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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01화 (201/415)

201화. 이 몸은(3)

* * *

'정령들이. 물이…….'

하벨은 방금 벌어진 일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시선을 내리자 그 일이 사실이라고 알리는 것처럼 하얀 꽃이 자신의 발밑에 가득했다.

가슴이 일렁거리고 손끝이 떨려왔다.

비록 자신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영혼에 각인되었던 권능은 그대로였다.

그렇기에 하벨 티에라의 몸으로도 물이 자신의 부름에 대답해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권능 대부분이 사라진 상태였기에 당연했던 물과 대화조차 하지 못했다.

'왜.'

하벨은 여전히 하얀 꽃에 시선을 떼지 않았다.

툭.

코피가 꽃을 붉게 물들였다.

'나를 기억했다는 거지? 여긴… 다른 세계일 텐데.'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세계가 아니었던가.

하벨은 넘실거리는 의문이 너무도 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숨만 내쉬었다.

이상했다.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죽으면… 다음 용왕이 태어나지 않는 이상 모든 물이 사라질 텐데?'

다음 용왕이 태어난다는 보장이 없기에 절망 속에서도 자신이 죽을 수 없었던, 아니, 죽지 말아야 할 저주 같던 옭매임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물이 있었다.

비록 오염되었지만, 물은 여전히 있었기에 이 모순이 너무도 이상했다.

물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여전히 물이 있다니.

―…고마워요.

하벨은 순간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직 자신이 만든 물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그 물을 통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하나도 안 아파요. 히히.

하벨의 안쪽 눈썹이 올라갔다.

앳된 목소리.

조금 전 물이 내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렇구나.'

―…저걸 뺀다면 죽습니다.

에멜이 손가락을 들어 서랍을 가리키며 했던 그 말이 생각이 났다.

나무가 자라난 그 틈 사이로 잔잔한 바람이 불어왔다.

―가, 가루가… 된 채 말입니다.

'그렇게 됐구나.'

하벨은 밀려오는 안쓰러움에 가슴팍이 욱신거렸다.

저 아이들이 바라는 일이었다고 하지만, 자신은 저들의 목숨을 거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했다.

적어도 조금 전에 자신이 봤던 아이들은 숨을 쉬고 있었으니.

"…미안하다."

죽어가는 이를 구하지 못하는 건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없었다.

그 사실이 너무도 안타까워 하벨은 위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몇 사람이 안아도 안기지 못할 만큼 굵게 자란 나무가 이곳에 뿌리를 박았다.

그들이 데리고 간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여기서는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이 장소는 더는 쓸쓸하게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됐습니까?"

카샬은 위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하벨에게 망설이고, 망설이다 일단 손수건을 꺼내며 말을 꺼냈다.

자신이나 레디나나 잘린 정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식물이 서랍 속에서 뻗어나왔고, 하나의 나무로 자라났으며 마지막에 땅이 열려 그 틈으로 올라가지 않았던가.

정령이 있다는 걸 몰랐다면 갑자기 펼쳐진 일에 얼마나 당황했을지 몰랐다.

무언가 잘 이루어진 것 같은데 하벨의 표정을 살펴보면 무언가가 꼬인 것 같은 느낌이 몰려왔기에 일이 잘된 건지, 잘못되었는지 헷갈렸다.

"잘됐어."

하벨은 코를 닦으며 말과 다른 표정을 지었기에 레디나는 눈동자를 굴렸다.

"아라 님한테…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아니. 아라는 괜찮아."

하벨은 여전히 힘이 빠진 목소리를 냈다.

문제가 생긴 건 자신이었다.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그 의문을 떨치기가 너무도 어려웠다.

'이건…….'

하벨은 입술을 깨물었다.

엘라힘이 자신에게 던져준 의문과 이어졌기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이건 왕께서 가지신 힘일 텐데?]

모든 걸 바라보던 한 정령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 느낀 게 아니지? 내가… 착각한 게 아닌 거지?]

이어 다른 정령이 말을 꺼내자 숙덕거림이 점점 커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멍하니 있던 하벨은 정령들의 말이 귀에 닿자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다른 일도 아닌 아라의 일이 아닌가.

[왕이라니? 이 몸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아라가 자신의 꼬리를 잡은 채로 하벨에게 조심히 다가가 얼굴을 기댔다.

[비정상적인 정령의 죽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야.]

[맞아. 가끔 이런 일이 종종 있어. 괴로움, 슬픔, 자기 혐오 등 다양한 감정이 극에 치달으면 우리는 죽었음에도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려.]

"지금이랑 비슷한 상황이잖아?"

하벨이 잠깐 시선을 돌렸다.

서랍 속 링거는 이미 찢겨 검붉은 액체를 바닥에 흘렸고,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맞아. 죽은 정령들을 다시 자연으로 인도하는 힘은 오직 왕만이 가지고 있는 힘이야.]

[이 몸은 왕이… 아닌데?]

아라가 어느새 하벨의 옷자락을 잡았다.

"아라가 왕인 게 뭐가 어때서. 아니, 그걸 떠나 아라는 아무 잘못도 안 했다고."

아라에게 묘한 압박이 가는 분위기에 칼리우스는 눈을 찡그렸다.

지금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잖아. 왕께선 살아계신단 말이야.]

정령은 잠깐 주춤거렸다.

[그래. 아직 왕께서 우리에게 내린 명령이 유지가 되고 있는데?]

인간을 죽이지 마라.

이 힘이 유지가 된다는 건 왕이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왕의 힘을 가진 아라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지.

정령들은 갑자기 아라를 낯설게 바라보았다.

[왜… 왜 이 몸을 그렇게 바라보는 거야?]

아라가 하벨의 등에 얼굴을 파묻어서는 눈만 빼꼼히 내밀었다.

처음 보는 시선이었기에 더 무서웠다.

"혼란스러운 건 이해해."

하벨은 상황을 중재하러 입을 열었다.

저들이 지금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하지만 너희도 봐서 알겠지만, 아라가 가진 힘은 완벽하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도왔고."

[그건 봤어. 네가 가진 그 힘이 뭔지 몰라도 너도 이상했어.]

정령들은 하벨마저 낯설게 바라보았다.

분명히 저 인간이 만든 그 물은 기존과 다른 물이었다.

정화제를 사용한 물과 거대 정화 장치에서 정화되어 나온 물을 비교해도 너무도 맑고 깨끗했다.

"아직 왕이 너희에게 내린 명령도 유지되고 있다면서?"

정령들이 조금 전에 꺼냈던 말을 하벨이 꼬집자 정령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직도 유지되고 있어.]

[만약에 그 명령이 유지되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당장 저놈을 똑같이 갈기갈기 찢어 죽였을 거야.]

정령들은 당장 에멜을 노려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없애고 싶은 인간이 아닌가.

"그러니까 여기까지 해. 아라가 특별하다는 건 나도 방금 느꼈어. 의문이 들겠지. 이상하겠지. 그래도 아직 왕이 살아 있다는 게 확실한 지금 아라를 괜히 흔들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아직은 불확실한 사실에 아라가 압박을 느끼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벌써 특별함이 가져다주는 그 불쾌함이 아라를 덮치고 있었으니.

'…나도 아니길 바라는데.'

하벨은 속으로 간절히 빌어보았다.

왕이라는 그 자리는 지금 아라가 감당하기에 너무도 가혹하지 않은가.

[미안해, 아라야.]

정령들은 빠르게 아라에게 사과했다.

[너무… 너무 놀라서 그랬어. 이런 일은 처음이니까. 왕이 둘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미안해. 우리가 이번 일로 너무 예민했어.]

왕은 사라졌고, 자신들은 아무도 모른 채로 죽어갔다.

오늘은 또 어땠는가.

이 지하에 아무도 모르는 채로 갈리어 죽지 않았는가.

그럼 내일은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지만 그렇다고 방금 우리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야. 미안해, 아라야. 도와준 너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아니야. 이 몸이… 뭔가 다른 게 맞아.]

조금 전에 아라는 확실히 느꼈다.

무언가 선을 긋는 정령들의 시선에 지금보다 더 작을 때 자신을 바라보던 정령들의 시선보다 더 낯설었으니까.

아예 모르는 생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이 몸은 너희랑 달리 다르고, 이상하니까아……?]

아라는 갑자기 얼굴에 튀는 물에 깜짝 놀라 하벨을 바라보았다.

하벨이 속상한 표정을 짓자 아라는 옷자락을 꼭 잡았다.

"아라야. 내가 그런 말은 쓰지 말라고 했지?"

아라가 입을 삐죽 내밀다가 다시 하벨의 옷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지만 이 몸은 다른걸. 달라!]

아라는 속상했다.

[이 몸은 아직도 다른 정령들보다 작고, 이 몸 보고 다르다고 했다구! 이 몸은 맨날… 맨날 달라!]

참고, 또 참았던 마음이 터져버려 너무도 속상했다.

"아라야."

하벨은 아라를 조심스레 들었다.

꼬리에 얼굴을 파묻은 아라는 훌쩍이고 있었다.

"다른 건 상관없어. 너하고 내가 다른 것처럼 누구든 다르니까. 그래서 내가 싫어?"

[아니야! 이 몸은, 이 몸은 대장이 제일 좋아!]

아라 당장 눈을 크게 뜨며 간절하게 하벨을 바라보았다.

"나도 아라 네가 제일 좋아."

하벨은 다른 손가락으로 아라의 코를 건드렸다.

언제 울먹였는지 아라의 눈이 포근히 감기며 수염이 떨릴 정도로 활짝 웃었다.

"하지만 그런 말은 좋지 않아. 내가 슬프니까. …너도 용용아. 그런 말들은 자기를 잡아먹는다고."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칼리우스는 뜨끔거렸다.

"나도 노력하고 있어. 저, 정말이야, 도련님."

칼리우스가 손톱을 뜯으며 대답하자 하벨은 자연스레 아라를 바라보았다.

[…이 몸도 안 그러도록 할게. 방금은 이 몸이 잘못했어.]

"그래. 둘 다 착하다."

하벨이 활짝 웃자 카샬은 품에서 시계를 확인했다.

본인도 아직 어리면서 더 나이가 많은 칼리우스나 똑같은 나이인 아라에게 말을 꺼내는 모습이 참 우습다 싶었다.

"도련님. 이제 위로 올라가셔서 확인하실 거 아닙니까?"

"그렇지."

"이제 슬슬 경비병이 내려올 때가 됐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 나만 믿어."

하벨이 손가락을 튕기자 아라가 머뭇거렸고, 카샬이 긴 한숨을 토했다.

"너무 불안합니다."

[…이 몸도.]

아라마저 개미만 한 소리를 내며 우물쭈물하자 하벨은 제 귀를 의심했다.

"아라… 야?"

"그냥 제가 따돌릴게요."

레디나가 기지개를 쭈욱 켰다.

"저 이런 거 잘해요. 아시다시피 많이 했고요. 그럼 다시 이 나무로 돌아올게요."

"아니, 레디나 너까지?"

하벨이 눈을 휘둥그레 뜨자 레디나는 입가를 가리며 키득거렸다.

"이제 언니가 초조함으로 다리를 떨고, 안경테를 계속 붙잡을 때가 된 것 같아서요. 왕실로 돌아가야죠. 그렇죠, 도련님?"

섬뜩함이 느껴졌기에 하벨은 레디나의 말에 긍정했다.

"그럼 천천히 오세요."

레디나가 손을 흔들더니 자연스럽게 어둠에 녹아내렸다.

"혹시 지쳤어, 아라야?"

하벨은 아라를 바라보았다.

에멜을 크라마한테 던져주고, 덤으로 장로 한 명을 더 지배한 뒤에 갈 생각이었지만, 아라가 지쳤으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아니. 이 몸은 오히려 더 기운이 나. 아까 정령들이 사라질 때 이 몸한테 꽃을 줬잖아?]

"그랬지."

[그 꽃을 받자마자 힘이 더 샘솟았어!]

"그럼 잠깐 들리고 갈 때가 있는데 괜찮겠어?"

"어딜 또 가신단 말입니까?"

시계를 집어넣던 카샬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미 다 날뛰지 않았던가.

여기서 뭘 더 어떻게 날뛰겠다는 말인지.

"얘를 던져주고, 그곳에 있는 장로까지 확실히 포획해야 다음 장로도 또 잡을 수 있지. 안 그래, 에멜?"

하벨이 가면을 쓰기 전에 에멜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너무도 거대해 에멜은 고개를 하염없이 숙였다.

"…위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뭐든 말씀드리겠습니다."

"위로 올라가자."

* * *

하벨은 하늘 높이 자라난 나무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일에 나무에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은 없었다.

레디나가 가게 근처에 올 경비병들을 따돌린다고 해도 이곳에 다른 경비병들이 들이닥칠 걸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급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하벨은 나무에 피어 있는 꽃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싱그러운 하얀 꽃송이는 그 커다란 나무를 가득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 숫자가 저 밑에 정령사를 만들기 위해 실험되었던 아이들의 숫자와 같았기에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쑥쑥 잘 자라야 해. 아프면 안 돼.]

아라가 나무를 매만졌고, 하벨은 조용히 용왕의 힘으로 만든 물을 부어다 주었다.

금세 물을 흡수해 잎사귀와 꽃잎이 반짝거리는 그 모습에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아이들의 마지막을 지켜줘서."

죽은 정령들이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이유가 아이들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들이 자연으로 돌아갈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아이들을 거둔 일이 아닌가.

덕분에 아이들이 산산조각이 나 부서지는 모습을 아무도 보지 못하게 막아준 걸 생각하면 참 고마웠다.

짧은 묵념을 끝낸 하벨은 고개를 든 뒤, 등을 돌렸다.

이 이상 눈에 띌 수는 없기에 레디나가 돌아오는 걸 보며 다른 쪽으로 달려가 건물 쪽으로 숨어들었다.

"너희는 이제 어떻게 할 건데?"

하벨은 숨을 잠깐 돌리며 정령들에게 물었다.

저들을 죽인 건, 정령사를 만들고자 사람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짓을 벌인 마법사 협회가 맞았다.

[여기에 머무르고 싶진 않아. 이렇게 마법사들이 가까이 있을 줄은 몰랐고, 당분간이라도 좀 쉬고 싶어.]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이곳 어디든 위험하지 않은 곳이 없어. 이곳에 있었던 이유는 부정한 것들이 없어서였는데. 거대 정화 장치도 대부분 다 망가져 있고, 근처에 다가갈 수도 없고. 그래서…….]

하벨은 정령들의 하소연을 듣다 양팔을 벌렸다.

"그럼 내 땅에 올래?"

정령들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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