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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31화 (231/415)

231화. 흔들린다(3)

* * *

* * *

"…읍읍!"

헤일리스가 입에 재갈을 물고 포박된 상태에서 또 바닥에 부딪히려고 하자 크라마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붙잡았다.

"어휴."

자신도 세뇌가 풀린 후에 밀려오는 거지 같은 기분을 경험해봤기에 크라마는 헤일리스가 딱했다.

헤일리스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해를 시도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무슨 기분인지 아는데 그만 좀 해."

하지만 어제까지 그 사실을 제대로 확인할 시간이 없을 만큼 바빴다.

진짜 협회장이었던 시렌은 죽었고, 아직도 세뇌가 덜 풀렸는지 몰라도 도망친 마법사들을 쫓았고, 이미 붙잡은 이들의 세뇌를 풀어주는 일까지.

'…어우, 그만두자.'

크라마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귀찮음이 밀려왔다.

손아귀에 느껴지는 묵직한 힘에 그는 헤일리스를 빤히 보았다.

솔직히 작전이 성공할 거라고 보지 않았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도 해두지 않았던가.

협회장하고 싸워서 하벨이 질 수도 있으니 그라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여차하면 비상 결계라도 작동시킬 셈이었다.

'뭐어, 그건 안 써서 다행이네.'

아마 자신하고 칼리우스 이외에 비상 결계 같은 건 모르겠지. 직접 거론한 적도 없으니.

'…도련님은 진짜 대단하네.'

크라마는 새삼 고개를 돌려 창문을 보았다. 여기가 마법사 협회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곳을 나갔을 때만 해도 언제 돌아올지 몰랐는데.

'진짜 대단해.'

용하고 가면단.

특히 자신은 가면단에 놀랐다. 자신이 잠깐 몸을 의탁한 곳이 가면단이었지만, 이토록 세력이 클지 몰랐다.

1조 뒤에 2조, 3조, 4조 점점 사람들이 늘어나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밟혔다.

새삼 페트리오가 달리 보였고, 그를 손에 꽉 쥔 하벨이 위대해 보였다.

'역시 귀찮은데 그냥 다 도련님한테 맡겨버릴까.'

하벨은 마법사 협회를 손에 쥘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가 손에 쥔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엄청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궁금했다. 미친 듯이 궁금했다.

'…아니다, 그러지 말자. 또 페트리오한테 혼날라.'

크라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크라마. 이, 이 술에 미친 새끼야! 제발 좀 술주정 좀 그만해라! 네가 그러다가 '도련님께 그냥 다 맡길래요'라고 말할까 봐 두렵다, 진짜.

언제였더라, 고작 몇 병만 마셨을 뿐인데 페트리오가 언성을 단번에 높이지 않았던가.

왠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흠칫거렸지만, 곧 억울함에 그러고 싶다고 말하자마자 페트리오는 당장 자신을 회로 떠버릴 것처럼 아주 살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지 마라. 단순한 부탁이나, 술값을 다시 청구할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이라면 몰라도 도련님께 다른 짐을 주지 마, 크라마.

'…뭐어, 이번 사건도 도련님이 없었으면 죽은 건 나겠지. 그냥 주제도 모르고 마법사 협회에 덤빈 기분이 너무 깊게 느껴져서 별로야. 그냥 우리끼리만 갔으면 죽었겠지? 응. 무조건 죽었을 거야. 그냥 죽진 않고, 손가락이 하나씩 잘려가면서 죽었으려나, 아니면 실험체로 쓰이다가 죽었으려나?'

크라마는 머리를 벅벅 긁다 다시 헤일리스를 바라보았다.

잘 해결됐음에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면 뭐하겠는가. 지금은 이 일부터.

"몇 번을 말하지만, 네 잘못이 아니라니까, 헤일리스."

"읍읍읍!"

하지만 헤일리스의 눈빛에는 자책과 감당할 수 없는 악몽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뿐이었다.

"큰일이네."

크라마는 그냥 땅바닥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표면적이라고 할지라도 마법사 협회에 협회장은 누가 뭐라고 해도 헤일리스였다.

지금은 그녀가 필요했다.

'방이 부서진 건 실험 실패의 흔적이라고 둘러대겠지만, 협회장이 바뀌는 건 둘러댈 수도 없는데.'

"…크라마."

뒤쪽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크라마는 깜짝 놀랐다.

콜록.

기침 소리에 이어 지팡이를 짊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 도련님?"

크라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가 네 침실이구나."

하벨이 땅을 짚으며 씩 웃자 크라마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도 제가 눕는 곳이 침대고 제집이란 생각은 하지만."

크라마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도련님께서는 왜 여길 오셨습니까?"

"그럴 수 있지. 나도 내 발이 닿는 곳이 내 땅이란 생각을 하거든."

"오늘은 말장난을 받아줄 때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어서 돌아가서 쉬시지요. 제가 보아도 한, 삼 일 뒤에 큰일이 날 것 같은 얼굴……."

크라마는 말을 멈췄다.

갑자기 제 목덜미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폭신함과 보드라움에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큰일이 날 것 같은 얼굴만 뺀다면 응응! 잘하고 있어. 크라마아, 제발 대장 좀 말려봐!]

아라가 크라마한테 찡얼거렸다.

"허락받았는데?"

하벨이 당당하게 말하자 아라가 입을 꽉 다물며 눈꼬리를 올렸다.

[그건 허락이 아니야. 이 몸도 그건 안다구.]

오염된 바다 때문에 기절했다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하벨이 피를 토하고, '고맙다'는 말을 마치자마자 쓰러지지 않았던가.

아라는 아찔해졌던 기억 때문에 더욱 화가 났다.

―자, 나보다 헤일리스를 더 잘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다시 깨어난 하벨이 밥도 잘 먹은 후에 갑자기 저 말을 꺼냈다.

침묵이 흘렀다.

―없지? 그럼 내가 간다?

[이 몸은 대장의 일방적인 통보라고 생각해.]

"에이, 아라야. 원래 잘하는 사람이 잘하는 걸 하는 거야. 봐봐. 나보다 용용이가 마법을 잘 다루니까 나는 하지 않잖아. 내가 마법을 다루는 거 봤어?"

하벨이 실실 웃으며 꺼낸 말에 아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몸은 못 봤어.]

"그렇다니까. 이건 내가 더 잘하니까 온 거야."

[하지만 왜 대장만 오는데?]

"하지만 왜 도련님만 오십니까?"

아라와 크라마의 말이 겹쳤다.

"다들 바쁘니까. 농담이 아니라 진짜 바쁘잖아. 다들 뒤처리하느라 바쁜데 나도 이 정도는 해야 얼굴을 들이밀 낯도 생기지."

하벨이 꺼낸 말에 크라마는 눈썹을 올렸다.

"제가 보기에 도련님보고 얌전히 있어 달라고 했을 것 같은……."

"자자, 혼은 진짜 많이 났으니까 거기까지 해. 이젠 혼날 힘도 없어. 이러다 귀에서 피가 나올 지경이야."

하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떻게 도련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으세요?

레디나가 어디에서 그 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정신을 차리니 그녀가 울먹거리며 다짜고짜 말을 꺼냈다.

―도련님은 제… 신이잖아요.

다른 이들에게도 그랬지만, 레디나한테도 정말 미안했다.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뒷말로 인해 미안한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만약 정말 그럴 생각이라면 그냥 제가 먼저 죽여드릴게요. 제 신이 남의 손에 그렇게 허망하게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아프지 않게 죽여드릴게요. 약속해요.

'…다시 떠올려도 무섭네.'

하벨은 잠깐 피식 웃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레디나다웠기에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벨은 크라마가 그랬듯 바닥에 앉았다.

"……?"

크라마가 의문을 가지며 묻자 하벨은 가볍게 바닥을 쳤다.

크라마는 더는 의문을 가지지 않고 편안하게 엉덩이 깔고 앉았다.

"헤일리스의 상태는 어때?"

하벨이 묻자마자 크라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부터 흔들었다.

"가망이 없습니다. 그냥 죽으려고만 듭니다. 혹시나 해 입마개를 풀어주면 혀를 깨물더라고요."

"으음. 그런데 마법은 왜 안 쓰는데? 아니면 못 쓰는 거야?"

하벨은 조금 전부터 들던 궁금증을 꺼냈다.

"정신이 무너졌잖습니까. 저러면 웬만한 마법사들도 마법을 못 씁니다. 괜히 정신을 단련하는 게 아니죠."

"그래?"

하벨은 자신의 허벅지에 아라를 앉혀 아직 화가 많이 난 아라를 달려주려 턱밑을 쓰다듬었다.

[…흐응! 이 몸은 좀 화났어.]

휙 돌린 고갯짓, 투덜거리는 말과 달리 아라의 꼬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역시 아라는 언제봐도 귀엽네.'

하벨은 자꾸만 입꼬리가 간지러웠다.

계속 아라의 턱밑을 긁어주며 헤일리스를 불렀다.

"이봐, 헤일리스."

"불러도 반응을 안 합니다. 그냥 저렇게 머리를 박고 있는 거죠."

하벨의 말에 크라마가 다시 한숨을 푹 내쉬며 헤일리스의 머리를 붙잡았다.

"헤일리스."

하지만 하벨은 헤일리스를 또 불렀다.

벌써 웃음기가 목소리에 섞여 있었다.

"축하해. 너는 시렌의 영원한 꼭두각시가 되겠네?"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려고 했던 헤일리스가 잠깐 멈췄다.

정신이 나갔어도 그녀가 반응할 단어는 있었다.

시렌.

모든 걸 망친 장본인이니 그 말을 어떻게 흘려듣겠는가.

"아, 지금 네가 저지른 일이 너무도 역겨워서 죽으려고? 그게 시렌이 바라던 일인데? 역시 꼭두각시다워. 이렇게 시렌이 없어도 알아서 명령을 수행하고 있다니."

"읍… 읍읍! 읍읍읍!"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까 어디 한번 해 봐."

하벨이 입마개에 손을 대자 크라마가 깜짝 놀랐다.

"뭐 하시는 겁니까, 도련님? 저러다 죽으면 큰일 난단 말입니다."

"내가 있잖아? 걱정하지 마."

"도련님이요……?"

"나, 물 마법사야."

하벨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입에 바르기에 크라마는 밀려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령사라는 건 이미 헤일리스가 다 봤을 텐데.

"뭐든 짊어지는 게 죽을 만큼 싫지만, 헤일리스가 죽어버리면 어쩌겠어. 너나 다른 사람한테 떠넘기기 전까지 손에 쥐고 있어야 하잖아."

하벨은 진심으로 새어 나오는 한숨에 내뱉으며 헤일리스의 입마개를 풀어주었다.

"어쨌든, 시렌이 널 어떻게 버렸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 나는 다 기억하고 있어."

헤일리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금세 피가 맺혔다.

"꼭두각시 중에서도 제일 뛰어났대. …오, 이건 좀 자랑스럽겠네? 네가 최고의 꼭두각시였다는 거잖아?"

하벨이 장난스레 웃었고, 헤일리스의 눈동자에 분노가 피어올랐다.

좋은 징조였다.

하벨은 그 분노를 조금 더 피워보고자 했다.

"생각해보니 시렌이 너를 그냥 버리기에는 좀 아깝다고 하더라. 아마 나중에도 요긴하게 쓰려고 한 모양이야. …아!"

도중에 무언가 떠올린 것처럼 하벨은 손가락 하나를 올렸다.

"그러고 보니 네가 처음에 얼굴을 가리는 모자를 쓰고 나왔잖아? 나는 그걸 왜 쓰고 나오나 했더니 시렌이 아마 두 번째 헤일리스를 준비한 모양이 아닐까? 그러면 안심이네. 잘 뒤져보면 있을 테니까."

사실 두 번째 헤일리스 같은 건 없었다.

후에 시렌이 두 번째 헤일리스를 준비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비슷한 체격을 가진 후보 목록만 있을 뿐이었다.

하벨은 실수한 척 말을 꺼냈다.

"아차, 나도 모르게 사설이 길어졌어. 자, 본론으로 넘어가야지. 죽는다고 했지? 그럼 어떤 걸로 준비해줄까? 검? 식칼? 아니면 독?"

곧 깊은 고민을 하는 척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으음, 내가 말이야, 위에서 떨어져 봤는데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바닷속에서 푸른 돌이 되어 마법사 협회를 쳐다보는 거지. 어때? 제법 낭만적인데?"

"아아아악!"

갑자기 헤일리스가 비명을 터트렸다.

"싫어? 싫으면 말로 해야지. 비명을 지르면 쓰나."

하벨은 아라를 여전히 쓰다듬으며 헤일리스를 내려다보았다.

"시렌… 시렌! 그 개 같은 년 어디 있어? 죽여버릴 거야!"

"죽었어."

"……?"

헤일리스의 눈이 금세 동그랗게 커졌다.

"내가 왜 네 손에 시렌을 죽이게 둘 거라 생각했어, 헤일리스?"

하벨이 씩 웃자 헤일리스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내가… 내가 죽였어야 했어!"

"그러게 먼저 말해주지. 네가 짐승 소리만 내고 죽으려고 하니까 무슨 말인지 몰랐잖아. …음, 보자."

하벨은 말꼬리를 늘어트리며 잠깐 생각하는 척했다.

"그간 잘못했습니다. 제가 정말 뼈저리게 반성하고, 제 손으로 시렌을 죽일 수 있게 해주신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뭐, 이 정도는 꺼내야지. 그렇지 않아?"

길어지는 하벨의 미소에 크라마는 누가 악당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아주 얄밉고, 얄미웠다.

하벨은 헤일리스를 위해 기꺼이 측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헤일리스야. 어떻게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시렌을 죽이려고 했어? 적어도 제정신은 차렸어야지. 자기 몫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는 말도 있잖아?"

"…진짜, 진짜로 시렌이 죽었다고?"

바닥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헤일리스가 눈동자를 움직여 하벨을 쳐다보았다.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 소년이 보였다.

"정말……?"

자신은 믿을 수가 없어 또 물어보았다.

시렌이 죽다니.

자신의 기억에도 계속 남아 있는 소년이 찬찬히 미소를 웃었다.

"그럼."

죽도록 질투하고, 시기했던 그 소년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지금 가장 무서운 말을 다시금 꺼냈다.

"시렌은 죽었어. 내 신도가 자비가 좀 없는 편이라 고통스럽게 죽지 않았을까 싶네."

하벨은 도중에 레디나가 원하는 대로 마무리를 짓지 못해 아쉬웠다는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멀쩡했으면 시렌은 아직도 고통을 울부짖으며 살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런……."

헤일리스의 눈에 조용히 눈물이 떨어졌다.

시렌이 정말 죽었다니.

자신을 그렇게 만든 시렌이 죽어버렸다.

"그런, 이게, 왜……?"

기억이 어디에서부터 끊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확실한 건 마법사 협회에 설렘으로 들어온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갑자기 자신은 늙어 있었고, 자신의 기억이지만, 전혀 모르는 기억으로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시점이.

누군가 자신의 시간만 돌려버린 것 같았다.

"괴롭지?"

하벨이 물었다.

하지만 헤일리스는 대답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다정히 들려왔다.

"괴로울 거야."

언제 장난스럽게 말했냐는 듯 하벨은 헤일리스를 위로했다.

"죽을 것 같겠지."

아라는 슬쩍 고개를 올려 하벨을 바라보았다.

진짜 괴로워 보이는 건 하벨처럼 보였다.

"그런데 너는 죽으면 안 돼."

"왜……?"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헤일리스가 눈을 번뜩 뜨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이미 시렌이 죽었다며? 죽었는데 내가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

"네가 세뇌당한 피해자라는 건 알아. 그런데 세상은 널 그렇게 보지 않아. 네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너와 얽힌 피해자들도, 피해를 받은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하벨은 진심으로 헤일리스가 딱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눈을 감았다가 뜨니 세월이 흘렀고, 모르는 기억이 머릿속에 가득하면 얼마나 끔찍할까.

자신도 전혀 모르는 자의 몸에 빙의가 되어 정말 힘들었다.

"죽고 싶으면 시렌이 했던 행적들을 네가 다 지우고 죽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헤일리스가 기가 찬 소리를 냈다.

자신이 왜?

지금 이렇게 억울한데.

"그게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니까."

"그러니까 내가……!"

"시렌의 조종을 받았어도, 네 입을 통해서 네 행동을 통해서 이뤄진 일이니까. 진짜 시렌에게 벗어나려면 네 손으로 끝내."

담담한 하벨의 말에 헤일리스는 입술을 다시 세게 깨물었다. 이빨이 붉게 물들어갔다.

"물론 혼자서 하라는 게 아니야. 내가 도와줄게. 하지만."

하벨은 품에서 검을 꺼내 헤일리스 앞에 내려놓았다.

"그래도 죽고 싶으면 죽어."

[오, 오오옵. 진짜 검을 꺼내면 위험하지 않을까?]

검을 보자마자 헤일리스의 표정이 바뀌었기에 아라는 앞발을 꼼지락거렸다.

이러다 진짜 죽어버리면 큰일이지 않은가.

"풀어줘, 크라마."

"지, 진짜 진심입니까?"

유심히 하벨이 꺼내는 말을 듣고 있던 크라마는 갑작스러운 명령에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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