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44화 (344/415)

344화. 왜 안 돼?(3)

* * *

[…어?]

아라가 당황하며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헙.]

곧 아라가 입을 틀어막았다.

모두의 시선이 하벨에게 쏠리자 하벨은 느긋하게 그 시선을 즐겼다.

가면단이 나라를 갖는다니. 이런 말은 없었잖아.

뭐야. 진짜 나라를 가지려는 거야?

아니, 왜?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등등 다양한 소리가 그냥 막 들려오네.'

비록 가면에 얼굴이 가려졌지만, 하벨은 저들의 표정이 상상되어 웃음을 터트렸다.

"하."

왕은 너무도 기가 차 말을 이어나가기가 무척 힘들어 보였다.

나라를 내놓으라니. 그게 무슨 개소리를 벗어난 말인지.

"길게 끌 거 없어. 도장 내놔. 그거면 충분하니까."

하벨은 당당하게 손을 내밀며 흔들었다.

"내가 언제까지 네놈의 망발을 듣고 있어야 하는가!"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왕이 등을 돌리자 하벨이 라탄을 불렀다.

"라탄."

하벨의 부름에 정령들이 왕의 길을 막았다.

"…지,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왕은 이 황당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모를 만큼 당황했다.

정령들이 정말로 저 남자의 말을 듣고 있지 않은가.

[어서 내놔.]

라탄이 앞발을 뻗었다.

"뭘 말입니까?"

[달님이 달라는 거 말이야. 다 내놔.]

"지금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아십니까?"

[책임을 져야지. 우리도 책임을 지기로 했어.]

책임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왕의 얼굴이 분노로 새빨갛게 익었다.

"먼저 도망친 분은……."

언성이 화악 올라가려다가 왕은 겨우 참고는 하벨을 포함한 다른 이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금 저들한테 속은 겁니까? 저들이 나라를 구해줬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나라가 어떤 꼴인지 보셨……."

"정령들은 괜찮은데? 지금 큰일이 난 건 정령들이 아니라 바로 너잖아, 너."

하벨은 왕의 말을 끊으며 고자질하듯 말을 꺼내자 라르웬이 입술을 꽉 깨문 채 어깨까지 떨었다.

'미치겠네. 웃긴 말이 아닌데, 왜 이렇게 웃기지?'

"…참아."

지금 하벨이 분위기를 잡아야 한다는 걸 알기에 넬시아가 라르웬을 말렸다.

여기서 여러 사람이 끼어들면 어수선해질 뿐이었기에 다들 참고 있었다.

이 웃긴 상황을.

"아무리 그래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지금 밖에서 너 잡으려고 난리인데. 내가 잠깐 그 상황에서 널 꺼내준 거잖아. 또 도망칠래?"

정곡을 찔렸는지 왕의 손끝이 잠깐 떨리는 모습을 보았기에 하벨은 낄낄 웃었다.

"머리 굴리지 마. 어차피 선택지는 두 개뿐이야."

하벨은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지금 그대로 내려가서 사람들한테 두들겨 맞으면서 죽든, 나한테 개처럼 엎드려 빌든 이 두 개뿐이라고."

"…개소리 집어치우거라! 저들은 잠깐 내게 분노한 것뿐인 것을."

"잠깐이라고?"

하벨은 가벼운 웃음을 토했다.

이 사태를 저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는 저딴 게 왕이라니. 이제는 헤스트리아 왕국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착각은 이제 접지, 그래? 저들은 널 버렸어. 네가 먼저 나라를 버렸으니까. 지금 피어오른 불꽃이 참고 인내하면 꺼질 거라 생각하지?"

"위기를 틈타 나를 흔들 셈인 것 같은데 날 우습게 여기지 말거라. 이 나라 헤스트리아 왕국은 사라지지 않으니!"

"왕국은 사라지지 않겠지. 하지만 이 불꽃은 절대로 꺼지지 않아. 왜냐고?"

하벨은 아주 가볍게 정령들을 가리켰다.

"정령부터 달라졌거든. 이 나라는 정령들의 나라인데 뿌리부터 달라진 걸 네가 어떻게 막아? 뿌리부터 붙은 불을 꺼트린다고? 네가?"

갑자기 하벨이 다가오자 왕은 당황하면서 살짝 뒷걸음질 쳤다.

"정령님들이 여길 버린다는 그딴 개소리를 내가……."

[난 떠날 건데?]

[나도 여길 떠날 거야.]

라탄이 꺼낸 말에 정령들이 동조하기 시작하자 왕은 숨을 삼켰다.

정령들이 떠나다니. 이 땅에서?

정령들을 위한 유일한 나라를 떠난다니.

왕은 그제야 놀라며 말을 더듬었다.

"왜, 왜들 그러십니까? 저 밖에 있는 것들은 잠깐만 기다리면 해결이 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이제 나라를 복구하면 원래 그랬던 것처럼 당신들을 떠받들겠습니다."

"사람들을 지배하는 자를 '왕'이라고 부르지."

정령들에게 빌고 있는 왕의 모습을 비웃으며 하벨은 말을 꺼냈다.

"하지만 사람들을 위해 모든 걸 내놓고 희생해야 하는 자 역시 '왕'이라고 불러. 그럼, 사람들을 버리고 도망친 왕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하벨의 뒤를 카샬이 따랐다.

왕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하벨을 바라보았다.

"뭐긴 뭐겠어? 그냥 도망자지."

하벨은 손가락을 들어 왕의 이마를 꾸욱 눌렀다.

"그게 너라고."

탁!

왕의 손이 하벨의 손에 닿기도 전에 카샬이 이를 막았다.

"그 더러운 손으로 달님을 만지지 마라."

싸늘하고 증오가 담긴 채 으르렁거리는 카샬의 기세에 짓눌렸지만, 왕은 허세를 부렸다.

"이 일이 외부에 닿게 되면 어떨 것 같은가? 고작 단체가 나라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정말로?"

"보통은 어렵지. 하지만 나는 할 수 있는데?"

왕의 이마를 누른 하벨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겨우 그 손짓에, 조금 강해진 손가락의 힘에 왕은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을 느꼈다.

거대한 산, 아니 거대한 바다에 집어삼켜진 기분이 들더니 식은땀이 줄줄 흘러 기어코 바닥으로 떨어졌다.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정령의 분노를 맞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큰,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한 힘이 온몸을 스치고 갔기에 눈물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천천히 내려가는 하벨의 손가락을 따라 왕이 무릎을 꿇었다.

부끄러움보다 제발, 그저 제발 이 압박감에서 풀어주길 빌었다.

"…으흑!"

피와 심장을 압박하는 그 느낌에 왕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뭐, 뭐든지 하겠습니다. 뭐든지 할 테니, 제발. 제발……."

왕이 흘린 콧물마저 지저분하게 땅을 적셨지만, 그는 자신의 몰골을 추스를 여유조차 보이질 않았다.

"너한테 낭비할 시간은 없으니까, 어서 내놔."

하벨은 애초에 다른 사람과 달리 저 왕을 설득할 마음이 없었다.

짐승보다 못한 존재에게 왜 그래야 하는가.

덜덜.

왕은 몸을 떨며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는지 몰랐다.

"…내, 내놓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딱.

하벨이 손가락을 튕기자 아라가 슬쩍 다가와 정령수를 넣어주었다.

하벨의 손에서 독의 힘을 띤 삼지창이 만들어졌다.

아라의 힘이 세져서인지, 아니면 그간 정령들에게 차곡차곡 받은 교감 때문인지 몰라도 삼지창이 제법 길어졌다.

가벼운 복통과 통증만 일으키는 독을 가득 바르며 바닥을 짚은 왕의 손등에 삼지창을 박아넣었다.

콰악!

"…으, 으아아악!"

"내가 너를 그냥 보낼 줄 알았어? 아직도 머리 굴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어오는데?"

자신이 정치판에 수없이 싸워왔던 그 경험은 결코 헛된 게 아니었다.

눈동자만 굴러도, 숨을 짧게만 내쉬어도 수없이 스쳐 지나왔던 그 기억이 왕의 행동을 판단해주었다.

어떻게든 지금 상황만 모면하자는 그런 눈빛이었다.

"이건 독이야. 나만 풀 수 있는 독."

하벨은 용왕의 힘을 끌어오며 이미 왕의 피에 돌고 있는 독을 억지로 방향을 틀어 놈이 가진 순환의 길에다가 넣어버렸다.

"…허, 허어억."

왕이 신음을 토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 무슨 뜻인지 알겠지? 이 독은 정령수로 만들어져서 정령수에 반응해. 즉, 이곳에 있는 정령이 너한테 정령수를 넣는 순간부터 독이 또 발생한다는 뜻이야."

순환의 길에 독이 찬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봤지만, 왕은 저 달무늬가 가득한 가면을 쓴 남자가 꺼내는 말이 결코 거짓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옥쇄, 아니 도장부터 내놔."

옥쇄라는 말조차 꺼내고 싶지 않았다.

하벨이 손을 뻗자 왕은 온몸이 뒤집힐 것만 같은 통증에 헛구역질하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탁.

손에서 도장이 떨어지자 카샬이 발로 걷어찼다.

이게 대체 뭐라고. 겨우 이게 왕을 상징하는 거라니.

"자. 이 도장으로 내가 뭘 하든 말든 너는 꼭두각시처럼 왕의 자리에 앉아서 뒤에서 주는 대본이나 떠들어대면 되는 거야."

"…아."

"대답."

하벨은 기세를 거두며 말했다.

"아, 아, 알……."

"대답!"

"알겠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허수아비 왕이지.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세 번 외쳐보는 게 어때?]

아코가 키득거리며 왕의 머리를 발로 눌렀다.

작은 발길질일지 모르겠지만, 정령들은 그 모습에 참았던 감정을 터트렸다.

[너는 우리를 농락했어.]

[우리가 너를 제대로 보지 않은 건 잘못이야. 그건 우리가 잘못했어. 하지만 너는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꾸미고, 우리 눈을 속였어.]

"…나한테 맡겨놓고 이제 와서?"

헛구역질하던 왕은 부르르 떨리는 고개를 위를 치켜올리며 비웃음을 날렸다.

지금 이렇게 다 망해버린 와중에 여기서 무슨 가면을 쓸까.

"알아서 다 하라면서. 나한테 알아서 다하라고 맡겨놓고 머릿속에 꽃밭을 그릴 때는 언제고!"

아코는 더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에 얼굴을 가득 구기며 왕에게 정령수를 넣었다.

"…아으으윽!"

왕은 그대로 배를 잡고 바닥을 구르며 고통에 발을 휘저었다.

[그래. 저 애들이 꽃밭을 머릿속에 피웠지. 하지만 그래도 책임을 지겠다고 했어. 너는 잘못이 없어? 왕으로서 책임을 져. 네가 해왔던 일에 책임을 지라고!]

아코는 당장이라도 왕을 씹어먹을 것처럼 쳐다보았다.

"효과가 좋은데요, 달님?"

카샬이 들뜬 목소리를 내며 바닥에 구르는 왕의 도장을 가지러 가면서 슬쩍 왕의 팔을 밟았다.

"…아, 실수."

계속 이어진 비명 속에 새로운 비명이 터져봤자 카샬의 귀에는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속에 능구렁이가 가득하니까. 이 정도는 걸어놔야지."

하벨은 라르웬과 넬시아를 바라보았다.

언제든지 앞으로 튀어나갈 생각이었던 이전 모습과 달리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부담되지 않습니까? 굳이 달님께서 희생하실 필요 없습니다."

카샬은 도장을 내밀며 하벨에게 말했다.

"아니야. 이 정도는 거뜬해. 엄지만큼 썼거든."

하벨은 키득거리며 카샬이 건넨 도장을 받았다.

"자, 어쨌든 쉽지? 이제부터 너의 위치는 허수아비 왕이야. 이걸 잊으면 안 돼."

일부러 왕을 내려다보며 도장을 휙휙 돌렸다.

"아참, 신관이 이곳에 왔다는 거 알아. 이곳에 재앙을 불러온 물건을 하나 들고 말이야."

"그, 그걸 어떻게……."

"그건 중요하지 않아. 너의 의지였어? 아니면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된 거야?"

"……."

하벨은 왕의 침묵에 자신의 눈이 가늘어지는 걸 느꼈다.

"그래. 역시 너의 의지였네."

곧 하벨은 비웃음을 터트렸다.

애초에 쇄국 정책을 펼치고 있는 헤스트리아 왕국에 외부의 세력이 개입되었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너무도 우습지 않던가.

하지만 헤스트리아 왕국 역시 먹고 살아야 하기에 외부와 최소한의 거래를 유지했고, 에른스트가 이걸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그 루트를 통해 저 왕에게 제안했을 게 뻔했다.

[…정말 너였다고?]

[네가… 우리를 배신하기까지 해?]

정령들이 밀려오는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네 머릿속에 뭐가 나올지 알겠어. 너무 뻔하잖아?"

하벨의 손가락이 정령들을 향했다.

"이것만 있다면 정령들을 네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제안을 건넸겠지. 얼마나 억울하겠어? 여긴 너의 왕국인데 정령들이 마치 왕처럼 행동하니 미칠 것만 같겠지."

왕은 조용히 찌르는 사실에 입술을 다물며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그럼 그렇지. 이 쓰레기 자식!]

아코는 더는 참지 못하고 왕의 얼굴을 걷어찼다.

저딴 놈이 카샬의 아버지일 리가 없었다.

[이건 모두를 속인 거잖아? 너무해!]

정령들의 분노가 느껴졌기에 아라 역시 덩달아 화가 났다.

왕 주변에 바람이 거세게 불자 그는 몸을 낮추며 덜덜 떨었다.

"애초에 이놈이 정의를 외칠 리가 있겠어? 아니, 정말로 정령들을 생각했다… 면."

문득 하벨의 머릿속에 스치고 간 생각이 있기에 잠깐 말을 멈췄다.

"…꽃님아."

하벨이 카샬을 무겁게 불렀다.

"예, 달님."

"이놈 정말로 살릴 자신 있어?"

"허울뿐이더라도 왕이 아닙니까?"

"자식은 있잖아. 걔를 왕으로 올리자. 어딘가에 살아 있을 수 있으니까."

"왜 그러십니까?"

카샬은 갑자기 마음이 변한 하벨의 태도에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꽃님아. 나는 이 말을 내뱉는 순간, 네가 이놈을 죽일 것 같아서 좀 그래."

"그러니까 왜 그러십니까?"

"다른 사람한테 맡겨.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야."

카샬의 사정을 다 이해하지만, 하벨은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이 거지 같은 상황만큼은 말리고 싶었다.

"달님."

카샬은 자신의 결단을 하벨에게 알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이지 않겠습니다. 저는 편안하게 죽지 않았으면 합니다. 모든 걸 다 잃어버린 채 허울뿐인 왕의 자리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었으면 합니다."

"…꽃님아. 진정해야 해."

"지금 충분히 진정하고 있습니다."

"너 때문이 아니야. 너 때문이 아니었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너와 어떤 이유도 없어. 이놈이!"

뻐억!

하벨은 순간 솟구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왕을 걷어찼다.

왜 정령들과 벌어진 갈등을 카샬의 어머니를 죽여서 해결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야 알았다.

"이 빌어먹을 개자식이! 이 쓰레기가 정령들을 지배하려는 계획을 알아버린 누군가가 혹여 정령들한테 말해버릴까 봐, 그냥 널 팔아서 죽여버린 거였어!"

카샬의 어머니를.

왕의 비밀을 알아버린 왕비를.

겨우 그딴 이유로 죽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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