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편안하게
* * *
"죄송합니다, 손님. 제가 잘 교육하겠습니다."
사장 역할을 담당하는 놈이 고개를 숙이자 하벨은 싱긋 웃었다.
'보고 있나, 레디나?'
지금쯤 레디나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을지 눈에 훤했다.
"아니, 그렇게까지 고개를 숙이면 내가 민망하지 않은가. 꼭 내가 뭘 잘못한 것처럼 말일세."
하벨의 시선이 직원 역할을 담당한 검은 달 일원에게 향했다.
"자네 오늘, 운이 좋은 줄 알아. 이런 사장 밑에 일하는 것도, 나같이 마음씨가 넓은 손님을 만난 것도 행운일 테니까."
"죄송합니다, 손님.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진작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는가?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이. 자자, 과거 일은 잊고 이 가게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으로 가져와 보게."
하벨은 그제야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두 사람을 물렸다.
창밖을 바라보려다 옆쪽이 따끔거리에 고개를 돌렸다.
많이 해보셨나 봅니까?
눈빛으로 말을 꺼내는 카샬을 향해 하벨이 싱긋 웃어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이건 다 연기다, 카샬.'
[씨잉! 우리 대장 욕하지 마!]
안쪽에서 아라가 언성을 높이자 하벨의 미소가 번져갔다.
'놈들이 내 뒷담화와 무언가를 하는 모양이네.'
하벨이 자리에 앉자 정령 기사 중 단장이 자신에게 걸어왔다.
"도련님."
"말해보게."
단장은 몸을 숙여 목소리를 낮췄다.
"이 가게, 뭔가 수상합니다."
하벨은 다 알지만, 뭐가 수상하냐는 눈빛을 보냈다.
"직원들의 움직임이 다릅니다. 정령님들의 움직임도 평소와 다르고요."
'그건 내가 아라를 통해서 부탁한 건데.'
하벨은 아라를 통해 정령 기사들에게 말하지 말고 가게 내부에 숨겨진 비밀 통로이자 진짜 지부를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다.
―비밀 통로? 오, 이거 재밌겠는데? 우리는 이런 거 진짜 좋아해.
아라가 속닥거리는 말에 정령들마저 신나 하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지 않았는가.
"일단, 경계해."
하벨은 입을 가리며 말했다.
수상하다는 의미에 여기에서 떠나야 한다는 말이 뒤섞여 있겠지만, 오늘은 떠날 수 없었다.
검은 달이 하벨 티에라의 암살 의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이번 기회는 정령 기사들에게 있어 앞으로 맞붙을 상대를 알,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모르는 척하고 있겠습니다."
단장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부하들에게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평소처럼. 단, 주변을 경계해.
그 신호에 기사들은 정말로 평화롭게 밥이나 먹으러 온 것처럼 긴장을 푸는 척하며 잡담을 시작했다.
"그런데 도련님. 제가 보기에 도련님께서 이런 모욕을 받고 굳이 이곳에 식사하실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쪽 가게가 좋아 보이질 않습니까?"
카샬은 이미 꺼져가는 불씨에 기름을 살짝 붓자 하벨은 창문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런 곳은 매번 가니까. 가끔 이런 곳도 오고 싶었어."
얄미운 말이었지만, 하벨의 목소리에는 악의는 없었다.
"상태는 어떠십니까. 괜찮으십니까?"
헤레스의 물음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방금 일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살짝 어지럽네."
"어지러움이 심해지면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도련님."
헤레스가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왜 그래?"
"이건 개인적인 부탁입니다. 제가 독 검사를 더 확실히 할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헤레스가 내뱉는 저 또렷한 말은 하벨이 아닌 놈들에게 꺼낸 말이었다.
검은 달, 네놈들이 무슨 짓을 해도 독은 소용없을 거란 걸.
이 역시 미리 헤레스와 입을 맞춰서 나온 말이었다.
'귀를 쫑긋 세워서 듣고 있겠지? 그러나 어쩌나. 이게 함정인데.'
하벨은 싱긋 웃으며 헤레스를 바라보았다.
"물론이지. 혹시 모르니 다른 사람들 것도 확인해줄래?"
검은 달이 자신을 그냥 보내줄지 아닐지는 어느 쪽도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놈들이 자신에게 사용할 방법 중 독과 관련된 일이 저지됐다는 점이었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도련님."
헤레스 역시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원들로 위장한 검은 달 일원들이 주방에서 차례대로 가져오는 물병을 헤레스가 일일이 검사했다.
안전하다는 사실에도 하벨은 식탁에 놓인 물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은 물을 함부로 먹을 수 없을 뿐인데 조금 전 일을 무마하려는 건지 몰라도 검은 달 일원이 하벨을 보며 친절하게 말을 꺼냈다.
"안심하셔도 괜찮습니다. 정화된 물입니다."
순간, 하벨은 '알려줘서 고맙다'라는 말을 꺼내려다 멈칫거렸다.
지금 자신은 진상이 아닌가.
'나는 진상이다. 나는 진상이다.'
하벨은 속으로 되뇌며 숨을 낮게 내쉬었다.
표정부터 달라져야 했기에 하벨은 한껏 진지하게 한쪽 눈썹을 높이 올렸다.
"갑자기 눈빛이 왜 이래? 되게 수상하게."
"눈빛이라뇨? 그저 물을 드시지 않기에……."
"그거야 먹든 말든 내 맘이지 않은가. 그게 아니라면 혹시 다른 걸 탔는가? 아까 내가 좀 언성을 높였다고?"
"그럴 리가……."
"안 됩니다. 이건 못 먹습니다."
하벨과 직원이 시끄럽게 떠들던 사이 오염도를 측정한 카샬이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먹지 못한다뇨? 방금 독이 없다는 걸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놈은 그 소리에 당황했다.
멍청이도 아니고 대놓고 독을 검사하는데 설마하니 사용하겠는가.
카샬 옆에 서 있던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빙그르르 돌아갔다.
자신이 열심히 냄새를 맡아도 저 물병에 독은 없었다.
'진짜 오염된 물이 완벽히 정화되지 않았나 봐. 이런 걸 매일 검사하고 확인하면 카샬도, 도련님도 엄청 힘들겠어.'
칼리우스는 카샬이 자신에게 연거푸 강조했던 말을 떠올렸다.
―도련님께서는 물의 내성이 없으시니 밖에서 무언가를 드실 때 오염도를 측정해야 해. 만약, 물론 그런 일이 없겠지만, 혹시나 내가 자리를 비우면 다른 건 몰라도 이건 확실히 살펴.
칼리우스는 저 모습에 다시금 카샬의 가르침을 머릿속에 넣었다.
"오염도가 남아 있으니까. 음식값은 더 지급할 테니 음식을 만들 때 완전히 정화한 뒤 가져오게."
카샬은 눈꼬리를 살짝 올리며 물병은 내밀었다.
놈의 시선이 아주 잠깐 매서워졌지만,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덮어버렸다.
물을 가져온 그대로 들고 가는 모습에 하벨은 넌지시 비웃음을 흘렸다.
'실컷 열 받아라. 속에서 부글부글 끓다가 폭발해버려라.'
하벨은 마음껏 웃지 못하는 상황이 마냥 안타까울 뿐이었다.
갑자기 옷자락이 당겨지자 하벨은 슬쩍 시선을 내렸다.
아라였다.
[대장.]
아라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걸었다.
하벨은 듣고 있다는 의미로 다리를 한 번 흔들었다.
헤헤.
아라의 웃음이 살며시 들려왔다.
[있지, 대장. 지금 뭘 발견했다? 곧 이 몸이 들어갈 작은 구멍이 만들어질 거야.]
'……!'
하벨은 웃다 말고 그대로 멈칫거렸다.
아라가 들어간다니. 그 속에 뭐가 있을 줄 알고.
하벨의 눈빛이 가라앉자 아라는 잠깐 하벨의 시선을 피했다.
[거, 걱정하지 마, 대장! 대장이 하는 것처럼 이 몸도 해낼 수 있어.]
"뭘?"
하벨은 참다못해 말을 꺼냈다.
"…어."
갑작스럽게 하벨의 언성이 올라가자 카샬은 박자를 맞출 겸 고개를 숙였다.
아마 아라와 무슨 대화를 나누는 중인 듯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그렇지만, 이 몸이 제일 작은걸. 이 몸은 대장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어!]
'그러니까 왜 너야, 아라야?'
하벨의 표정마저 일그러지자 아라는 옷자락을 꽉 잡았다.
[이 몸도 할 수 있어! 이 몸이 가장 많이 보는 존재는 대장인데, 대장은 뭐든 해내잖아? 이 몸도 그랬으면 좋겠어.]
하벨은 그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 사실을 생각하지 않았는지.
가장 가까이서 자신을 보는 존재가 아라였다.
―이 몸이 대장의 후회가 될게.
아라가 북극여우의 형태로 탈바꿈하며 자신이 했던 후회를 바로 잡아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있지. 대장은 모르겠지만, 아니, 어쩌면 알 수도 있지만, 항상 우리 모두를 보호하려고 애쓰고 있잖아.]
'내가 시작한 일이다. 그건 당연해.'
[그래서 언제나 가장 위험한 건 대장이 늘 맡고 있어. 이 몸은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 대장이 지금 꾹 참고 있다면, 왕일 때, 얼마나 애를 썼는지 이 몸 눈에 계속 보이는걸?]
'그게… 보인다고?'
하벨은 갑자기 아라가 달리 보였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속이 깊지 않은가.
[이 몸은 하나씩 하고 싶어. 이 몸도 있지, 대장처럼 되고 싶어.]
'나를… 나를 닮지 마라, 아라야. 제발.'
하벨은 그 말을 꼭 꺼내고 싶었지만, 그저 아라를 쓰다듬었다.
아라가 하고 싶다는데. 더는 말려봤자 무얼 하겠는가.
[헤헤. 고마워, 대장. 무슨 일이 있으면 이 몸이 소리칠게. 그럼 달려와 줘야 해?]
하벨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아라의 머리를 쿡쿡 찔렀다.
[아라야!]
정령이 아라를 불렀다.
[이리 와야지!]
[오오오. 비밀 통로를 진짜 발견했나 봐. 이 몸은 갔다 올게.]
아라는 조심스럽게 나와 하벨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하벨은 아라 대신 카샬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언짢으십니까, 도련님?"
하벨이 화가 난 듯 보이면서도, 또 속상해 보였기에 카샬은 넌지시 말을 던졌다.
"좀. 아니, 많이."
하벨은 괜히 우습다 싶어 턱을 괴며 괜히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말리는 사람들의 기분이 이랬을까.
음식이 나오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테니, 하벨은 천천히 자신의 감정을 다잡았다.
"…도련님."
칼리우스가 작게 속삭였다.
"왜?"
"나는 아라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충분히 이해해. 나도 그러니까."
아라처럼 자신을 닮아가고 싶다는 저 말에 하벨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체 왜?'
하벨은 그 이유를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말았다.
왜인지 듣고 싶진 않았다.
이전에도 저런 소리를 많이 듣곤 했으니까.
쑥쑥 자라면 용왕인 자기처럼 되겠다는 아이들의 소리를.
'그러니까…….'
탁!
갑자기 누군가 바짓자락을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턱을 괸 채로 아래를 보자마자 하벨의 숨이 저절로 멈췄다.
―…살려… 주세요, 용왕님.
발밑에 그 작은 손으로 자신의 바짓자락을 잡으며 죽어가는 아이가 보였다.
가슴이 철렁거리는 기분이었다.
―너무… 아파요. 아파요… 용왕님.
그때 자신은 무얼 했던가.
―…미안하다.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사과만 하고 있었다.
그 작은 몸에서 저토록 많은 피를 흘리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죽음이 아이를 거둬가지 말라고 피를 막는 일뿐이었다.
―미안하다. 내가 너희를… 구했어야 했는데. 내가… 왕으로서 너희를 보호했어야 했는데. 내가…….
자책이 담긴 자신의 목소리에 하벨의 얼굴이 가득 일그러졌다.
후회와 자책밖에 없는 자신을 대체 왜 닮고 싶다는 건지.
그 작은 아이들조차 구하지 못한 멍청이가 아닌가.
"…도련님?"
누군가의 손짓에 하벨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몸이 많이 좋지 않으신가요?"
헤레스의 물음에 하벨은 차차 귀에 닿는 소리를 의식했다.
가게 안은 어느새 기사들이 떠드는 왁자지껄한 소리로 가득했다.
'하.'
하벨을 짧게 숨을 내쉬었다.
곧 걱정이 담긴 헤레스의 표정에 말을 꺼내려다 멈췄다.
가뜩이나 자신이 하벨 티에라 몸에 빙의됐다는 사실을 몰라 저지른 오진으로 괴로워하지 않는가.
이 말을 꺼내면 짐을 짊어지게 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아니야. 괜찮아."
하벨은 애써 웃었다.
쿵쿵.
하지만 심장은 아직도 뛰고 있었다.
'방금 그건 환각인가.'
이전에 수족이 자신의 다리를 붙잡았던 기억도.
이번에도.
―가엾은 널 위해 하나 말해주지. 곧… 그분이 오실 거다. 그분이 널 찾아갈 거다.
원치 않게 재차 떠오른, 수족이 지껄인 말에 하벨은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빙의의 부작용인가. 아니면 대체 뭐지?'
"도련님."
하벨의 안색이 창백해지자 헤레스는 다시 조심스레 하벨을 불렀다.
"뭐든 말씀해주세요. 그 일은 신경 쓰지 마시고요."
하벨이 자신의 오진을 계속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왜 영혼이 바뀌었음에도 계속 자신의 주치의가 되는 거냐며 물었을 테니까.
"정말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평소에는 입이 구름처럼 가벼우신 분이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카샬마저 하벨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방금 자신이 보아도 하벨의 상태가 뭔가 이상했다.
바닥에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님에도 아래를 보는 하벨의 시선에 죄책감이 깊게 어렸으니까.
"…나중에."
하벨은 일단 뒤로 미뤘다.
아무리 주변 분위기가 풀어졌어도 이곳은 적진이었다.
하벨은 숨을 깊게 내쉬다 칼리우스와 시선이 마주했다.
칼리우스의 뾰족한 눈동자가 살짝 가늘어졌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꾹 참고 있었다.
'…용용이가 나한테 또 뭘 본 건가?'
자신의 꿈이든, 의식 속이든 균열이 일어났을 당시, 칼리우스가 자신을 향해 다가왔던 검은 손을 보았다고 했다.
이것 역시 또 검은 손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걸까.
하벨 역시 궁금했지만, 일단 삼켰다. 고민해봤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
주방 쪽에서 침샘을 자극하는 냄새에도 하벨은 아라를 떠올렸다.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하벨은 초조함과 불안함, 그리고 혼란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기다렸다.
쉭.
그때, 작게 움직이는 무언가가 다가와 하벨의 다리에 찰싹 붙었다.
익숙한 감각에 금세 하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방금 느끼던 복잡한 생각들이 한 번에 날아가 버렸다.
[대자아앙!]
아라가 소곤소곤하며 소리쳤다.
[비밀 통로가 맞았어! 저기 밑에 사람들이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