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이럴 수 없어!(3)
* * *
류아가 하벨 티에라를 찾았던 이유.
틈의 세계에서 하벨 티에라를 쫓았던 대신들.
그리고 하벨 티에라가 어떻게 자신을 이 몸에 빙의시킬 수 있었는지를.
―인간이 어떻게 회귀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하벨 티에라가 물었던 저 질문 속에 모든 게 담겨 있을 줄이야.
'너는 다 알고 있었다.'
어떻게.
―덜떨어진 저는 안 되고, 용왕님밖에 없었어요.
'하벨 티에라. 너는 네 존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을까.
하지만 그 의문은 밀려드는 현실 앞에서 금방 꺾여버렸다.
[대장…….]
아라는 하벨의 몸이 떨리는 걸 느꼈다.
슬쩍 시선을 올리자 하벨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입술마저 꽉 깨문 그 모습에 아라는 당황하고 놀랐다.
하벨이 울고 있었다.
아주 슬프게 울고 있었다.
[이 몸은… 대장한테 용왕이라는 의미가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 그런데 이 몸이라도 너무너무 슬플 거라 생각해.]
아라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대장은 대장 이외에 용왕이 있다는 걸 몰라서 너무 슬픈 거지?]
하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답이었으니까.
이 세상에서 유일하다 믿으며 지내왔던 시간이 너무도 허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대장. 그래도 이 몸이 생각하기에 그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라고 생각해. 대장은 있지.]
아라가 하벨의 손을 빠져나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장은 엄청 대단해! 이 몸이 보다 보면 계속 '와'하고 입을 버리고 볼 정도로 엄청 대단해! 그러니까 대장이 오해해서 했던 행동도 전부 대단할 거야.]
"…아라야."
하벨은 저절로 비틀어지는 입꼬리를 바로 잡으려 노력했다.
[응응.]
"내가… 세상에서 유일할 거라 생각했다?"
[맞아. 유일해.]
"하지만 아니었어."
손을 내린 하벨의 눈동자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같이 고여있었다.
팔을 들어 랜턴을 잡았다.
그저 정령왕이라는 자리가 이안에서 아라로 넘어가는 자리처럼 자연스러웠던 것을.
자신이 처음이라서, 자신밖에 없어서 알지 못했다.
"하벨 티에라가… 용왕이었어. 내가 죽고 난 후에 탄생한 용왕."
잠잠하던 랜턴에 빛이 들어왔다.
자신을 위로해주고자 한 것처럼 따스한 빛이 나왔기에 하벨은 눈물을 막지 못했다.
"내 뒤에 새로운 용왕이 탄생할 걸 알고 있었다면……."
문이 열렸다.
똑똑.
뒤늦게 카샬이 노크를 해서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달라진 건 없었을 겁니다."
카샬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사실 조금 전부터 앞에 서 있었다.
언제 들어가야 하나 몰라 타이밍을 놓치다가 아라와 시작된 저 대화에 더는 참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예. 달라지진 않습니다. 도련님은 도련님이니까요. 가만히 있질 못했을 겁니다. 여전히 사고뭉치이실 테고, 여전히 사람들을 줍고, 보듬어주고, 그렇게 감싸주실 테니까요."
하벨 티에라가 용왕이었다.
충격이었다.
상당히 많이, 충격이었다.
자신은 하벨 티에라가 가진 슬픔을 알고 있었다.
티에라 가문의 둔재.
시든 푸른 꽃.
이 모든 건 하벨 티에라를 조롱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말이었다.
그런데 하벨 티에라가 하벨과 같은 용왕이었다니. 밀려오는 안쓰러움에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지만, 참았다.
지금 제일 충격에 휩싸일 건 하벨이니까.
제일 안쓰러운 건 하벨이니까.
"일어나셨습니까, 도련님? 몸은 어떠십니까?"
하여 카샬은 조금 전 실수를 감추며 되도록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냈다.
"일단 여기는 왕실입니다."
"아니, 카샬. 달라. 이건 다르다고."
하벨은 상체를 일으켰다.
"그럴 줄… 알았다면 다 놓아버렸을 텐데. 다 안고 다음 용왕을 위해 세상을 주었을 텐데. 맛이 가버린 나보다 하벨 티에라가 그 나라를 더 잘 다스렸을……."
"도련님이요?"
카샬은 더는 참지 못하고 반문하자 랜턴이 거세게 흔들렸다.
"셋째 도련님께서 아니라고 말씀하시네요."
"카샬 나는……."
"도련님. 일단 심호흡부터 하십시오. 지금 흥분하실만한 일이 벌어진 건 압니다. 알고 있지만, 너무 멀리 가지 마십시오."
"이건 흥분이 아니라, 사실이야. 그냥 내 선택으로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렸어. 내 오만함이 벌인 결과를 지금 내 눈으로 보고 있다고."
하벨은 눈물을 닦으며 자신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아라를 쓰다듬었다.
[대장. 이 몸은 갑자기 무서워. 대장이 뭔가를 다 놓아버린 것처럼 보여. 대장이… 멀리 떠날 것만 같아.]
하벨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기에 아라는 밀려오는 불안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카샬 역시 불안했기에 하벨이 꺼낸 말을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왜 오만함입니까?"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다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바보처럼 뒤에 새로운 용왕이 탄생한다는 것도 모르고."
아직도 하벨의 얼굴이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얼마 전에 말이야. 아버지한테 떼를 써봤다? 너무… 마음이 편안한 거야. 내가 왕이었으면 해보지도 못한 일이었어. 그래서 새로웠어. 기뻤고."
카샬은 저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벨이 말하는 '떼'라고 해봤자, 속마음을 털어놓는 일에 불과할 테니까.
"그래. 어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겠지만, 나는 아니었어. 이제 천천히 더 확실하게 왕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왜 내 선택이 이제 와서 발목을… 잡을까?"
잠깐 하벨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응……?"
[그, 그런 거 아니야, 대장. 아무것도 대장의 발목을 붙잡지 않았어. 대장은 정말 할 수 있는 만큼 해낸 거야. 그때의 대장한테는 그게 최선이었을 거야.]
"그랬을지도 몰라. 그때의 나한테는 그게 최선이겠지. 그런데 아라야. 내가 말했지? 나는 실패했다고."
[그건 이 몸한테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어. 대장이 실패했든 아니든 이 몸은 대장이 좋아!]
아라가 눈에 힘을 주었다.
제발. 내 마음을 알아줘.
간절한 아라의 눈빛에도 하벨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야, 아라야. 나도 실패할 수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내 실패의 대가가 계속 벌어지고 있어. 지금 일어난 모든 사건이 내 실패의 대가라고."
바짝 마른 피를 삼키는 듯 하벨은 두려움을 삼키고 있었다.
머릿속에 너무도 많은 사건이 스치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또 다른 사건들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이건 다 에른스트 그 새끼가……."
"에른스트를 죽이지 못한 건 나야."
하벨이 절망감을 드러내며 말을 토했다.
기억 속에 분명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 에른스트를 죽이지 못했다고.
"예……?"
"에른스트를… 막지 못한 건 나야. 내가, 놈을 막지 못했어. 내가……."
하벨은 손끝을 덜덜 떨었다.
"……다 뺏겨버렸어."
카샬은 화가 났다.
갑자기 작아진 하벨의 모습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왜 이제 와서.
여기까지 와놓고.
"…그래서 미래가 되어버린 현재에 책임감을 느끼는 거라면 그게 무엇이든지 버리십시오."
카샬은 이전보다 높아진 언성을 억누르지 못했다.
"왜 갑자기 짊어지려고 하십니까? 이게 너무 싫으셨던 거 아닙니까? 버리십시오. 그냥 눈길을 돌려서 하고 싶은 걸 하고 사시란 말입니다, 제발요!"
하벨은 팔을 들어 랜턴을 내보였다.
이젠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하벨은 부들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하벨 티에라가 나한테 세상의 멸망을 막아달라고 했어. 난 그러기로 약속했고."
[세상이 멸망한다고?]
아라가 귀를 다시금 접었다.
"그게 무슨 말씀… 입니까?"
"하벨 티에라는 미래에서 현재로 돌아온 회귀자야. 나한테 여러 가지를 보여줬어."
하벨의 말을 따라 랜턴이 흔들렸다.
카샬은 눈을 크게 떴다.
미래에서 현재로 돌아오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는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게, 그게… 가능한 겁니까?"
"날, 이 몸에 빙의시킨 이유가 처음부터 그거였어."
하벨은 또 웃었다.
"세상을 구해달라고."
콱.
카샬이 단번에 랜턴을 붙잡았다.
"미치셨습니까, 셋째 도련님!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이건 너무 잔인하잖습니까!"
카샬의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갔지만, 랜턴은 금 하나 가질 않았다.
"세상을 구해달라뇨! 그래서 지금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부른 겁니까! 이렇게 사람을 기만하는 게 당신의 방법이었습니까?"
"방법이 없었대."
"왜 옹호하는 겁니까? 지금 여기까지 감싸주시는 겁니까? 이건, 이건… 너무 미련하십니다!"
카샬은 속이 쓰라렸다. 저놈의 이해심은 왜 본인한테만 작동을 하지 않는 건지.
"하지만 이제는 나도 그 이유를 알아."
하벨은 시선을 잠깐 내렸다.
왜 하벨 티에라가 덜떨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하벨 티에라가 용왕이었음에도 정령을 보지 못했는지.
"내가, 내 영혼이 저 육체에 묶여 있었기에, 류아가 내 영혼을 가져갔기에 하벨 티에라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하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처럼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가 아니었다. 죄책감이 담긴 어쩔 수 없는 미소가 아닌가.
카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용왕의 힘은 영혼에서 나오니까. 이게 내가 용왕은 나밖에 없다고 그렇게 떠들어댄 결과인 거야."
하벨은 힘없이 말을 토해냈다.
류아가 왜 그런 행동을 했겠는가.
저 영혼만이라도 챙겨야 한다고 왜 그런 생각을 했겠는가.
다 자신의 말 때문이었다.
"내가 죽고 제대로 계승을 받아야 했을 하벨 티에라가 사람과 똑같이……."
하벨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점차 일그러지는 얼굴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일반 사람보다 못할 정도로 나약하고, 무능력해진 이유가 바로 나 때문이었다고!"
모든 게 꼬인 원흉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니, 지금까지 버텨냈던 그 힘마저 모조리 다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이러니까, 내가 미칠 것만 같은 거야! 내가… 미래를 빼앗아버렸어! 과거에 머물러야 하는 내가… 미래의 용왕이 가져야 할 모든 걸 빼앗아버렸다고!"
죽었던 용왕이, 새로 태어난 용왕의 목숨을 빼앗고 다시 돌아온 꼴이라니.
이 얼마나 우스운가.
새로운 용왕이 탄생했다는 사실이 놀라운 걸 너머 자신이 미래를 가져가 버렸다는 암담함이 밀려왔다.
하벨 티에라가 느꼈을 그 무력함은 원래 그가 느꼈어야 하는 게 아니었는데.
이 영혼이 하벨 티에라한테 제대로 가기만 했어도 그가 그렇게 괴로운 삶을 살지 않았을 텐데.
[아니야!]
아라가 소리치자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그건 절대로 아니야!]
카샬이 검을 툭툭 건드리자 아코가 슬쩍 나와서는 무거운 분위기를 껄끄럽게 바라보았다.
'나오기 싫었는데…….'
아코는 하벨의 팔에 꼬리를 말며 어깨에 기댔다.
당장이라고 아라는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속상해 보였기에 아코는 하벨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니야! 대장이 하벨 티에라의 미래를 뺏지 않았어! 그런 건 절대 아니라구!]
아라가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아라야. 이건 사실이야."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대장! 왜 그렇게 나쁘게 말하는 거냐구! 이 몸은 이렇게나 속상한데… 너무 속상한데!]
아라가 소리치고, 또 소리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벨 티에라가 미래를 봤다면! 정말로 과거로 돌아온 거라면! 그 선택도 결국, 하벨 티에라가 한 거라구!]
하벨의 눈이 커졌다.
아라가 이렇게까지 크게 분노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하얗던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힘주어 말하는 아라의 모습에 하벨은 말이 함부로 나오지 않았다.
[대장은 왜 하벨 티에라가 선택한 행동을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내버리는 거야! 그건 대장답지 않아! 대장은, 대장은… 으흑, 모든 선택을 존중해줬잖아.]
아라가 기어코 울음이 터져버렸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앞발에 얼굴을 묻어서는 그대로 엎드렸다.
카샬은 저렇게 엉엉 우는 아라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하벨이 슬픈 게 얼마나 속상했으면 저럴까.
카샬은 아라를 대신해 말을 이었다.
"아라 님 말이 맞습니다. 이건 이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셋째 도련님이 잘못하신 겁니다. 도련님이 빼앗으신 게 아니라 억지로 떠맡은 겁니다. 그런데 왜 도련님이 마치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이십니까?"
마치 저 말에 긍정이라도 하듯 랜턴에 빛이 깜박거렸다.
"대체 왜 실패의 책임을 지시려는 겁니까."
"내가……."
하벨의 동공이 갑자기 커졌다.
천천히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따라 눈을 감겼다가 떠졌다.
느닷없이 푹신했던 자신의 침대가 시체로 변하고, 지독한 피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환상이 또 시작됐다.
피로 된 웅덩이 속에 갇힌 자신을 향해 검디검은 손이 자신에게 뻗어왔다.
"내가… 실패하면……."
―살릴 수 있었잖아요! 분명히 그럴 힘이 있잖아요! 그런데 왜… 왜 살리지 못한 건데요?
―뭐가, 대체 뭐가 용왕이라는 건데? 이렇게, 이렇게 다 죽일 거였으면! 왜 신의 자식이라도 된 것처럼 설친 거냐고!
―가만히 있었으면 죽지 않았을 거야! 네놈이 설치지 않았으면, 내 딸이 저 수족 새끼들에게 찢어 죽진 않았을 거라고!
원망이 귓가로 쏟아졌다.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손길에 분노가, 절망이, 원망이 흘러나왔다.
저건 실패의 대가였다.
"다… 죽어. 다, 죽었어."
생기를 잃은 하벨의 눈동자에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지금 자신의 눈에 보이는 저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걸 알지만, 이번에는 막지 못할 것 같았다.
마음이 너무도 크게 흔들렸다.
또 절망에 사로잡힐 것만 같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무얼 하기에는 손이 피 웅덩이 사이에서 나오는 저 손들이 너무도 많았다.
원망이 가득한 손들이 자신을 잡고 피 웅덩이 속으로 끌어당겼다.
같이 가자는 소리마저 들려와 거부할 수 없었다.
풍덩.
웅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글보글.
입에서 피거품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천천히 몸에 힘이 빠졌다.
'벗어나야 하는데…….'
반짝.
그때, 잔잔한 빛이 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