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영혼 하나, 확인 한 번(3)
* * *
하벨이 힘을 쓰자마자 내부에 돌던 물의 흐름이 저기 말뚝이나 못처럼 생긴 저주로 우르르 움직였다.
[대장이 힘을 쓰니까, 물이 움직이고 있어. 말뚝? 못? 으음,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저 아래로 물이 스며들고 있어. 이 몸은 왜 이렇게 두 개로 나누어졌는지 모르겠어.]
"그건 나도 모르겠어. 사실 하나라고 생각했던 저주가 두 개라는 것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
하벨의 말에 칼리우스가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도 그래. 좀 특이해."
"어쨌든, 아라야. 물의 흐름을 따라 내려갈 수 있겠어?"
하벨이 지시를 내리자 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용용이의 마법이 있어서 이 몸은 괜찮아.]
아라는 아주 작은 뗏목을 만들었고, 물살을 따라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1층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느낌이 들자마자 아라의 몸이 움찔거렸다.
[여, 여기 너무 무서워!]
아라가 갑자기 소리쳤다.
말뚝이라고 생각했던 겉모습과 달리 아래에는 뿌리처럼 이곳저곳 뻗어 하벨의 물을 잡아먹고 있었다.
콰직.
저주가 하벨의 물을 먹자 몸집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뚝뚝.
뿌리처럼 보이는 저주에서 검고 진득한 액체가 흘러내리자마자 역으로 위로 올라갔다.
그때, 하벨의 몸이 살짝 움직였다.
[저주가… 대장의 힘을 먹고 대장을 공격하고 있어. 이렇게 대장을 공격하고 있었어!]
아라가 주변을 돌아보자 진득한 액체가 수백, 아니 수천 개나 보였다.
이렇게나 많으니 그간 하벨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어!]
그 저주가 한 번에 위로 올라가자 아라는 깜짝 놀랐다. 뗏목을 만든 힘을 떼어 위로 올라가려는 액체를 붙잡으려다가 잠깐 멈췄다.
진득한 액체가 자신이 만든 물을 피하고 있었다.
"아라야. 무서우면 그만둬둬 돼."
하벨의 목소리가 들리자 아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섭지만, 이 몸이 지금은 그만두면 안 돼. 이 몸이 만든 물을 저주가 피하고 있어.]
아라는 다시 물을 살짝 올려 수건을 흔들 듯 흔들어보자 하벨의 물을 먹던, 뿌리처럼 된 저주마저 그대로 물을 놓고는 뒤로 물러섰다.
[오오. 진짜야! 진짜 이 몸 물을 피하고 있어!]
아라는 기뻐하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위를 쳐다보았다.
[어어…….]
칼리우스의 마법이 반 정도밖에 내려오질 않았다.
[용용이가 만든 마법이 중간에 끊어져 있어. 이래서 대장이 계속 아팠던 거야.]
"…뭐어? 중간에 끊어져 있다고?"
칼리우스가 깜짝 놀랐다.
분명 침식을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설프게 막았을 줄이야.
"내가 똑바로 하지 못해서! 으으."
자신한테 화가 났다.
"아라야. 미안한데 혹시 방금처럼 저주를 건드려줄 수 있어?"
칼리우스는 그새 코피를 흘리는 하벨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물었다.
이전에는 몰랐지만, 성장했고, 카르밀에게 받은 마나 덕에 하벨이 힘을 사용하자 그의 주변에 무언가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아주아주 얇은 실이었는데 어딘가로 이어져 있었다.
싹둑.
칼리우스는 마나를 이용해 잘라버렸다.
하지만 계속해서 자라는 게 아주 불쾌했다.
'이게… 이 실 끝에 에른트스가 있는 거야. 그래서 이걸로 도련님의 힘이 발동됐는지 아닌지 알아버린 거지.'
[응! 지금 건든다? 지금 한다?]
아라가 묻자 칼리우스가 대답했다.
"응응. 지금이야."
방금 아라가 본인이 만든 물을 저주가 피한다고 말하던 순간, 저 실이 움직임을 멈추고, 겹쳐 있던 저주가 두 개로 분리가 되어 보이지 않았던가.
[됐다!]
아라의 말과 함께 저주를 이루는 마법 속 단어와 문양이 반짝였다.
마법은 단어와 문양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나를 유지할 수단으로 가장 좋은 게 바로 단어와 문양이기 때문이었다.
간단하면서도 형태를 잡기가 좋고, 오래 축적된 기억으로 마나 역시 쉽게 반응했다.
하여 마법을 없애려면 일부러 흩트려 놓은 단어와 문양을 순서대로 배치하고 역순으로 없애야만 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본 그 반짝이는 부분이 바로 마법의 시작 부분이라 생각했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봐, 아라야."
[응! 빨리 봐야 해.]
아라는 '끄응'하며 다시 물을 움직여 앞발을 파닥거리듯 움직였다.
저주가 뒤로 움직이고, 움직이다 뿌리처럼 뻗어가던 힘이 자신이 못이든 말뚝이든 본 아주 긴 봉처럼 된 기둥 속으로 들어갔다.
"됐어!"
칼리우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아라도 하벨에게 말했다.
[대장, 대장. 이제 멈춰줘. 이제 됐어!]
하벨이 숨을 몰아쉬며 힘을 거뒀지만, 아라는 멈추질 않았다.
하벨이 힘을 멈추자 나머지 저주 역시 기둥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했다.
아라는 여전히 앞발을 떼지 않고 하벨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 몸은 있지, 대장을 괴롭히는 못된 저주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봤어! 기다려봐.]
아라는 혀를 날름거렸다.
[대장, 대장. 이 몸의 생각을 들어줘.]
"언제든 듣고 있으니까, 천천히 말해도 돼."
하벨은 아라를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어쩌면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벌써 아라의 눈동자는 별을 박은 듯 반짝거렸다.
[있지, 대장은 물이야. 물은 무엇이든 키울 수 있어!]
"그래."
[게다가 이 몸이 가진 물은 대장하고 달라.]
"맞아. 아라 네가 가진 힘은 나한테서 변형된 힘이지."
[그럼 이 몸도 용용이처럼 저주를 막을 수 있어!]
아라가 활짝 웃었다.
[용용이의 마법이 닿지 못하는 곳은 이 몸이 하면 되는 거야! 이 몸도 할 수 있어!]
아라는 기쁨이 밀려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힘이 있다는 건 뭔가 무서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하벨에게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어 너무 기뻤다.
아라는 하벨의 힘을 잡아먹고, 하벨을 아프게 하는 저 저주가 너무너무 싫었다.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이렇게나 아름다운 곳인데.
아라는 자신이 뽑아 온 물을 씨앗처럼 만들어 하벨의 물 위에 천천히 두었다.
[쑥쑥 자라야 해. 대장이 아프지 않게.]
하벨의 눈이 커졌다.
정령수가 들어온 것과 다른 느낌이었다.
'와. 이거 너무 기분이 좋은데?'
정령들과의 교감에 가까우면서도 그들이 자신을 쓰다듬을 때 느꼈던 감각이 몰려왔다.
아라가 자신에게 남긴 저 힘은 바로 성장할 수 없는 힘이기에 하벨은 억지로 자신의 힘을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는 자신의 힘이 흐르는 공간이었고, 아라가 가진 힘의 근원이 자신이니 이를 뚫고 자란다는 게 쉽지 않은 건 분명했으니.
[…하.]
아라는 숨을 골랐다.
아라가 이렇게 지쳤던 적이 있던가. 하벨은 걱정이 되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아라야. 이제 가만히 두어도 될 것 같아. 내가 보기에 한 번에 자라지 않을 것 같……."
쑤우욱.
하지만 아라가 심은 물로 된 씨앗이 자신의 내부에 도는 물을 먹고는 바로 싹을 틔웠다.
[우와아아! 싹이 자라났어!]
'벌써 자랐다고? 적응이… 너무 빠른 거 아닌가?'
하벨은 앞발을 떼고 방방 뛰는 아라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아라한테 내 힘으로 만든 물을 줬기 때문인가. 그 친숙함 때문에 이렇게 성장할 수 있는 건가.'
하벨은 놀람을 삼키고는 다시 앞발을 올리려는 아라를 말렸다.
"이제 힘을 그만 써도 되겠는데, 아라야?"
정령은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자연과 가까워졌다.
하여 교감이 필요했기에 하벨은 아라를 평소보다 더 만져주었다.
'혹시 이걸 에른스트가 생각했을까. 정령왕이 가진 힘이 내 저주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잠깐만 기다려봐, 대장.]
아라는 배시시 웃으면서 혀를 또 날름거렸다.
하벨은 고개를 돌려 무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에른스트가 건 이 저주를 풀어보겠다고 이렇게 애를 쓰는 모습을 보니 고마웠다.
조금 전, 떨어지는 비를 보며 자신은 잘린 육체와 류아의 상처를 생각했다.
비참함이 들끓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지만, 지금은 언제 날뛰었냐는 듯 잠잠해졌기에 참 신기하다 싶었다.
'좋네. 이 순간이 너무도 좋아.'
하벨은 실실 웃었다.
[이 몸이 아까 1층에서, 앗, 여긴 1층이고 이 몸이 부우웅 떨어진 곳이 지하야.]
"알아들었어."
하벨은 계속 아라를 만지작거렸다.
[있지, 1층에서 지하로 내려오면서 이 몸이 구멍 같은 걸 봤다?]
"구멍?"
[응응.]
아라가 고개를 끄덕이고, 또 끄덕였다.
[거기에서 정령수 냄새가 가득 났어.]
"정령수라니? 아라 네가 나한테 정령수를 준 적……."
하벨은 말을 잠깐 멈췄다.
"그러니까, 네가 본 그 구멍이 순환의 길과 이어져 있다는 거야?"
[어음, 이게 확실하다고 이 몸은 말을 못 하겠어. 진짜, 진짜 엄청 잠깐 느껴졌거든.]
아라가 입술을 바짝 올리며 하벨 내부에 있는 물로 이리저리 움직여보지만, 다시 지하로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자 앞발을 떼고 뒤로 발라당 누웠다.
[…하. 이 몸은 더는 못하겠어, 미안해 대장.]
"아니야.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하벨은 시선을 돌려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너도 그런 말 할 필요가 없어."
"하지만 나는 도련님한테 사과해야 해. 미안해, 도련님. 이전에도, 지금도 내 마법이 도련님의 저주를 완전히 억누르지 못했어."
"아니. 저주를 억눌러준 사실만으로 고마워. 사실 최근에는 정신이 없었을 때이기도 하잖아? 그런 걸 생각하면 대단한데, 용용아?"
자신의 배가 뚫려 생사가 오락가락할 때인데 칼리우스가 마법을 사용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발전이 아닌가.
"그리고 이번에 더 확실하게 방법을 찾았잖아?"
하벨은 싱긋 웃었다.
칼리우스와 아라의 조합으로 벌어진 이번 일은 자신에게 있어 엄청난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너도 방법을 찾았고, 아라의 힘으로 내 저주를 멈춰줄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으니까 이제 내 영혼을 계속해서 찾아가도 괜찮겠어."
솔직히 불안했다.
영혼이 모인다는 건 곧 자신의 힘이 강해진다는 의미였고, 힘이 강해진다는 건 다르게 말하자면 저주 역시 강대해진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었다.
자신의 힘과 저주가 계속 충돌하면 이 몸이 버틸 수 있을지 왜 걱정하지 않았겠는가.
"둘 다 고마워."
하벨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이제 누님이나 카샬이 와서 어떻게 됐는지 보고해 주기 전까지……."
딱딱.
무언가 창문을 두드리자 칼리우스가 번뜩 일어났다.
"내가 가."
창문을 열자 칼리우스는 새를 손에 쥐고 왔다.
"크라마가 보냈나 봐."
발에 묶인 쪽지를 풀고 하벨에게 주었다.
'뭐가 급하다고…….'
―습격.
쪽지에 적힌 두 글자를 이어 물이 술렁거렸다.
소곤소곤.
하벨은 아라를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으로 칼리우스의 옷자락을 쥐고 침대 아래로 내려와 엎드리게 했다.
쨍그랑!
창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하벨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 쪽지… 실시간이었어?'
아라가 놀라며 물을 쓰려다가 하벨이 용왕의 힘을 쓰는 걸 알아챘다.
당장 하벨에게 붙어 자신의 물을 넣어주었다.
깨진 창문 너머로 날아왔던 화살이 하벨이 넓게 펼친 물속에서 멈췄다.
개수만 수십 개였다.
하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아라가 부른 물을 넣어줬을 뿐인데, 침식이 평소와 달리 아주 더뎠다.
왜 이렇게 상쾌한지.
"이건 내가 하면 되는데."
칼리우스가 상체를 일으키자 하벨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오늘은 마나를 아껴.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으아앗……. 으앗! 이, 이 몸은 너무 놀랐어!]
아라가 뒤늦게 놀라며 부들부들 떨었다.
"고마워, 아라야."
하벨은 싱긋 웃었다.
"그럼 도련님. 내가 있으니까 에른스트는 신경 쓰지 마."
칼리우스는 또 하벨의 몸에서 뻗어 나오는 아주 얇은 실을 잘라버렸다.
"좋은데?"
하벨은 가슴에 충만함으로 가득 차는 기분을 느꼈다.
힘을 편안하게 쓸 수 있었던 시기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콰앙!
밖에 서 있던 카샬과 여하가 들어왔다.
"도련님!"
하벨이 카샬을 보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문 닫고. 조용히 움직여."
하필 오늘, 자신이 머무는 방에 습격이 벌어졌다.
누군지 몰라도 아주 열심히 일하는 중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네놈들은……."
하벨이 손을 까닥하자 화살 수십 개가 단번에 방향을 틀었다.
하벨의 눈동자가 파랗게 빛이 났다.
―저쪽이에요, 용왕님!
―느껴지시죠? 여기에 놈들이 있어요!
표적이 어디 있는지 물이 알려주었다.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과거의 느낌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시기를 잘못 잡았네."
하벨은 화살을 가득 쥐어 날아왔던 방향으로 쏘았다.
탁!
갑자기 화살 끝에 힘을 한 번 더 붙는 게 보였다.
뒤쪽에서 마나가 넘실거리는 게 느껴지자 하벨이 말을 꺼냈다.
"용용아."
"응."
"피는 천천히 묻히는 게 좋은데."
"이걸로는 피 안 묻어."
"하긴 그렇지. 하지만 기억해, 용용아."
푸욱!
하벨의 귀에 적들의 몸에 화살이 꽂히는 소리와 비명, 그리고 죽음이 넘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아니라 내가 죽인 거야."
시야가 멀리 보였다.
창문을 넘어.
왕실에서 자신의 방으로 화살을 날릴 수 있을 만한 건물까지.
허공에 있는 물과 물이 자신의 시선을 이어주자 놈들이 보였다.
딱 두 놈을 남기고 죽었다.
하벨은 허공에서 물을 길게 만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물의 힘에 이 모습을 보고 무어라 말하겠는가.
"…괴물."
겁에 질린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하벨은 무덤덤하게 장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두 놈의 목이 베어졌고, 피가 튀고, 머리가 저 멀리 날아갔지만, 하벨은 아무 일도 없었노라 자신이 움직였던 물의 흔적을 모두 없앴다.
'…하. 진짜 오랜만에 개운하네.'
하벨은 권능을 풀었고, 칼리우스를 쥐었던 손을 그제야 놓았다.
"도련님. 또 와!"
칼리우스가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 무언가가 일렁거리는 게 보였다.
쿵.
누군가 내디딘 묵직한 발소리가 들리자 하벨은 칼리우스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무거운 발소리는 처음이었다.
'여하겠지.'
하벨이 고개를 돌리기 전에 여하는 이미 암살자 앞에 도착해 있었다.
육체적인 능력이 절정에 달했다고 보는 것 이외에는 무어라 설명할 텐가.
여하는 주먹을 내지르고 암살자의 머리를 으깨버렸다.
빡!
가장 단순한 공격, 하지만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하나.
빠악!
둘.
뻐억!
찬찬히 깨지는 암살자의 머리통이 마치 바람 빠진 고무공 같았다.
여하는 암살자 셋을 차곡차곡 쌓은 뒤에 하벨을 바라보았다.
"되었소?"
"물론, 충분하네."
검증은 그걸로 됐다.
하벨은 씩 웃으며 손을 내렸다.
카샬이 마지막 남은 암살자를 제압하고는 다리에 검을 박아넣었다.
푸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