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무너지기 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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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겅!
에르티안 선왕을 둘러싼 정령 기사들이 룬델의 지휘 아래 일제히 검을 뽑아 하늘 높게 올렸다.
기사들에게 꼼짝없이 붙어 있던 정령들은 룬델의 다음 말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이 자리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가득했다.
"선왕께 마지막 인사를!"
룬델이 꺼낸 굳건한 목소리에 기사들은 들었던 검을 천천히 내려 끝을 맞닿았다.
검 끝 중심에 선왕이 있었으며 바안이 마지막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지금 맞지? 지금 해야 하는 거지?]
정령이 룬델에게 묻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 기사들은 밀려드는 정령수를 느끼며 룬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안이 고개를 들었을 때 룬델은 검을 뽑았다.
스겅.
"불을 붙이거라."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룬델의 목소리를 따라 정령 기사들의 검 끝에 불꽃이 붙었다.
붉게 타오르는 불이 선왕의 위에서 아른거렸다.
한 손에 들어갈 것 같은 불꽃은 정령 기사들이 보여주었던 기세에 비교하면 앙증맞은 크기라 사람들은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룬델은 하벨에게 신호를 보냈다.
'네 차례다, 하벨아.'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하벨은 또 검은 꽃으로 된 길로 걸어 나왔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알고 있었고, 모르던 사람은 놀란 눈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대체 왜 하벨 티에라가 또 나오는 건지.
선왕이 누운 관까지 향하는 그 긴 길을 하벨이 걸을 동안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또 무얼 보여줄지, 사람들의 표정에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하벨은 이번에 정 가운데가 아닌 기사들 뒤쪽에 서서 용왕의 힘을 끌어와 양손에 물을 만들었다.
오늘만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건 간단하다.'
이번에는 자신을 돋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마지막 여정을 함께한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줘야 했기에 하벨은 불 옆에 물을 불처럼 타오르는 모습으로 만들었다.
찰랑.
물과 불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져 선왕의 손등에서 둥글게 움직였다.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며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했다.
룬델의 지시에 맞춰 불이 갑자기 모습을 키우더니 마치 물을 단숨에 잡아 먹어버렸다.
감쪽같이 사라진 물.
더욱 몸집을 키운 불은 그대로 선왕의 손등에서부터 번져갔다.
그때, 타오른 불꽃 위에서 물로 된 새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오오."
예상치도 못한 효과에 감탄사가 여기저기 흘러나왔다.
'보고 있는가, 바안?'
하벨은 바안을 힐끔 바라보았다.
이는 선왕이 자유로이 좋은 곳으로 가길 바라는 바안의 마음이었다.
"…하."
하벨은 어깨를 내리며 숨을 내쉬었다.
코피를 쓱 닦고는 선왕에게 허리를 숙인 뒤에 제대로 바라보았다.
타탓.
불꽃이 선왕을 잡아먹고 있었다.
금세 치솟는 까만 연기는 까만 하늘에 번져갔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하벨의 모습에 헤일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허벅지를 세게 쥐었다.
'…밉다.'
조금 전, 단 5분도 되지 않는 그 시간에 자신과 마법사들이 그토록 원했던 걸 손에 넣었다.
자신이 유혹을 참지 못하고 허락했지만, 그래도 미웠다.
저렇게 마법사로서 당당하게 서는 그 첫 번째 마법사가 자신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얼마나 많았는가.
'…하지만 참을 수 있어.'
하벨이 가진 가능성을 이미 보지 않았던가.
헤일리스는 가슴 속에 들끓는 부러움과 질투를 꾹 눌렀다.
하벨이 있다면.
하벨만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건 물론, 더 큰 것 역시 손에 넣을 수 있을 테지.
"협회장님."
헤일리스 옆에 앉은 여자 마법사가 그녀를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왜 그러지, 시렌?"
"많은 걸 잃으셨네요?"
"…아직은 아니야. 그것도 덮을 수 있어. 이번에 손에 넣은 저것만 있으면 말이야."
"으음, 저도 그렇게 바랄게요."
시렌의 미소가 길어지자 헤일리스는 눈동자를 살짝 굴렸다.
"닥치고, 그냥 지켜봐."
"물론이죠. 제가 당신을 지켜보지 않으면 무슨 소용일까요?"
시렌은 가볍게 발을 흔들었다.
"지금 이 분한 마음도 꼭꼭 간직하는 거예요. 원래 저 자리는 협회장님 거였잖아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선왕의 시체를 태우며 화려한 불꽃을 터트리는 영광스러운 모습 말이에요."
헤일리스를 가엽게 바라보던 시렌은 헤일리스의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괜찮아요, 협회장님. 꼭 그렇게 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 그렇게 될 거야."
헤일리스의 눈동자 색이 한층 더 탁해졌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해."
지금 하벨이 서 있는 저 자리는 원래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자신이야말로 사라진 물 마법사의 후손이니까.
주먹을 꽉 쥐던 헤일리스의 눈동자가 잠깐 커지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선 한 남자를 보았다.
'저거…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인데?'
의아함도 잠깐, 헤일리스는 곧 관심을 접었다.
에르티안 왕국의 국력이 약했던 게 오늘 하루 일이 아니기에.
하벨은 자리로 돌아가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묘한 살벌함에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또 헤일리스가 나를 보는…….'
하벨은 생각을 멈췄다.
헤일리스가 아닌,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이 자신 쪽으로 오고 있었다.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이 왜 갑자기 일어난 거지?'
자신이야 미리 바안에게 허락을 받았고, 대신들과 귀족들이 있는 와중에 말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지만,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은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겠지.'
하벨은 놈에게 더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대신은 하벨을 스쳐 지나갔고, 하벨 역시 괜히 자신이 괜히 예민했다고 생각하며 잠깐 늦췄던 걸음을 재촉했다.
자신의 자리에서 아라가 방긋 웃자 하벨 역시 덩달아 미소를 짓다 말고 그는 멈칫했다.
'……?'
갑자기 공기가 떨려왔다.
자신의 주변에 무언가가 소곤소곤하는 소리가 이어 들리기까지 했다.
'이건… 정령들이 내는 소리가 아닌데?'
지금 아라를 제외한 모든 정령은 다 뒤쪽에 정령 기사들에게 매달려 있지 않은가.
하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기에 하벨은 살짝 얼이 빠진 채로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이상함을 느낀 건 자신뿐인지, 다른 사람은 그저 차분히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뭔가…….'
그때, 근처에 앉아 있던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과 눈이 마주쳤다.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질적인 감정이 그의 눈에 보였다.
짙은 행복함.
이상했다.
하벨은 본능적인 묘한 감각에 짧게 호흡을 참으며 바로 용왕의 힘을 끌어와 물을 만들어냈다.
몽글몽글.
하벨의 손아귀에 물이 잡혔다.
착!
하벨과 눈을 마주쳤던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이 느닷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꼬리가 과할 정도로 길어지며 미소라기에 어딘가 괴이했다.
그는 두 주먹을 쥐고 있었고, 목에 핏대를 가득 세웠다.
"코스모피안 왕국을 위하여!"
말과 함께 꽉 쥔 두 주먹을 풀면서 땅으로 힘차게 내렸다.
'설마, 이건.'
하벨은 두 물체가 떨어지는 보았다.
물을 움직여 단번에 움켜쥐었다.
'미치인…….'
누가 보아도 이건 폭탄이었다.
하벨은 놀란 눈을 하며 놈을 보았다.
놈은 또 웃었다.
저 웃음과 손아귀에서 짙은 화약 냄새가 밀려오자 속이 울렁거렸다.
당장 토악질이 나올 만큼 끔찍함까지 일어나는 바람에 하벨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런 장면을 어디선가 보았다.
그게 어디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보글보글!
단번에 만들어진 물이 놈을 감쌌다.
이건 자신의 물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자 룬델이 보였다.
괜찮을 거라는 확신이 담긴 눈빛.
이제 괜찮을 거라는 다독임.
룬델은 폭탄이 터질 수 없게 점점 물을 줄여 거센 압력으로 찌그러트렸다.
"에이, 여길 봐야지."
하지만 다른 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자신만 들을 수 있게 작게 낸 목소리에 하벨은 눈동자를 돌리다 달려오는 아라와 카샬을 보았고, 놈을 찾았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사람들이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진짜인데?"
사람들 틈에 섞여 놈이 슬쩍 내린 옷 사이로 폭탄이 우르르 보이자 하벨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저건 장난이 아니었다.
하벨은 자신의 근처에서 나타나 옷자락을 붙잡은 레디나를 거칠게 밀치며 소리쳤다.
"도망쳐!"
"도련……."
"명령이야!"
레디나의 눈동자 곤혹감이 깃들었지만, 하벨은 앞으로 나아가며 이를 생각할 틈도 없이 바로 물을 끌어왔다.
'…이번에는 달라야 해!'
무엇이.
자신이 뭘 생각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할 수 있을 만큼, 아니 물 한 방울까지 쥐어짜는 기분으로 끌어왔다.
온몸의 핏줄이 곤두서는 게 느껴졌고, 코피가 후두두 떨어졌지만, 하벨은 그 무엇도 멈추지 않았다.
'최대한 많이!'
물이 하벨 주변을 감쌀 만큼 모였다.
'더 많이!'
언제나 손아귀에 가득 움켜쥔 자신의 힘을 원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팟.
억지로 쥐어짠 만큼 간절함이 가득하던 하벨의 오른쪽 눈에 핏줄이 터져 붉게 물들었다.
"빵!"
놈이 장난스럽게 꺼낸 그 말과 함께 거센 빛이 새어 나오며 뜨거운 열기가 몰아쳤고, 하벨은 만들어낸 물을 펼쳐 방패처럼 사람들 앞에 뒀다.
콰아아앙!
쾅!
하벨의 시야를 밝은 빛이 앗아버렸다.
어떤 힘이 자신을 감싸는 듯했지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비명도 채 나오지 않을 만큼 강한 통증이 밀려오자 몸에 감각이 사라졌다.
의식을 얼마나 잃고 있었을까.
삐이이이.
귓가에 소리가 사라지고, 눈을 떴지만, 앞이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하벨은 당황하지 않고 손가락을 움직여보며 몸의 반응을 살폈다.
손가락은.
'움직인다.'
발가락 역시 움직였다.
이러면 괜찮았다.
'…용용이다. 용용이가 나를 감쌌어.'
하벨은 폭발에 휘말리기 전에 자신을 감싼 따뜻한 힘을 떠올렸다.
이전에도 느껴본 힘이었다.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는지 격한 아픔이 살을 깊게 긁자 신음이 절로 나왔다.
"…으으."
하벨은 제 몸을 확인할 새도 없이, 한순간 돌아온 시야에 앞을 보았다.
자욱하게 깔린 흙먼지 사이로 터진 살점과 붉게 번진 피가 괴상한 냄새와 섞여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더 너머에 너덜너덜한 방어 마법이 언뜻 보였지만, 하벨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두른 물을 찾았다.
대체 어디까지 자신이 튕겨 날아왔는지 몰라도 물이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섬뜩해질 무렵, 자기는 아직 건재하며 자신에게 알려주는 것처럼 귓가에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힘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건 하나를 의미했다.
'…살렸다.'
자신의 힘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느껴졌지만, 가슴이 뛰었다.
왜인지 몰라도 울컥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살렸다……!'
오로지 그 생각만 들던 차 입안에 피 맛이 돌았다.
뭔가 몸에서 흘러내리는 것 같았지만, 하벨은 앞으로 천천히 기어나갔다.
아직도 '삐이'하며 울리는 소리에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엔 어려웠다.
"…살았어? 이걸?"
흙먼지 틈으로 누군가 하벨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우성과 혼란으로 가득 찬 소리 속에 묻힐 수 있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대단하다. 물 마법사라는 건 정말 특별하구나."
악의가 전혀 섞여 있지 않은 말 속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그야 그럴 것이 하벨의 몸에 박힌 폭탄 파편이 상당해 움직일 때마다 피가 줄줄 새어 나오고 있지 않은가.
"아플 법도 한데. 장한 일도 하고."
누군가의 시선이 하벨이 바라보는 쪽을 향했다.
아마 지금 하벨이 제정신이 아니라 모르겠지만, 저 물로 많은 사람을 구했다.
하벨이 만든 물 뒤편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얼빠진 채로 주저앉아 있자 누군가는 웃었다.
"이러니까 갑자기 생각이 확 달라지네. 지금 네가 죽으면 너무 아쉽겠어. 좋아, 한 번은 살려줄게."
누군가는 키득거리며 손가락을 튕기고는 연기 속에 몸을 맡겼다.
순간 하벨의 시야를 가리던 연기가 걷히자 거친 숨을 몰아쉬던 하벨의 눈이 커졌다.
'이런.'
자신의 시야를 가리던 연기가 갑자기 사라진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시체 틈에 누군가가 꿈틀거렸다.
이미 팔 하나가 폭탄에 날아갔음에도 조금 전 자신이 보았던 폭탄과 똑같이 생긴 걸 내려놓는 모습에 집념을 벗어난 강한 집착마저 느껴졌다.
'미치이인…….'
하벨은 경악했다.
조금 전 자신이 봤던 폭탄보다 더 많은 수가 우르르 나오고 있었다.
자신은 갑자기 주변에 걷어진 연기 때문에 알아챘을 뿐, 사방에 퍼진 화약 냄새와 여전히 자욱한 연기, 그리고 시체 속에 숨어 있는 저 사람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는가.
만약 저 폭탄이 자신을 찾으러 온 정령 기사들과 왕실 기사들이 몰려오는 도중에 터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저놈을 죽여야 한다.'
저놈의 목을 베어내기만 하면 모든 사태를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하벨은 숨을 몰아쉬며 용왕의 힘을 끌어왔다.
"…쿨럭!"
갑자기 피가 쏟아졌다.
하벨은 붉은 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물이 조금도 반응하질 않았다.
마치 지금은 힘을 쓰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처럼 손이고, 발이고 온몸이 떨려와 시야까지 흔들렸다.
'이러지 마라.'
하벨은 용왕의 힘을 끌어오고자 다시금 억지로 물을 움켜쥐는 감각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그냥, 내가 평소에 쓰는 만큼만, 딱 그 정도면 되니까 제발, 말을 들으라고!'
아라가, 정령이 없는 이상, 자신이 가진 건 오직 용왕의 힘뿐이었다.
'빨리!'
눈앞에 벌어지는 사태도 막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한스러웠다.
다시금 하벨의 입가에 피가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멈추질 않았다.
한쪽 눈동자가 푸르게 물이 들다 꺼지기를 반복하던 차 비수가 날아와 놈의 머리를 꿰뚫었다.
푸욱!
'…레디나?'
하벨은 죽어버린 놈을 바라보았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아니었다.
레디나가 아니었다.
화르르르륵!
랜턴에 밝은 빛이 어렸고, 누군가 하벨의 손을 잡았다.
아직도 웅웅 울리기는 하지만,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였다.
하벨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그자다.'
칼리우스를 찾으라고 언급했던 그자.
하벨이 눈동자를 굴리자 그자의 목소리가 하벨을 찔렀다.
"지금은 안 됩니다, 용왕님."
'…….'
하벨은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용왕이라니.
그 단어를 어떻게 아는 걸까.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고개를 돌리자 그자가 보였다.
얼굴이 가려 있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몰려왔다.
"당신의 힘은 결단코, 당신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왜 그렇게 무리하십니까. 물이 움직이지 않는 건 용왕님의 몸이 위험하기 때문이잖습니까."
또다시 이어진 용왕이라는 말에 하벨은 혼란스러웠다.
'누구야?'
"아프지 않으십니까?"
그자는 하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너, 대체 누구야?'
하벨의 눈빛에 날이 섰다.
"걱정하지 마세요, 용왕님. 곧. 곧 찾아뵙겠습니다."
실실 웃음이 섞인 목소리를 내며 그자는 손을 들어 하벨의 얼굴을 쓸었다.
강제로 눈이 감기고 다시 떴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숨소리가 길게 이어지고, 하벨의 눈동자가 허공을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