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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43화 (143/415)

143화. 말해줘(2)

* * *

의지를 가진 푸른 돌들을 애초에 병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건 단지 '변종'이라고 하기에 선을 벗어나도 너무 벗어나지 않았는가.

하지만 물의 저주라는 병의 형태를 띤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헤레스는 밀려오는 의구심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왜 그래 헤레스?"

하벨이 묻자 헤레스는 굳은 표정 그대로 말을 더듬거렸다.

"…그러니까요, 도련님."

무언가를 말하려다 헤레스는 입을 다물었다.

[에이. 왜 말하다가 말아? 지금 엄청 궁금하다고.]

[맞아. 하벨이 앓는 물의 저주가 대체 어쨌다는 거야?]

정령들은 불만을 토로했다.

오래 살길 바라던 정령사에게 문제가 생겼다는데 어떻게 화가 안 날 수 있을까.

"잠깐 나가 있겠습니다."

페트리오는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레스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몰라도 쉽게 입을 열 수 없을 만큼 곤란해 보였다.

"저도 일어날게요. 편안하게 말해요, 언니."

레디나 역시 궁금증이 목구멍까지 솟구쳤지만, 일단 참았다.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있던 칼리우스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왜 갑자기 일어나는 걸까.

레디나의 시선이 카샬을 향하자 그는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집사라는 거 잊었어?"

[이 몸도 나가야 하는 거야?]

아라가 눈을 크게 뜨며 묻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알아야 하는 건데 다들 자리 안 비켜도 괜찮아. 헤레스 너는 편안하게 말하고."

하벨은 싱긋 웃으며 말을 꺼냈다.

보아하니 좋은 소식은 아닌 듯했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물의 저주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을.

하벨이 재촉하자 헤레스는 자신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이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오진까지 한 마당에…….'

몇 번이나 망설이던 헤레스는 큰 결심을 하며 말을 꺼냈다.

"도련님."

"그래."

하벨이 대답했고, 아라는 혀를 날름거리며 헤레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물의 저주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새삼스러운 말이네. 변종이라는 것 자체로 이미 이상하잖아?"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도련님께서 정령님과 교감을 통해 몸에 퍼진 불순물, 그러니까 푸른 돌이. …하. 그 푸른 돌이 줄어들자마자 갑자기 다시 증가했습니다. 이건… 제가 봐도 너무 이상합니다."

"병이… 맞긴 합니까?"

페트리오가 긴가민가하며 물었다.

아무리 병의 진행이 빠르다지만,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예. 도련님께서 변종을 앓지만, 제가 변종이라고 말씀드린 건 '낫지 않는다'라는 것과 '느닷없고, 과도한' 증상이라는 부분에서였습니다. 병은 맞습니다. 하지만 방금처럼 푸른 돌이 이렇게 빨리 증가하는 건… 이건, 저도 이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헤레스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의사로서 확답도 내리지 못하는 이 상황이 답답했다.

"반영구 정화제 때와 달랐나?"

하벨이 묻자 헤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때는 이렇게 늘어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치유법이라고 생각했는데……."

헤레스는 말을 하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혹시 교감을 통해 줄어들었던 푸른 돌이 재차 늘어났을 때, 그 양이 이전보다는 적었어?"

하벨의 질문에 헤레스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물의 저주로 일어나는 증상들이 일정하지 않아 설마 했는데.

하벨은 감을 잡았다.

물의 저주로 일어나는 증상들이 일정하지 않아 설마 했는데.

하벨은 감을 잡았다.

'순환의 길과 물의 저주가 비슷할 줄이야.'

정령수로 순환의 길에 있는 불순물을 녹이는 것처럼 물의 저주로 발생하는 푸른 돌 또한 정령들과의 교감으로 녹여낼 수 있었다.

불순물의 침투를 차단하는 막 또한 푸른 돌을 억제하는 반영구 정화제와 내성이라는 부분에서 같은 성질을 띠고 있지 않은가.

'…정령들과 했던 그 모든 게 도움이 될 줄이야.'

하벨은 만족스러웠다.

느릴 뿐이지, 이 몸은 점점 회복되고 있었다.

"있잖아요. 뜬금없긴 한데요, 혹시 저주가 아닐까요?"

레디나가 말을 던지자 헤레스와 페트리오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주는 아닙니다. 저주는 애초에 제 목숨을 바쳐도 통할까 말까 한 아주 쓸모없는 마법이고, 그 흔적은 무조건 몸에 남습니다. 헤레스 씨. 혹시 도련님을 진찰하시면서 마법의 흔적을 보셨습니까?"

페트리오의 시선이 헤레스를 향하자 그녀는 재차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맹세코 없습니다. 그래서 이걸 뭐라고……."

"헤레스."

하벨은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짓는 아라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네."

"인상 펴. 나는 이렇게 확인했으니까 만족스러운데? 애초에 하루아침에 낫는 병도 아니잖아?"

하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점점 괜찮아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정보였다.

"하지만."

헤레스가 망설이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 헤레스 네가 이 병을 얼마나 연구하는지 알고 있어. 초조한 건 이해해. 하지만 천천히 가자고."

애초에 곧바로 해결 가능할 것 같았으면 룬델이 하벨 티에라를 위해 우산이며 정화 장치며 만들지 않았을 테니까.

"다들 가면 고쳐 써."

하벨은 훌훌 털었다.

지금은 앞을 바라볼 때였다.

"나도 가는 거야?"

칼리우스는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당연히 같이 가야지."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도련님. 칼리우스 님은… 어딜 봐도 눈에 띕니다. 그곳에 마법사 협회 소속 마법사가 있을 테니 칼리우스 님을 잡아가라는 것과 무슨 차이겠어요?"

헤레스가 하벨을 조심스레 말렸다.

"네 말이 맞아, 헤레스. 그래서 용용이가 더욱 가야 한다고 생각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용용이의 체격이 눈에 띄는 건 맞지만, 저 정도의 체격이 용용이만 있는 건 아니잖아? 무엇보다 이번 기회에 용용이가 자신을 쫓고 있는 단체가 대체 어떤 곳인지 알 기회라고 생각해."

만약 칼리우스가 세상을 멸망시킬 용이 되는 원흉이 마법사 협회라면 더더욱 '적'임을 확실히 인식시켜줘야 하지 않겠는가.

헤레스가 더는 말을 하지 않자 하벨은 카샬을 재촉했다.

"카샬. 아까 시장에서 산 가면 꺼내줘."

카샬은 자신이 쓰던 꽃무늬 가면을 주머니에서 꺼낸 것처럼 태연하게 내놓았다.

"우와. 내가 이거 쓰는 거야?"

칼리우스가 기뻐하자 카샬의 입꼬리도 덩달아 올라갔다.

"이제 꽃님이는……."

"카샬."

하벨이 나지막하게 부르자 카샬은 손과 말을 멈췄다.

"칼리우스가 좋아하지 않습니까? 솔직히 꽃무늬 가면은 저보다 더 어울립니다."

"아니, 꽃님이는 너야. 쭉."

[맞아. 꽃님이는 카샬이야. 그건 카샬 가면이구 용용아.]

아라가 거들자 칼리우스는 눈을 크게 떴다.

"카샬. 아라가 말하는데 이 가면은 네 거라며? 나는 세상의 수호자로서 네 걸 가져갈 생각이 없어. 꽃님이라는 이름 역시 가져갈 생각이 없고. 꽃님이는 영원히 카샬이야."

"……."

칼리우스에게 악의가 없다는 건 알지만, 비꼬는 건가 싶을 정도로 카샬은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여기서 화를 내면 치졸한 인간이 되는 게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아까 칼리우스를 뒤쫓다 샀던 가면을 꺼냈다.

해 무늬가 박힌 가면이었다.

"너는 이제부터 햇님이야, 용용아."

초롱초롱한 칼리우스를 보며 하벨이 씩 웃었다.

* * *

[…여기야.]

정령들은 제분소가 보이는 곳에서 멈췄다.

제분소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는 강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고맙게도 먼저 갔다던 인간들이 부정한 것들을 치워줬나 봐. 원래 여기까지도 들어가지 못했는데.]

[맞아. 그…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게렌이라고 했어. 크라마의 부하 중 한 명이라고 했는데.]

[아, 맞아. 기억해둬야지.]

"어떤 제분소인지 봤어?"

하벨이 페트리오를 보며 물었다.

이곳에 제분소는 하나가 아니었다. 제분소 공장 지대라고 할 만큼 여기저기 가게가 보였고, 곡식이든 뭐든 찧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우린… 어떤 제분소인지는 몰라. 부정한 것들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 볼 생각도 한 적이 없으니까.]

강아지를 닮은 정령은 하벨에게 딱 매달린 아라를 쓰다듬었다.

[아라 너도 힘들면 여기에 남아.]

[아니. 이 몸은… 이 몸도 부정한 게 싫지만, 대장한테 정령수를 줘야만 해.]

아라는 힘없이 늘어진 채로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자신이 하벨에게 정령수를 주지 않는다면 그는 코피를 흘리면서 맛있는 물을 사용해야 할지도 몰랐다.

정령수를 사용하면서 일어나는 후유증보다 더 컸기에 생각만으로도 싫었다.

"도련님."

제분소를 바라보던 페트리오가 입을 열었다.

"왜?"

"저는 게렌과 합류해 함께 움직이겠습니다."

"탈출로를 막아두게?"

"그것도 있고, 저는 원래 정면에서 덮치는 일과 맞지 않습니다."

"그렇지. 정면으로는 승패를 쥘 수가 없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카샬이 빈정거리자 페트리오는 코웃음조차 치지 않았다.

"그러면 기왕 뒤에서 움직이는 김에 하나 봐줬으면 하는 부분이 있어."

하벨은 페트리오에게 부탁을 꺼냈다.

이미 가면을 착용해 하벨의 표정이 보이질 않았지만, 페트리오는 그의 번뜩이는 눈빛이 상상됐다.

"말씀하십시오."

"제분소에 나오는 가루 중에 혹시 정화제가 섞였는지 알아봐 줘. 어떻게 알아보는지는 알지?"

"…정화제요?"

페트리오는 얼떨떨함을 드러냈고, 그 말에 비 무늬가 들어간 가면을 쓴 헤레스가 가면을 살짝 올렸다.

어느 때보다 심각해 보였기에 하벨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심각해, 헤레스?"

"저는… 마법사 협회의 자금줄이라고 해봤자 모두가 아는 마법 물품이라고 믿고 있었어요."

"모두가 알고 있는 건 내가 쫓을 이유가 없지."

하벨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모두가 알고 있다는 건 드러내도 될 자신감이 가득하다는 의미이자 굳이 캐봤자 나올 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애초에 마법 물품이나 마법 아이템이라 불리는 것들은 나라에서 전반적으로 관리하기에 수작을 부렸어도 달님께서 원하시는 만큼은 아닐 겁니까."

카샬이 하벨의 말을 보충하자 헤레스는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그렇죠. 그게 나라를 향한 존중이라는 의미로 마법사 협회에서 내민 협약이니까요."

일상생활에 쓰는 마법 물품을 가지고 장난치지 말자.

그런 협약을 에르티안 왕국과 했다고 들었다.

"협약했다고 해서 정말 지킬 거라고 봐요?"

그 말에 레디나는 당장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마법사 협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겠죠. 마법 물품 역시 뒤에서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아마 자신이 꺼낸 말을 더 잘 이해하는 건 헤레스일 테지.

"맞는 말이에요. 나도 마법사 협회에서 지키지 않을 거라고 봐요."

헤레스 역시 회의적으로 현재 상황을 바라보았다.

"다만… 도련님께서 언급하신 정화제는 너무 멀리 가지 않았나 싶어요."

정화제를 관리하는 자는 티에라 가문이었다.

영혼이 바뀌었든 간에 하벨은 티에라 가문의 막내아들이라는 위치에 있었다.

저 발언은 티에라 가문 자체를 의심하는 게 아니겠나.

"뭐든 간에 중심에서 손을 떠나면 누구든지 손을 대는 자들이 많아져. 그게 티에라 가문이라고 예외는 될 수 없어. 그렇지 않아?"

하벨은 자연스럽게 카샬을 바라보았다.

지금 여기에서 그 누구보다 티에라 가문을 알고 있는 사람은 카샬이었으니.

"그건 맞습니다. 어디든 구멍이 있을 수 있죠. 그렇기에 가주님께서 더 필사적이신 겁니다. 아주 작은 구멍일지라도… 그 영향은 절대 작지 않을 테니까요."

"아쉽게도 내가 보기에 이미 뚫렸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저는 확답하지 않겠습니다."

카샬은 일단 한발 물러섰다.

정화제 문제는 그만큼 예민했기에 가볍게 입을 놀릴 상황이 아니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가능성은 큽니다."

페트리오는 말을 꺼냈다.

평소에 하벨이 가볍게 말을 내뱉는다고 하지만, 이런 일에서는 그 누구보다 신중한 사람이었다.

만약 아닐 수도 있지만, 하벨이 저런 말을 하는 것 자체는 미리 인지해두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니 더 제대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아, 제분소의 위치는 부서진 말 동상이 세워진 곳 뒤쪽에 있습니다. 그럼 먼저 움직이겠습니다."

페트리오는 고개를 숙이고는 정령들이 가리킨 방향이 아닌 다른 쪽으로 향했다.

[어. 저 방향이 아닌데? 이 방향인데.]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도둑은 다른 길로 가는 거야, 아라야."

[아! 아까 좀도둑이 정면공격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어. 혹시 대장은 좋아해?]

"나는 뭐든 좋아. 이길 수 있다면야 뭘 못하겠어?"

하벨은 이번에 함께 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계획은 알다시피 단순해. 제분소를 뒤져서 놈들이 숨기는 걸 파악하는 거지. 마을 경비병이든, 놈들이 지원을 부르든 불확실한 요소가 있긴 하지만 작전에는 아무 지장 없어."

"왜 아무런 영향이 없는 건데?"

칼리우스가 어리둥절한 채로 물었다.

"어차피 놈들은 찔리는 게 가득하니까. 여기에서 지원을 부르면 그림이 더 이상해지잖아?"

제분소에 문제가 생겼는데 마법사 협회의 마법사가 등장한다?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작전명 '우당탕3'이야."

"…하. 도련님. 작전명으로 우당탕밖에 모르십니까?"

저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카샬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닌데. 다른 것도 있어. 하지만 후방에 좀도둑이 있는데 내가 쓸데없이 복잡한 계획을 세우면 오히려 피해만 갈걸?"

하벨은 페트리오까지 생각해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건 정면으로 쳐들어가도 될 만한 각이 보였다.

"혹시 좋은 계획이 있어? 없으면 바로 들어가자."

하벨은 설레는 마음을 꾹 누르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 몸은 찬성이야.]

아라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지만, 그마저도 힘없어 보였다.

"저는 뭐가 됐든 해야 할 일은 똑같아요. 그러니 도련님 혼자 돌진하는 게 아니면 괜찮아요."

레디나는 가면을 올려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나는… 오늘 열심히 배울 거야!"

칼리우스는 의지를 담았고, 헤레스는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저는 일단 여기에 적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가자."

하벨은 모두의 마음이 하나로 합쳐지자 거침없이 발을 움직였다.

"…저는요?"

뒤에서 카샬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하벨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자동 찬성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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