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44화 (144/415)

144화. 말해줘(3)

* * *

* * *

"저기 말이 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칼리우스는 단번에 낡은 말 동상을 발견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다 말고 깜짝 놀랐다.

"아아, 내 목소리가 이상해."

목소리가 변한다고 했지만, 정말 이렇게 바뀔 줄이야.

"…아."

가면을 만지작거리던 칼리우스는 입 주변을 건드리더니 구조를 바로 파악했다.

"여기에 목소리를 바뀌게 하는 마법이 담긴 물품이 걸려있었어. 이건… 원래 걸려있는 게 아니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칼리우스와 나란히 걸어가던 헤레스가 물었다.

"나는 응, 마나한테 축복을 받았거든. 마나가 있는 곳은 그냥 알아. 여기랑."

칼리우스는 가면을 가리켰다.

"여기 입 부분에 있는 마법 물품이랑 서로 친하지 않다는 것도 알아."

"그런 것도 아세요?"

이어지는 헤레스의 칭찬에 칼리우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수줍게 웃었다.

"맞아. 서로 친하지 않지. 아무래도 마법 물품은 마법사 협회 손에서 나오잖아? 그러니 직접 만드는 게 낫겠다 싶어서."

하벨은 칼리우스에게 정답을 알렸다.

"직접… 만들었어? 날 위해?"

칼리우스가 감동하자 이때다 싶어 카샬은 하벨에게 제안했다.

"그냥 이참에 새로 하나 맞추시는 게 어떠십니까? 통일이 되지 않았잖습니까."

"그런 가면은 은밀한 경로를 통해서 팔고, 아닌 것들은 죄다 파티용 가면인 걸 확인했잖아? 괜히 꼬리가 길 이유도 없고, 지금도 되게 마음에 드는데? 나름대로 통일되고, 튼튼하고, 투박하면서도 색감이나 여러 가지가 좋아."

하벨은 실실거리며 카샬의 가면을 가리켰다.

"특히 네 가면이 말이야, 꽃님아."

으득.

카샬이 이를 갈았고 하벨은 즐거워하며 가볍게 발걸음을 놀렸다.

칼리우스가 가리켰던 낡은 말 동상에 가까워지자 제 망토 속에 숨은 아라가 벌벌 떠는 게 느껴졌다.

하벨은 동상 뒤쪽에 있는 제분소와 다른 가게를 힐끔 바라보았다.

'…아. 이게 부정한 것이었네.'

어쩌면 이곳이 한때는 중심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하벨은 동상을 보자마자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다.

부정한 것들은 자연의 존재인 정령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자연에 역행하는 무엇이든 부정한 것들이 될 수 있었다.

생명과 관련된 것이 섞일수록 효과가 컸기에 주로 핏자국이 많이 쓰이긴 했다.

하벨은 말 동상으로 가기 전에 망토 속으로 손을 넣어 손바닥에 용왕의 힘으로 만든 물을 아라 근처에 가져댔다.

할짝.

아라가 물을 먹는 걸 느끼며 말 동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다른 쪽 손을 들어 동상을 쓸어내렸다.

장갑에 묻어 나오는 거무튀튀한 자국에 하벨은 볼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설마하니 페인트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피일 줄이야.

'이렇게… 부정한 것들이 섞여 있구나. 이러면 모를 수밖에 없지.'

하벨은 살짝 열이 받았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뒤섞인 부정한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벨은 낡은 말 동상을 만졌다.

아마도 이게 부정한 것들의 중심부가 아닐까 싶었다.

역겨움의 산물이니 부숴버려야지.

[…대장?]

하벨이 용왕의 힘을 추가로 끌어오자 아라가 작은 목소리로 하벨을 불렀다.

[이… 몸이 줄게. 그러지 마.]

부정한 것들 사이에서 힘을 끌어오는 것도, 정령수를 주는 것도 힘들었지만, 아라는 하벨이 힘을 쓰는 게 더 싫었다.

"아니야. 이건 내가 부수고 싶어."

하벨은 아라를 툭 건드리며 낡아빠진 저 동상의 틈 속에 물을 끌어왔다.

이런 것들은 안에서부터 부서트려야 했다.

"……!"

칼리우스는 갑자기 피부가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다.

하벨이 자신과 동족이구나 생각했던 바로 그 힘이었다.

대체 무얼 하려는 걸까.

"…달님?"

하벨이 말 동상 앞에서 움직이지 않자 카샬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바람이 한순간 살랑살랑 불어왔다.

'아라 님은 지금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실 텐데.'

부정한 것들을 게렌과 페트리오가 치웠다고 해도 아직 남아 있기에 한 번씩 하벨이 망토 속을 확인하는 게 아니겠는가.

"아무것도 아니야. 어서 들어가자."

하벨이 무언가 시치미 떼고 있다는 걸 느꼈지만, 카샬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으니까.

"……?"

칼리우스 옆에 있던 헤레스마저 무언가 수상해 하벨에게 다가가던 차 멈칫거렸다.

쩍.

뒤쪽에서 균열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렸는데?'

헤레스는 동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러 제분소를 돌아 다녀본 결과 여기가 제일 좋겠네. 그렇지 않아?"

앞서 걷던 하벨이 제분소를 앞두고 갑자기 등을 돌렸다.

제분소를 방문한 손님인 것처럼 하벨이 목소리를 내자 헤레스는 고개를 돌리려다 멈췄다.

팍!

갑자기 무언가가 쪼개지는 소리에 헤레스는 움찔거렸고.

콰르르르.

낡은 말 동상이 무너져내렸다.

지나가던 사람들마저 그대로 멈추고는 부서지는 동상을 바라보았다.

"……!"

헤레스는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대체 언제.

자신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고, 하벨은 지금 아무것도 못 할 텐데.

"…와. 진짜 큰일 날 뻔했네. 아까 거기 서 있었으면 엄청 아팠겠어."

천연덕스러운 하벨의 말에 칼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엄청 위험했어. 내가 아까 도… 아니, 달님한테서 뭔가를 느꼈는데 착각이었나 봐."

'그럴 리가.'

카샬은 하벨이 저 일을 했음을 확실히 알아차렸다.

하지만 지금은 따질 수가 없었다.

그걸 알기에 하벨은 문손잡이를 잡고 자신들을 바라보는 거겠지.

"들어가자."

하벨은 부정한 것들로 칠해진 동상이 부서지자마자 아라의 떨림이 멎은 걸 확인하며 행복함을 가득 드러냈다.

"지금 다져야 할 게 천지니까."

* * *

"실례합니다."

하벨은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밖으로 나가려던 직원과 마주했다.

"…무,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직원이 놀라다 말고 다급히 물었다.

지금 하벨이 가면을 썼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질 않았다.

"아, 밖에 동상이 부서졌더라고요."

하벨은 엄지를 들어 뒤를 가리켰다.

"…동상이 부서졌다고요?"

자루를 짊어진 또 다른 직원이 깜짝 놀랐다.

방금 직원과 다른 반응에 하벨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예. 갑자기 와르르 부서지던데요? 하마터면 파편이 튀어 큰일 날 뻔했습니다. 휴우."

하벨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소 과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 과감한 부분이 오히려 자연스러웠기에 자루를 옮기던 직원의 시선은 밖을 향했다.

킁킁.

아라가 갑자기 망토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냄새를 맡았다.

하벨은 자연스럽게 망토를 만지다 아라를 쓰다듬었다.

'무슨 냄새라도 나는 건가?'

무슨 냄새인지 몰라도 아라가 익숙한 냄새인 건 분명했다.

'…미안하다, 아라야.'

하벨은 미안함을 담고는 손가락을 살짝 튕겼다.

지금 아라가 필요했다.

아라는 숨을 짧게 내쉬다 '흐읍'하는 소리를 내며 정령수를 넣어주었다.

평소보다 턱없이 작은 양이지만, 충분했다.

자루를 옮기고 있던 직원이 밖을 바라볼 때, 하벨은 새롭게 얻은 힘을 떠올렸다.

바람.

자신의 손가락에서 바람이 일어났다.

잡히지 않은 비단을 만지는 것만 같아 신기했지만, 일단 집중했다.

바람을 꾹 눌러 얇은 종이처럼 만들었다.

언제든 자신의 손아귀를 빠져나갈 준비가 됐다는 것처럼 손가락을 간질일 때, 카샬이 일부러 자신을 불렀다.

"너무 놀라서 이걸 묻는 걸 잊어버렸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카샬의 귀가 좋은 건지, 아니면 눈치가 빠른 건지.

슉!

하벨은 바람을 쏘아내며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역시 바람이라 그런지 속도가 가장 빨랐다.

"아, 괜찮아. 갑자기 동상이 무너질 줄을 누가 알았겠어?"

하벨이 자루로 시선을 둘 때, 칼리우스가 갑자기 자신의 망토를 잡아당겼다.

한 번.

두 번.

세 번.

속으로 숫자를 세던 하벨은 세 명임을 확인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어?"

하벨이 묻자 칼리우스는 하벨이 알려준 대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용용아.

가게에 들어서기 전에 하벨이 갑자기 자신을 불렀다.

―이제 가게로 들어갈 건데 마법사가 몇 명 있는지 망토를 살짝 잡아 당겨줘. 다른 곳에도 있을 수 있는데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만 알려주면 돼.

지금 자신이 느낀 숫자는 세 명보다 많지만, 하벨이 원하는 대로만 알려줬다.

"…아차. 어떤 걸 빻으러 오셨나요? 곡식? 아니면… 어, 약재를……."

요란한 상황에 놀라고 있던 직원이 뒤늦게 하벨에게 물었다.

그제야 가면이 눈에 들어오는지 직원의 눈빛에 의심이 어렸다.

대낮에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것부터 이상하지 않은가.

슬쩍 눈길을 돌리자 가면을 쓴 자가 한두 명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그게 말이죠……."

솨르르르.

하벨이 말을 꺼내자마자 자루에 난 구멍 사이로 가루가 쏟아졌다.

새하얗고.

어딘가 반짝거리는 가루가.

하벨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아, 죄송합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벨을 상대하던 직원은 고개를 숙이고는 당장 빗자루를 들러 움직였다.

[…어?]

아라가 뒤늦게 반응했다.

답답한 와중에 번져가는 향기로운 냄새에 안 끌릴 수가 없었다.

[저건 정화제… 인데?]

'그래, 아라야. 저건 정화제다.'

하벨 자신이 정화제를 몇 번이나 봤겠는가.

아마 헤레스와 카샬도 바로 눈치챘겠지.

하벨이 가루를 흘린 직원에게 다가가며 시선을 굴렸다.

당장 보이는 직원의 숫자는 총 셋.

안에서 무언가를 찧는 소리까지 생각한다면 지금 저들 중 몇 명이 마법사인지 알기는 어려웠다.

"저도 도와드릴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지만, 직원의 눈빛이 묘했다.

당황하면서도 자신을 노골적으로 의심하고 있지 않은가.

'이놈은 분명 마법사다.'

하벨은 결정을 내리고는 고개를 슬쩍 돌려 끄덕였다.

준비해.

그 신호를 카샬, 헤레스, 칼리우스가 봤다는 걸 확인하고는 하벨은 다시 천연덕스럽게 직원에게 말을 꺼냈다.

"있잖아요.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요."

"…예, 손님."

"요새 제분소에도 정화제를 팔아요?"

직원의 눈이 번뜩거리며 숨을 참으려던 차, 연기가 휘날리고 그의 목덜미에 단검이 겨눠졌다.

"…쉬쉬. 그대로 숨을 내쉬세요."

레디나는 마치 아이를 달래듯 차분히 목소리를 냈다.

하.

직원은, 아니 마법사는 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목에 겨눠진 단검 말고도 하벨이 허리춤에 찬 단검까지 슬쩍 들이밀었기 때문이었다.

"꽃님아."

하벨은 카샬을 바라보았다.

"예예. 뒤처리는 제 담당이죠."

카샬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한 직원이 빗자루를 가지러 가지 않았던가.

"문 닫을게요."

헤레스는 눈치껏 계산대로 가 '영업 끝났어요'라는 팻말을 찾아다녔다.

칼리우스만 멀뚱히 서 있자 하벨이 말을 꺼냈다.

"햇님아. 다른 놈이 오는지 확인해줘."

"응."

칼리우스는 우선 대답했지만, 잠깐 머리를 굴렸다.

'…하벨이 말하는 건 마법사를 말하는 거야.'

그제야 칼리우스는 다시 대답했다.

"응!"

힘찬 대답에 하벨은 그제야 안도하며 마법사를 보았다.

"자, 나는 네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아. 너도 우리가 누구인지 궁금할 필요는 없어."

"그럼요."

레디나가 추임새를 넣으며 단검을 조금 더 깊게 들이밀었다.

"이참에 어딜 자르고 시작하죠? 목이 뻣뻣한 게 쉽게 말이 나오지 않을 거라 보는데요?"

"제가 입을 다물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팻말을 걸고 문을 잠근 헤레스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좋아. 그러자."

하벨은 망설이지 않았다.

조금 전 칼리우스를 추적하던 마법사들의 눈을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무언가를 향한 강렬한 믿음에 대화는 쉽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비야. 어디를 빼앗기면 제일 겁이 나?"

하벨이 헤레스를 향해 묻자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히 순환의 길이죠. 그곳에 마나가 담겨 있으니까요."

"…음, 아마 여기쯤일 거예요. 찔려도 바로 안 죽어요. 좀 고통스러울 뿐이죠."

레디나는 하벨이 쥔 단검을 움직여 가슴팍에 향하도록 했다.

"아니야. 저 사람은 지금 거기 찌르면 죽어."

칼리우스가 걸어왔다.

마법사를 죽이지 않고 그의 의지를 꺾을 만큼 마법사에게 중요한 곳, 그건 마나를 통해 마법을 발현하는 곳이었다.

"여기가 마나가 가장 많이 통하는 곳이야."

칼리우스는 마법사의 손목을 가리켰다. 그쪽에 마나의 향기가 짙었다.

"여길 막으면 마법을 거의 못 쓸 거야. 그러면 엄청 무서워질걸?"

"고마워. 이제 뒤돌아 있어 줘."

하벨이 말하자 칼리우스는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왜 뒤돌아 있으라는 걸까.

갑자기 바람 소리가 들렸다.

툭.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피 냄새가 번져갔다.

'…진짜로 손목을 잘라버렸어?'

칼리우스는 깜짝 놀랐다.

정말로 손목을 자를 줄은 몰랐다.

쿵쿵.

가슴이 뛰었고, 무언가 혼란스러웠다.

'나, 나는 수호자인데.'

자신이 알려줬기에 저 사람의 손목이 잘린 게 아닌가.

아직 저 사람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내가 잘못한 거야?'

자신이 꺼낸 말이 이렇게 무거울 줄이야.

항상 누군가의 말로 내쫓기거나 곤란한 상황은 있었지, 자신의 말로 저 사람의 운명이 바뀔 줄은 몰랐다.

하지만 저 마법사는 자신을 쫓던 마법사 협회 소속 마법사이자 정령들과 아라를 괴롭히려고 부정한 것들을 놓은 악당일 텐데.

'아니면 내가… 내가 옳은 일을 한 걸까.'

수호자는 대체 어디까지 지켜줘야 한다는 건지.

칼리우스는 갑자기 무엇이 옳은지 헷갈렸다.

"자, 말해줘."

속삭이듯 들려오는 하벨의 음성에 칼리우스는 우수수 돋아나는 소름을 느꼈다.

어쩐지 하벨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벨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정화제는 어디에서 만들어지지?"

하벨은 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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