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81화 (81/415)

81화. 연회에 붉은 꽃을(3)

* * *

* * *

[…어휴, 룬델. 정신 사나우니까, 다리 좀 그만 떨어!]

세렌의 투정에 룬델은 어색하게 웃었다.

오늘 하벨과 라르웬이 진짜 돌아오는 날이었다.

세간에서 하벨은 요양 중이라 알려진 만큼 이곳에 있는 사람은 현재 자신뿐이었다.

"그렇게 티가 많이 났나?"

[티만 많이 나겠어? 너 지금 표정도 엄청 이상한 거 알아?]

"내 표정이? 아, 아니. 대체 어떻길래 그러나? 이상하면 안 되는데. 거울이라도 가져와야 하나?"

룬델이 다시 돌아가려 하자 세렌은 다급히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됐어. 내가 보기에 이상한 거지, 하벨이나 라르웬이 본다면 다를 거야.]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 정도는 되어야 돌아오는 이도 반가울 테니.

"고맙다, 세렌."

룬델이 고마움을 가득 담아 웃자 세렌은 고개를 돌렸다.

[바보 같긴. 겨우 며칠 떨어졌다고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

"내겐 너무도 긴 시간이었어. 정말, 하루하루가 피가 말리는 시간이기도 했고."

라르웬을 통해 주기적으로 연락했지만, 그때마다 얼마나 심장이 떨어졌는지.

하벨에게 당장 돌아오라는 말을 꺼내려다 삼키고, 그렇게 수십 번 이상 고민하지 않았던가.

[그럼 허락을 안 했으면 됐잖아. 그렇게 하벨이 소중하면 지금처럼 손에 끼고 살면 되는 거 아니야?]

"하벨도… 내 품을 떠날 때가 올 테니, 미리 연습한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참을 수 있어."

[룬델, 네가 잘도 그러겠다. 너한테 있어… 하벨은 정말. 정말 특별하잖아?]

세렌은 금세 상처받은 눈빛을 짓는 그 모습에 뒷말을 더는 이어가지 못했다.

자신들과 다른, 인간이 가진 망각이라는 축복이 있음에도 왜 아직도 잊지 못하는 건지.

두 사람의 목숨으로 이어간 생명이기에 그런 걸까.

"고맙다, 세렌."

[바보 같긴. 넌 바보야, 룬델.]

세렌은 룬델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

[저기 오네.]

세렌의 말이 마치 출발신호가 된 것처럼 룬델은 단숨에 달렸다.

세렌은 한숨을 내쉬며 룬델의 뒤를 따랐다.

가주 수업 때 대체 뭘 배웠는지. 아무도 없어서 망정이지.

불쑥 튀어나온 룬델의 모습에 마차가 다급히 멈췄다.

"…와아, 아버지께서 진짜 네가 너무 보고 싶으셨나 보다."

라르웬은 마차 문에 바짝 붙은 룬델을 보며 살짝 질색했다.

"내가 아니라 형님이겠죠."

"날?"

라르웬은 하벨의 말에 기가 찬 듯이 반응했다.

"도련님 상식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다 자란 둘째 도련님이 뭐가 예뻐서 이러시겠습니까?"

카샬도 가려운 입을 참지 못했다.

"그럼 확인하면 되겠네."

하벨은 문을 열었다.

최대한 무덤덤하게 내려왔지만, 룬델의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하벨은 그대로 숨마저 멈췄다.

―오셨습니까, 용왕님?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던 사람들의 미소가 갑자기 떠올랐다.

하지만 하벨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다시 앞을 보았다.

얼마나 세차게 달려왔는지, 룬델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다.

무엇이 저렇게 그를 급하게 만들었을까.

그들보다 더 깊은 시선은 무엇일까.

'…분명 내가 하벨 티에라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데.'

가슴을 건드리는 그 시선에 하벨은 궁금증이 생겨났다.

"어서 오렴, 하벨아."

룬델은 하벨을 살핀 뒤에야 꾹 참았던 미소를 말과 함께 터트렸다.

하벨이 당황하기 무섭게 룬델은 그를 안았다.

밀려드는 포근함에 걱정, 다정함 등 온갖 따뜻한 감정이 느껴져 하벨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반가… 워요, 가주님."

"그래, 하벨아."

하벨을 안은 룬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고맙단다. 내가 얼마나 이날을 기다렸는지."

룬델의 목소리가 떨리는 만큼 하벨의 눈동자 흔들렸다.

쿵.

쿵.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위험을 알리는 반응과도 같았다.

자신이 세운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려는 하벨 티에라의 사람들.

그들은 그 어떤 칼날보다 매섭고, 단단했기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 * *

"…도련님, 듣고 있나요?"

헤레스가 하벨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그럼에도 멍하니 있자 덜컥 자신이 하벨을 만나자마자 했던 잔소리가 생각이 났다.

"도련님, 그…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갑자기 가주님께서 오셔서 도련님이 어디론가 갔다고 말씀하시는데, 눈앞이 캄캄해졌어요. 걱정이 하루, 이틀 쌓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말이 심하게 나와……."

"헤레스."

"예?"

"그대는 하벨 티에라의 주치의지?"

"예, 도련님의 주치의이기도 하죠."

헤레스는 제법 진지해진 하벨의 표정에 절로 긴장됐다.

―도련님께서 앓으시는 자아의 혼동이 심해지신 것 같습니다.

카샬이 하벨의 방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며 폭탄을 던지지 않았던가.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현재 자아의 상태를 알 수 있을지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했다.

하지만 이미 본인을 하벨 티에라라고 인정하지 않는 이상 무슨 말을 꺼내도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대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하벨 티에라가 아니라 용왕이야."

여전히 '용왕'이라는 말이 낯설었지만, 헤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하벨 티에라가 가진 것들을 내가 욕심내면 안 된다고 몇 번이고 되뇌었네."

하벨은 지금 자신의 흔들림을 제대로 알아줄 사람은 주치의인 헤레스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버텨왔네. 하지만……."

"참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련님."

"그건 기만이 아닌가. 내 가족도 아닌 사람에게 가족인 척하는 건 말일세."

"아뇨. 도련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하벨 티에라가 아닌, '용왕'이라는 말을 여러 번 하셨어요. 저도 이전 도련님과 다르다는 걸 계속 받아들이고 있고요."

헤레스는 자연스럽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불안정한 자아는 어느 쪽이든 도움이 되질 못 했다.

하벨은 이중인격과 다른, 기존 자아가 죽고 아예 새로운 자아가 탄생한 상태였다.

현재 자아를 존중해줘야지 그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도련님께서는 '하벨 티에라'의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현재 도련님께 맞추고 있어요."

자신이 보기에도 모두가 변한 하벨에게 맞춰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라르웬에게 있었고.

"도련님께서는 지금 적응 중이시니 혼란스러운 게 당연합니다."

"당연… 하다고?"

"물론이죠. 모든 게 새롭고 낯설 텐데, 어떻게 금방 적응을 하겠어요?"

'…그런가? 나는 아직도 혼란스러운 것인가?'

하벨은 룬델 때문에 치솟았던 혼란스러움이 차차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무거웠다.

"그래서 도련님께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어 기쁘네요."

"좋은 소식이라면? 그 마법사와 소식이 닿은 건가?"

"맞아요! 그분과 연락이 닿았어요. 조만간 티에라 가문을 방문하겠다고 하네요. 하지만 그 '조만간'이 저도 언제인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헤레스는 기뻐하다가 말고 괜히 머쓱한지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그 팔찌는 아직 저도……."

"괜찮네. 온다는 사실만으로 좋은 소식이니."

하벨이 웃자 계속 전전긍긍하던 아라가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이 몸이 아는 대장으로 돌아왔어. 아까 룬델한테 안긴 후로 계속 이상해 보였는데.]

아라는 하벨을 토닥거려주고는 하벨의 팔찌에 달린 랜턴을 슬쩍 건드렸다.

흔들리는 랜턴에 아라의 눈동자가 순간 반짝거렸다.

하벨이 맨날 소매로 가려서 몰랐는데 되게 재미있지 않은가.

"헤레스, 혹시 크라마라고 불리는 마법사를 아는가?"

랜턴을 가지고 노는 아라의 모습에 하벨의 미소가 더 길어졌다.

"…걔, 아직 안 죽었어요?"

헤레스는 눈을 깜박거렸다.

"친한 사이인가?"

"아뇨, 아뇨. 절대 아니에요! 그냥… 마법사 협회 탈퇴를 같이한 사이기도 하고, 그……."

"협회를 부술 거라던데?"

"도, 도, 도련님께서도 아세요? 미쳤어, 크라마. 진짜 미쳤나 봐."

헤레스는 경악하다 다급히 목소리를 낮췄다.

"…도련님. 크라마 걔는 진짜 눈치가 가끔 없어서 그렇지,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에요."

"내가 고발할 거라 생각해?"

"보통은 그런 선택을 하죠. 마법사 협회가 내어 주는 게 좀 많으니까요."

"나는 아니야. 오히려 쳐부술 셈이니."

순간, 헤레스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하벨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어떤 당황함인 걸까?'

"도, 도련님."

"왜?"

"이만 편히 쉬세요."

"그래. 이틀 뒤에 왕실로 가야 하니 오늘은 쉬어야지."

"…누가요? 제발 도련님은 아니라고 말씀해주세요."

"소식이 벌써 거기까지 닿았는가?"

헤레스는 느긋해 보이는 하벨의 말에 방긋 웃었다.

"도련님? 오늘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도착하신 지… 한, 3시간쯤 흘렀네요."

"그렇지?"

하벨의 태연한 대답에 헤레스는 다급히 앞머리를 이마 뒤로 넘겼다.

"그러니까, 오늘 오셨는데 하루 쉬시고 다시 왕실로 가신다는 말씀이죠?"

"오, 맞네. 아무래도 그대에게는 말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잘한 모양이야."

하벨이 침대에 기대어 웃자 헤레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익.

"안 됩니다!"

하벨이 당황할 정도로 강한 의지가 헤레스의 눈동자에 어렸다.

"안 된다니?"

"연회의 꽃은 독살이 아닙니까?"

"……?"

"독하면 연회! 연회 하면 독! 연회에 독이 빠질 수 없는 노릇 아닙니까?"

"아니, 헤레스."

"이렇게 제가 말씀드려도 꼭 가시겠죠? …하. 미리 준비해 둬야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도련님! 아, 오늘은 정말로 아무것도 하시면 안 됩니다. 무조건이요."

헤레스는 넙죽 허리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하벨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연회를 겪었길래?'

[대장, 대장. 진짜 연회의 꽃은 독이야?]

"아니야, 아라야. 연회의 꽃은 독이 아니라, 피야."

하벨은 제법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 * *

"…도련님께서는 밝은색이 어울리시는데."

카샬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초상이라도 난 것처럼 장갑과 머리 장식까지 죄다 검은색이 아닌가.

이건 주인공이 아니라 악당에 가까웠다.

"하얀색은 뭐가 막 묻어서 별로야."

"뭐가… 묻습니까? 아, 음식을 드시다 흘리실까 봐 그렇습니까? 여벌 옷은 두둑이 챙겨뒀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니. 피가 묻을 것 같아서."

[맞아. 연회의 꽃은 피야!]

아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서 차를 마시던 라르웬이 뿜었다.

"막내야, 너… 아라한테 뭘 가르친 거야?"

"연회의 꽃은 피라고 알려줬습니다."

목깃을 점검하는 시녀의 손길을 받으며 하벨은 활짝 웃었다.

"카샬."

라르웬이 당장 카샬을 불렀다.

"아니, 둘째 도련님. 진짜 억울합니다. 지금 저도 황당하던 참이었습니다. 이거 대체 누가 가르친 겁니까? …설마 너야, 레디나?"

하벨의 옷을 정리하던 레디나는 손을 멈추고는 억울함을 드러냈다.

"저는 도련님의 순수함을 지켜드리고 싶은 쪽이에요. 절 의심하지 마세요."

'…좀도둑은 아닐 테고. 걔가 멍청하지만, 그런 일은 하지 않아.'

카샬의 미간에 고인 주름이 짙어졌다.

"누가 알려준 적도 없고,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야."

장난기 어린 하벨의 목소리에 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오늘."

하벨은 말을 생략하며 입꼬리만 올렸다.

정말 피를 볼 차례가 아닌가.

"팔찌는 또 그걸로 착용하실 생각입니까, 도련님?"

"아니, 안 빠진다니까. 네가 빼볼래?"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모든 게 멈췄다.

시종이 문을 열자 룬델이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가주님?"

모든 시녀와 시종이 일제히 손을 멈추고 룬델을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존재만으로 분위기가 달라졌고, 룬델을 향한 시종들의 시선에 두려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준비는 다 됐는가?"

"예, 이제 확인만 하면 끝이 납니다."

카샬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럼, 잠깐 나가들 있게."

"알겠습니다, 가주님."

카샬과 레디나를 포함한 시종들 전부 밖으로 나갔다.

[너희도 잠깐 나가 있어.]

세렌이 룬델을 따라온 정령들을 보며 말하자 그들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왜 너만 들어가, 세렌? 네가 물의 힘이 강한 정령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지.]

[이번 사건에 나 말고 정령 기사와 얽히지 않은 정령들이 있나 모르겠네? 룬델이 곱게 넘어갔으면 알아서 눈치 챙겨야 하는 거 아니야? 입이 있으면 말해보든지.]

[…가, 간다고. 갈게! 가면 되잖아!]

정령들은 세렌의 눈치를 살피다 조용히 물러섰다.

그 일이라면 정말 룬델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미안했으니까.

설마하니, 정령 기사들이 자신들의 뒤통수를 때릴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하벨아. 재무부 장관과 자문관이 죽은 건 걱정하지 말거라."

룬델은 정령들이 나간 뒤에야 입을 열었다.

"벌써 처리하셨습니까?"

라르웬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언제든 떠벌릴 그 입을 연회 뒤로 미루는 거야, 약간의 돈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건 라르웬 너도 알지 않더냐?"

"혹시 전하께서도 아셨습니까?"

하벨의 물음에 룬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왕실은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소식을 막 들었단다. 너에게 알려줘야 할 듯싶어 이렇게 찾아왔고."

준비를 마쳤다는 말에 하벨은 룬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 티에라 가문 역시 선택할 순간이었다.

"가주님."

"그래, 하벨아."

"티에라 가문은 오늘도 가만히 있을 겁니까? 아니면 손에 움켜쥐기만 했던 칼을 휘둘러보겠습니까?"

하벨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 * *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연회장을 덮었다.

어딘가 엉성했지만, 그 어느 순간보다 화려하게 치장된 귀족들이 우글거렸다.

모두 한 존재를 보러 이 자리에 모였다.

그 한 존재를 위해 왕실을 압박하며 이 자리까지 만들지 않았던가.

갑자기 밖이 분주해졌다.

자리를 잡고 있던 귀족들 전부 어떤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드디어, 그 존재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페트리오 비발체 님이 입장하십니다!"

웅성웅성.

"페트리오라니? 혹 내가 잘못 들은 거요?"

"아뇨. 제대로 들었습니다. 저도 그 이름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귀족들의 의문이 넘실거릴 무렵, 문이 열렸다.

페트리오가 당당히 걸어왔다.

얼굴을 확인하자 연회장에 일어난 소란은 더욱 커졌지만, 페트리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봐라, 네놈들이 죽였던 내가 돌아왔다.

페트리오는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지옥에서 돌아온 사람이 저럴까.

눈동자에 어린 증오에 벌써 귀족들은 마른 참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예상밖에 일이었다.

페트리오가 입을 여는 순간, 모든 게 박살이 나는 게 아닌가.

귀족 중 그 불쾌함을 견디지 못해 돌아가려는 순간, 시종이 다시금 외쳤다.

"라르웬 티에라 님, 하벨 티에라 님이 입장하십니다!"

기다렸던 이름이 들려오자 귀족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드디어 왔다.

라르웬이라는 혹을 달고 왔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적어도 룬델 티에라가 아니라면.

이미 페트리오의 일은 잠깐 머릿속에 사라져버렸다.

문이 활짝 열렸고, 귀족들의 입꼬리도 같이 올라갔다.

라르웬이 존재감을 뿜어내며 앞서 걸었고, 그 뒤를 이어 하벨이 우아한 걸음으로 따랐다.

홀린 듯 그들을 바라보던 귀족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묘하게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상복을 떠올리듯, 짙은 색의 옷을 입은 티에라들은 물론, 하벨의 손에 들린 붉은 꽃이 참 거슬렸다.

'붉은 꽃이라니? 왜?'

귀신같이 잘 어울리는 모습과 달리 귀족들은 그들이 입은 옷차림에 머리를 굴릴 수밖에 없었다.

저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쿵쿵!

그때, 땅이 진동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비하기도 전에 귀족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기사들을 이끌고 누군가 걸어왔다.

누구나 아는.

누구에게나 두려운 존재, 룬델 티에라.

그가 걸어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