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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78화 (178/415)

178화. 무너지기 전

* * *

마치 제 물건을 가져가는 것처럼 너무도 당연한 소리에 누구 하나 하벨에게 반박하는 이가 없었다.

정말로 마나가 있고, 물이 나타나지 않았던가.

저기서 뭘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하벨은 테이블에 손가락을 두드리며 눈동자를 굴리다 바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바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경악하는 저 눈빛에 하벨은 행복해하며 웃었다.

―…당연히 가능해! 도련님이 확인하려고 했을 때 내가 내 마나를 이용해서 도련님 손바닥에 착 붙게 할 수 있어. 그 정도는 쉬워.

칼리우스가 두 주먹을 쥐고 힘차게 말하지 않았는가.

자신에게 마나가 있을 리가 없었다.

마법 아이템에 반응하는 저 마나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칼리우스가 가진 마나였다.

'무려 용의 마나인데 푸른 불꽃이 조금 작은 게 아닌가 싶은데.'

하벨은 칼리우스를 넌지시 바라보자 그가 활짝 웃었다.

나 잘했지?

칭찬을 바라는 저 눈빛에 하벨은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

"아니, 아니, 이게 진짜란 말입니까! 진짜, 물 마법사라고요?"

조금 전에 자신에게 시비를 걸었던 레놀드 왕국의 대신이 현 사태를 믿지 못하고는 소리쳤다.

그 에르티안 왕국에 물 마법사가 나오다니.

"아시다시피 이 방에 정령은 없습니다. 공정성을 위해 이미 저쪽에 서 있는, 다른 정령 기사분이 계속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벨은 분위기를 탔다.

다시금 못을 박기 위해서였다.

"믿기 어렵다면 물어보시죠."

하벨은 정령 기사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방금 저 마법 아이템이 고장이 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그렇게 들었습니다."

레놀드 왕국의 대신 중 한 명이 헤일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모든 증거가 드러났음에도 레놀드 왕국의 발언권이 가장 강하기에 꺼낼 수 있는 말이었다.

헤일리스 역시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이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분명히 마법 아이템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하벨의 시종에게 반응하지 않았을 뿐, 하벨한테도 자신에게도 제대로 반응하지 않았던가.

이런 경우 둘 중 하나였다.

하벨의 시종이 마나를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재능이 있거나, 정말로 마법 아이템이 보여준 것처럼 아예 마나가 없는 일반인이거나.

"왜 말을 못 하는 겁니까? 방금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레놀드 왕국 대신의 재촉에 헤일리스는 입이 바짝 탔다.

지금 생각해야 하는 건 왜 마법 아이템이 반응하지 않았냐가 아니었다.

마법 아이템이 고장 나지 않았다고 말하면 하벨은 물마법사가 되지만, 시종은 일반인이라 인정하는 셈이었다.

반대로 마법 아이템이 고장 났다고 말한다면 지금 하벨이 보여준 건 거짓이나 조작이 되어버리지만, 시종에게는 한 번 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헤일리스는 입가를 핥으며 무겁게 말을 꺼냈다.

"…마법 아이템은 정상입니다."

헤일리스는 하벨을 선택했다.

전자든 후자든 하벨의 시종을 납치하려 했고, 하벨을 공격한 일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벨을 데려와야 시종과 하벨 둘 다 데리고 올 수 있지 않겠는가.

"크흠."

레놀드 대신은 헛기침하며 입을 다물었다.

헤일리스가 인정했는데 뭘 더 부정할 수 있을까.

"들으셨습니까?"

하벨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장 목소리를 높이며 대신들과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협회장이 친히 알려준 대로 마법 아이템이 정상이라면 제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자신의 머리 위를 가리켰던 화살표를 흐트러트리며 손가락으로 불러와 흔들고는 그대로 사라지게 했다.

"보시는 것처럼 물을 사용할 수 있고요."

하벨의 시선이 바안에게 향했다.

이제 결론을 내리는 건 바안과 대신들의 몫이었다.

하벨은 혹시 코피가 흐를까 조용히 코밑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이렇게 확실한 증거를 두고 더는 꺼낼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더 확인하고 싶은 대신들과 귀족들이 있습니까?"

이렇게 증거가 또렷한데 뭘 더 확인하겠느냐 할 수 있겠지만, 바안은 그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잠깐 기다렸음에도 어떤 말도 없자 빠르게 다음으로 넘어갔다.

하벨이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비록 거짓이라도 물 마법사가 에르티안 왕국에 나타났다는 사실은 두 팔 벌려 환영할 사실이 아닌가.

"하면 대신들과 귀족들끼리 의논해 하벨 공이 물 마법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손을 들어주세요."

바안은 통보하고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그런 물음을 담아 하벨을 쳐다보지만, 그는 싱긋 웃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정령사가 마법사가 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바안이 그렇게 골똘하게 생각하던 차 누군가 손을 들었다.

샬룸이 활짝 웃으며 말을 꺼냈다.

"레놀드 왕국의 대신으로서 하벨 티에라 공이 물 마법사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이는 레놀드의 왕, 샤르비에 레놀드와 같은 뜻을 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바안의 눈이 잠깐 가늘어졌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모습을 떠나 저 샬룸이라는 사람, 보면 볼수록 어디선가 낯이 익었다.

'내가 어릴 적에 본 것 같은데.'

하지만 바안은 잡생각을 떨치고 현재 상황만을 바라보았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레놀드부터 동의한 상황이 찝찝했다.

분명 다른 나라들 입장에서 물 마법사의 등장은 마냥 반가운 게 아니었으니.

'무슨 꿍꿍이지?'

바안은 아버지한테서 들어왔던 레놀드와 지금 마주하는 레놀드를 파악하고자 계속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바안아. 레놀드 왕국은 가장 기묘한 곳이란다.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가장 파악하기 어려우며 이를 제일 잘 숨기는 곳이기도 하지.

착.

그때, 엘라힘이 손을 들었다.

'설마 시엘느까지?'

바안은 손가락을 매만졌다.

"신의 종인 저 역시 신과 시엘느라는 이름을 걸고 하벨 티에라 공이 물 마법사라는 사실을 인정하겠습니다."

엘라힘은 하벨을 너무도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이런 기적을 볼 줄이야. 신께 이 감사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벨 티에라 공."

―신성 국가 시엘느에는 알 수 없는 신비함이 존재한단다. 모두가 그 신비함에 매료가 되어 같은 생각을 하곤 하지.

바안은 자신의 눈으로도 그 신성한 힘을 보았다.

줄줄 흐르던 하벨의 식은땀이 단번에 멈추고, 안색도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아버지 말씀대로라면 저 신관의 생각은 곧 시엘느 모두의 생각이기도 하겠지.'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바안은 일단 돌아가는 상황에 안도했다.

레놀드 왕국부터 하벨이 물 마법사라는 사실을 동의했고, 이어 신성 국가 시엘느까지 동의한 와중에 다른 나라들이라고 섣불리 반대하겠는가.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을 대표해 저 역시 동의하는 바입니다."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까지 손을 들었다.

현재 가장 주목해야 할 나라가 아닌가.

하벨이 일단 용의 선상에서 제외하라고 했지만, 정말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건지 아닌지 자신은 여전히 지켜보고 있었고, 커다란 세 나라 중 에르티안 왕국에 가장 깊은 뿌리를 박아 마음이 더 흔들렸다.

'…개인적인 감정은 눌러라.'

바안은 저들의 의도가 무엇이든 현 상황을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강대국 세 나라가 동의한 상황에서 이제 누가 반대를 할까.

연신 눈치만 살피던 못난 에르티안 왕국의 귀족들까지 손을 들었다.

하나씩 올라오던 손이 모두 천장을 향하자 하벨은 그 손들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바안은 지금 하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척 궁금했다.

지금까지 입가에 걸려있던 하벨의 미소도, 강한 자신감을 내보였던 눈빛도 싹 가라앉기에 덩달아 하벨 주변에 흐르던 분위기마저 가라앉았으니.

모두를 바라보는 하벨의 시선에 당연함만 엿보여 저 진지한 표정에 바안은 개구쟁이였던 하벨의 모습이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저는."

하벨이 겨우 한마디를 꺼냈음에도 피부를 스치는 어떤 감각에 신경이 곤두섰다.

이는 바안 자신만 느낀 게 아닌지 현 상황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레놀드 왕국의 대신들마저 입을 살짝 벌리며 하벨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부터 물 마법사입니다."

당연한 걸 언급하는 말에도 묘한 전율마저 돋아났다.

그 절제된 말로 자신이 물 마법사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내지르는 것만 같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해 누군가 내는 숨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릴 수가 없었다.

모두가 동의했으니 당연한 침묵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누구 할 것 없이 하벨이 바라보는 시선에, 손끝에, 목소리에 하나씩 압도된 기분을 느꼈다.

점점 거대해지는 하벨의 모습에 바안은 넋을 잃다 '톡톡' 가볍게 두드리는 작은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바안은 참았던 숨을 토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눈을 몇 번이나 깜박여 바라본 하벨은 그렇게 자신을 혼내고 있었다.

'…아.'

조금 전 하벨에게 보았던 것들이 아지랑이처럼 느꼈지만, 바안은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떠올리고는 목소리를 냈다.

"좋습니다. 이로써 하벨 티에라 공은 모두의 동의 받아 물 마법사가 되었습니다."

짝짝짝!

바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라르웬이 손뼉을 쳤다.

헤일리스 역시 점점 커지는 박수에 마지 못해 손뼉을 마주했다.

앞으로 헤쳐나갈 게 많더라도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하벨이 마법사가 되었으니, 협회장으로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척 많았다.

박수가 이어지던 참에 바안은 조금 전 기사가 넘긴 종이를 들었다.

"조금 전 내 손에 종이는 방금 벌어진 습격 사건을 조사한 결과입니다."

틈새를 노리고 찌른 바안의 말은 모두의 귀에 꽂혀버렸다.

"조사 결과를 따르자면 마법사들은 심부름을 가는 저 어린 시종을 끈질기게 쫓아갔고, 이를 하벨 공이 알아채 말렸습니다. 그 와중에 몸싸움이 벌어졌고요. 하지만 그 뒤 1시간도 채 흐르지 않아 하벨 공을 습격했습니다. 협회장, 이는 사실이 맞습니까?"

지금 하벨이 물 마법사라는 사실에 집중되어 마법사 협회가 벌인 저 발칙한 사건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지 않던가.

잊을 뻔한 사실을 바안이 다시 상기시키자 헤일리스는 모래알을 씹어 삼키는 기분을 느꼈다.

"전하. 저 역시 이번 사태를 무척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확실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면 이번에 일어난 소란에 대한 책임에도 마찬가지인 입장입니까?"

바안의 이어진 질문에 헤일리스는 잠깐 하벨을 바라보았다.

하벨이 마법사가 되었다.

결국, 저 문제는 하벨이 해결 가능한 문제였다.

완전히 그를 손에 넣는다면야 얼마든지 덮고, 벗어날 수 있는 문제가 되었다.

이제 곧, 놈의 목에 목줄을 채울 시간이 있었고.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헤일리스가 고개를 숙이지만, 바안은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렇게 증거가 명확함에도 발뺌하다니.

"전하."

그때, 하벨이 목소리를 냈다.

순간, 사람들은 웅성거리던 말을 멈췄고, 헤일리스는 곁눈질로 하벨을 보았으며 바안은 왜인지 심장이 덜컥 주저앉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왜 갑자기 자신을 부른 건지.

이 사태를 해결하지 못했기에 질책이라도 하려는 건지.

"저 사건과 별개로 전하께 부탁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벨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마법사가 벌인 일은 꼭 지금이 아니라도 문책할 수 있지만, 이건 아니다. 반드시 지금이어야만 한다.'

"말해보세요."

"이 영광을 나중에 선왕께도 올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억울하게 돌아가셨으니 백성 된 도리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하벨이 꺼내는 말은 흡사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여기서 저 사건보다 더 큰 에르티안 왕국의 선왕 사건을 꺼낼 줄이야.

하지만 바안은 아주 듬직했다.

선왕의 이야기는 지금 모두가 꺼리는 이야기였기에 아무리 자신이라도 해도 함부로 꺼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하벨은 짧지만, 용의자 모두가 있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할 수 있게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공이 그렇게 생각해주어 무척 고맙게 생각합니다."

바안은 잠깐 미소를 지었다.

말 만큼이나 고마움이 깊게 베여 있었다.

"게다가 공이 말한 대로 선왕께서 억울한 죽임을 당하셨죠."

바안의 시선은 용의자들을 향해 돌아갔다.

레놀드 왕국.

코스모피안 왕국.

신성 국가 시엘느.

이 세 나라를 포함한 작은 나라들.

바안의 눈동자에 핏줄이 선 채 저놈들을 전부를 곱씹듯 말을 꺼냈다.

"이곳 왕실에 쳐들어와 내 아버지를 죽이고 도망간 놈을 반드시 쫓을 생각입니다. 하여 놈을 갈기갈기 찢어 내 아버지께 뿌리기 전에 공께서 넋을 위해준다니. 이 얼마나 기특합니까."

"아닙니다, 전하.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벨은 누구든 도중에 끼어들지 못하게 먼저 고개를 숙여 말을 잘랐다.

선왕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 났다.

"전하. 하벨 공에게 말을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조금 전 일이 그냥 물 흐르듯이 흘러갔기 때문일까.

헤일리스는 당당하게 바안에게 요청했다.

"허락하겠습니다."

바안의 허락에 헤일리스가 방긋 웃으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이제 공은 어엿한 물 마법사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러면 곤란한데.'

속셈이 너무도 빤히 보였기에 하벨은 우스웠다.

'좋다. 이렇게 나온다면야.'

하벨은 헤일리스를 위해 선물 하나를 주고자 했다.

"모든 마법사는 등록된 마법사여야 하기에……."

"아뇨. 저는 필요 없습니다."

하벨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애초에 마법사가 등록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본인이 마법사임을 숨기고, 위험한 일을 벌이기 전에 사전에 막겠다는 장치가 아닙니까?"

"예. 그 의도가 맞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그럴 필요가 없겠네요. 이제 제가 물 마법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고, 마법사이기 전에 티에라 가문으로 엮어있어 위험한 일 역시 벌일 생각도 없습니다."

"그런 자잘한 말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건 모든 마법사라면 당연히 져야 할 의무입니다."

헤일리스는 마음에도 없는 당연한 논리를 펼쳤고, 하벨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겨우 한 명뿐인 물 마법사에게도 족쇄를 씌우고 싶다는 겁니까?"

당장 헤일리스의 표정이 구겨졌다.

저건 그 누구보다 마법사들이 바라던 것이었다.

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 등록되어야 하는 현실을 바꾸는 것.

"…그래야 한다면요."

헤일리스의 목에 핏대가 바짝 섰다.

"이번에는 다를 수 있습니다, 헤일리스 씨."

하벨은 헤일리스의 눈에 깃든 혼란을 보며 너무도 즐거웠다.

지금 자신은 헤일리스가 바라던 걸 꺼내 흔들었다.

처음 마법사가 권력에 기대고자 바친 게 바로 마법사라는 자존심을 바치는 일이었을 지도 몰랐다.

그 결과 지금 모든 마법사는 등록되어야 하며 마법사라는 이유로 손목에 문양을 새기는 제도가 고착됐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들의 힘이 강해짐과 동시에 개 목걸이처럼 채워져야 하는 사실에 불만이 점점 쌓이고 뒤에서 계속 딴짓을 하는 게 분명했다.

그럼 저들이 지금 무얼 가장 바라겠는가.

바로 제일 처음 내려놓은 마법사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저부터 달라지는 게 어떠십니까?"

그렇기에 하벨은 독이든 달콤한 말을 내밀었다.

"제가 마법사들의 희망이 되겠습니다."

헤일리스가 자신에게 원했던 역할을 그녀에게 내보이며 흔들었다.

천천히.

먹음직스럽게.

'이걸 먹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을 텐데.'

원래 이걸 주장해야 하는 건 헤일리스였어야 했다.

지금 이 순간이 변화의 시작이라는 그녀 역시 직감했을 테지.

"협회장의 권한으로 특별히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애원하듯, 부탁하듯, 그렇게 매달리기까지 한 하벨의 말투에 헤일리스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하벨은 자신에게 정당성을 내밀었다.

아주 탐스럽게.

저게 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거절하기에는 너무도 달콤하지 않은가.

저게 시작이 되어야만 했다.

자신의 계획을 앞당길, 아주 좋은 변화가 될 수 있었다.

헤일리스는 주먹을 꽉 쥐고, 배에 힘을 주고, 숨을 들이마시며 말을 토해냈다.

"허락… 하겠습니다."

결정은 이미 내려졌다.

헤일리스는 온몸에 빠지는 힘을 느끼며 불안한 시선으로 하벨을 쳐다보았다.

"부디 이를 존중해주셨으면 합니다, 전하."

하벨은 이를 덥석 받아 바로 바안에게 요청했다.

헤일리스마저 흔들리는 눈으로 바안을 쳐다보았다.

설마.

설마.

"좋습니다. 나는 공의 의견을 존중하겠습니다."

바안은 하벨의 의도를 알아챘기에 잠깐 고민하고는 말을 꺼냈다.

"공은 이제 우리 모두의 희망이기도 하지만, 마법사들의 희망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공은 아주 특별하기에 허락하는 겁니다. 모두가 공의 감시자가 되기에 마법사들을 등록해야 했던 취지와 조금도 벗어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고개를 숙인 하벨의 미소가 길게 올라왔다 사라졌다.

마법사 협회가 그토록 손에 넣고 싶었던 것이 단 5분도 되지 않고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

하벨은 바안에게 고개를 숙인 뒤 모두를 향해 바라보았다.

헤일리스와 마법사들이 마치 모든 걸 잃은 듯한 허망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자, 하벨은 더욱 환하게 웃었다.

'보고 있나?'

사라진 줄 알았던 물 마법사.

공식적으로 마법사임을 인정받았지만, 등록되지 않은 최초의 마법사.

특별한 마법사 위에 더 특별한 마법사.

그리고 마법사 협회를 부술 독이 바로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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