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다독이자(3)
* * *
* * *
하벨은 아라의 눈앞에서 손을 휙휙 저었다.
귀도 꿈틀거리지 않고 푹 퍼진 찹쌀떡 엎드려 자고 있자 활짝 웃으며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소곤소곤.
물이 무어라 말하지만, 아라처럼 자신을 걱정하는 뉘앙스로 들려왔다.
"쉬잇."
하벨은 물에게 말했다.
―대장 지금 움직이면, 이 몸은 울 거야. 엉엉 울어버릴 거라구. 이 몸은 대장이랑 말도, 말은 할 건데, 안 쳐다, 아니, 쳐다볼 건데, 에잇! 하여튼 안 돼!
아라의 필사적인 저지에 자신은 결국, 오늘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요양이라는 말은 다시금 생각해도 우스웠다.
과거에 요양이 어디 있었는가.
다쳐도 움직여야 했고, 잠깐 아플 뿐, 시간이 지나면 회복력으로 나아가는 것을.
'나도 나이를 먹었나.'
하벨은 괜히 우스웠다.
링거를 띄워두고는 발소리를 죽이며 넬시아의 방으로 향하려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정령들이 우르르 보이는 상황에 하벨은 눈을 깜박거렸다.
이곳에 자신이 온 사실은 비밀이기에 호위는 전반적으로 물린 상태였다.
하지만 더 큰 호위가 있을 줄이야. 그것도 아주 귀엽고 듬직한 호위가.
[…뭐야, 하벨? 너 움직이면 안 된다며.]
[맞아. 아라가 너를 얼마나 걱정했는데. 이러면 안 돼.]
[혹시나 네가 나간다면 아라가 널 말려달라고 그랬어. 어서 들어가, 하벨.]
"쉬잇. 아라가 자고 있는데 계속 떠들 거야?"
정령들은 그 말에 입을 가렸다. 목소리가 컸다.
하벨은 정령들이 놀라며 허둥지둥거리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이러면 곤란한데? 아라를 깨워야…….]
"너희도 아라가 누구인지 눈치챘지?"
정령들이 눈치가 없는 자들이 아니기에 그들이 유난히 놀란 걸 보면 이미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너도 눈치챘어?]
"그럼. 이전부터 그렇게 생각했지."
[왕이… 두 분이 되셨어. 혼란스러워.]
"그러니까 지금 잠들고 있는 아라는 내버려 둬야지. 정말 나 때문에 깨울 거야?"
하벨이 정령들의 약점을 파고들자 그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다.'
하벨은 그제야 즐겁게 웃으며 그들을 어루만졌다.
복도는 한적했기에 하벨은 혹시 몰라 슬쩍 물었다.
"레디나하고 카샬은 없었지?"
[레디나가 방금 네 방에 들렀다 갔어. 카샬은 그 전에 들렸고. 교대로 바꾸나 봐.]
[그런데 하벨.]
"왜?"
[넌 뭐야? 왜 너만 보면 이렇게 애틋해지는 건데?]
"알고 싶어?"
[응. 알고 싶어.]
"그럼 오늘 일은 비밀로 해줘. 어때?"
하벨의 제안에 정령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잖아? 그냥 나는 누님 얼굴 한 번 보러 갔다 오고 싶은 건데. 이게 그렇게 어려워?"
[…아니. 그건 어렵지 않지.]
[맞아. 어렵진 않아. 오히려 음, 당연한 거고.]
[사실 아라나 다른 인간들이나 너를 왜 말리는지 모르겠어.]
어두운 복도에 걸맞지 않게 하벨의 눈이 반짝거렸다.
"내 말이 바로 그거야. 너희는 진짜 사랑스럽네."
갑작스러운 칭찬에 정령들은 몸을 배배 꼬았다.
왜 이렇게 기쁜지 몰랐다.
[난 비밀로 할래. 하벨이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게 아니잖아.]
[나도 그럴래. 가족인데 얼굴 보러 가는 게 뭐가 나빠? 만약에 하벨이 쓰러지면 내가 업고 갈게.]
하벨은 정령들의 의견이 통일되자 신이 난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역시 자신의 작은 친구들이었다.
* * *
넬시아의 방으로 가는 건 가뿐했다.
신이 난 정령들이 알아서 길을 알려주었으니.
[…어?]
[쉬잇!]
넬시아 방 앞에 모여 있던 정령들이 하벨을 알아보자 그와 함께했던 정령들이 입술에 손을 올렸다.
[하벨은 넬시아를 보러 온 거야. 금방 간대.]
[하지만 아라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잠깐인데 그것도 안 되는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암암. 잠깐인데.'
하벨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아까 아라가…….]
[하벨의 누나가 넬시아잖아. 동생이 누나가 걱정돼서 올 수도 있지.]
'그럼, 그럼.'
하벨은 자신을 대변해서 말해주는 정령들의 속삭임에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왜 이렇게 든든한지 몰랐다.
'이게 요양이라는 건가.'
하벨은 배실배실 웃으며 그들의 결론을 기다렸다.
[이, 이번만이야. 나는 아라가 꺼낸 말을 지키고 싶단 말이야.]
"고마워. 날 배려해줘서."
하벨이 웃자 넬시아의 방을 지키고 있던 정령들이 걱정을 잊고는 덩달아 배시시 웃었다.
[그런데 하벨.]
문손잡이를 잡은 하벨은 쭈뼛쭈뼛하는 정령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응?"
[넬시아 상태가 음, 그렇게 좋지 않은 것 같아. 나는 안을 엿보진 않았는데 사람들이 막 왔다 갔다 그러고 비명도 들렸어. 그리고 톰톰이라는 정령이 우리한테 들어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고.]
"알려줘 고마워."
하벨은 정령을 쓰다듬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가 살피러 온 톰톰과 눈을 마주쳤다.
그간 톰톰이 매번 자신을 피했기에 그 이후로 제대로 눈을 마주한 건 처음인 것 같았다.
[너……!]
톰톰이 깜짝 놀라다 곧 자신의 입을 가렸다.
[가. 어서 가라고.]
"누님을 보러왔어."
[지금 넬시아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톰톰은 울적함을 드러내다 슬쩍 하벨을 살폈다.
[네 탓이라고 말하지 않았어. 물론, 네 탓도 아니고. 그래도 네가… 넬시아를 다독여줘서 훨씬 나아. 그건 고마워. 엄청 고맙지만, 넬시아가 깨어나기 전에…….]
하벨은 톰톰의 고개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저벅저벅, 넬시아가 걸어왔다.
톰톰이 하벨의 어깨를 밀쳤다.
[어서 가! 널 위해서야, 하벨. 지금 넬시아는… 환상과 마주하고 있다고.]
톰톰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두툼한 꼬리가 바짝 섰다.
"…하벨."
넬시아가 흐릿한 시선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네, 넬시아.]
톰톰은 힘없이 몸을 늘어트렸다.
그녀의 시선이 이상했다.
약에 가득 취한 것처럼 흐릿하며 텅 비어 있었다.
이럴 걸 예상했기에 하벨은 넬시아를 찾아왔다.
설령 넬시아에게 무슨 소리를 듣든지 간에 자신은 찾아와야 하는 게 맞았다.
원하지 않아도 자신은 넬시아의 트라우마가 되었기에 계속 이 상태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벨은 자신을 걱정하며 계속 밀치는 톰톰을 쓰다듬어주고는 입을 열었다.
"예, 누님."
넬시아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그녀의 눈빛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환상 속 막내를 보는 거겠지.
자신 역시 환상에 시달려봤기에 저 마음을 왜 모를까.
"누님. 밖이 춥더라고요. 불을 때고 있어도 아직 쌀쌀합니다. 어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세요."
하벨은 넬시아에게 다가갔다.
"…네가 죽였지?"
넬시아는 여전히 눈동자가 풀린 상태로 입을 열었다.
"누님, 그날 막내를 죽인 건 하벨 티에라가 아니에요."
"아니야. 내가 봤어. 그날, 너 때문에 우리 막내의 목이 비틀어졌다고."
넬시아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누님.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마세요."
"나는 현실에서 눈을 돌린 적 없어! 나는! 나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고……!"
넬시아의 목소리가 단번에 높아졌다.
[야, 약을 먹어서 그래. 넬시아는 원래 이런 아이가 아니야. 너한테 이럴 생각은 없어! 저, 정말이야!]
"알아. 누님은 다정하니까. 나도 알고 있어. 걱정하지 마."
하벨은 자신을 걱정하며 쩔쩔매는 톰톰의 모습이 신기했다.
사실 자신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은 게 아닐까.
"누님."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며 하벨은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천천히 하벨의 눈꼬리가 내려갔다.
"그간 이렇게 아프셨습니까? 환상에 시달릴 정도로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던 겁니까."
"지금… 장난해? 네가 그랬잖아. 네가 모든 걸 망쳤어. 내가, …내가 무너지고 있다고."
"순간, 하벨 티에라에게 저지른 일이 누님에게도 얼마나 상처로 남았는지 압니다. 하지만 누님. 이렇게 도망치면 죽을 때까지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하벨은 넬시아의 손을 잡았다.
짜악!
하지만 넬시아가 하벨의 손을 쳤다.
"이거 놔!"
[그만해, 둘 다. 이건 좋지 않아. 좋지 않다고.]
톰톰이 겁에 질린 채로 말했다.
"그 더러운 손으로 나를 만지지 마!"
하벨이 다시 손을 뻗자 넬시아는 당장 하벨을 할퀴듯 쳐다보았다.
"네가 나오지만 않았어도. 네가… 그 틈의 세계에서 나오지만 않았어도!"
"오해로 벌어진 실수였습니다. 아버지도, 하벨 티에라도. 누구의 잘못이 아니에요."
세계가 그들을 슬프게 만들었을 뿐,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하벨 티에라는 누님을 용서했어요. 아시잖습니까. 제 몸을 바쳐서 나를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용서하지 않았다면 하벨 티에라가 가족을 위해 몸을 바쳤을 리가 없었다.
하벨은 뺨을 맞을 각오를 하며 넬시아의 손을 조심히 잡았다.
"이거 놓으라고!"
넬시아의 격렬한 저항에 하벨의 팔과 연결한 링거가 빠졌다.
뚝뚝.
피를 보자 넬시아가 덜덜 떨었다.
"네가."
두려움이 극에 달하자 넬시아가 하벨에게 손을 뻗었다.
"네가 잘못한 거야!"
하벨은 고스란히 그 손을 받아들였다.
넬시아가 하벨의 목을 쥐고 그를 바닥에 쓰러트렸다.
[네, 넬시아! 그만해! 이러면 안 돼!]
하벨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자 톰톰이 넬시아의 옷자락을 잡으며 소리쳤다.
"누님은… 잘못하지 않았어요. 괜… 찮아요."
다독이는 하벨의 손길에 천천히 넬시아의 눈동자를 가렸던 탁한 게 사라졌다.
넬시아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링거가 바닥에 나뒹굴고.
팔에 피를 흘리며 그곳에, 하벨이 누워 있었다.
넬시아는 다급히 손을 뗐다.
대체 무슨 짓을 해버린 건가.
"미, 미안해 내가……."
하벨은 넬시아의 두 손을 천천히 당기며 자신의 목에 가져댔다.
넬시아의 눈이 커졌고, 하벨은 눈을 감았다.
넬시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끔찍한 기억에 묶여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봐요, 이 몸은 이제 누님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그렇죠?"
하벨이 눈을 떴다. 두려움이 가득한 넬시아와 눈을 마주했다.
"…나는 괜찮아요. 그걸 말해주려고 왔어요."
하벨은 찬찬히 넬시아의 손을 내려주었다.
"누님."
하지만 넬시아는 자신의 손을 너무도 끔찍하게 바라았다.
"내가… 네 목을……."
머리가 뿌옇게 변한 뒤로 아무 기억도 없었는데.
"아뇨.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내가 누님을 찾아왔죠."
아무렇지도 않게 하벨의 꺼낸 말에 넬시아는 찬찬히 기억을 되짚어가며 톰톰을 보았다.
시선을 흘리는 그 모습에 자신이 또 예전처럼 미쳐 날뛰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넬시아는 손이 부들부들 떨었다. 또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다 과거에 흘려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뒤로 물러나다 넬시아는 그만 손아귀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했든, 전부다. 전부 가짜야!"
넬시아는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돌아올 말이 무엇이든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린 건 사실이었다.
무서웠다.
하벨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무서웠다.
'…그래서 피해 다녔는데.'
가끔 덮치는 이 발작이 그 아이를 어떻게 긁을지 무서워 피할 수밖에 없었다. 먼 헤스트리아 왕국을 자발적 간 이유도 이 일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닌데.
"알아요, 누님. 누님은 다정하시죠."
흠칫.
넬시아는 예상과 다른 말에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니까 이제 자신을 용서해주세요. 왜 그렇게 자꾸 자신을 헐뜯는 거예요. 아프게."
이어진 하벨의 말에 넬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하벨은 평소처럼 자신을, 아니, 더 따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넬시아의 어깨가 찬찬히 내려갔다.
"누님."
잘못을 손에 놓는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하벨은 부탁했다.
"찬찬히 그 일을 놓아주면 안 될까요?"
넬시아는 하벨의 목으로 시선을 줬다.
목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때도 이렇게 목을 졸랐다.
죽이려고. 셋째가 너무 미워서 죽이려고 했다.
감정이 복받쳤다.
"하지만 내가 이 손으로… 셋째의 목을 조른 그 일은 사라지지 않아! 내가 죽이려고 했다고! 내가……!"
"사라지지 않겠죠. 하지만 기억해보세요."
하벨은 계속 자신에게 무어라 말하는 랜턴을 느끼며 하벨 티에라를 위해 입을 열었다.
"내가 이 몸에 깃들기 전에 분명 하벨 티에라는 누님을 용서했습니다. 나는 몰라도 분명 누님은 기억할 겁니다."
'…셋째가.'
넬시아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제가 용기가 없어서 누님께 다가가지 못했지만, 저는 누님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두 달 전, 헤스트리아 왕국으로 떠나기 전 셋째가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셋째에게 다가가야겠다고 마음먹게 했던 말이 아닌가.
―괜찮아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까, 누님. 이제 그만 용서해줘요.
환한 웃음 뒤에 마지막으로 꺼냈던 그 말.
'용서해달라는 게 아니라, 나를 용서하라는 말이… 었어.'
넬시아는 비로소 그 의미를 알아버렸다.
그 착한 아이가 자신에게 모든 걸 말하고 갔다니.
목구멍까지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내가… 용서할 수가 없어. 셋째의 목을 쥐었던 이 손이 더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누님, 나는요."
하벨은 자신의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비록 적이었지만, 정말 많은 이들을 죽였어요. 아마 합치면… 나라 하나 정도는 나올걸요? 누가 봐도 내 손이 더 더럽잖아요."
"그렇지 않아!"
"그럼, 누님은 더더욱 아니잖아요?"
하벨은 자신을 바라보는 넬시아를 향해 눈웃음 지었다.
"그 행동이 잘못됐지만, 누님은 하벨 티에라를 죽일 수 없었을 거예요."
하벨은 넬시아의 손을 잡았다.
"분명, 점점 사랑하고 말았을 겁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했던 간절한 부탁이나, 때때로 바라보는 눈빛을 본다면 하벨 티에라를 아주 많이 아낀 게 틀림없었다.
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했… 어. 아주 많이."
잠깐 눈을 감은 넬시아의 눈꼬리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누님."
"…응."
"나는 누님하고 같은 적을 뒀어요."
"같은… 적이라고?"
"내가 말했잖아요. 배신당해서 죽었다고요. 막내를 죽인 그놈이 날 죽인 놈들 중 하나에요."
"…널 죽였다고?"
넬시아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너한테까지. 너한테까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벨은 왕이었고, 그들은 신하였다고 했다.
넬시아는 모든 걸 통째로 빼앗겨버린 하벨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져 하벨에게 손을 뻗어 뺨을 만졌다.
사실 검은 달의 간부가 나타나기 전에 자신이 하벨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너는… 괜찮은 거야? 정말로 괜찮아?"
그렇게 큰일 겪고도 어떻게 앞을 바라볼 수 있는지.
자신은 십여 년이 지난 일임에도 아직도 발목이 묶여 나아가질 못했는데.
"아뇨."
하벨은 괜찮다고 말하려다 그만뒀다.
그 사실이 어떻게 괜찮을까.
"전혀요. 아직 눈을 감으면 죽었을 때가 떠올라요. 내가 죽어서 이렇게 세상이 변했을까, 내가 잘했다면 어땠을까. 후회가 맴돌아요."
괜찮지 않았다.
자신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가슴이 매 순간 따끔따끔했지만, 이젠 욱신욱신 아팠다.
"하지만 누님."
하벨은 조금 강하게 넬시아를 불렀다.
피가 이어졌든, 아니든 같은 일을 겪었다. 그렇기에 하벨은 넬시아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후회는 한 번이면 충분하잖아요. 그러니 지금은 지키고 싶은 모든 것에 시선을 떼지 마십시오."
강해져라.
넬시아는 하벨이 자신에게 그렇게 말한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그녀의 눈동자에 깃든 반짝임이 점점 가득해지자 하벨은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나는요, 다 지킬 겁니다. 다시는 안 뺏겨요. 그러기로 했어요. 이 아픔도, 슬픔도 그 후에 생각하려고요. 누님도 같이하실래요?"
장난기가 가득한, 그러나 다정한 제안에 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눈물을 꾹 감으며 넬시아는 입을 열었다.
"그래… 나도 같이하자. 지지 않을게."
"그러니까 오늘 일은 우리 셋만의 비밀이에요."
쉿.
하벨은 손가락을 입술 위에 올렸다.
키득키득.
넬시아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지만, 그녀는 웃었다.
왠지 어릴 때로 돌아간 느낌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얼굴을 돌렸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하벨이 바짝 굳었다.
"어, 어디로 숨어야 하죠?"
"이, 이불 속?"
넬시아 역시 덩달아 당황했다.
넬시아가 다급히 이불을 들치고 하벨이 그 속에 뛰어들려던 차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와르르.
[…미안. 끼어들 때가 아니라서.]
톰톰의 사과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 도련님."
하벨은 삐꺽거리며 고개를 돌려 헤레스를 보았다.
"그리고 아가씨."
헤레스의 눈꼬리가 매섭게 올라갔다.
'이건 혼날 각이야, 무조건.'
하벨은 끝을 직감하며 헤레스에게 웃었다.
아주 방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