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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02화 (202/415)

202화. 인연이란

* * *

[하벨 네 땅?]

정령들이 눈을 깜박거렸다.

[응! 대장이 가진 땅에 이미 다른 정령들도 있어! 거기에 착한 마법사들도 있구! 아까 봤던 예쁜 나무도 있어!]

마법사라는 말에 정령들이 멈칫했지만, 아라가 꺼낸 말이었기에 정령들은 서로를 바라보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어설프게나마 왕의 힘을 사용하는 아라와 티에라 가문의 자제인 하벨이 말했기에 믿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들을 위해 그렇게 애를 썼는데 믿지 못하면 너무 나쁘지 않은가.

[갈게. 거기가 어딘지 알려줘.]

"여기서 거리가 좀 있는데 괜찮겠어?"

하벨이 머뭇거리자 정령들의 눈동자는 오히려 더 반짝였다.

[괜찮아. 오랜만에 여기를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두근두근하기도 해.]

"하지만 부정한 것들은 만나면 어쩌려고."

[거기까지 뭉쳐서 다닐 거니까 괜찮아. 그리고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원래 평화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잖아?]

[역시 착하네, 하벨. 들은 대로 착해.]

정령들은 다시 서로를 바라보다 실실 웃었다.

[착한 아이한테는 선물을 줘야지.]

정령들은 누구 할 것 없이 하벨에게 모여들었다.

"이런 걸 바라고 한 건 아니었어."

하벨이 꺼낸 말에 정령들은 개구쟁이처럼 웃어 보였다.

[그건 우리도 알아. 혹시 들어봤는지 모르겠지만, 우린 감정을 볼 수 있어.]

"알아. 이미 본 적이 있으니까."

[그럼 더더욱 부담 가질 필요 없어, 하벨.]

[그래. 이건 우리가 좋아서, 네가 한 행동이 기특해서 하는 것뿐이야.]

[있잖아. 나는 네가 만든 그 물을 보고 있으니 그리움이 몰려와. 아주 옛날에 무언가 있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그냥 그리워.]

말처럼 그리움을 담아 꺼내는 그 목소리를 시작으로 따스한 기운이 하벨에게 스며들었다.

찌르르.

교감을 넘어선 그 힘이 순환의 길을 채운 불순물을 녹여 내려갔다.

언제 느껴도 다정한 손길 같기에 하벨은 또다시 귓가에 울리는 바닷소리를 들었다.

―쏴아아.

[나도 그래. 하벨, 너는 보면 볼수록 바다 같아. 물의 오염이 되기 전에 보았던 아주 아름다웠던 바다 말이야.]

애틋함이 뒤섞인 말과 함께 순환의 길에 있던 다섯 번째 막이 점점 모습을 갖춰갔다.

머릿속에 거대한 땅이 보일 무렵, 또 그들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인간이 너무 무서워.

멍하니 나무에 앉아 있던 어떤 정령이 말을 꺼냈다.

그 정령은 살짝 일그러진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무슨 기쁜 일이 있는지 방긋 웃는 사람들을 보더니 언제 심각했냐는 듯이 정령 역시 잔잔한 미소를 흘렸다.

―그런데 인간이 좋아. 웃기지?

―에이, 뭐가 웃겨? 인간만큼 잔인하고 어여쁜 존재도 없는데.

―너도 그래?

정령이 놀라며 묻자 고개를 끄덕이는지 시선이 흔들렸다.

―그럼. 아마 대부분 다 그럴걸? 나는 대부분 인간이 우릴 보지 못해서 슬프고, 미울 때가 있어.

―나는 있지. 우리를 죽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럼 장난도 안 칠 수 있는데.

정령은 괜히 나뭇잎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우릴 보지 못해도… 아니야, 그건 역시 싫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 두려움은 싫지만, 인간들이 우릴 볼 수 있으면 좋겠어.

―그건 나도 그래.

나뭇잎을 만지던 정령은 배시시 웃었다.

―정령사들의 건넨 그 다정한 손길과 눈빛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어. 인간이 무서워도 정말, 정말로 너무도 사랑스러우니까.

하벨은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목소리에 눈을 깜박거렸다가 떴다.

선물을 준 뒤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하는 정령들의 모습에 하벨은 위험성을 알지만, 가면을 벗었다.

"…도련님?"

카샬이 기겁하며 바로 주변을 경계했다.

"고마워."

하벨은 눈마저 살포시 감으며 정령들을 향해 활짝 웃었다.

"내게 큰 선물을 주어서."

사람을 믿어줘서.

하벨은 뒷말을 삼키며 정령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수줍게 웃으며 하벨을 안아주었다.

[고마워, 하벨.]

[역시, 인간은, 아니, 너는 참 사랑스럽구나.]

* * *

"…오늘으은. 뭘 먹어볼까나."

크라마는 책장에 버튼을 눌러 벽 쪽에 펼쳐진 술 진열대를 보며 흥얼거렸다.

어제도, 오늘도 아주 즐거운 날이 아닌가.

마법사 협회가 하벨에게 한 방 먹은 뒤로 즐겁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게 사람이 사는 맛이지.'

크라마는 무슨 술을 먹을지 고르다 말고 계속 밀려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도련님은 뭔 생각으로 사기를 친 거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너무 위험했다.

'헤레스, 이걸 왜 네가 말리지 않은 거야?'

자신이야 옆에 있었다면 순간, 분위기에 휩쓸려 아주 즐겁게 거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헤레스는 그럴 성격이 되질 않았다.

'게다가 페트리오까지 있었다며?'

크라마는 술병을 하나 쥐었다.

기쁨에 취해 잠깐 잊었던 사실이 밀려오자 생각을 멈추기가 어려웠다.

하벨을 보면 왜 저렇게까지 하나 싶기도 하고.

사실 알고 보면 마법사 협회에 얽힌 자신보다 더 원한이 깊은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푸드드득.

잠깐 열어둔 창문 틈으로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날개가 젖어 있었기에 크라마는 대충 닦아주고는 다시 술병을 쥐었다.

꾸륵.

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도 마시려고? 그런데 이건 안 된다. 큰일이 나요."

뽕.

크라마는 닫아둔 뚜껑을 열었다.

향긋한 과일주의 냄새가 몰려오자 '크흐'라는 추임새를 넣으며 소파로 걸어갔다.

쏴아아.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슬쩍 바라보니 비가 내렸다.

저 오염된 물이 더 심각해지는 데 자신이 얼마나 일조했는지 몰랐다.

'너도 참 역겹다, 크라마. 그딴 짓을 해놓고 진짜 잘도 살아 있네.'

크라마는 키득거리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크라마의 눈동자가 갑자기 커지고 고스란히 술을 뿜어냈다.

"…푸흡!"

갑자기 허공에서 생겨난 물웅덩이로 사람이 튀어나왔다.

한 명.

두 명.

네 명.

"…술이 입에 잘 들어가나 봐? 응?"

한 남자가 시비조로 말을 걸자 크라마는 당장 경계했지만, 우산이 접히고 달 무늬가 가득한 가면을 쓴 남자를 보자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 도련님."

"아직 취하진 않았나 보네. 그것참 다행이야."

하벨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화가 많이 나 보였지만, 꽃무늬가 들어간 가면을 쓴 남자와 구름무늬가 들어간 가면을 쓴 여자가 하벨을 부축하고는 소파에 앉혔다.

끄응.

하벨이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십니까?"

카샬이 묻자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에 카샬은 꾹 참았던 화가 터져버렸다.

"도련님. 저는 진짜. 정말 맹세코 오늘 많이 참았습니다. 지금 제 속이 얼마나 부글부글 끓는지 모르실 겁니다. 딱 돌아버리기 직전이니 제대로 들어주십시오."

폭파 사건에 하벨이 휘말려 얼마나 크게 다쳤던가.

오늘 레놀드 왕국의 대신 샬룸,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 게리온을 포함해 다른 대신들은 물론 시엘느 왕국의 엘라힘까지 만난 상태였다.

엘라힘이 가진 신의 은총을 받아 하벨의 상처가 꽤 회복됨과 별개로 하벨이 벌일 고집을 알기에 그냥 순순히 허락했다.

그런데 그 몸으로 움직였다.

비가 오는데 또 움직였다.

화가 안 나게 생겼는가.

카샬은 최대한 짜증과 언짢음과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지금 여기서 무리한 행동을 하신다면 도련님의 의사는 일절 무시한 채 무작정 왕실로 데리고 갈 겁니다."

[그럼! 카샬 말이 다 맞아! 대장 지금 엄청 위험해. 순환의 길에 불순물이 가득 차 있고, 정화 장치에 불도 들어와 있다구!]

아라가 꼬리를 바짝 세우며 하벨을 혼냈다.

"아시겠습니까, 도련님?"

카샬이 품에서 정화제가 담긴 주사를 꺼내자 크라마가 기겁했다.

"주사기를 왜 갑자기 꺼내? 도련님한테 뭐 하려고 그래?"

"밖에 비 오는 거 안 보여? 술 처먹었으면 곱게 잠이나 자."

"안에 어떤 약물이 들었는데? 빨리 말해."

"정화제다."

크라마는 신경질이 고스란히 담긴 카샬의 말에 깜짝 놀라다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자신이 알고 있는 하벨 티에라는 오염된 물에 대한 내성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런 하벨이 비가 오는 와중에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도련님. 대체 왜 오신 겁……."

이리저리 돌아가던 크라마의 시선이 에멜에게 멈췄다.

쨍그랑.

손에 쥔 술병이 그대로 떨어져 깨져버렸다.

분명 술이 신발과 바짓자락에 튀어야 하지만, 아무것도 튀지 않았다.

크라마는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에멜에게 다가갔다.

"…멈춰."

하벨이 꺼내는 말에 크라마는 마지막 이성을 잡고 그대로 멈춰 섰다.

콜록.

하벨이 기침하자 레디나가 가면을 벗겼다.

창백한 입가에 붉은 피가 흐르자 아라가 기겁하고, 레디나는 솟구치는 화에 언성을 살짝 높였다.

"엉망인 몸이 그 힘을 받았다고 해서 괜찮아진 게 아니에요! 도련님은 좀 자제할 필요가 있어요."

엘라힘에게 신의 은총을 받아 몸이 나아진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로 인해 몸 상태가 결국 최악으로 변해버리지 않았는가.

"맞아. 나도 가지 말자고 했어. 내가 나중에."

칼리우스는 말을 잠깐 멈추고 아라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라는 미간을 써서는 당장 하벨을 혼낼 기세로 보고 있었다.

"같이 오면 된다고 말했는데."

쏴아아.

칼리우스는 시원하게 쏟아 내리는 비를 원망했다.

비가 내리자마자 하벨의 몸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대장! 이 몸은 이제 물의 길을 더 많이, 더 잘 열 수 있어! 아니, 물의 길 말고도 바람의 길도…….]

"…잠깐만. 진짜 잠깐만."

하벨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의 동시에 말이 오가니 머리가 울리는 건 기본이고 토악질까지 나올 것만 같았다.

오늘은 특히 더 힘들었다.

레디나 말이 다 맞지만, 그래도 몸 상태가 너무 급격히 나빠지는 것 같았다.

'…다섯 번째 막이 생겼는데도 불순물이 빠르게 차고 있다.'

비가 오자마자 다섯 번째 막 아래까지 불순물이 빠르게 차올랐다.

―영혼이 부족하기에… 육체를 갉아 먹을 겁니다.

드웰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에 하벨은 조금은 가쁜 숨을 길게 내쉬며 이를 살짝 깨물었다.

검은 달의 지부를 털 때 그 부작용이 시작됐다고 느꼈지만, 설마 이것까지 영향이 있을 줄은 몰랐다.

"죽이지 마, 크라마."

하벨은 일단 크라마를 다시금 말렸다.

뭐든 가볍게 흘리던 크라마답지 않게 눈동자에 분노가 가득했기에 재차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

크라마가 그제야 기가 찬 소리를 냈다.

"어디에서 잡아 왔는지 몰라도 이놈은 말입니다. 이놈은 헤레스가 가진 그 힘을 이용한 놈입니다! 이놈이 검은 물을… 아니, 헤레스를 이용해 아주 나락으로 떨어트려 버렸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진정해."

"하……."

크라마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숨을 길게 내뱉었다.

몇 번이나 숨을 내쉬었을까, 크라마는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다 하벨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흥분했습니다."

장로가 죽는다면 제일 먼저 의심을 받을 사람은 하벨이었다.

자신이 잠깐의 분노로 하벨을 위험에 빠트릴 뻔했다.

'진짜 최악이다, 너는.'

대체 얼마나 잘못을 반복해야 속이 후련한지.

"…됐어."

하벨은 콧바람을 가볍게 내쉬었다.

"이참에 술이나 끊어. 아, 좀도둑한테 들었지? 이제 술값은 지원할 생각이 없어."

"저기 있는 게 진짜 마지막입니다. 저거만 먹고 끊을 생각입니다."

"전형적인 변명이네."

하벨이 씩 웃자 크라마 역시 평소의 여유를 찾았다.

"저놈을 또 보관하고 있으란 말입니까? 이미 있던 놈은 너무 날뛰어서 곤란한데요. 아니면 땅 문제로 찾아오셨습니까? 그러기엔 제가 엄청 잘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둘 다 틀렸어."

"틀렸다고요? 제가요?"

하벨은 크라마에게 닥칠 일을 알기에 실실거리며 웃다가 잠깐 기침했다.

콜록.

"…도련님."

카샬의 낮은 음성에 하벨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나, 아무것도 안 하고 기대있어."

"제가 말하겠습니다. 이미 칼리우스도 허락하지 않았습니까."

카샬은 어깨를 늘어트리며 칼리우스를 가리켰다.

"용이다."

"……."

크라마가 눈을 깜박거렸다.

"칼리우스가 지금 용으로서 장로를 지배하러 왔으니까, 칼리우스를 장로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 나머지는 알아서 할 거다."

카샬은 할 말을 끝낸 후에 레디나를 보았다.

"컵이랑 덮을 것 좀 가져와 줘."

"알겠어요. 금방 갈게요."

[이 몸은 대장 옆에 있을래. 그래도 괜찮겠지, 용용아?]

"으응. 이번에는 나 혼자 할 수 있어. 도련님은 지금 많이 아프니까, 괜찮아. 여기 크라마도 착한 마법사고."

칼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자신보다 하벨이 먼저였고, 여기는 하벨이 아는 사람들의 지부였기에 안심했다.

"날 안내해줘, 크라마."

칼리우스가 크라마에게 부탁했다.

크라마는 문득 바닥에 깨진 술병과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바지나 신발에 묻지 않았다.

'아. 꿈이구나.'

크라마는 조용히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아픈데?"

볼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아픔에 크라마는 이상함을 느끼며 찬찬히 눈동자를 돌려 하벨을 바라보았다.

하벨이 아주 얄밉게 웃고 있지 않은가.

"술값을 펑펑 쓸 땐 좋았지? 용이 살아 있는 줄도 모르고."

술과 용은 아무 관계도 없었다.

"…미친."

하지만 크라마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욕지거리를 입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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