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진상(3)
* * *
"자, 잠시만요."
페트리오가 바로 하벨을 말렸다.
"도련님. 진정하십시오. 지금 열이 높아 제대로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겁니다."
"아니야, 좀도둑."
하벨이 부정해보지만, 카샬이 바로 치고 들어왔다.
"시비는 저한테 거십시오. 오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을 테니 생각을 달리하셨으면 합니다."
"도련님. 이거 몇 개인가요?"
레디나가 손가락을 내밀자 하벨은 기가 찬 목소리를 냈다.
"두 개잖아."
"…시야가 흐릿하신 건 아닌데, 확인이라는 말이랑 시비라는 말이 왜 같이 나왔을까요?"
의문이 가득한 레디나의 목소리에 하벨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다들 진정해."
하벨은 헤레스까지 말이 나올까 일단 그들을 진정시켰다.
"마차에서 무슨 일 있었어? 왜 이렇게 극단적이야?"
"극단적인 사람이 그런 말을 꺼내면 안 될 텐데요."
카샬의 고개가 살짝 삐딱해졌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리인지.
"진정하세요, 도련님."
헤레스는 하벨을 살살 달랬다.
"아니, 봐봐. 나는 진정하고 있다니까. 언제 내가 그냥 막 내지르는 거 봤어?"
하벨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응했지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이는 칼리우스와 아라뿐이었다.
아라는 이 와중에 갸우뚱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하."
하벨은 뭔가 배신감이 밀려와 가슴이 꿀렁거렸다.
다들 자신을 저렇게 보고 있었다니.
억울했다.
"자자, 다들 들어봐."
하벨은 얼굴을 쓸어내린 뒤에 사람들이 자신의 곁에 오지 못하게 통제에 들어간 정령 기사들을 가리켰다.
"이번에는 내가 기사들을 데려왔어."
"그렇습니다. 평소와 달리 데려오셨습니다."
페트리오가 고개를 끄덕였고, 레디나가 속삭이듯 말을 꺼냈다.
"사실 저도 그게 의문스럽긴 했어요. 지금까지 도련님께서 어떻게든 기사들을 따돌리기 바빴는데 이번에는 데려오셨잖아요?"
"내가 얼마나 이 몸을 조심스럽게 다루는지 보여주려고 데려왔지."
하벨은 지금까지 자신이 사용하지 않은 한 가지 패를 내보일 셈이었다.
티에라 가문의 막내아들.
그 좋은 걸 잊고 있었던 건 절대로 아니었다.
자신이 그 부분을 건드려도 될지 말지 깊게 고민했고, 어디까지 발을 디뎌도 될지 계속 생각했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이번에는 저들을 개입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검은 달은 지금처럼 계속 숨어서 활동하고 있을 테고, 그런 놈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무엇이겠는가.
'정체든 뭐든 드러나는 거겠지.'
하벨은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를 하며 레디나를 보았다.
"혹시 괜찮다면 건드려도 괜찮아?"
"좀 위험해… 질 텐데요?"
"어차피 지금도 그렇게 평화로운 건 아니잖아? 네 덕에 편안함을 느끼는 거지. 솔직히 좀 억울하단 말이야. 놈들만 치사하게 혼자 뒤에서 바라보는 건 그렇잖아. 위험부담을 안으려면 같이 안아야지. 그게 아니라면 왜 나를 건드렸을까?"
하벨의 눈매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자신이 왜 당연하게 덜덜 떨고 있는 토끼가 되어야 하겠는가.
놈들이 건드린 게 토끼가 아닌 호랑이라는 걸 알려줘야지.
'…음. 토끼 같은 호랑이가 좋은가?'
* * *
[…대장.]
아라가 하벨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하벨 주변에 기사들이 있는 것도 신기했고, 저택이 아닌 밖에서도 정령들이 날아다니며 꺄르르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참 낯설었다.
[리본이 너무 예쁜데?]
[파란 리본이야.]
[아라 네가 성장하면서 생겼다며? 넌 참 보면 볼수록 재미있어.]
[오, 키도 조금 자랐어. 장하다, 아라야.]
아라는 자신은 물론, 자신의 리본을 건드리는 정령들의 손길에 정신을 차리기가 너무 어려웠다.
[이, 이 몸은 지금 뭔가 기분이 이상해. 오늘 너무 많은 시선을 받고 있어. 이 몸이 태어나고 처음이야.]
"오늘은 익숙해져야지, 아라야."
하벨은 입꼬리가 가득 올리며 작게 속삭였다.
아라가 정령들에게 사랑받는 것도 기뻤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오랜만에 받는 시선이 퍽 나쁘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카샬이 넌지시 물었다.
"안 괜찮을 게 어디 있어?"
"막 속이 울렁거리나, 진땀이 흐르는 것도 없습니까?"
"카샬."
"예, 도련님."
"나는 달라."
하벨은 잠깐 걸음을 느리게 하며 카샬을 오래 바라보았다.
싱긋 웃는 하벨의 웃음에 자신이 이전 주인인 하벨 티에라와 지금 하벨을 겹쳐 봤다는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카샬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아니야. 내가 말하면 되니까 너는 그냥 신경 쓰지 마."
하루아침에 모시던 주인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바로 달라지겠는가.
한 번씩 생각이 날 테지.
하벨은 활짝 웃었다.
"괜히 날 신경 쓰면 내가 더 어색하니……."
"도련님."
"왜?"
"신경은 이미 진짜 많이 쓰고 있습니다. 설마 이제야 알았다는 말씀을 하려는 건 아니시겠죠? 이러시면 진짜 섭섭합니다."
"…그, 크흠. 날이 좋네?"
하벨은 그제야 민망하게 웃으며 괜히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페트리오는 가면단과 합류하고자 먼저 떠났고, 레디나는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몸을 숨겼으며 칼리우스는 후드로 얼굴을 꾹 눌러쓴 채로 헤레스 옆에 붙어서 걸어왔다.
[지금 구름이 가득 꼈는데?]
아라가 고개를 올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저쪽입니다."
카샬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음에도 하벨은 어색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그러게. 보이네."
하벨은 음식점으로 위장해 있는 지부를 보았다.
―지부의 위치는요, 으음, 음식점이에요! 가게 간판에 걸린 이름은 '든든한 한 끼'고요.
레디나가 사라지기 전에 꺼낸 말을 기억하며 하벨은 간판에 걸린 글자를 읽어나갔다.
든든한 한 끼.
바로 옆에 카페가 있고, 앞에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게와 마주하고 있는, 누가 보아도 평범한 가게 중 하나였다.
이미 티에라 가문이 마을에 왔다는 소식이 퍼져나갔는지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게 앞에 주인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저희 가게에 오시겠습니까.
그런 시선이 기사들 틈으로 보였지만, 하벨은 바로 방향을 틀어 든든한 한 끼로 걸어 들어갔다.
'미안하구나. 다음에 꼭…….'
화르르륵!
갑자기 랜턴에 검은 불꽃이 붙기 시작했다.
'…이건 또 왜 이래?'
[대장? 어디 또 아파?]
하벨이 잠깐 멈추자 아라가 하벨을 흔들었고, 카샬이 그를 쳐다봤으며 헤레스가 조금 빨리 걸어 하벨에게 다가갔다.
"도련님."
헤레스가 입을 열자 하벨은 괜찮다며 손을 흔들었다.
랜턴 때문이라고 변명을 할 수도 없고.
하벨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마치 모든 게 불편한 듯, 조금 전 가게와 상반되는 분위기를 내뿜었다.
직원으로 보이는 검은 달 일원이 하벨을 보자마자 말을 꺼냈다.
"죄송하지만……."
"통째로 빌릴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는 없겠네. 이렇게도 운이 좋을 수가. 손님이 없네?"
주도권을 놈들에게 넘길 생각은 조금도 없었기에 하벨은 자연스럽게 놈의 말을 끊었다.
원래 이 가게 있던 손님은 페트리오가 미리 보낸 뒷세계 사람이자, 가면단이었기에 때에 맞춰 비워진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손님. 죄송하지만……."
"됐네. 죄송할 필요 없고, 자리를 안내하게. 오던 길이 힘들어서 오늘은 두 번 말하고 싶지 않다네."
하벨은 손을 올려 직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기세를 내뿜든 말든 하벨은 오늘 컨셉을 하나 정했다.
진상.
언젠가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기에 벌써 가슴이 설렜다.
게다가 그 대상이 적이라니.
이보다 더 기쁠 수가 있을까. 죄책감을 가질 필요조차 없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나?"
"그게 아니라 손님."
"왜 자꾸 말을 거는 건가? 장사하지 않는다는 팻말을 밖에 붙여 놓은 것도 아니고, 장사 중인 가게 들어왔을 뿐인데 왜 그렇게 표정이 띠꺼운가? 그게 아니라면 내가 누구인지 몰라서 그래?"
하벨 티에라, 네놈들의 표적이 자발적으로 굴러왔는데?
하벨은 그 말을 내뱉지 못하는 게 안타까운 만큼 우쭐거렸다.
"나 하벨 티에라야."
"…하."
카샬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평소에는 그저 가슴 속에만 묻어두고 있었는데 오늘은 진짜 재수 없다는 생각을 또렷이 하고 말았다.
"실례했습니다."
하벨의 시선에 카샬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카샬이 저 정도로 나온다면 제대로 먹히고 있다는 거다.'
하벨은 오히려 카샬의 반응에 만족스러웠다.
이곳 직원들의 표정에 변화는 없었지만, 눈빛이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돈이 부족할 거라는 걱정은 집어넣게. 확실한 대답이 되었을 테니."
하벨은 직원의 옆을 지나가서는 노골적으로 밖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았다.
밖의 사람들, 여기 하벨 티에라가 있으니 보라고.
"자자, 다들 편안히 앉게. 뭐든 시키고, 뭐든 먹게."
"예, 도련님!"
정령 기사들의 표정 또한 밝았다.
어떤 가게든 뭐가 중요하겠는가.
먹고 즐길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스러웠다.
"이 가게에서 제일 자신 있는 걸로 다 준비해주게. 술 말고, 제일 맛있는 음료수로 말일세."
술을 먹지 못한다는 말에 기사들은 시무룩함을 내비칠 수밖에 없었다.
알고는 있어도 섭섭함이 깊게 몰려왔다.
"저어, 손님."
직원이 다시금 하벨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
"이렇게 많은 인원은 불가합니다."
"불가하다? 어째서인가? 자리도 딱 맞고, 충분히 기다릴 의향도 있다는데? 설마 재료가 떨어졌다느니, 이렇게 많은 인원은 처음이라는 등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일 생각은 아니겠지?"
하벨은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왜 그래야 하는가.
아라와 정령들은 이미 비밀 통로를 찾으러 돌아다녔고, 칼리우스는 마법 반응에 귀를 기울였으며 레디나는 조용히 자신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내가 말이야."
하벨은 자신을 상대하는 검은 달 일원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부터 너무 수상하다고 생각했어."
"수상하다뇨?"
"그야 이상하잖아. 저기 봐봐."
하벨은 창문 너머를 슬쩍 가리켰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가게 주인이 아직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하벨 티에라라는 걸 밝혔고, 크게 한몫 잡을 좋은 기회일 텐데, 내가 들어오자마자 얼굴을 구기더니, 갑자기 장사하지 않겠다는 이상한 말을 꺼내고. 진짜 이상하네. 그렇지 않아?"
하벨이 넌지시 던진 말에 정령 기사들은 사전에 하벨이 말해준 것처럼 눈빛을 달리했다.
―지금부터 눈빛 연습 한 번만 해보게. 내가 '그렇지 않아?'라고 하면 어떻게든 매섭게 떠줬으면 좋겠네. 오, 좋아. 딱 그렇게 말이야.
대체 무얼 하려는지, 뭘 하려는지 하벨은 설명해주진 않았다.
하지만 기사들은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너희 지금 왜 가만히 있어? 어서 따라 해야지. 하벨 말이 말 같지 않아?
정령들의 강한 압박에 기사들은 당황했다.
언제는 비협조로 나오던 정령들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니, 우리 보지 말고 하벨을 보라니까. 그 얼굴에 달린 눈으로 하벨을 보라고.
정령들이 몇 번이나 구박했는지 몰랐다.
―나는 지금부터 너희를 무조건 믿을 거라네. 그러니 내가 미덥지 못하더라도 따라와 줬으면 좋겠네.
하벨이 꺼낸 그 말이 너무도 다정하게 들릴 지경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하벨은 지금까지 다른 눈빛으로 자신들을 바라보았다.
누가 자신을 지켜야 하는지 아는 눈빛.
그것만으로도 그간 자신들과 쌓인 오해가 풀린 기분을 느꼈다.
결코, 일부러 하벨을 지키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지키려 했지만, 정령들의 비협조로 지킬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아직 여기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한층 사나워진 분위기에 뒤에서 누군가 달려와 하벨 앞에 서 있는 직원의 뒷머리를 꾹 눌렀다.
"애초에 누구 마음대로 손님을 받고 안 받고를 결정해? 빨리 사과 안 해? 어서 손님께 사과드려! 정중히!"
누가 봐도 직원을 타이르는 사장 같지만, 하벨의 눈에 비치는 건 달랐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표적의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동료를 어떻게든 말리려는 걸로 보였다.
그럼 자신도 참을 수 없지.
"죄송……."
"아니. 이딴 식으로 떠먹여 주는 사과는 별로야. 받고 싶지도 않고. 아, 사과하는 것보다 활짝 웃어 봐."
하벨 자신이 시간을 끌어줘야 아라와 정령들이 더 오래 비밀 통로를 찾을 수 있을 테지.
[좋아, 좋아. 잘하고 있어, 하벨! 그렇게 시간을 끌어줘.]
정령이 하벨의 등을 찰싹 때려줘서는 다시 숨겨진 곳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왜 안 웃지?"
하벨은 의문을 드러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손가락을 들어 검은 달 일원의 얼굴로 향했다.
'…도련님, 좀.'
카샬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벨이 그냥 말만 꺼낸 게 아닌, 살기까지 품고 있었기에 저 위험한 행동에 적이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언제든 튀어나갈 수 있게 잠깐 숨을 멈췄다.
하벨 앞에 선 검은 달 일원은 곧바로 반응했다.
본능적인 흐름을 억누르려고 애를 쓰는 게 노골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냥 안 참는 게 좋았을 텐데.'
하벨은 놈의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이렇게 웃어야지. 응?"
"…죄송합니다, 손님."
"됐어. 말에서 진정성이 느껴지질 않네."
하벨은 손가락을 떼며 사장 역할을 담당하는 놈을 향했다.
"네가 보기에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거랑 나한테 하는 태도랑 별개로 보이지 않아? 그냥 사람으로서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응?"
하벨은 얄미운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