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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79화 (279/415)

279화. 휴식 그 끝에(2)

* * *

[그러면 충분하잖아?]

루룸은 콧바람을 내쉬었다.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냈다.

[나는 솔직히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건 싫어해. 그래서 지켜보는 게 좋고.]

[이 몸은 알아. 루룸은 지켜보는 걸 엄청 좋아해. 그래서 이 몸이랑 함께 가준다는 말에 되게 기뻤어.]

아라가 따뜻하게 웃자 루룸은 시선을 흘렸다.

[뭐,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야.]

[뭔데?]

[내가 봤을 때, 하벨은 지금 상태가 안 좋아.]

[맞아. 대장은 맨날맨날 다치고 와. 피도 엄청 토하구. 이 몸은 대장이 정말로 죽…….]

―나는 죽었어, 아라야.

괜히 담담하게 말하던 하벨의 말이 떠올라 아라의 눈망울이 일렁거렸다.

아직도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몰랐다.

[다시 또 대장이 그렇게 될까… 봐 이 몸은 무서워. 엄청 무서워.]

[그러니까 네가 하벨을 지켜.]

[이 몸이?]

[그리고 나는 하벨 몸 상태를 말한 게 아니야.]

루룸은 앞발을 올려 이마를 가리켰다.

[머리?]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대장은 두통도 있어. 어지러움도 있구, 머리도 가끔 아파해.]

[그거 아니야. 정신 말이야. 마음이라고 하기도 하지.]

[으응?]

[슬픈 일에 괜찮다고 말해도 속지 마. 인간은 우리랑 달리 거짓말을 할 수 있으니까. 여기가 곪아버릴 거야.]

루룸은 손을 내려 가슴을 두드렸다.

[곪아서 텅 비어버릴 수도 있어.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그러면 인간은 못 움직여. 말도 못 하고, 계속 인형처럼 지내다가… 그렇게 죽을 테니까.]

루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여기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라도 알 건 알아야 했다.

아무리 하벨이 특별하다고 하나, 마음이 있는 존재라면 누구든 나약해지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었다.

어쩌면 이미 하벨은 끝자락까지 왔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라르웬이 저렇게 계속 하벨 근처를 맴돌고, 상태를 확인하며 매달리는 거겠지. 하벨에게 덮친 일이 생각보다 크니까.'

[혹시 이 몸이… 루룸을 아프게 했어?]

[아니야. 그냥 생각이 나서 그렇지.]

루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주 예전에, 자신이 왜 클로저가 됐냐는 물음에 라르웬은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밖을 쳐다보며 찬찬히 말을 해주었다.

―틈의 세계에 가까이 가야지만, 클로저가 되어야지만, 그날 봤던 그 이상한 틈의 세계를 쫓을 수 있으니까. 쫓아서 죽이고 복수하려고. 물론, 그게 불가능한 건 알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낫잖아.

'그 이유의 일부를 하벨 덕에 알게 됐고.'

루룸은 최근 의자에 기대 하염없이 천장을 바라보며 손에 쥔 술병을 계속 만지작거리던 라르웬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시간을 바쳐서 알아내려던 일을 막내가 알고 있었어. 기쁜데, 엄청 기쁜데 되게 슬프네. 막내가 그런 일을 당했을 줄은 몰랐어. 확 마시고 잠깐 잊어버리고 싶은데 지금 마시면 막내한테 온갖 말들을 쏟아낼 것 같아. 그러니까 내가 혹시나 하벨한테 가려고 한다면 말려줘, 루룸.

라르웬이든 누구든 그렇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무서웠다.

[아라 넌 그런 일 겪지 말라고.]

루룸은 상념을 떨치며 아라의 볼을 꾹 눌렸다.

라르웬 이전에 그렇게 허망하게 잃어버린 아이가 있었다.

라르웬만큼 잃어버리지 않으려 정말 소중히 하고 있는데 라르웬은 알까 몰랐다.

아라가 루룸을 왈칵 안았다.

[루룸은 역시 착해! 이 몸은 지금 감동했어!]

[당장 떨어져.]

루룸은 아라를 살짝 밀치며 뒤로 물러났다.

헤헤헤.

아라가 눈을 살포시 감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세렌도 부끄러움쟁이지만, 루룸은 더 그랬다.

[뭐해, 어서 가야지?]

[아아앗! 맞아! 이 몸은 어서 가야 해!]

아라는 그제야 서둘렀다.

* * *

[…우와아.]

아라의 눈동자가 햇살에 반짝거렸다.

숲으로 들어갈수록 꽃이 다양한 색으로 아라 자신을 환영해주었다.

이제는 꽃잎이 반짝이기까지 하자 아라의 입을 떡하니 벌어졌다.

[꽃잎이 어떻게 빛나는 거야, 루룸?]

아라가 물었음에도 루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라의 시선이 움직였고, 루룸 역시 별처럼 반짝거리는 꽃잎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너무 예쁘지, 루룸?]

[…그러네.]

루룸은 그제야 대답하면서 믿을 수 없는 감각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이렇게 편안한 느낌은 생에 딱 한 번 느껴보았다.

'…왕이시여.'

루룸은 저절로 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아주 커다랗지만, 자신을 쓰다듬던 따스한 그 손길을 잊기 어려웠다.

[루룸?]

아라가 루룸을 콕콕 찌르자 그제야 루룸은 아라를 바라보았다.

[좀 더 가봐, 아라야. 그러면 꽃잎이 왜 반짝이는지 알게 될지도 모르잖아?]

[앞으로 가면 뭔가 있다는 걸 알지만, 이 몸은 뭔가, 기분이 이상해.]

아라는 눈동자를 빙그르르 돌렸다.

이상했다.

너무도 이상했다.

이불 위를 둥둥 떠도는 기분에 휩싸였지만, 이상하게 가고 싶지 않았다.

무섭다는 것과 달랐다. 뭔가 거대한 게 있어 그냥 물러나고 싶었다.

아라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어?]

아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렇게 많던 정령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루룸. 뭔가 이상해. 정령들이 다 사라졌어.]

[나도 여기까지야, 아라야.]

루룸은 그대로 멈췄다.

[여기까지라니?]

아라는 눈을 깜박거렸다. 루룸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더는 못 가.]

[왜에? 여기 원래 다들 안까지 갔어.]

[그런데 지금은 안 돼. 내가 버틸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루룸은 직접 느꼈다.

더는 갈 수 없어. 그렇게 주변에 있는 자연이 자신에게 속삭이며 자신을 붙잡았다.

[이 몸은 혼자는 싫어.]

아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혼자가 아니야, 아라야. 주변에 너를 보고, 나보고 뭐라고 속삭이는지 알잖아.]

[…알아.]

힘없는 목소리가 아라한테 나왔다.

그 커다란 나무로 가까이 갈수록 나무가 반가움에 몸을 흔들고, 바람이 '환영해요'라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하지만 루룸은 아니었다.

루룸한테만 매섭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이런 관심은 아라 자신한테 있어 낯설었고, 이상하게 몸이 무거워져 신경을 쓰지 않으면 땅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이 몸은 지금 너무 이상해. 다들 이 몸을 반기는데, 그게 막 좋지 않아. 뭔가 거대한 게 이 몸을 덮칠 것만 같아.]

아라는 답답했다.

[이 몸은… 이 몸은 대장이 보고 싶어. 대장한테 가고 싶어.]

하벨이 있다면 괜찮다고 자신을 쓰다듬어줬을 텐데.

아라는 저 나무로 가야 할지, 다시 돌아갈지 망설였다.

아라는 돌아가는 길을 선택해 나아가려다 그대로 멈췄다.

'다시 돌아가면 대장은 분명… 분명, 이 몸을 따라올 거야.'

자신의 마음은 편해지겠지만, 하벨의 몸은 아니었다.

이미 많은 일이 하벨을 덮쳤다. 지금 얼마나 힘들까.

[아라야.]

루룸이 힘든 기세를 드러내며 말했다.

[으으응.]

[나는 여기 있을 거야. 다시 돌아와도 돼.]

[정말로?]

[그래. 나는 빈말은 안 해. 하벨도…….]

[대장은 아파! 안 돼! 대장이 오면 안 돼.]

[하벨은 네가 힘들었다는 사실을 알면 더 슬퍼할 텐데?]

[그럼… 이 몸은.]

아라는 망설이다 몸을 돌렸다.

하벨이 슬퍼하는 건 더 싫었다. 아라는 등을 보인 채로 손을 흔들었다.

[이 몸은 대장이 걱정하지 않게 용감하게 갈 거야.]

아라는 앞발을 꼭 쥐고 앞으로 달렸다.

조용했다.

꼭 바안의 즉위식이 열렸던 그 날, 바안이 등장할 때처럼 조용했다.

아라는 이 적막함에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고요함이 이렇게나 싫었던가.

* * *

하벨은 쿠키를 먹다 말고 손을 멈췄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하벨의 머리카락으로 장난을 치던 레디나가 물었다.

마침 예쁘게 머리가 완성됐는데.

"왜? 도련님이 왜?"

마무리로 어떤 리본이 좋을지 살피던 헤레스마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반응에 하벨 방에서 보고서를 작성하던 라르웬까지 잠깐 손을 멈췄다.

하벨을 바라보다 라르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막내야?"

카샬이 침착하게 온도계를 꺼낼 때, 하벨이 침대 밑으로 다리를 뻗었다.

"나오시면 안 됩니다, 도련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라가……."

하벨은 입을 열었다.

방금 잔잔하게 퍼지는 물소리를 들었다.

그 속에서 아라의 목소리가 들려와 가슴이 일렁거렸다.

"루룸이랑 같이 갔는데 그렇게 걱정돼? 루룸이 얼마나 아라를 챙기는지 너도 알잖아."

라르웬이 실실 웃었지만, 하벨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아라가… 우는 것같이 들렸습니다."

"아라가 운다고? 나는 그런 목소리 못 들었는데?"

라르웬은 웃음기를 지웠다. 하벨은 아라를 두고 이런 장난을 하지 않았으니까.

"뭔가가 주변에 흐름도 이상합니다."

하벨은 이어 자신 느끼는 상황을 알려줬다.

아라가 나간 뒤, 물의 흐름이 이상해졌다.

속닥거리는 소리가 늘어나고 주변에서 일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어떤 설렘 같이 들려와 하벨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잠깐만."

하벨은 바로 창문으로 향했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기 보세요, 형님."

무언가 일어나고 있었다.

바로 아라가 향한 저 숲에서.

그게 아니라면 정령들이 숲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몰려 있지 않았겠지.

"가봐야겠습니다."

하벨은 등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 일렁거림이 단순한 일렁거림이었으면 좋겠는데.

"간다고?"

라르웬의 물음에 하벨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라가 걱정됩니다."

자신이 움직일 이유로 충분했다.

* * *

아라는 달려갔다.

고요함에 하벨이 더욱 생각이 났다.

대장하고 같이 왔으면. 대장에게 매달렸으면. 대장의 목소리를 들었으면.

'…그랬으면 엄청 좋았겠는데.'

하벨은 자신처럼 예쁜 꽃을 좋아했다. 신기한 것도 좋아하고, 가만히 하늘을 보는 것도 좋아했다.

하벨이 이곳에 왔으면 아마도 가만히 앉아 꽃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겠지.

'대장이랑 용용이랑 여기에 와서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

아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숲을 해치고 커다란 나무에 도착했다.

'어……?'

아라의 눈이 커졌다.

나뭇잎이 천천히 흔들렸다. 물방울이 나뭇잎마다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이전에는 이런 건 없었는데?'

찰랑.

바람을 따라 나뭇잎이 흔들리자 물소리가 들려왔다.

토옹.

통.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처럼 들리면서도 아라는 마치 물의 길을 사용했을 때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소리가 번져가자 주변에 있는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어……!]

갑자기 격한 바람이 불어와 아라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쏴아아.

[어?]

낯선 소리가 들리자 아라는 눈을 떠 고개를 돌렸다.

검게 물든 물이 넘실거렸다.

'바다다.'

이미 한 번 바다를 봤기에 아라는 모든 게 죽어버린 그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때 느꼈던 무시무시한 불길한 감각이 없자 아라는 자신의 코를 간질이는 향기로운 냄새에 이끌렸다.

빨간색, 노란색, 분홍색 등 세상에 온갖 예쁜 꽃들이 모여 있는 모습에 아라는 금세 눈을 반짝거렸다.

[…예쁘다.]

여기는 섬이었고, 아라는 이상하게 이 모습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서 봤을까.

천천히 아라의 눈이 커졌다.

[이, 이 몸은 봤어! 여기 본 적이 있어!]

아라는 놀라 소리치다 입을 막았다.

저번에 엘라힘이 꺼내는 신성한 힘의 여파로 자신은 바다에 떠 있는 섬에 핀 아름다운 꽃을 떠올렸다.

여기가 바로 그곳이었다.

자신이 왜, 어떻게 이곳에 와버린 건지 몰랐기에 아라는 당황스러워 뒤늦게 눈물이 핑 돌았다.

하벨이 보고 싶었다.

[어여쁜 이여.]

꽃들 사이에 굵으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아라는 꼬리를 잡고는 그대로 멈췄다.

[괜찮습니다, 어여쁜 이여.]

다시 들으니 다정한 목소리에 아라는 꼬리 너머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귀가 팔랑팔랑 움직였다.

[이 몸은 '어여쁜 이여'가 아니라 아라야.]

[실례했습니다, 아라여.]

누군가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을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었기에 아라는 조심스레 물었다.

[너는 누구야?]

[이름은 없습니다. 다만, 정령들에게 왕이라 불리는 자입니다.]

아라는 꼬리를 내렸다.

정령들의 왕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정령… 왕?]

아라의 물음에 꽃이 움직였다.

커다란 발이 튀어나왔다.

단 한 걸음으로 싹이 자라났다.

굵고 강인한 갈기가 꽃 너머로 드러나며 날카롭지만, 인자한 모습을 한 왕이 아라를 바라보았다.

다른 정령들이 꺼낸 말처럼 아주 커다랬다.

아라 자신이 저 존재의 앞발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았으니.

꼭 사자 같았고, 저 존재의 뒤에 밝은 빛이 반짝반짝했다.

황금빛이 감도는 눈동자를 보자 아라는 왜인지 저 존재를 향해 손을 뻗고 싶었다.

[예. 내가 정령왕입니다, 아라여. 드디어 당신을 만나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를 겁니다.]

왕은 포근한 웃음으로 아라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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