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흔들린다(2)
* * *
《약 2년 전, 코스모피안 왕국과 에르티안 왕국의 싸움은 누가 보아도 코스모피안 왕국의 승리로 끝이 날 거라 예상했다.
제1 왕국인 레놀드 바로 밑에 있는 거대한 왕국이 코스모피안 왕국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전쟁에서 승리한 곳은 바로 에르티안 왕국이었다.
현 에르티안 왕국의 왕인 바안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말에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지만, 의외의 조력자가 전쟁의 판도를 바꿔버렸다.
"…저런, 차는 없는 건가요?"
바로 눈앞에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다리를 꼬고 앉아 여유로운 자태를 뽐내는, 마법사 협회의 협회장 헤일리스라는 협력자를 통해서.
바안이 온다는 말에 가문이 분주해졌지만, 그는 헤일리스를 데려왔다.
마법사가 티에라 가문에 오다니.
지금까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저택 내부가 한껏 날카로워진 게 느껴졌다.
"나하고 헤일리스가 불청객이라는 건가?"
바안이 아니꼬운 눈으로 나와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전하."
"듣고 있네."
바안의 시선은 너무도 탁해 보자마자 불길함이 일어날 정도였다.
왜 저렇게 변한 거지.
이전에 바안을 봤을 때, 미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한 광기가 어리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사람이 너무 달라졌어.
이상해.
눈동자를 움직여 헤일리스를 슬쩍 바라보자 나한테 쏟아지는 뾰족한 살기에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그만두시죠, 협회장."
아버지가 헤일리스를 보며 이리처럼 낮게 울부짖자 몸을 찌르는 느낌이 사라져 어쩐지 힘이 쭈욱 빠졌다.
아니, 나는 대체 왜 부른 거야?
옆에 바안이 없었다면 절대로 마법사 협회장을 만나러 오지 않았을 텐데.
"아. 워낙 이곳이 역겨워 실례했네요. 괜찮으신가요, 하벨 티에라?"
헤일리스의 건방진 소리에 저절로 미간이 안쪽으로 모이는 게 느껴졌다.
"전하. 대체 무얼 하시는 겁니까?"
"뭘 말인가?"
아버지가 꺼낸 말에 바안은 곧바로 공격태세 돌입한 것처럼 한없이 날카로웠다.
…입을 벙긋할 수 없어.
나만 얼어붙은 이 공간에 모든 게 불편해졌다.
"전쟁을 또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쳇.
바안은 아버지의 말에 팔짱을 낀 채로 혀를 찼다.
"지금 감시했는가? 나를?"
"그렇게 떠들썩하게 준비하시는데 왜 모르겠습니까?"
"그래도 불쾌하네. 정도껏 하게."
바안은 코웃음을 쳤다.
잘못한 건 너잖아.
진짜 짜증이 났다. 왕이면 다인지.
재수 없어.
왜 우리 아버지를 건드리는 건데?
"자네는 나한테 불만이라도 있나? 시선이 아니꼬워."
바안의 시선이 나한테로 닿자 고개가 저절로 숙어졌다.
"아닙니다, 전하."
바보 같긴.
떨리는 내 목소리에 비참함이 몰려왔다.
내가 아버지를 도와줘야 하는데. 여기서 또 아버지 등에 숨는 건 싫어.
"무슨 용건으로 협회장까지 데려왔습니까? 전하께서만 오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의 물음에 돌아온 바안의 대답은 턱없이 기가 찼다.
"그대가 협회장의 요청을 내치지 않았으면 내가 이렇게 올 이유가 애초에 없지 않은가?"
저번 전쟁 때 마법사 협회에서 내보인 어떤 무기가 상황을 뒤바꿨다고 하는데 그게 뭔지 아무도 몰랐다.
아버지 역시 모르는 눈치였고.
그저 엄청나고 이제껏 없었던 거라는 말이 오갔다고 했다.
"그러니까 전하께서는 지금 협회장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 저를 찾아왔다는 말씀입니까?"
아버지가 불쾌함을 가득 담아 물었다.
얼마 전에 마법사가 나를 습격하는 일이 있었다.
이유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사실 나를 습격한 게 아니라 아버지를 건드리기 위함이 아닐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야 나는 협박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 텐데.
정령도 보지 못하는 내가 인질 이외에 어떤 용도가 있을까.
"왜 이렇게 날을 세우나?"
바안이 묻자 아버지는 허탈한 미소를 그리며 헤일리스를 노려보았다.
"얼마 전에 마법사들이 제 아들을 습격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이렇게 제 아들을 부른 겁니까?"
"그건 몰랐네. 유감이군."
바안의 시선이 헤일리스를 향했다.
"저도 유감이네요."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뭐야.
지금 협회장인데, 마법사 협회장인데 이렇게 나오는 거야?
나는 도무지 헤일리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콰앙.
아버지는 헤일리스의 대답에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지금 유감이라 했습니까?"
"그럼요. 유감이죠. 아니면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아버지를 농락하려는 듯 헤일리스는 말을 끝낸 뒤에 조금씩 웃었다.
"협회장은 마법사들을 관리할 의무가 있습니다."
"등록되지 않은 마법사까지 제가 어떻게 알까요? 하지만 이번 일에 책임을 느껴 조사하겠습니다."
"협회장이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어떤가, 그냥 넘어가는 게."
누굴 바보로 알아?
바안이 헤일리스의 편을 들면서 아버지를 억압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럼 저 마법사부터 내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내 시선이 닿는 곳에 양갈래 머리카락을 한 소녀가 서 있었다.
헤일리스보다 더 존재감을 돋보였다.
"호위 한 명쯤은 데리고 오고 싶었어요."
헤일리스의 말에 아버지는 비웃음을 그렸다.
"전하 앞에서 내가 추태를 부릴 거라 생각했습니까?"
"추태가 아니라 제 보호였을 뿐입니다. 절 싫어하시잖아요."
"용건이 대체 뭡니까."
"헤레스를 데리러 왔어요."
헤일리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래서 공의 아들을 부른 겁니다."
헤일리스가 짓는 미소가 왜 이렇게 끔찍하게 보일까.
"허락을 구하러요."
마치 나라는 먹이를 노리러 오는 뱀처럼 보였다.
"…왜 헤레스를 데려가려는 겁니까?"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기세가 한 꺼풀 꺾인 것처럼 들려왔다.
"전하. 제가 그 사실을 알릴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헤일리스는 갑자기 바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허락하네. 나 역시 이를 위해 왔으니."
탐욕으로 물든 바안의 표정에는 오늘 뭔가를 끝장내기 위한 의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표정에 나는 한 가지를 예감했다.
…그렇구나.
나는 또 인질이구나.
얼마 전에 벌어진 마법사들의 습격 역시 오늘을 위해서일지도 몰랐다.
아버지를 흔들고, 제 욕심을 이루기 위한 계략을.
벌써 바닥이 꺼져 깊고 깊은 지하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룬델 공께서 예상하셨던 것처럼 전쟁이 또 벌어질 겁니다."
"대체 또 무슨 전쟁입니까, 전하? 이미 코스모피안 왕국과의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에르티안 왕국 주변에 우리를 업신여기는 이들이 있네. 그걸 놔둬서야 되겠는가?"
"아직 이전 전쟁의 아픔이 씻겨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저항하는 코스모피안 왕국의 백성들을 죽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그대가 복구하는 데 도우면 되지 않겠는가? 그대의 가문에 쌓여 있는 그 재화들은 대체 어디에 쓸 건가?"
"전하."
"농담이네. 농담. 거, 왜 이렇게 예민한지 모르겠어."
바안은 말과 달리 아쉬움을 가득 담았다.
그렇게도 우리 가문의 돈이 탐이 나는 거야?
이건 아버지의 노력과 피가 섞인 거라고.
저 돈이 있어야지만 정화제가 제대로 돌 수 있다고.
가뜩이나 정화제가 심각할 정도로 줄어들었는데.
정화제를 지키는 데 드는 것도 돈이고, 유통하는 데도 돈이 든다는 걸 너는 왜 모르는데?
답답했다.
너무 답답했다.
"어쨌든, 신무기와 에르티안 왕국을 위해서니 헤레스가 필요합니다. 내어주시지요, 룬델 공."
"…그러니까 왜요? 헤레스는 제 주치의입니다."
나는 헤일리스가 꺼낸 말에 꾹 눌러뒀던 감정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마법사니까요. 마법사가 마법사 협회로 들어오는 게 뭐가 이상합니까?"
"…헤, 헤레스가 마법사라고요?"
나는 말을 더듬었다.
"아, 몰랐습니까? 어쩐지 잘 지낸다 싶었는데."
헤레스가 마법사라니.
헤일리스가 무어라 꺼내는 말도 귀에 닿질 않았다.
헤일리스와 헤레스가 아는 사이였다면 며칠 전에 나를 습격한 마법사의 행동도 알고 있었다는 걸까.
"헤레스한테 전해주십시오. 이제 술래잡기는 끝이 났다고요."
헤일리스는 우아한 웃음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전하."
"그렇게 하게. 이제 자네도 나가보고."
바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허리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인질로서 이용된 사실 너머로 헤레스가 마법사였다는 말이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헤레스에게 사실을 물을지 말지 망설이던 중에 헤일리스가 향했던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 뻔뻔한 낯짝을 들고 여길 찾아와요? 나를요?"
얼마나 걸었을까, 아래층에서 헤레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미끄러지듯이 벽에 기댔다.
"그래. 네가 도망갔으니 내가 찾아왔지."
"다… 말한 거예요?"
"그럼."
쿵쿵.
심장이 뛰었다.
진짜였어? 진짜 헤레스가 마법사였어?
"자, 돌아가자. 너도 여기에 더는 있을 수 없겠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어떻게 그 끔찍한 걸 전쟁에 쓸 수 있냐고요?"
"누가 들으면 오해할라. 오미너스는 네가 만들었단다, 헤레스."
오미… 너스?
그게 전쟁에서 사용한 무기의 이름이라는 건가.
"그 검은 물에 오미너스라는 이름까지 붙였어요? 미쳤어요? 진짜 미친 거예요?"
헤레스가 꺼내는 말에 나는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 무기가 물이라고?
검은 물?
그런데 그걸 헤레스가 만들었다니.
"아직 오미너스는 완벽하지 않아. 이번에도 일반인들이 얼마나 죽었는지 몰라. 그러니 네가 필요해, 헤레스. 적과 아군은 구분할 수 있어야지."
"꺼져요. 다시는 찾아오지 마요! 다시 찾아온다면 내 시체를 볼 줄 알아요."
"안타깝네. 오미너스는 이번 전쟁에 또 쓸 계획이야, 헤레스."
헤일리스가 꺼내는 말에 발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네가 사람이야? 네가?"
헤레스는 분노했다.
"전하께서 소규모 전쟁에 오미너스를 쓸 셈인데, 방금 말했듯이 조종이 잘 안 돼. 이번에도 얼마나 또 죽을까? 얼마나 죽어야 네가 마법사 협회로 찾아올 수 있을까?"
"내가 미쳤어? 내가 내 발로 나온 거기를 다시 들어간다고?"
"네가 모시는 도련님 말이야. 네가 마법사라는 사실에 겁을 먹었던데. 그럼 오미너스를 네가 만들었다는 사실까지 알면 어떻게 될까?"
"가지 않겠다고……."
"아. 그럼 그냥 죽여야겠네. 그래야 올 거야? 하벨 티에라를 내가 진짜 죽이면 올 거냐고?"
"도련님에게 손대지 마. 도련님은… 물이 오염된 세상에서 희생자일 뿐이라고!"
"헤레스. 티에라 가문은 기울고 있어. 저번 전쟁 때, 정령들이 많이 죽었거든. 덕분에 나는 좋았지만."
"…그게 무슨 소리야?"
"왜 모르는 척해? 오미너스를 만드려면 정령들이 필요하잖아?"
헤일리스의 웃음이 퍼져나갔다.
쿵쿵.
심장이 다시금 빠르게 뛰었다.
오미너스라는 검은 물을 만들려면 정령들이 필요하다고?
그렇다는 건 왕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이야?
"아, 여기에 정령들이 정말 많을 텐데. 지금도 내 말을 듣고 있으려나. 하지만 상관없어. 티에라 가문은 내 손아귀에 넣을 셈이니까. 하지만 헤레스."
헤일리스는 잠깐 말을 멈췄다.
"네가 다시 돌아온다면 한번 생각해볼게. 티에라 가문은 손대지 않기로……."
"도와줘!"
갑자기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좀 도와줘……! 제발!"
"또 뭘 한 거야, 헤일리스?"
헤레스가 헤일리스를 닦달했다.
"…하, 칼리우스, 칼리우스. 마차에서 얌전히 기다리라니까."
칼리우스?
헤일리스는 한숨을 내쉬다 누군가에게 명령했다.
"시렌, 뭐 해? 잡아. 절대로 놓치면 안 되니까."》
* * *
"…커헉."
기억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하벨은 피를 쏟았다.
바닥과 옷에 피가 뚝뚝 떨어졌다.
"도, 도련님!"
헤레스가 제 소매로 하벨의 입가를 닦았다.
'와.'
하벨은 갑자기 아득해지는 의식을 간신히 잡았다.
'진짜…….'
주변이 요란한 와중에 하벨은 미래에 펼쳐질 이야기에 기겁했다.
바안은 타락하고.
그런 바안와 헤일리스, 아니 시렌이 손을 잡고.
헤일리스가 전쟁이라는 수단으로 오미너스를 강화하고.
칼리우스는 이미 마법사 협회 손에 붙잡혔고.
'최악의 미래다.'
모든 게 하나씩 이어지고 움직이고 있던 게 눈에 보였다.
놈이 에르티안 왕국의 왕을 죽여 바안의 분노를 터트린 뒤, 놈의 명령을 듣는 마법사 협회가 바안의 분노를 이용해 뒤에서 움직일 줄이야.
결국, 헤레스마저 마법사 협회로 가지 않았을까 싶었다.
저 미래에 과연 희망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벨은 시야에 점점 가까워지는 아라를 보며 웃었다.
[마, 많이 아파, 대장?]
"…아니."
하벨은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저번에는 몰랐지만, 이번 기억은 정말 깊게 느꼈다.
만약에 바안과 시렌을 막지 않았다면 벌어질 일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아버렸다.
자신이 막았다.
그 쓰레기가 뒤에서 바안과 시렌을 조종해 벌어질 미래를 막았다.
-용왕님 덕분에 많은 것들이 바뀌고 있어요. 달라지는 게 느껴지시나요?
하벨 티에라가 물었던 물음.
'그래. 이번에는 확실히 알았다.'
하벨은 시선을 돌려 헤레스와 칼리우스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곳에 있었다.
자신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피 흘렸는데, 왜 안 아프다고 말하는 거야?"
칼리우스가 속상해하며 말하자 카샬이 손수건을 하벨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냥 흘려들어. 자주 저러시잖아. 헤레스 씨."
"네. 잠깐만 기다려주……."
"고마워."
하벨의 말에 모두가 행동을 멈췄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건 페트리오였다.
"제가 했던 말이 상처로 남으실 건 알지만, 그렇다고 정신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아니."
하벨은 페트리오의 말을 부정했다.
"이제 영혼을 바꾸는 건 이제 포기하려고."
화르르륵.
랜턴이 긍정하듯이 하얀빛을 내며 타올랐다.
"안 되는 건… 뭘 해도 안 되는 거잖아?"
룬델도 그렇고 라르웬과 넬시아. 마주쳐야 할 이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나는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가슴이 욱신거렸지만, 하벨은 후련해하며 활짝 웃었다.
"이제야 아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카샬은 안도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거나 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벨의 다짐에 아라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대장은 하고 싶은 거 다 해.]
"물론입니다. 도련님께서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주세요."
헤레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들 고마워."
하벨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우르르 모였는지 모르겠지만, 하벨은 속으로 하나 맹세했다.
저들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고.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널 확실히 죽여주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악연, 이를 다시 갚을 기회가 손에 들어왔음을 느꼈다.
하벨은 랜턴을 바라보았다.
'세상을, 가족을 지켜달라고 했는가.'
-부디, 이 세상을, 제 가족들을 지켜주십시오.
자신이 하벨 티에라의 몸에 들어가기 전에 어렴풋이 들려왔던, 간절함이 가득한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제야 하벨 티에라가 품었던 간절함이 마음속에 닿았다.
'…하겠다.'
하벨은 랜턴을 조심스레 쥐었다.
'네가 바라는 대로 모두를 지켜주겠다.'
이미 이 세상도, 하벨 티에라의 가족도 자신에게 소중해졌다.
다시는 쥘 수 없었던 그 따스함을 어떻게 놓을 수 있을까.
'하나, 착각하지 말거라. 마침 날 죽인 그놈이 바로 세상을 멸망으로 이끄는 놈이었으니.'
하벨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다시 자신을 보고 웃는 저들을 향해 찬찬히 입꼬리를 올렸다.
"정말로, 고마워."
하벨의 눈이 살포시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