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왜 안 돼?
* * *
아라가 하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괜찮아."
하벨은 물의 검을 없애며 거두며 활짝 웃었다.
하지만 아라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대장 지금 엄청 혼란스러워 보여.]
"티가 나나? …이거 큰일이네."
하벨의 시선이 저 멀리에 있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향했다.
아니, 그보다 더 가까이 있는 칼리우스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아니! 이, 이 바보 용왕님!
물이 요동치자 하벨은 깜짝 놀랐다.
"…바보라니. 아니, 내 위엄이 떨어졌어도. 이건 좀 너무한데?"
―그런 소리를 들으면 누구라도 감정을 숨기는 건 어렵다고요!
―용왕님을 죽인 행동은 누가 봐도 용서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용왕님은, 지금 슬퍼하잖아요. 다 감싸줄 필요가 없어요. 항상. 항상… 용왕님만 슬프잖아요!
"사실은 말이야."
물을 향해 하벨은 손을 뻗었다.
"…혼란스러워."
하벨은 물을 어루만졌다.
"자안이 말한 것처럼 정말로 에른스트에게 세뇌를 당해서 날 죽인 거라면."
하벨의 눈이 잠깐 감겼다.
"그런 거라면 내가 저들을 죽여도 되는 건지 혼란스러웠어. 그 죄가 무엇이든 결국, 에른스트에게 이용당한 거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맞아요. 나는 그런 거 싫어요!
―용왕님께서 얼마나, 얼마나 아팠는지 다 기억난단 말이에요. 아직도 이렇게나 선명한데요. 아직도 갈기갈기 찢긴다는 기분이 뭔지 기억이 나는데요. 그럼 용왕님은 지금 얼마나 더 선명할까요?
물이 울자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울지마. 왜 울어?"
하벨은 물을 달랬다.
―용왕님께서 안 울잖아요. 이렇게 슬픈 게 느껴지는데, 아직 반밖에 연결이 되지 않아도 슬픈데.
[이 몸은 물의 감정이 느껴져. 너무 슬퍼. 이 몸은 안 울려고 하는데, 이게 너무 슬퍼.]
아라까지 훌쩍거리자 하벨은 그들을 안아주었다.
"걱정하지 마. 나는 저들을 죽일 거니까."
그들을 안은 하벨의 손에 잠깐 힘이 들어갔다.
―그게 맞는 거예요.
―그래야만 해요. 용왕님께서 겪었던 고통을 돌려줘야 해야 해요.
[하, 하지만 대장은 그러고 싶지 않잖아!]
아라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기특하네, 아라야."
하벨은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세뇌를 당했다는 자안의 말을 듣자마자 제일 먼저 떠올린 건 류아였다.
류아에게는 서황과 자안이 가진 무기가 없었다.
'똑같이 틈의 세계에 묶였어도 그 목적과 의지가 다를 수 있구나.'
자안 같은 자도 있을 수 있지만, 아닌 자들도 있을 수 있으니 하벨은 하나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저들은 유렌에게 묶인 자이며. 그래서 유렌이 죽으면 똑같이…….'
하벨은 밀려오는 생각에 얼굴이 더 일그러지기 전에 가면을 썼다.
"고마워, 아라야. 하지만 내가 죽여야 해."
[왜에……? 이 몸은 대장이 괴로운 게 싫은데.]
아라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힘없이 늘어진 꼬리를 살짝 흔들었다.
"작별인사는 해야 하니까."
유렌이 죽으면 틈의 세계와 얽혀 있는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별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작별인사라 말을 꺼내자 슬픔이 잦아드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은 여기까지.
자신의 슬픔을 누르고 하벨은 물을 더욱 세게 안아주었다.
"고마워. 지금까지 잘 견뎌줬어."
갑작스럽게 자신과 이별을 겪고, 세계가 망가지는 걸 보며 온갖 오염에 엉망이 된 몸을 견딘 건 모두 물이었으니까.
―…으흑.
물은 다시 물방울을 흘리며 바닥을 적셨다.
―너무… 너무 슬펐어요. 다른 건 몰라도 용왕님이 없다는 사실이. 그 사실이 너무 슬퍼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어요.
"내가 너희를 다시 원래대로 돌려줄게. 약속해."
랜턴이 흔들리자 하벨은 왜인지 웃음이 났다.
마치 자꾸만 늘어나는 약속에 적당히 좀 하라며 자신을 혼내는 것만 같았다.
―아직 많이 아파요?
물이 하벨의 배를 만지작거렸다.
"아파. 이 몸이 비록 용왕의 몸이라고 해도 사실 사람하고 차이도 없고."
―훨씬, 훨씬 약해요!
물이 꺼내는 말에 랜턴이 거칠게 흔들렸지만, 하벨은 키득거렸다.
"맞아. 상처도 빨리 낫진 않으니까. 그래도 참을 만해. 어쨌든, 울지 말고. 얌전히 잘 있어야 해. 착하지?"
―얌전히 있어야 하는 건 용왕님이잖아요!
물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
하벨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아라와 물의 시선이 너무도 노골적으로 느껴져 하벨은 손가락을 곱게 접었다.
"뭐어, 노력해볼게."
하벨은 자신에게 달려오는 이들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마무리를 지어야지."
이제 헤스트리아 왕국의 왕을 만날 차례였다.
* * *
[…얘들아.]
아라가 정령들을 불렀다.
[네!]
[듣고 있어요!]
정령들이 초롱초롱한 시선으로 아라를 보고 있었다.
[이 몸은 말이야. 너희가 이곳에만 매달려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 더 큰 세상으로 나가서 예쁜 것도 보구, 신기한 것도 보면서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하벨은 카샬이 따라주는 유자차를 마시며 싱긋 웃었다.
'잘하네, 우리 아라.'
어쩜 저렇게 잘 자랐는지.
'유자차 맛도 좋고.'
왕을 잡는 건 자신이 아니라 이곳 백성들이었다.
무너진 건물 중 가장 깔끔해 보이는 저택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오미너스가 계속 배회하던 장소였는지 누구 하나 사용한 흔적조차 없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왕을 잡았으면 이곳으로 데려와달라는 부탁을 정령들에게 했으니 자신은 왕이 오기 전까지 이렇게 아라를 바라보면서 느긋하게 기다릴 셈이었다.
[있잖아. 만약에 밖에 나왔는데 모든 게 두렵다면 이 몸이 좋은 곳을 알고 있어.]
아라가 꺼낸 말에 하벨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설마.
[이 몸하구, 대장하구, 정령들의 보금자리가 있어! 이름은 '아벨'이야. 이 이름은 정령들이 지어줬어. 예쁘지?]
헤헤.
아라가 방긋 웃었다.
'영업도 저렇게 잘하고. 대체 못 하는 게 뭔지 모르겠네.'
하벨은 흡족함을 숨기지 못한 채 아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라 뚫리겠다. 적당히 좀 보지, 그래?"
라르웬이 말을 던지자 하벨은 실실 웃었다.
"저렇게 예쁜데 적당히 보는 게 가능해요?"
라르웬이 손을 뻗어 하벨에게 쿠키를 내밀었다.
"…갑자기 왜 그래요? 나 지금 가만히 있는데요?"
하벨은 쿠키를 잡으면서도 라르웬의 친절에 눈을 깜박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방에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들이 몇인가.
아주 단체로 둘러싸여서 뭘 하려고 해도 침대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네가 기특해서 그래. 장하다, 막내야."
"그렇죠? 내가 좀 기특하죠."
하벨은 싱긋 웃으며 다시 아라를 바라보았다.
오도독.
하벨은 쿠키를 베어먹었다.
[하지만 이 몸은 강요할 생각은 없어. 이곳에 남고 싶으면 그래도 돼. 대신, 이 몸은 너희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아라가 나름 무서운 표정을 지었지만, 하벨은 고개를 돌리며 어깨를 흔들었다.
평소 '대장! 나가면 안 돼!'라고 말할 때 짓는 표정과 다를 게 없었다.
[버… 벌이라는 게 뭐죠?]
[아픈 건 싫어요. 제발, 그러지 말아 주세요, 왕이시여.]
[이, 이 몸은 아프게 안 해! 그런 건 이 몸도 싫어!]
정령들의 반응에 아라는 도리어 기겁했다. 자신의 표정이 그렇게 무서웠나 싶어 슬쩍 하벨을 보았다.
하벨이 싱긋 웃자 아라의 꼬리가 흔들렸다.
[그럼 벌이 뭐죠? 안 아픈 거 맞는 거죠?]
[응응! 이 몸은 거짓말 같은 거 안 해!]
이미 반짝이던 아라의 눈빛이 한층 짙어졌다.
[이 몸은 너희가 그간 미뤄왔던 임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세상을 위해서, 대장을 위해서, 이 몸을 위해서 우리를 도와줘.]
아라의 앞발이 하벨을, 모두를 가리켰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위해 가장 먼저 나서주는, 이 몸이 가장 좋아하는 저 사람들은 티에라 가문 사람이야!]
행복함이 아라의 얼굴에 가득 어려 빵빵해진 볼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티에라 가문이요?]
정령들은 그제야 흠칫 놀랐다.
[내가 도움을 요청했어. 우릴 위해 여기까지 왔고, 우릴 구해줬어.]
그 과정에 오해가 많았지만, 라탄은 사실을 언급했다.
도와달라 요청했고, 이렇게 와준 건 티에라 가문이 유일했다.
[나는… 왕을 따라갈 거고, 티에라 가문을 도울 거야.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았거든.]
라탄은 정령들을 바라보며 앞발을 꼼지락거렸다.
아라한테, 아라를 넘어 하벨에게 도달한 자신들의 힘이 어떤 감정으로 돌아왔는지 이미 느끼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나는 할래. 어차피 너희도 그날 느껴봤잖아.]
난생처음 느껴보는 그 감정에서 라탄은 도무지 떠날 수가 없었다.
다시 느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감정이었다.
[정령사들이 우리한테 느끼는 그 감정은 모두 가짜였어. 우리가 정령사들에게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았기에 우리도 똑같이 받은 거야. 나는 계속 가짜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지금이라도 달라질 거야.]
라탄이 갑자기 하벨에게 다가왔다.
오도독.
하벨은 쿠키를 먹으며 라탄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 반성 많이 했어. 혹시 보여?]
"보여."
[그럼 나를, 나를 치, 칭찬해줘!]
눈을 질끈 감으며 칭찬해달라는 저 모습에 하벨은 잠깐 눈을 깜박거렸다.
하지만 실실 웃는 채로 손을 뻗어 라탄을 쓰다듬어주었다.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을 삼키며 감정을 드러냈기에 하벨은 얼마든지 칭찬해줄 수 있었다.
잘했다. 장하다.
찌르르.
교감이 느껴졌다.
하벨의 보드라운 손길에 라탄은 너무 기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고, 아라는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멍하니 벌리다 아랫입술을 올리며 꼬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대장이… 이 몸의 대장이.]
아라를 힐끔 쳐다본 하벨은 귀여움에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라탄을 바라보았다.
"라탄. 그건 부끄러운 감정이 아니야. 나도 칭찬해줬으면 하는데?"
[정말로?]
하벨의 말에 라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럼. 나도 칭찬해줄래?"
[고마워. 우리를 도와줘서. 오미너스를… 없애줘서.]
라탄은 그제야 가장 자연스럽게 웃었다.
"그럼 가장 공로가 컸던 두 사람한테 고맙다는 말도 해줄래?"
하벨은 넬시아를 가리켰고, 그녀는 갑작스러운 지목에 놀라서는 어깨를 크게 흔들었다.
하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세를 바로 앉아서는 정령들을 바라보았다.
"누님은 헤스트리아 왕국에 위기가 온 걸 알고 가장 먼저 티에라 가문에 도움을 요청했어. 누님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여길 오지도 않았을 거야."
라탄이 넬시아가 다가가자 라탄의 뒤를 다른 정령들이 따라 움직였다.
그들 모두 한층 상기된 모습으로 넬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처음으로 따뜻했기에 넬시아는 어쩐지 벌써 눈가가 찡하게 울려왔다.
[고마워!]
[우릴 생각해줘서 정말 고마워!]
정령들이 모두 한 입으로 외쳤다.
넬시아는 그 외침에 입술을 꽉 다물었다.
[있잖아. 나는 널 기억해. 그때도 지금처럼 따뜻하게 대해줬는데. 사실은 네가 우리를 이렇게나 생각할 줄은 몰랐어.]
[나도 봤어. 매번 웃으면서 인사해줬어!]
[나보고는 착하다고 해줬어!]
[나보는, 예쁘다고, 또 보자고 그렇게 말해줬어!]
하나씩 쌓이는 말들에 넬시아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별말이 아님에도 넬시아는 너무도 기뻐 환히 웃었다.
"…고마워."
이곳 헤스트리아 왕국에 온 이유는 이걸로 충분했다.
정령들의 저 말에 모든 게 녹아내렸다.
배신감도, 실망감도, 전부.
[그럼 우리도 쓰다듬어줘!]
[맞아! 라탄처럼 쓰다듬어줘.]
정령들이 넬시아에게 우르르 붙자 그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너희를 위해 기꺼이 넓은 아량을 베푼 카샬에게도 고맙다고 말해주면 좋겠어."
하벨은 해맑게 웃으며 카샬을 가리켰다.
넬시아처럼 크게 당황하지 않았지만, 카샬은 왜 이런 상황을 만든 거냐는 듯 하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눈 뜨고 물어봐야지, 카샬?"
태연하게 묻는 하벨의 말에 카샬 역시 태연하게 대꾸했다.
"눈 떴습니다."
"때론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도 중요하지. 그러니까, 눈 좀 떠봐."
"이미 잘 보입니다. 그것보다 정령들에게 미움받아서……."
"그럴 일은 없다는 걸 알잖아?"
하벨은 슬쩍 자신에게 다가온 아라를 토닥거려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입이 삐죽 나온 정령왕이 이 자리에 있었다.
"자, 착하지, 카샬?"
하벨에게 어린애 취급을 받자 카샬은 얼굴을 가득 구겼다.
"이제 70일을 향해 다가가는 거 아십니까?"
"하!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아. 훨씬……!"
카샬은 바로 발끈하는 하벨의 말에 그제야 만족하며 정령들을 바라보았다.
"저는 개인적으로 왕에게 볼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에게도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카샬은 아라를 믿고 정령들에게 다가갔다.
"왜 정령사와 정령사가 아닌 이들을 분리하며 차별하셨습니까?"
정령들은 저 질문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정령사가 아닌 이들의 마음이 보이지 않아서 그랬어. 무서워서. 미움받는 게 두려워서 정령사가 아닌 이들을 외면했어.]
라탄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자신은 그래야만 하니까.
"그럼 왜."
카샬은 눈을 떠 라탄과 정령들을 바라보았다.
눈을 뜨면서 드러난 카샬의 눈빛에 정령들이 흠칫거렸다.
짙은 증오가 드러났다.
"정령사가 아닌 절 낳았다는 이유로. 이 나라 왕비가, 제 어머니가 온갖 핍박에 시달리다 당신들에게 대항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었어야 했습니까?"
카샬이 차분히 꺼낸 말에 동요한 건 정령들만이 아니었다.
"…카샬?"
라르웬이 말을 잇지 못했다.
다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카샬에게 아무도 물을 수가 없었다.
너무도 잔인한 말이 아니던가.
"왜… 어렸던 저에게, 세상에 전부였던 어머니를 빼앗아 가셨습니까?"
그리고 카샬은 차분히 한 가지 사실을 더 언급했다.
그의 눈빛에는 원망이 어려 있기에 정령들은 웅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