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저는 참는 거 모르는데요?(2)
* * *
"…열 받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여하는 하벨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귀족 놈들을 일단 싫어해. 그런데 여기 오면서 자꾸 설쳐대는 모양새가 영 거슬려서."
하벨은 아라의 꼬리를 만지작거렸다.
분명 평온해 보이는 모습임에도 여하 자신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마치 칼을 갈고 있는 살벌함이 연출됐다.
"이걸 왜 가만히 둬야 해? 나를 건드렸는데?"
"그건 어느 정도 동감하오. 여기는 악의가 가득해 무척 피곤하니 말이오."
"어쨌든, 간단하지?"
"괜한 시비는 무시하겠소.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으니."
여하가 고개를 살짝 숙이자 파란색이 가득 담긴 머리카락이 어깨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 고마워."
하벨은 싱긋 웃었다.
* * *
"…다행이에요."
헤레스가 안도하며 말하자 하벨은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던 차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행… 이라고?"
"저는 진짜 엄청난 일이 벌어졌을 거라 생각했어요. 뭘 준비해야 하지, 피는 또 얼마나 필요할까 싶은 생각부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죠. 이어서 도련님께서는 또 얼마나 다치셨는지, 불순물과 푸른돌이 또 얼마나 올라왔는지. 기절하셨는지. 혹은……."
"오늘은 얌전했어! 정말로! 그러니까 진정해, 헤레스."
하벨은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도와줘, 용용아.
간절함이 가득했다.
"응! 오늘 도련님은 피도 안 토했다? 아라가 도련님의 저주를 막았어."
칼리우스는 아직 곤히 자는 아라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카샬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리고 나도 아라 덕에 저주와 관련해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어."
칼리우스는 수줍게 자랑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저주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중첩되어서 도련님을 괴롭히고 있었어."
"저주가 하나도 아니고 무려 두 개나 있었다고요?"
헤레스가 경악하며 물었다.
"응. 두 개였어."
다시 이어진 칼리우스의 대답에 헤레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애초에 저주는 지금 마법사들조차 쓰지 않을 정도로 터무니없을 만큼 비효율적인 마법이었다.
'…그게 도련님한테 무려 두 개나 있다니.'
저주를 사용하려면 마나 이외에 대가라고 불리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 대가를 모으는 동안 마법을 시전한 시전자에게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혔다.
타격이란, 병일 수도 있고, 신체 일부 기능을 잃을 수도 있고, 죽을 수 있기까지 했다.
실패 확률도 80%나 될 만큼 도박적이기도 해 보통은 죽기 전에 사용하곤 하는데.
"나는 마법이 겹쳐진 줄도 모르고 방법을 찾으려 해서 찾지 못한 거였어. 하지만 이제는 마법의 출발점이 어딘지도 알았어."
칼리우스가 목소리에 힘을 주자 헤레스 역시 덩달아 긴장하며 물었다.
"그럼 이제 저주는 해제할 수 있는 건가요?"
"응! 무조건이야. 카르밀이랑 이 저주를 어떻게 풀 수 있는지 나랑 계속 대화하고 있어."
"도움이 된다면야 상관없지만, 아주 고약한 늙은 용이 또 네 몸을 뺏을 수 있으니 경계해."
카샬은 코웃음을 쳤다.
"이제 괜찮아. 카르밀은 그런 행동 안 한다고 나하고 약속했어."
칼리우스가 배시시 웃었다.
"칼리우스 님. 제가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미안해요. 저도 도와드릴 수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헤레스가 미안해하자 칼리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헤레스. 그렇게 말하면 나도 도련님이 아플 때 아무것도 못 했는데? 헤레스는 더 대단해."
"칼리우스 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제가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헤레스와 칼리우스 사이에 하벨만 모르는 세계가 펼쳐지자 목소리를 냈다.
슬슬 흐려지는 자신의 행동을 헤레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들었지? 나는 오늘 얌전했어."
헤레스의 눈동자 슬쩍 옆으로 움직였다.
"헤레스……?"
하벨이 재촉해서 불렀지만, 헤레스는 무언가 머쓱한 듯이 안경을 올렸다.
"헤레스 너 설마 내 말을……."
"도련님. 어서 주무셔야죠. 부상에는 잠이 약입니다."
"이거 실망인데?"
"실망은 애초에 기대가 있어야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러기엔 도련님께서 좀 뻔뻔하지 않나 싶습니다."
슬쩍 말을 꺼낸 카샬은 하벨의 시선이 이어지자 모르는 척 입을 다물었다.
"헤레스. 용용이가 거짓말을 했을 것 같아?"
"아뇨."
헤레스는 조금 전과 달리 단칼에 대답했다.
"그럼 나는?"
하벨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가리켰다.
"그저."
안경테를 잡은 헤레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저?"
"그저, 그간 해온 도련님의 행동을 본다면 제가 믿어도 될지 모를 정도라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어려워요. 물론, 도련님을 믿지 못한다는 건 아닌데, 그것과 별개이지 않을까요? 어쨌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오미너스와 관련된 말이었습니다."
횡설수설하던 헤레스가 갑자기 오미너스를 언급했다.
푸흡.
이야기를 듣던 카샬의 웃음이 터졌다. 참 거짓말을 못 한다 싶었다.
하벨은 헤레스가 일부러 말을 돌리려고 무던히도 노력한다는 걸 알아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오미너스가 왜? 마법사들 쪽에서 무슨 연락이라도 왔어? 헤일리스가 뭐라고 그래?"
"아뇨. 연락은 아직 오지 않았어요. 다만……."
"편안하게 말해봐. 오미너스를 없애는 건 나한테 있어서 몹시 중요하니까."
"제게 오미너스가 더 필요해졌어요. 제가 여러 가지를 보려고 해도 지금 있는 오미너스의 표본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았어요."
"알았어. 그건 곧 해결될 것 같은데, 나도 하나 부탁해도 돼?"
이미 드란트한테 수도에 있는 거대 정화 장치 문제를 해결해주기로 하지 않았던가.
"네. 얼마든지 부탁하셔도 됩니다."
"오미너스의 구조를 알게 된 후에 오염된 물과 비교해줄 수 있어?"
"오염된 물을요?"
"일반적인 물이 아니라 바닷물을 말하는 거야. 혹시 비교해줄 수 있어?"
"비교야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죠. 그런데 바닷물을 언급하시는 데 이유가 있는 거예요?"
"여하가 하던 말에 따르면 바닷속 깊은 물에 닿았더니 살이 썩어갔대."
"아니야. 오염된 물은 살을 썩게 할 수 없어."
칼리우스가 하벨의 말을 부정했고, 이어 헤레스가 설명을 꺼냈다.
"맞습니다. 오염된 물에 닿으면 1차로 내성이 막아주지만, 타고난 내성을 넘어버리면 물의 저주에 걸려요. 그리고 도련님께서도 이미 엄청 가지고 계신 푸른 돌이 내부에 생깁니다. 여기서 오염된 물에 추가로 계속 노출된다면 결국, 석상처럼 굳어져 죽어버리죠."
"알아. 그런데 이안도 바닷물 때문에 여하랑 같은 증상을 보였다고 했어. 이안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기도 하고."
"정령왕께서도요……?"
헤레스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하벨이 정령왕을 만났다는 건 알고 있지만, 다른 존재도 아니고 정령왕이 바닷물 때문에 나오지 못하다니.
"그래. 그래서 네가 도와줬으면 해, 헤레스. 대체 무슨 차이인지 알고 싶으니까."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애초에 이 오염을 퍼트린 게 에른스트라면서요."
"맞아. 만약에 오미너스가 바닷물과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바닷물이 오미너스처럼 움직이는, 혹여 자신의 상상을 넘어선 그 자체가 하벨에게 너무도 끔찍하게 다가왔다.
헤레스는 주먹을 쥐었다.
"그런 거라면 무조건 해야죠. 제가 방으로 돌아가서 일단 마법사들과 연락해볼게요."
"편안하게 해. 우리한테는 든든한 아군이 있으니까."
하벨의 시선이 칼리우스를 향했다.
용인 칼리우스가 있는데 마법사들이 왜 두려울까.
"물론이죠. 마법사 협회는 에르티안 왕국이 제일 강하지만, 방심은 할 수 없죠. 아마도 시렌의 의지를 이었을 거라 생각해요."
헤레스 역시 칼리우스를 보며 대답하자 그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물었다.
"나를 왜 봐?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
"얼굴에 묻진 않았는데, 이제 용용이 네가 나설 차례가 다가온다는 건 알아둬."
"그러엄! 나는 이제 뭐든 할 수 있어."
칼리우스는 '정령왕'이라며 으쓱거리던 아라를 떠올릴 만큼 씩씩하게 대답했다.
헤레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나중에 다시 올게요. 도련님, 그때까지 얌전히 푹 주무셔야 해요."
오늘 비 때문에 행사가 취소되었으니 하벨이 쉬어도 될 명분이 있었다.
"제가 잘 보고 있겠습니다. 들어가시죠."
카샬이 당당히 말하며 헤레스를 배웅했다.
똑똑!
이렇게 투박한 소리는 몇 번 들었기에 거친 문소리가 나자 헤레스는 여하라는 걸 알아차렸다.
안으로 들어오던 여하가 헤레스를 보더니 흠칫 놀랐다.
"피가 또 필요하시오?"
"아뇨. 지금은 충분해요. 여하 씨 덕에 매일 푹 자고 있어요."
"피가 그렇게 좋소?"
여하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예. 저는 무척 좋은데요?"
헤레스는 피가 가득 쌓여 있다는 그 자체로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 취향은 존중하겠소."
여하의 말에 헤레스는 웃음이 터졌다. 여기서 뭘 더 설명한다면 이미 안절부절못한 하벨의 표정이 굳어질 게 뻔했다.
뭘 잘못했는지는 알지만, 그걸 포기할 수 없는데 또 미안해하는 눈빛이라 헤레스는 빨리 자리를 비켜주었다.
"도련님을 더 찔러도 되지 않겠습니까?"
카샬이 슬쩍 말을 걸자 헤레스는 그저 웃었다.
'오늘은 얌전히 계시겠지.'
굳게 믿으며 방을 나서자 하벨은 헤레스의 뒷모습을 힐끔 보더니 눈동자를 돌려 여하를 보았다.
"돌고 왔소."
"생각보다 빨리 왔네?"
"길을 몰라 헤매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 당황했소."
"그래서?"
"물이 갑자기 알려주었소."
―쟤는 용왕님을 '능력도 없는 주제에 물에게 선택받는 게 뭐가 대수라고'라면서 욕했어! 너, 반드시 기억해야 해! 다 기억해야 한다고!
"엄청 화가나 보였기에… 당황했소."
여하는 인어족이기에 물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이거지. 내가 바라는 게 이거였는데.'
하벨은 왕실 내에 자신의 육체 때문에 아라가 부르지 않는 이상, 정령들이 근처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 마법사라고 보여야 하는 지금 아라를 데리고 활보하기도 어려웠다.
그렇다면 물의 목소리가 들리는 여하가 필요한 순간이 아니겠는가.
"혹시 물이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고 있어?"
"나는 인어족 중에서도 기억력이 무척 좋소."
"카샬, 받아 적어줘."
하벨의 말에 카샬은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마법 타자기를 꺼냈다.
타다다닥.
여하의 말을 따라 타자기가 움직였고, 하나씩 글자가 채워 나갔다.
카샬의 손가락이 멈췄을 때쯤에 하벨은 여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고생 많았어. 시비 거는 자들도 있었고, 널 회유하려던 자들도 있었지?"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잘했어. 혹시 불만은 있어?"
"무슨 불만을 말하는 것이오?"
"그래도 왕자잖아. 이런 일이 싫을 수가 있지."
"바닷속에 들어가지 못한 지가 벌써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소. 옛날 일은 기억이 나나, 왕자 때 누려왔던 모든 게 변했다는 건 아오. 궂은일은 당연히 해보았으니 그런 생각이라면 접어두는 게 좋을 것이오."
여하의 대답에 카샬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도 억울하지 않아?"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거라면 억울할 수 있으나, 나에게 희망이 생겼소."
여하는 하벨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걸로 만족하오."
"너는 정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
"집이잖소. 인어족인 나는 물론 사람 역시 본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고 들었소. 그대는 아니오?"
그 대답에 짧게 생각하던 카샬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뭐, 그럴 수 있지."
마치 뒷말을 삼키는 모양새에 하벨은 카샬을 힐끔 바라보았다.
다는 몰라도 카샬은 집과 좋지 않은 기억이 있었고, 그걸 떠올렸는지도 몰랐다.
"아, 누가 이쪽으로 온다고 물이 속삭이는 걸 들었소."
"오, 그래?"
하벨은 곧 여하가 꺼낸 말에 반응했다.
"용용아."
"응?"
"그거 숨기고, 일단 카샬 옆에 서 있어. 여하 너도."
칼리우스는 저주 해제 방법을 찾으러 벌써 수십 장이나 쓴 종이를 다급히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옷매무새를 바로잡은 뒤에 카샬 옆에 섰다.
"그냥 서 있으면 되는 것이오?"
여하의 물음에 하벨은 손가락을 올렸다.
"너는 되도록 아무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마. 예법이 안 되어 있으니 괜히 책잡힐 수 있어."
"…알겠소."
여하는 칼리우스 옆에 섰다.
그렇게 몇 분간 있었을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카샬이 미간을 찌푸렸다.
"갔다 오겠습니다."
카샬이 문을 열자 그 앞에 왕실 기사를 대동한 누군가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레바놈 코스모피안 저하."
미리 얼굴을 익혔기에 카샬은 레바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제 저하께서 오셨으니 길을 비키게."
시종의 말에 카샬은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
"하오나, 도련님께서 아직 몸이 좋지 않아 허락을 구하고 오겠습니다."
"허락?"
레바놈이 피식 웃었다.
"티에라 가문의 위세가 높다 한들, 이리 오만해서야."
"이는 오만이 아니라 도련님께서……."
짜악!
레바놈이 카샬의 뺨을 때리자 선명한 소리와 퍼져나갔다.
"감히 시종 주제에 건방지게 나한테 언질을 주는 것인가."
애초에 때릴지 말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카샬 자신을 하찮게 바라보는 레바놈의 시선에 기가 찼다.
오랜만에 맞은 뺨이라고 이렇게나 기분이 더러우니 참 우스웠다.
꽤 많이 맞지 않았던가.
'…아니지. 벌레한테 맞았으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탁!
지팡이를 짚는 소리가 깊게 들려오자 카샬은 놀라 고개를 돌렸고, 레바놈은 재차 들었던 손을 내렸다.
레바놈이 시선을 옮기자 그곳에 하벨 티에라가 서 있었다.
웃음기가 싹 사라진 상태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 처음 뵙겠네, 하벨 티에라."
"조금 전에 보셨잖습니까. 레바놈 코스모피안 저하? 기억력이 감퇴하셨습니까?"
하벨은 삐딱하게 대답했다.
카샬을 건든 놈이 뭐가 예뻐서 말이 곱게 나가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