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35화 (235/415)

235화. 귀 파고 잘 들어(4)

* * *

명백한 경고.

노골적인 살의.

헤레스의 낯선 모습에 아라가 다급히 그녀를 꽉 안아주었다.

[화내지 마, 헤레스.]

헤레스는 갑작스러운 폭신한 감각에 깜짝 놀란 건 물론 살짝 표정이 풀릴 뻔했지만, 눈에 힘을 주었다.

'미안해요, 아라 님.'

하벨의 목숨이 달린 일인 만큼 중요했다.

"예. 걱정하지 마세요."

엘라힘은 헤레스의 걱정을 한 번에 무너트릴 만큼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좋은 분들을 두셔서 다행입니다, 하벨 공."

이어 엘라힘은 하벨을 보며 따스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하벨은 그 눈빛이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헤레스 님. 제가 신의 종인 이상, 절대로, 헤레스 님께서 생각하는 최악의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제게 하벨 공을 치료할 귀중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엘라힘은 헤레스에게 고개를 숙인 뒤에 하벨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하벨의 미간이 가득 찌푸려졌다.

'신이시여.'

신을 부른 엘라힘은 붙잡은 하벨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찌릿.

아직 신의 은총을 내지 않았음에도 손끝이 벌써 저렸다.

'왜 당신의 어린 아들을 구해주지 않았습니까?'

엘라힘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왕실에서 하벨에게 느꼈던 그 감각.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그 자애로운 손길은 신께서 뻗은 힘임이 틀림없었다.

분명 신의 아들임에도 이렇게까지 될 정도로 왜 가만히 보고만 있는 건지.

'이걸 시험이라 하신다면 저는… 이번만큼은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엘라힘은 힘을 내뿜었고, 하벨은 빛을 껄끄럽게 바라보았다.

신이랍시고 엘라힘이 말해준 말이 다시금 머릿속에 맴돌았다.

―미안하고.

역겹고.

―미안하다.

역겨운.

―…아들아.

그 말이.

―신은 널 버렸다.

덤으로 검정 놈이 지껄이던 말까지 덩달아 떠오르지 않는가.

'짜증 난다. 불쾌해.'

하벨은 자신의 몸에 퍼지는 순하면서도 따뜻한 감각이 너무도 짜증 날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엘라힘을 통해 무언가를 언급하면 어쩌나 싶은 불안함도 들었다.

'아무 말도 지껄이지 마라. 이번에는 내게 아무 말도 꺼내지 말라고.'

찌이이잉.

하지만 하벨의 바람과 달리 온몸으로 퍼져나가던 그 힘이 갑자기 멈췄다.

하벨의 몸 밖으로 하나씩 새어 나와 둥근 원을 이루는가 싶더니 어떤 문양으로 모습을 바꿔나갔다.

'또 왜?'

하벨은 까드득 이를 깨물었고, 엘라힘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눈시울을 붉혔다.

[우오옵.]

아라가 신성하다는 기분이 절로 들 정도로 반짝거리는 문양에 배시시 웃으며 손을 뻗었다.

[기분 좋아. 엄청 따뜻해.]

하지만 아라는 순간 털을 바짝 세웠다.

[어……? 이, 이 몸이 방금 뭘 봤어!]

아라가 당장 꼬리를 쥐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하벨의 시선이 닿자 그제야 아라는 삼켰던 말을 내뱉었다.

[바다가 보였어. 바다 한가운데 섬이 있는데 너무 예쁜 꽃이 피어 있었어!]

아라가 그 기억을 떠올리며 황홀함에 광대를 높이 올렸다.

하벨은 행복함으로 물들어간 아라의 표정에 무어라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고 자신의 앞에 둥둥 뜬 문양을 바라보았다.

'또 내게 뭘 말하려고 하는 거야?'

마치 자신보고 만지라는 듯 가만히 떠 있었다.

"제가 보기에 신께서 저 문양을……."

"압니다."

하벨은 엘라힘의 말을 가로챘다.

누가 봐도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 강요하고 있었으니.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습니까?"

하벨이 묻자 엘라힘은 살짝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습니다. 제가 신관이 된 후로 난생처음 보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신께서 의지를 드러낸 적도 처음 봅니다."

그 말에 당장 하벨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업. 대장도 화내지 마.]

헤레스를 꽉 안아주던 아라는 다시 하벨에게 다가가 그를 안아주었다.

'화를 내는 게 아니야, 아라야.'

하벨은 간지러운 입을 참았다.

이건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이제 와서 자신을 도우려는 저 이중적인 태도에 분노할 뿐이었다.

랜턴이 흔들렸다.

'조용히 하거라, 이 눈치 없는 하벨 티에라야.'

하벨은 자신을 간절하게 바라보는 헤레스의 시선에 마지못해 손을 뻗으려던 찰나, 칼리우스가 목소리를 냈다.

"나쁜 거 아니야, 도련님.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어. 저건 착해. 도련님을 도우려고 하고 있어."

'진짜… 진짜 너는 치사하네.'

하벨은 칼리우스까지 동원하며 자신에게 강요하는 상황에 마지 못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문양에 닿자마자 빛이 퍼져서는 글자를 이뤄갔다.

하벨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가 넋을 살짝 놓을 때, 글자를 이뤘던 빛이 다시 하벨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칼리우스가 순간 움찔거렸다.

'내… 마법이 강해졌어?'

사르르륵.

깜짝 놀란 것도 잠시 칼리우스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어떤 손길에 고개를 올렸다.

빛이 살랑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화,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도련님?"

헤레스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방금 그 빛이 하벨에게 스며들지 않았던가.

하벨은 여전히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못 본 건가?'

하벨의 시선이 엘라힘에게 향했다.

그는 차차 빛이 사그라지는 모습을 보며 방긋 웃었다.

어떤 웃음인지 모르겠지만, 하벨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 보셨습니까?"

"예. 제 두 눈으로 봤습니다. 신께서 하벨 공에게 내려준 그 힘은 정말이지……."

"그거 말고요."

"그거 말고라뇨? 문양을 말씀하시는 건지."

"글자가 나타났잖습니까?"

"글자요……? 죄송합니다. 화려한 문양은 봤지만, 저는 글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엘라힘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으로 하벨에게 미안해했다.

[글자라면 이 몸도 못 봤는데?]

아라가 속삭이듯 말을 꺼냈다.

"저도… 보지 못했습니다."

헤레스가.

"미안해, 도련님. 나도 글자는 못 봤어. 예쁜 문양은 봤는데."

칼리우스 역시 모른다는 말을 꺼냈다.

'진짜 나만 봤다고?'

여전히 혼란스러운 하벨의 표정에 엘라힘은 당황함에 말을 꺼냈다.

"혹시 몸이 아직도 아프십니까? 제가, 제가 다시 하겠습니다."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한 번 더 신의 은총을 사용한다면 엘라힘이 쓰러질지도 몰랐다.

'…왜 저들에게 글자가 보이지 않았는지 알겠다.'

차차 떠오르는 이유에 하벨은 손가락에 힘을 줬다.

지금 글자와 예전에 자신이 있던 시절에 쓰던 글자가 달랐다. 다르기에 그걸 글자라고 보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하벨은 자신이 본 글자에 속이 뜨거워졌다.

―잃어버린 것들을 찾거라.

이제야, 이제 와서 잃어버린 것들을 찾으라니.

그건 불가능했다.

이미 많은 것들을 바뀌어버렸다. 이미 많은 것들이 사라진 후였다.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하벨… 공?"

엘라힘이 조심스럽게 묻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덕분에 좋아졌습니다. 또 이렇게 신세를 지내요. 의심해서 미안하고, 저를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하벨은 그제야 몸이 훨씬 좋아졌다는 걸 느끼며 마차에 타기 전보다 핼쑥해 보이는 엘라힘에게 고개를 숙였다.

엘라힘은 정말 검정이 아닌 걸까.

여전히 하벨의 머릿속에 빙글빙글 맴돌아 온전히 고마워할 수가 없었다.

엘라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쫓기고 있는 절 구해주신 건 오히려 하벨 공입니다. 입은 은혜를 갚은 것뿐이니 크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는 지금 왕실로 가고 있습니다. 같이 가시죠. 그편이 훨씬 안전할 겁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죄송합니다, 하벨 공. 아직 볼일이 끝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럼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두 번은 거절하기 곤란한지, 엘라힘은 어색한 미소로 대답했다.

"근처 마을에 내려다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마을에 내려다 드리겠습니다."

하벨은 대답하며 아라를 슬쩍 봤다.

[아! 이 몸이 정령들한테 부탁하라는 거지? 엘라힘이 어디로 가는지?]

'요새 정말 아라의 눈치가 더 좋아졌다니까?'

흡족한 하벨은 눈웃음을 지었다.

엘라힘 말대로 만남이 우연일 순 있기에 그가 이곳 에르티안 왕국에 무얼 하러 왔는지 알아내는 것 역시 우연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하벨 공. 저는 당분간 에르티안에 머물 생각입니다. 만약에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찾아오셔도 됩니다.

엘라힘은 이미 왕실에서 에르티안에 머문다고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싸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기에 이참에 잘됐다 싶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는 그 기분 때문에 하벨은 뒤숭숭한 마음으로 턱을 괬다.

* * *

왕실의 뒤편에 마차 한 대가 들어섰다.

"도련님."

마차가 멈추기 전에 카샬이 입을 열었다.

"…으함."

하벨은 길게 기지개를 켜다 무릎에서 배를 내밀고 잠이 든 아라를 조심스레 안으며 카샬을 바라보았다.

"왜 엘라힘이 하필 그때 도망치듯 쫓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내내 생각해도 계속 찝찝했기에 하벨의 의견이 궁금해 잠에서 깨길 기다렸다.

"나도 엄청 궁금했어! 내가 봐도 이상해. 엘라힘은 왕실에서 머물고 있었다며? 갑자기 우리가 탄 마차로 도망쳐 왔어. 나는 엘라힘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나쁜 사람이 아닌데도 나쁜 사람인 적이 많아서 의심스러워."

칼리우스도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참았던 말을 꺼냈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저는 섣불리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쫓기고 있었다는 건 사실이었으니까요."

헤레스는 자신의 팔을 잡았다.

"팔에 긁힌 자국을 보면 도망치다가 생긴 게 맞았어요. 다리는 치료한 흔적이 보였고요. 일부러 생긴 거라기엔 거리가 좀 멀었어요."

시선들이 하나씩 하벨에게 쏠렸다.

하품 때문에 나온 눈물을 닦고 있던 하벨은 잠깐 멋쩍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가볍게 웃었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내가 엘라힘이 아닌데 어떻게 알겠어? 물론 과정은 몹시 의심스럽지만, 결과적으로 좋았잖아?"

하벨은 자신을 가리켰다.

여전히 링거를 맞고 있는 상태지만, 몸이 무척 좋아졌다는 게 느껴졌다.

폭파 사건 때 생겼던 상처도 더 아물어가고 있었고, 바다 때문에 가슴팍이 푸르게 변한 자국 역시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용용이가 나한테 새긴 마법이 한층 강화됐다.'

엘라힘을 의심한 건 사실이되 이쯤 되면 갑자기 내려온 선물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도련님이라면 어렴풋이 무언가를 예상하고 계시잖습니까?"

카샬의 이어진 물음에 하벨은 또 웃었다.

"만약에 안 맞으면 어떡해? 나중에 놀리려고? 난 그런 거 싫은데."

마차가 멈추자 하벨은 조용히 마차 문을 가리켰다.

"…혹시, 말씀해주시면 안 되나요? 개인적으로 엘라힘 신관님을 존경하고 있어 좀 괴롭네요."

조용히 하벨의 귀를 간지럽히는 헤레스의 말까지 이어지자 하벨은 팔짱을 꼈다.

'카샬과 칼리우스에 이어 헤레스까지 이럴 줄은 몰랐는데.'

왕실로 가던 차에 그저 엘라힘과 우연이 마주쳤을 뿐이었다.

그걸 보고 파악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긴 했다.

"엘라힘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고 했어. 그리고 마법사 협회에 검은 달이 잠입한 상태지."

"그 두 개가 왜?"

칼리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벨은 엘라힘과 마법사 협회 사이에 일어난 일을 왜 같이 보는 걸까.

"너희가 검은 달이라면 어떻게 할래?"

하벨이 넌지시 짓는 미소에 카샬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이용해 덮는 게 좋죠."

슬쩍 열린 마차 문 사이로 레디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게 내가 생각한 정답이야."

하벨은 이제 만족했냐는 듯이 카샬과 헤레스를 바라본 뒤에 마차에서 내렸다.

이유는 모르나, 검은 달이 마법사 협회에 잠입한 이유는 신성 국가 시엘느와 마법사 협회를 싸움 붙이기 위함이 아닐까 싶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여러 가지 누명을 쓴 마법사 협회를 이용하기 위해서겠지.'

지금 여러 가지 일로 위치가 흔들린 마법사 협회만큼 써먹기 좋은 패가 없었다.

제아무리 마법사 협회가 크다 한들 나라를 적으로 돌리는 건 휘청거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뭐, 대체 왜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도련님."

레디나가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기억하고 계시죠?"

"물론 기억하지."

이전에 레디나가 자신의 지시로 검은 달로 가 상황을 살피고 오지 않았던가.

―검은 달에서 '클로저'일 이외에 다른 큰 의뢰를 받을 모양인가 봐요. 그게 뭔지는 알려주지 않네요. 저는 가서 혼났어요. 왜 도련님을 못 죽이냐고요. 슬슬 의심을 받는 모양이에요.

그때, 그렇게 보고했고, 마법사 협회가 우선이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 큰 게 신성 국가 시엘느의 고위 신관인 엘라힘을 노리는 거라면 말이 달라지지.'

하벨은 수수께끼를 푸는 흥미로움을 느끼며 앞으로 걸어갔다.

'엘라힘한테 정령들을 잘 붙였네.'

일단 마법사 협회, 그리고 클로저와 연계해 에르티안 왕국에 있는 검은 달부터 쳐부수는 게 먼저였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검은 달이 무슨 목적인지를.'

하벨은 벌써 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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