달이 진짜 적이 아니라는 걸 아셨습니까?"

"알기에 왔습니다. 여기서 멈출 생각이 있었다면 오지 않았겠지요. 다 보여드렸습니다."

"말은 똑바로 하시죠. 절반 정도겠죠."

사실을 꼬집는 하벨의 말에 크로니안은 잠깐 실소를 내뱉었다.

겨우 몇 분 정도밖에 나누지 않은 말에도 이렇게 가슴이 벅찬 느낌은 처음이었다.

자신은 포기가 좀 빠른 편이라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이건 승산 없는 싸움이라 생각했다.

"맞습니다. 절반입니다. 더는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부디 이해해주십시오."

"이해합니다. 저도 아직 보여드리지 않았으니까요."

사실을 언급하자 저렇게 누그러지니 크로니안은 그냥 달님 손바닥에 있다고 생각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클로저의 대표로서 클로저를 건드린 검은 달은 물론, 놈들 뒤에 있는 그놈도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은 없습니다."

"혹시 클로저가 떠안은 죄를 검은 달에게 뒤집어씌울 겁니까?"

"그러면 안 됩니까? 애초에 먼저 덤빈 건 그쪽입니다. 클로저가 떠안은 죄를 넘기는 것도 안 됩니까?"

"됩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벨은 레디나를 위해 크로니안에게 부탁했다.

"편안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지금 검은 달은 죽여도 됩니다. 뭘 어떻게 하든 괜찮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검은 달에는 힘을 불어넣어 주세요."

"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곧 검은 달의 수장이 죽을 겁니다. 그리고 새로운 검은 달이 탄생할 테니, 전혀 다른 단체로써 봐달라는 부탁을 하는 겁니다."

하벨은 자신의 부탁이 얼마나 뻔뻔하게 들릴지를 예상했다.

클로저가 검은 달 때문에 얼마나 큰 피해를 보았던가.

"음……."

크로니안은 잠깐 고민했다.

"그러니까, 가면단이 곧 검은 달을 집어삼킬 거란 말입니까?"

"제가 집어삼키는 건 아니고, 집어삼켜진 검은 달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크로니안은 저 말에 소름이 돋아났다.

요컨대, 쌍둥이가 있다고 하면 A가 저지른 범죄는 낱낱이 밝히면서 때려놓고, A와 똑같이 닮은 B는 죄가 없으니 옹호해달라는 말이 아닌가.

자신이 A를 아예 매장했기에 B가 A와 아무리 똑같이 생겼어도 다르다는 말이 더 크게 들려 사람들은 다르게 볼 게 뻔했다.

대놓고 자신을 이용하겠다는 사실이 우습다 싶었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저 뻔뻔함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습니다."

그렇기에 크로니안은 이를 허락했다.

"이를 받아들일 테니 이유부터 말해주십시오."

"당신들의 적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는 소리입니다."

하벨이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크로니안의 시선이 덩달아 하늘을 향했다. 그 방향이 우습게 레놀드를 향하고 있었다.

"적이 레놀드 왕국에 있는 겁니까?"

"그래요. 절 위해 시선을 끌어줘야겠습니다. 그럴 뻔뻔함은 지니고 있다고 보여서 말이죠."

클로저가 왜 클로저이겠는가.

틈의 세계라는 핑계로 무얼 해도 용서가 되는 게 클로저였다.

지금까지 그랬고, 지금도 그럴 힘이 있었다.

물 마법사가 레놀드 왕국에 왔고, 클로저까지 레놀드 왕국에 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시선이 분산될 수밖에 없지.'

"저 뻔뻔합니다. 그건 잘 보셨네요. 그런데 솔직히 이해가 가질 않는 부분도 있고, 갑작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싶은데……."

"저는 여기까지밖에 못 보여줍니다. 아직 이 정도의 관계잖습니까? 그 이상을 바라기엔 오늘 처음 봤는데요?"

하벨은 무언가를 슬쩍 요구하는 크로니안의 손길을 딱 잘랐다.

"그럼 며칠이면 됩니까? 저희가 클로저인 건 맞지만, 레놀드 왕국이라 좀 부담스러운 건 사실입니다."

"며칠만 버텨주십시오."

"연락은 지금처럼 라르웬 씨를 통해서 해야 합니까?"

"네."

"직접 하면 안 됩니까?"

크로니안은 불만을 섞으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연락 정도는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 정도 요구는……."

"처음부터 저를 믿어준 건 라르웬 씨뿐이니까요."

하벨의 말에 라르웬은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저 말이 상황상 맞추기 위한 말이라는 걸 알아도 저게 뭐라고 이렇게 기쁜지.

[라르웬, 너 표정 관리해. 지금 기뻐 날뛰기 일보 직전이야.]

루룸이 라르웬의 입꼬리를 억지로 당겼다.

여전히 하벨을 바라보는 라르웬의 시선이 달라진 게 없자 루룸은 키득거렸다.

[아라가 뚫어질까 봐 어쩌고저쩌고 말하더니 너도 똑같네. 네 동생 뚫리겠다.]

"할 수 없죠. 이건 제가 물러나겠습니다. 불신을 가질 만큼 행동했으니까요."

크로니안은 할 수 없이 물러섰다.

무얼 생각해봐도 도움을 주겠다고 찾아온 달님을 이용한 건 클로저였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이것도 준비가 필요해서요."

"정체를 왜 묻지 않으십니까?"

하벨이 장난스레 묻자 크로니안은 눈웃음을 지었다.

"원래 궁금할 때가 제일 신비로운 법입니다."

등을 돌리는가 싶더니 펜랄이 무어라 꺼내는 말에 크로니안은 하벨에게 다시 다가왔다.

"아차, 가면단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묻는 걸 까먹었습니다. 이 정도는 알려줄 수 있잖습니까."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큽니다. 보세요."

하벨이 손을 위로 뻗자 숲이 흔들렸다.

나무 틈 사이로 사람들이 우르르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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