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한 번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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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나라가 아니니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 말 맞지?"
하벨은 비웃음을 그리며 물었다.
어떻게 다른 나라의 첩자가 됐는지는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데론이 웨인에게 빚을 갚을 돈을 주었다는 일과 방금 꺼낸 '우리 귀족'이라는 소리가 말이 되지 않았다.
당장 피의 연회가 끝난 후에 열린 연회에도 자신을 아니꼬운 눈으로 바라보던 왕정파 귀족들이 몇인가.
"지금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데론은 말을 더듬었다.
눈동자를 어떻게 할지 몰라 끊임없이 흔들리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평소라면 태연하게 표정을 관리하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꾸밀 수 있겠지만, 데론은 곱게 온 것도 아니라 납치되지 않았던가.
그 상황에서 여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도련님."
레디나가 입을 열었다.
"왜?"
"어떻게 아신 거예요?"
레디나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은 사람들의 극단적인 표정에 익숙했다.
특히나 위기에 몰릴 때 드러나는 표정을 잘 알기에 데론이 지금 위기에 몰렸고, 거짓말이 탄로가 났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곱게 자란 하벨이 이런 표정에 익숙할 리가 없었다.
[맞아. 이 몸도 너무 궁금해. 이 몸도 데론이 거짓말을 하는 건 알았는데 첩자라는 것까지는 몰랐어.]
아라 자신이 보았을 때, 데론은 당황했고 눈동자가 흔들려 '거짓말을 하는구나'하고 알게 된 게 전부였다.
하벨하고 말도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고.
만약 자신보고 알아내라고 했으면 몇 번이나 물어야 했을까.
"이제는 그냥 보이거든."
하벨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자의 표정을 봐왔겠는가.
감정이 있는 한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카샬."
"예, 도련님."
카샬은 무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 깜짝 놀란 상태였다.
하벨이 뭘 했는가.
그저 데론에게 물어보고, 바라보고, 그게 전부였다.
'자아의 혼동이 왔다고 과연 이 정도로 사람이 바뀌는 게 말이 될까.'
카샬은 점점 그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냥 하벨 티에라라는 껍데기를 쓴 다른 사람이 아닌가.
―카샬. 몇 번을 말하지만, 나는 하벨 티에라가 아니야.
문득 하벨이 계속 주장해온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저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지금 하벨은 대체 누구인가.
"검 뽑아."
하벨의 목소리에 카샬은 흠칫거렸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카샬은 신이 난 하벨을 쳐다보았다.
"혹시 검 안 가지고 왔어?"
"아닙니다."
하벨은 이대로 분위기를 더 고조시키고자 했다.
원래라면 자신이 용왕의 힘을 써 놈의 몸에 있는 물을 조종해 두려움을 줬을 테지만, 지금은 그러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 몸이 버티지 못하겠지.
이제는 침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스겅.
검이 뽑히는 소리에 놀라지 않을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누구야?"
하벨은 기세를 몰아 물었고, 카샬은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데론에게 다가갔다.
"자, 자, 잠시만요, 도련님. 말로 합시다. 차분히 대화를……."
"싫어."
하벨은 단호한 목소리를 내며 발을 움직이자 데론은 하벨에게 밟혔던 배를 움켜쥐었다.
"저, 저 죽습니다. 정말로 죽습니다!"
"지금도 죽을 건데? 당장 네 뒤에 있는 검이 보이지 않는가 보네."
데론은 잔뜩 얼어붙어 고개조차 돌리지 못했다.
"저, 저 말고 제 식구들이 다 죽습니다. 제발, 제발 제 식구들만이라도……."
"가족? 개소리 지껄이지 마. 가족을 생각했으면 이딴 짓거리는 안 벌여."
하벨은 차디찬 말을 날렸다.
결국, 마지막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가족을 인질로 잡고 감정으로 호소하는 꼴이라니.
자신이 있던 곳도, 이곳도 어쩜 이렇게 똑같은지.
"개수작도 부릴 생각하지 마."
하벨의 눈꼬리가 날카로워졌다.
"어떻게 그, 그렇게 매정하실 수 있습니까! 제 죄를 왜 가족까지 받아야……."
퍼억!
카샬은 더는 참지 못하고 데론을 걷어차 바닥에 뉘었다.
"닥쳐, 이 쓰레기 새끼야!"
발을 슬쩍 움직이던 하벨이 데론의 머리를 툭툭 걷어차고, 카샬이 등줄기를 한 번 더 걷어찼다.
퍽!
"그딴 소리는 네놈 뒤에 있는 놈한테나 징징거려."
분명 하벨을 만만하게 봤음이 틀림없었다.
사기라도 안 당하면 다행이다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올 줄이야.
"도련님. 손가락 몇 개만 가져가도 되나요?"
레디나는 벌써 쪼그려 앉아 데론의 팔을 붙잡았다.
"딱 4개만 가져갈게요."
단검까지 꺼냈기에 하벨이 말만 하면 가져갈 생각이었다.
"안 돼. 여기에서 피가 튀기는 건 결단코 반대야. 뒤처리가 힘들다고."
카샬이 날을 세웠다.
하벨을 누가 노릴 줄 모르니, 청소는 항상 자신의 몫이었다.
"그럼, 제가 할게요. 페트리오한테 피를 쉽고 간단하게 지우는 방법을 몇 가지 배웠어요. 아주 기가 막히던데요?"
아무렇지도 않게 나누는 말에 데론은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도 결국 귀족이었다.
곱게 자라온 놈이 이런 상황이 과연 얼마나 버티겠는가.
"카샬. 손가락 몇 개라면 괜찮지 않을까? 나도 그때 옆에서 같이 봤는데 엄청나던데? 거짓말할 때마다 하나씩 잘라내는 거야. 오, 열 번의 기회가 있겠네?"
하벨이 화사하게 웃자 데론은 눈빛부터 바꿨다.
정에 호소하면 넘어가는 멍청이들 간혹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벌집을 건드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픔을 참으며 다급히 무릎을 꿇고 빌다시피 했다.
"제, 제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글쎄.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겠는데?"
하벨은 침대로 걸어가며 천천히 머리를 굴리는 척 연기했다.
데론이 일단 살아야 했다.
한, 몇 시간 정도.
'역시 독이 좋겠네.'
하벨은 새로 얻은 불을 떠올리다 곧 독으로 방향을 바꿨다.
세 개로 나뉜 독 중에 빨간색을 띠는 힘은 조건이나, 시간이 필요한 극독류라 지금 상황에서 딱 맞지 않는가.
'아직은 무작위로 튀어나오지만, 뽑아보면 좋은 게 나오겠지.'
하벨이 침대에 앉아 손가락을 튕기자 아라가 귀를 쫑긋 세웠다.
[정령수가 왜 필요해?]
하벨은 그저 미소를 지었고, 아라는 앞발을 내밀다 말고 곧 의심 어린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흥, 또 위험한 행동 하려는 거지? 이 몸은 그럼 안 줄 거야.]
아라는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벨의 표정이 살짝 굳어질 때쯤에 데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웨인 톨이 가진 기,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누가?"
하벨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데론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았고, 눈을 마주했다.
덜덜.
이상하게 갑자기 하벨이 커 보였다.
마치 산을 마주한 듯 거대했고, 두려웠다.
머릿속에 써먹으려 만들어놨던 여러 말들이 저 두려움에 잠식되어 버렸다.
"코스……."
그 때문이었을까, 절대로 꺼내면 안 된다는 머리와 달리 목소리가 자동으로 나왔다.
"코스모피안."
살고자 하는 의지가 이성을 억눌렀다.
데론은 휘어지는 하벨의 눈을 본 순간, 아주 강하게 무언가 잘못됐음을 알았다.
"…코스모피안 왕국이라니."
카샬은 혀를 찼다.
한때 제국이었던 왕국이 아닌가.
"그곳이 왜?"
하벨은 여전히 자신한테 고개를 돌린 아라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처음 들어보는 나라 이름이 나왔다.
카샬에게 물어보려던 차, 하벨의 눈썹이 가운데로 몰렸다.
―코스모피안 왕국. 한때, 제국이었지만, 여러 나라가 모여 만들어진 신진 왕국 레놀드로 인해 영토의 40%를 빼앗기고 추락했다. 제국이… 이렇게 빨리 무너질 수 있는 걸까.
머릿속에서 하벨 티에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름이 우수수 돋아났다.
이전에는 이런 정보들이 떠오르면 훨씬 더 빨리 이해할 수 있어 좋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저 두 나라를 기억하라는 것인가?'
하벨 티에라가 일부러 이 기억을 심어놓을 리가 없었다.
하벨은 진정하려 애를 썼다.
어차피 다른 나라들의 이름은 언제가 되었든 알아야 했을 테니.
"에르티안 왕국… 을 압박하려고 그런 듯합니다."
데론은 하벨의 눈치를 보며 말꼬리를 늘였다.
'확실히 그렇지. 날씨 정보만큼 유용한 게 없으니까.'
날씨의 정확도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정령들이 확실했다.
이미 그들한테서 계속 날씨 정보를 듣고 있기에 체감이 들지 않을 뿐, 마을만 가도 이전처럼 날씨 방송이 매일 나왔다.
에르티안 왕국의 전반적인 상황만 보아도 톨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그 기술의 의존도가 매우 높았고.
'웨인 놈이 멍청해서 침투하기도 좋았을 테지.'
하벨이 아라의 꼬리를 살짝 건드리자 슬쩍 고개가 돌아가 자신하고 눈이 맞았다.
아라는 순간 흠칫거리더니 금세 미안함이 눈동자에 그렁그렁 맺혀서는 하벨에게 다가갔다.
[이 몸이 대장을 외면해서 미안해! 이 몸이 잘못했어!]
'잘못한 일은 아닌데.'
하벨은 아라가 이렇게 마음을 빨리 접을 줄 몰랐기에 오히려 더 당황스러웠다.
밀려드는 정령수를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티에라 가문을 감시하라고 시켰어?"
"…마, 맞습니다. 모든 보고를 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데론은 자신이 세워두었던 둑이 '코스모피안'이라는 이름을 언급한 이후로 빠르게 무너짐을 느꼈다.
"너 말고도 많아?"
"티에라 가문 주변에… 있는 귀족들을 의, 의심해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여기저기 퍼져 있다?'
하벨은 흥미로운 소식에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갔다.
"주로 무슨 일을 시켜? 그냥 감시?"
"티에라 가문을."
데론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순간, 이성이 간신히 그 말만큼은 잡았다.
절대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가 머릿속에서 계속 울렸다.
서걱.
하지만 그때, 데론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목덜미에 닿는 서늘함에 데론은 부들부들 떨었고, 크게 뜬 눈으로 조용히 눈동자를 굴렸다.
단검이 목에 있었고.
툭.
무언가 떨어졌다고 생각한 무렵, 어깻죽지부터 옷이 떨어져 내려왔다.
어깨 위에 검이 놓여 있었다.
"망설이지 마라."
"그래. 눈동자를 굴리는 순간, 목이 떨어져 나갈 테니까."
카샬의 말을 레디나가 이었다.
"아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날이 섰어?"
하벨은 그 모습을 재미있어하며 웃었다.
"이러면 나라도 말리기가 어려운데."
하벨이 손을 뗀다는 말에 데론은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살고자 발버둥 치는 게 뭐가 나쁜가.
"티, 티에라 가문을 손에 넣고자! 그러려고 주변 귀족을 포, 포섭해서… 그래서, 그래서……."
"고립시킨다?"
"맞습니다! 티에라 가문이 아… 아무리 강하더라도 결국, 교류를 끊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자급자족도 한계가 있을 테고요!"
"…풉."
카샬은 비웃음을 터트렸다.
하벨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했지만, 어떤 정보도 넘기고 싶지 않았다.
티에라 가문이 자급자족이 안 된다니.
저 멍청한 놈이 티에라가 정령사 가문임을 잊었던가.
[카샬이 왜 웃는 걸까?]
아라가 물었지만, 하벨은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도 궁금했으니까.
"왜 웃어?"
"나중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도련님. 누가 멍청해도 말할 입은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카샬은 대놓고 데론을 비웃었다.
"그래. 조금 기다리는 게 뭐가 어떻겠어?"
하벨은 잠깐 사이 손아귀에 빨간색을 띠는 독을 만들었다.
네 번째 막이 생길 만큼 성장한 덕인지, 불이라는 새로운 능력을 익혀서인지 몰라도 무작위로 나오나 무슨 독인지 눈에 보였다.
'이건 아니고.'
하벨은 카샬과 레디나의 눈치를 보며 만들어 놓은 독을 지웠다.
혹시 봤을까.
레디나를 바라보니, 그녀는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안 봤겠지?
"데론 트로인."
하벨은 그제야 안도하며 이름을 불렀다.
"예, 예, 도련님!"
"어떻게 하고 싶어?"
"어떻게라뇨……."
"몰라?"
"제, 제가 첩자가 되겠습니다!"
'이것도 아닌데.'
하벨은 만들어진 독을 지우다 우스운 소리에 입꼬리를 올렸다.
"첩자가 되겠다?"
말을 꺼내며 세 번째로 독을 만들었다.
'…오.'
먹은 후 5시간 뒤에 죽는 독.
'이 정도면 되겠는데.'
하벨의 시선이 다시 데론에게 향하자 그는 자신이 진지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눈에 힘까지 줬다.
"예. 제가 도련님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이 거짓말쟁이!]
아라가 털을 부풀렸다.
[이 몸이 보기에 저 사람은 거짓말쟁이야! 진심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아라까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이미 끝난 게 아니겠나.
"물 한 잔만 줘봐."
하벨은 카샬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카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까 손을 움직이더니 무슨 붉은 게 생기지 않았던가.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었는데.
'…잠깐 눈이라도 떼면 말썽이시라니.'
카샬은 그제야 하벨이 무얼 했는지 알아차렸다.
한숨을 내쉬며 카샬은 물컵을 따라 주었다.
데론이 볼 수 없게 가리며.
"도련님."
"대단하네."
그걸 보다니.
하벨은 독을 스르르 물컵에 넣어 카샬에게 내밀었다.
어쩜 저렇게 뻔뻔할까.
카샬은 인상 하나 변하지 않은 하벨의 표정에 혀를 내둘렀다.
"가져다줘."
하벨은 손가락을 들어 데론을 향했다.
데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하는 표정을 짓길래 하벨은 해맑게 웃어주었다.
"먹어."
"…예?"
"내 첩자가 될 거라며? 그럼 나를 믿어야지."
설령 물컵에 독이 들었다고 해도.
"목이 탈 텐데, 쭉쭉 마셔.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