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뒤바뀐다(3)
* * *
"레디나가 데론의 집에서 정보를 가져왔습니다. 데론은 물론, 죽었습니다."
카샬은 하벨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서류 뭉치를 꺼내 넘겼다.
"좀도둑이 마법사를 심문해 얻은 정보로 마법 암호문을 추가로 얻었습니다. 받자마자 칼리우스에게 맡겼습니다."
"꼴이 이 모양인지 왜 안 물어? 비꼬든지 해야 할 텐데, 평상시랑 다르네."
하벨은 서류를 받으며 물었다.
"무얼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 표정, 지금 이상하잖아."
"아십니까?"
"모르는 게 이상하지. 너 지금 눈 떴어."
"전 원래부터 눈 떠 있습니다. 이상한 말씀 하지 마십시오."
풉.
하벨은 눈동자가 훤히 보이는 카샬의 눈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이상하다고 그러는 건지.
"물으면 말씀은 해주실 겁니까?"
"묻는다면야 하지."
"도련님께서 소유하신 땅에 제가 모은 돈을 투자해도 됩니까?"
"그 투자 안 받을 건데?"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카샬은 하벨을 빤히 바라보았다.
"도련님. 저는 '하벨 티에라'라는 이름에 대고 맹세했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하벨은 레디나가 가져온 정보를 살피다 말고 카샬을 다시 보았다.
어느덧 카샬의 눈이 감겨 있었다.
"은혜를 갚기로요. 제가 몸에도 맞지 않는 집사 일을 하는 거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아니. 너한테 딱인데? 딱 맞아."
하벨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 듯 올리자 카샬은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이런 말씀은 처음 드리지만, 저 좀 고급스럽게 살았습니다."
"됐고. 너답지 않게 둘러 이야기하지 말고 말해봐."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 같다는 헤레스 씨의 말을 들었습니다."
카샬은 그 말에 하벨이 앓는 '자아의 혼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전, 문득 하벨을 보며 자아의 혼동과 관련 없는, 전혀 다른 사람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부정했고, 가볍게 넘겼지만, 룬델이 꺼낸 말에 자신이 계속 느끼고 있던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내일, 하벨의 영혼을 알아보기 위해 마법사가 온다네. 이는 하벨이 직접 헤레스한테 부탁한 일이니 그렇게 알고 있게.
저 말을 듣는 순간,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지금도 이상했다. 정말 본인이 하벨 티에라가 아니라는 말일까.
"그래서?"
하벨이 물었다.
마치 자신의 속내를 다 꿰뚫는 것처럼 보였기에 카샬은 살짝 불편했다.
만약 지금 눈앞에 보이는 존재가 하벨 티에라가 아니라면 무엇이 달라질까.
"저는 내뱉은 말을 번복할 정도로 치졸하지 않습니다, 도련님."
―저는 앞으로 도련님을 모시게 된 집사, 카샬 메르흔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입으로 하벨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앞으로 모시겠다고.
"넌 치졸한데? 말도 자주 바꾸잖아?"
자신을 살살 긁는 하벨의 말에 카샬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눈치도 빠른 사람이, 꼭 이런 상황에서까지 저렇게 말해야 하는지.
카샬은 치밀어 오르는 불만을 잠재웠다.
만약 지금 눈앞에 보이는 존재가 하벨 티에라가 아니라도 달라질 건 크게 없었다.
"…앞으로도 도련님을 모실 겁니다."
진중한 저 말에 하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웃음기를 싹 지우며 물었다.
"내가 하벨 티에라가 아닌 걸 알아도 그렇다고?"
"예, 그렇습니다."
카샬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카샬. 은혜 갚는 거라면 이제 충분해. 넌 이미 날 위해 많은 것들을 해줬으니까. 여길 떠나고 싶으면 그래도 돼.
하벨이 산에 올라 자아의 혼동이 찾아오기 전, 문득 어른스러워진 그가 갑자기 저런 말을 꺼냈다.
그저 평소처럼 장난치는구나 하며 대수롭지도 않게 흘렸던 말.
―…물론, 너는 떠나지 않겠지. 여기, 티에라 가문을 나보다 더, 정말 많이 좋아하니까. 그럼, 카샬. 만약에 내가 좀 많이 달라지더라도 너무 이상하게 보지 말고 평소처럼 대해 줘. 그래 줄 수 있어? …아, 진짜 아니다 싶으면 떠나도 괜찮고.
문득 그 말이 생각이 났다.
묘한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던 것도 덩달아 떠올랐고.
자신한테 이곳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떠나라니.
"희한하네, 카샬. 넌 참 속도 좋다."
하벨은 애써 덤덤한 척 종이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종이의 부드러운 촉감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어떻게 저런 말을 고민도 없이 말할 수 있는가.
하벨 티에라한테 은혜를 입었다고 했을 텐데.
"속이 좋은 게 아닙니다."
카샬은 코웃음을 살짝 쳤다.
이미 전 하벨한테 지금 하벨을 잘 대해달라고 부탁받았으니 어떡할 텐가.
"티에라 가문을 떠나고 싶지도 않습니다."
처음에는 하벨 때문에 머물렀던 이곳에 이미 정이 들어버렸다.
농담 삼아 뼈를 묻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만, 티에라 가문은 자신의 집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하벨이 믿을 만한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물론, 차마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참 괜찮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
"…재수 없으십니다."
카샬은 진심을 담아 말을 꺼냈다.
"아차, 실례했습니다. 자신감은 없는 것보다 있는 편이 더 좋죠."
"사실이잖아, 카샬? 너도 알면서 왜 이래?"
카샬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하벨은 낄낄 웃었다.
이대로 하벨에게 말려들고 싶지 않았기에 카샬은 화제를 돌렸다.
"데론은 죽기 전에 코스모피안 왕국에 있는 '푸렐'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와 연락을 나눴습니다."
"푸렐이 누구인데?"
"현재 코스모피안 왕국의 귀족인 푸렐 텔르나로 추정됩니다. 정확하다고 볼 순 없습니다. 푸렐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습니까?"
"그래. 이름만으로 함부로 단정 짓기 어렵지."
"마법사 협회의 경고와 더불어 도련님께서 물 마법사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보고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데론이 사이좋게 돈을 찌른 자들이 적혀 있고."
하벨은 서류 뭉치를 가볍게 흔들었다.
"맞습니다. 이미 죽은 귀족들과 여러 상단이 얽혀 있다고 합니다."
하벨은 카샬의 보고에 가볍게 혀를 찼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이래.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것 같고, 이제 더는 털린 곳이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 새롭게 나오잖아?"
"경험담이십니까?"
"눈치도 빨라라. 이 건은 바안 저하께 드렸어?"
"예. 이건 가주님께서 직접 보고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이건 바안이 처리할 테지.
그가 시름시름 앓을 걸 생각하니 괜히 우스웠다.
왕이 되는 과정이 밥을 먹는 과정처럼 쉽겠는가.
"좀도둑은? 마법 암호문이 전부일 리가 없을 텐데."
하벨은 서류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이번에 잡은 건 지느러미도 되지 않는 놈들, …음, 마법사 협회 내에 등급이 낮은 놈들이라 좋은 정보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뭘 얻었으니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겠어?"
"그렇습니다. 좀도둑이 기억을 읽어 다음 거대 정화 장치 실험 장소를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걸려도 아무 문제가 없을 자들만 보낸 거네?"
거대 정화 장치 위치를 알고 있는 게 뭐가 그렇게 큰 죄일까. 마법사 협회에서도 얼마든지 시치미를 뗄 수도 있고, 오히려 큰소리칠 수도 있었다.
봐라, 마법사 협회에서는 저놈들을 차단해 정의를 세웠다고 말이지.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 수법이 아닌가.
하벨은 엄지로 손가락을 만지다가 문득 드는 의문에 입을 열었다.
"카샬, 마법사 협회는 독자적으로 사업체를 유지하고 있어?"
"그건… 모르겠습니다. 저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원래 어떤 단체든 나라든 돈이 엄청 중요하단 말이지. 자금줄이 끊어지면 휘청거리게 되어 있는데."
하벨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턱밑을 쓰다듬었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도련님. 머리도 더는 굴리지 마십시오."
카샬은 하벨이 놓았던 서류를 챙겼다.
"가주님을 불러오겠습니다."
"…자, 잠깐만, 카샬."
히쭉.
카샬은 온 힘을 다해 웃어 보였다.
룬델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하벨이 이렇게나 두려워하는데 얼른 가야 하지 않겠는가.
크라마가 노리던 땅도 차지했고, 데론이 죽으면서 레디나가 정보를 가져왔고, 페트리오까지 정보를 캔 상황에서 하벨이 신경 쓸 일은 이제 없었다.
벌써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호로록.
얼굴이 털로 뒤덮이다시피 한 남자가 수염을 살포시 잡으며 차를 마셨다.
"하. 차 맛이 좋소."
휘어진 눈동자를 따라 긴 눈썹이 덩달아 움직였다.
'저 사람이 드웰인가.'
하벨은 침대에 누워 드웰을 힐끔 바라보았다.
새벽에 조심스레 찾아왔고, 자신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고 들었다.
[오오오.]
아라가 눈을 반짝이며 꿈틀거리는 수염을 향해 앞발을 내밀다 하벨의 눈치를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하벨이 굳어 있었기에 아라는 자신의 꼬리를 잡으며 생각했다.
'대장이 또 어디 아픈가. 저 사람 수염이 너무 많아서 놀란 건가?'
[아라야.]
루룸이 언성을 높이자 아라는 흠칫 놀라다 루룸을 바라보았다.
[응?]
[이리 와. 수염 건드릴 생각하지 말고.]
[왜 이렇게 무섭게 말해? 이 할아버지가 뭘 잘못했어?]
[세렌이 이것도 안 가르쳐 줬어? 네가 좋다더니.]
루룸은 세렌을 슬쩍 바라보았다.
세렌의 시선이 룬델을 향했고, 평소와 달리 걱정을 가득 담은 눈동자에 루룸은 더는 세렌을 건들지 않았다.
세렌에게 있어 룬델이 중요한 만큼 룬델에게 하벨 역시 중요했으니.
라르웬조차 입을 다물 만큼 분위기가 상당히 가라앉은 상태가 아닌가.
[뭘 말하는 거야, 루룸?]
아라가 눈을 깜박거리자 루룸은 목소리를 낮췄다.
[마법사는 일단 경계부터 해.]
[왜에?]
[가장 빨리 부정한 것들을 만들 수 있으니까. 경계해서 나쁠 건 없지.]
[아……. 그건 너무 싫어. 이 몸의 몸이 막 굳어진단 말이야.]
아라가 털을 바짝 세웠다.
"아니, 다들 왜 이렇게 빤히 보시오?"
드웰은 찻잔을 내려놓자마자 룬델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경계하는 눈빛이 상당히 매서웠다.
"내가 그대의 아들을 잡아먹을 것만 같소?"
드웰의 시선이 하벨을 향했다.
시선을 마주하려면 의도적으로 그가 피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룬델은 그제야 입술을 열었다.
"나는 헤레스를 믿으니 그대가 그런 악랄한 마음을 먹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시기가 좋지 않았다는 건 나도 인정하는 바요. 제기랄, 빨리 서둘렀는데도 이 모양이니. 나도 늙었나 보오."
낄낄.
남자는 웃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들었습니까?"
룬델이 물었다.
"마법사 협회, 그 개잡놈들이 사람이 해서는 안 될 짓거리를 저질렀다는 정보를 들었소."
"벌써 그렇게 퍼져나갔습니까?"
"아, 나는 바람을 다루오. 바람을 다루는 마법사라고 해도 각각 다루는 방식이 가지각색이라는 건 알고 있을 것이오. 내 마법은 특히 소리에 예민하오."
"바람을 타고 들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소. 어딘가 정령하고 비슷하지 않소?"
[전혀.]
루룸이 딱 잘라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소. 물론, 헤레스의 부탁이기도 했지만, 마법사인 내가 이렇게 정령사 가문에 초대될 수 있는 것도 상당히 드문 일일 테니 말이오. 늘그막하게 이루고 싶은 꿈이기도 했소."
드웰이 기분 좋게 웃었다.
"자아."
드웰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말은 때려치우고 우선 봅시다."
"이렇게."
룬델의 기세가 사나워지자 드웰의 긴 눈썹이 올라갔다.
"찾아와주어 몹시 고맙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 당부를 받겠습니다."
"비밀은 당연히 지키겠소. 이 나이를 먹고 권력이니 뭐니 하는 부질 없는 것을 노리겠소?"
"세상에 말만으로 신의의 지킬 수 있다면 뭐가 그렇게 어렵겠습니까?"
툭.
드웰은 망설임도 없이 종이를 내밀었다.
됐소?
종이에 글자가 뜨자 룬델은 기세를 바로 거두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거참, 내 그대의 고개가 이리도 가벼울 줄은 몰랐소."
"아들을 위해 숙이는 게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내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건 나도 잘 아오. 하지만 맹세코 그대의 아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이오. 나는 정령을 좋아하오. 보이진 않아도, 그들의 부드러움을 알고 있소."
"죄송하지만,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라르웬이 입을 열었다.
―며칠 뒤에 마법사가 온단다.
자신의 누이, 넬시아가 온다는 말을 꺼낸 후로 룬델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하벨의 영혼을 확인하러 온다더구나.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라르웬은 하벨이 직접 헤레스에게 요구했다는 소리에 더 기가 찼다.
'대체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거야, 하벨?'
라르웬의 시선이 하벨을 향했다. 그는 태평해 보였다.
"정말 확인할 수 있는 겁니까?"
"그렇소. 내 마법은 특히 소리에 예민하다고 말하지 않았소? 그래서 들리지 않아야 할 게 들리오. 그게 바로 영혼의 소리지."
드웰은 차분히, 그리고 확실히 말해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그대에게 요구하겠소."
"비밀로 하겠습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정령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룬델은 당장 입을 열었다.
헤레스가 자신에게 말했을 때도 크게 당부하지 않았던가.
드웰이 마법사 협회에서 쫓기고 있는 처지라는 걸.
"좋소. 이 힘 때문에 나도 온갖 꼴을 다 보았으니."
드웰이 이빨을 내보였다.
"그러면 이제 비켜주겠소? 정령들까지 전부다."
"…전부 다 말이오?"
룬델이 당황하며 물었다.
일단 드웰한테 종이를 받긴 했지만, 막말로 하벨을 함부로 한다면 어떡하겠는가.
이미 하벨의 목숨을 앗아간 뒤에 놈의 목을 베어버린다면 대체 무슨 소용일까.
"소리가 뒤섞이면 나도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할 것이오. 그래도 좋다면 남아 있어도 괜찮소."
드웰은 룬델에게 선택을 넘겼다.
불확실한 결과를 보든, 불안해도 확실한 결과를 보든.
"괜찮습니다."
하벨이 입을 열었다.
"눈이 선한 분이네요."
이건 거짓말이었다.
눈이 선하다고 본질이 선하다는 말로 이어질 수 없었다.
죽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 하벨은 놀란 표정을 한 아라를 바라보며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아버지."
하벨이 짓는 저 표정에 라르웬은 속이 들끓었다.
진짜 하벨을 놔두고 가도 되는 건지.
"가자꾸나."
라르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가 역류하는 기분이 들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속이 뒤틀리고, 살점이 떨어졌다.
하벨을 놔두고 가도 되는 건지 갈등하고, 또 갈등했지만, 그의 선택을 존중했다.
하벨은 이전의 하벨이 아니었고, 자신도 변하기로 했으니까.
"아버지……!"
"라르웬. 가자꾸나."
룬델의 목소리가 떨리자 라르웬은 주먹을 꽉 쥐며 하벨에게 걸어갔다.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무슨 소리라도 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형님."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로. 간절하게."
라르웬은 입술을 깨물며 루룸이 붙잡은 아라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대자아앙……!]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드웰이 물었다.
"정령들은 다 나갔소?"
"그걸 제게 물으시면 안 되죠."
하벨은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미안하오. 잠깐만 기다리시오."
드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역시나 하벨 티에라의 이야기를 들어본 모양이었다.
티에라 가문의 막내이면서도 정령을 보지 못하는 존재라는 걸.
'정령들'을 언급하는 소리가 들리자 하벨은 숨을 천천히 골랐다.
긴장됐다.
되게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사실 이건 오래 걸리지 않소."
드웰이 걸어와 자리에 앉았다.
"일단 가볍게 확인부터 할 테니 손을 주시오."
드웰이 손을 뻗자 하벨은 두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내가 바람을 일으킬 테니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면 되오. 그대에게 해가 가지 않을 테니 천천히 눈을 감으시오."
하벨은 눈을 감았다.
드웰이 호흡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천천히 일어나 손가락 끝을 간질였다.
기분 좋게 밀려오는 감각에 하벨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바람이 팔을 향해 밀려드는가 싶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
하벨이 뭔가 이상해 눈을 뜨자 드웰이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대체 누구십니까?"
드웰이 갑자기 공손해졌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왜… 당신 같은 분이 이 몸에 있는 겁니까?"
"이건 제 몸이 아니니까요."
그 대답에 드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필요했습니다."
드웰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어가자 하벨은 망설이지 않았다.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다."
드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전히 당황과 놀람이 공존하는 그 표정으로 뒷말을 이었다.
"이렇게 커다란 영혼은… 그 누구라도 옮길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