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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80화 (80/415)

80화. 연회에 붉은 꽃을(2)

* * *

* * *

"…하."

라르웬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을 내쉽니까?"

하벨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래. 왜 한숨을 내쉬어, 라르웬? 이 몸이 아는데, 한숨은 좋지 않은 거래.]

저 순진한 표정들을 보자 라르웬은 열이 치밀어 올랐다.

틈의 세계와 관련된 이상 신호 때문에 자리를 비웠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사이 하벨이 모스튼 벨은 물론, 재무부 장관하고 자문관의 목을 날렸다니.

라르웬이 카샬을 쳐다보자 그는 자신의 목을 잡으며 뒤로 물러섰다.

"이번 일로 제 멱살을 잡으시면 진짜 억울합니다. 이건 가주님께도 말씀드릴 겁니다."

"말해. 당장 말씀드려. 아니다, 오늘 가면 내가 직접 말씀드려야겠네. 카샬 네가……."

"형님."

하벨은 라르웬을 말렸다.

"지금 티에라 저택으로 가잖습니까? 왜 좋은 날에……."

"막내야."

라르웬의 언성이 살짝 올라가자 하벨도 주춤거렸다.

이상하게 라르웬의 시선이 무서워 보이는 건 하벨 티에라의 영향일지도 몰랐다.

"내가 온 뒤에 움직여도 늦지 않았을 건데?"

[그건 맞지. 라르웬이 얼마나 서둘렀는데.]

루룸이 라르웬의 머리카락을 살짝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베려고 했잖습니까. 숨긴 것도 아니고, 형님께 다 말씀드린 일입니다."

하벨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술술 입을 열자 라르웬은 제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다 루룸의 가시에 찔려 움찔거렸다.

"그래. 어차피 베려고 했지. 다 좋아. 다 좋은데, 너는 왜 거기에 간 거야?"

라르웬은 당장 이해가 가질 않는 사실부터 물었다.

레디나라는 암살자를 영입했으면 그녀를 시켜야 하는 게 아닌가.

설령 위치상 재무부 장관과 자문관을 비슷한 시간에 죽이지 못할 것 같았으면 카샬을 보내면 될 테고.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으니.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하벨은 지금 혼나는 중이라는 걸 알지만, 조금 전 일을 생각하니 웃음이 실실 나왔다.

두 놈의 머리가 베어질 때, 과거에 하지 못했던 일의 한을 푸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기뻐?"

라르웬이 주춤거리며 물었다.

"예, 기쁩니다."

[그럼, 이 몸도 기뻐!]

아라까지 이빨을 내보였다.

"…하아."

라르웬은 더는 혼낼 수가 없었다.

너무도 행복해하는 하벨의 모습을 보니 금세 맥이 빠졌다.

자아의 혼동으로 하벨이 본래 자신을 잃어버리자 예전과 달라지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더는 외롭지 않게.

"둘째 도련님?"

"왜?"

라르웬은 카샬의 물음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게 끝입니까?"

"그럼 기쁘다는데 뭐라고 그래?"

"저한테는 언제나 멱살을 잡으시고, 도련님께 '그러지 마라'가 전부라니. 이유를 알아도 참 너무하다 싶습니다."

"하벨은 내 동생이니까."

"압니다. 강조하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내심 도련님께 조금 강하게 말할 거라 생각한 제가 바보였죠."

"그럼, 막내야. 준비하고 있어. 아버지한테 먼저 연락할 테니까."

라르웬은 갑자기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도 수상해 하벨은 망설이다 물었다.

"혹시 가주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습니까?"

"잘못된 행동이라는 건 알고 있네. 그럼 됐어. 이 일은 아버지께 보고하지 않을게."

라르웬은 마치 낚시를 성공한 사람처럼 입꼬리를 높이 올렸다.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너무하다니. 내가 너 때문에 아버지께 거짓말을 한 것만 따지자면 벌써 열 손가락을 넘어가는데?"

라르웬은 살짝 움츠러든 하벨을 보며 키득거렸다.

"지금도 아버지께서 얼마나 걱정이 많은지……."

"형님."

"왜?"

"원래 아버지는 그런 겁니까?"

하벨이 '아버지'를 입에 올리자 라르웬은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 잠깐만 다시 말해봐. 이거 아버지께 들려드리면 눈물바다가 될 텐데."

라르웬이 허둥지둥거리자 하벨은 단추를 잠그던 손을 멈췄다.

"장난치지 말고 말해주십시오."

"원래라고 한다면… 글쎄. 나도 다른 아버지는 몰라서. 하지만 아마 우리 아버지가 좀 유별난 게 아닌가 싶지."

라르웬은 하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특히 넌 엄청 특별하니까. 나한테도, 우리 가족……."

"특별하다뇨?"

[그건 있잖아…….]

"조용히 해, 루룸."

당장 루룸의 입을 막으며 라르웬은 어색하게 웃었다.

거기까지 말하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나중에. 네가 괜찮아지면 그때 알려줄게. 이건 너도 알고 있어야 하니까."

라르웬의 분위기가 한층 가라앉았다.

언제나 경쾌한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슬픔이 담겨 있었기에 하벨은 더욱 짙은 의문을 느꼈다.

'대체 뭐길래 저러는 건가?'

라르웬은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치밀어 오르는 미안함을 삼켰다.

"어쨌든, 막내야."

"예, 형님."

"그런 위험한 곳엔 나서지도 말고, 설령 어쩔 수 없다고 하면 카샬을 시키라고. 얘가 돈을 얼마나 받아가는데?"

"…하. 제가 갑자기 왜 튀어나옵니까?"

하벨의 옷 정리를 돕던 카샬은 억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집사가 받는 수당에 조금 더 보태서 받는 게 고작인데.

"왜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하벨의 물음에 라르웬과 카샬의 표정이 얼추 비슷하게 굳어버렸다.

찰싹!

라르웬은 더는 참지 못하고 하벨의 이마를 때렸다.

"……!"

[대, 대장을 때리지 마!]

아라가 뒤늦게 다가와 하벨의 머리를 감싸자 루룸이 웃었다.

[하벨은 맞아도 싸. 한 대로 되겠어?]

"왜… 때리십니까?"

당황한 하벨이 뒤늦게 입을 열자 라르웬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긴 왜야? 걱정되니까. 내가 내 동생을 걱정하지 누굴 걱정해?"

라르웬은 주먹을 쥐다 말고 실실 웃는 카샬의 모습에 손을 내렸다.

"…하. 가출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니, 내가 자리를 비우지 말았어야 했는데."

"맞는 말씀입니다. 자리 좀 적당히 비워주십시오. 도련님께서 성장기로 접어드시니 저 혼자는 좀 버겁습니다."

맞장구치는 카샬도 그렇고 자신에게 화를 내는 라르웬까지.

하벨은 유난히 아픈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가슴에서 일어나는 간지러움을 느꼈다.

'내가… 나서는 건 당연했는데.'

앞장서야만 했고, 몸이 갈리도록 움직여야만 했고, 자신이 아닌 주변을 둘러봐야만 했다.

그게 왕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가족.

아버지.

형.

자신과 상관없었던 이런 단어들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순간 하벨은 멈칫거렸다.

'…좋지 않다. 이런 신호는.'

현실을 깨닫자마자 간지러움이 사라지고 지독한 갈증이 몰아쳤다.

이건 갈망이었다.

이미 잃어버렸던, 다정한 것들을 향한 갈망.

하벨은 천천히 입술을 깨물며 갈증을 삼켰다.

* * *

'…내가 미쳤지.'

카샬은 귀를 막고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레디나와 페트리오가 타고 있는 마차에 합석하는 거였는데.

'이 멍청아! 왜 여기에 앉아서는…….'

라르웬은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하벨에게 말을 걸었다.

이참에 하벨의 버릇을 고쳐주려고 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는데.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카샬?"

하벨이 묻자 카샬은 숨을 내쉬며 물었다.

"아니, 이야기가 왜 이렇게 흘러갑니까?"

"왜 이렇게 흘러가냐니? 그야, 재무부 장관과 자문관을 죽였으니까. 이제 고위직에 있는 건 피나토 웬이 전부잖아?"

하벨은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에트리안 왕국의 고위직이 재무부 장관, 자문관, 대법관. 이거 몰라?"

"알죠. 잘 알죠. 거기서 기상국장도 추가하셔야 합니다."

"아."

하벨은 손가락을 하나 더 펼쳤다.

"어쨌든, 둘째 도련님께서 도련님을 혼내던 모습은 대체 어디로 갔습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웬일로 네가 세게 나간다고 생각했네.]

아라와 놀던 루룸이 라르웬을 향해 핀잔을 뿌렸다.

"하벨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미리 들어야 나도 대비를 하지."

라르웬은 팔짱을 낀 상태로 콧바람을 살짝 불었다.

"어쨌든, 몇 번을 생각해도 피나토 웬은 아버지께 맡기는 게 좋을 듯하네."

"가주님께요?"

"그래. 피나토 웬을 잡는 건 쉽지 않을 거야. 무엇보다 지금 시간도 없고."

"움직여 주실까요? 이건… 나도 건드리고 싶은 부분이 아닙니다."

룬델은 티에라 가문을 위해, 이미 침투한 다른 나라들이 에르티안에 내분을 일으키지 않게 지금껏 조용히 움직이지 않았던가.

자신은 그런 룬델을 존중했다.

"하지만 네가 새로운 판을 만들었잖아?"

라르웬은 새삼스럽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귀족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두 존재와 그 명령을 전달하는 자를 죽인 건 물론, 유언장을 빌미로 귀족들의 발을 묶었고, 뒷세계까지 통합해 정보가 흐르지 않게 막고 있지 않은가.

"이제 내분은 불가능해."

여러 가지 상황을 보며 라르웬은 결론을 내렸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벨은 뒷말을 삼켰다.

여기서 룬델이 움직인다면 정말로 끝을 확실히 찍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뒷수습해준다고 약속했다며?"

"예, 그러셨습니다."

"그럼, 아버지가 약속을 지킬 차례겠네."

"일단… 물어보겠습니다. 티에라 가문은 좋든 싫든 선택을 해야 할 테니까요."

룬델을 생각하는 하벨이 기특한 것과 별개로 하벨이 머뭇거리자 라르웬은 더는 권할 수 없었다.

대신 하벨이 페트리오에게 꾸준히 시켰던 일을 생각하며 말을 돌렸다.

"이제 앞으로 거대 정화 장치 일은 어떻게 하려고?"

"이건 귀족들을 처리한 후에 왕실과 협력해야죠."

클로이 체닐라라는 귀족을 통해서 귀족들이 거대 정화 장치를 팔거나 방치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정령들을 도우며 강해지고, 룬델의 바람을 들어주고 하는 일은 부차적인 일이었다.

반영구인 정화제로 오염이 사라진 물을 보며 자신이 또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얻지 않았는가.

검은 물속에 나타났던 정령들의 기억이 적힌 글자와 햇살에 반짝이던 강.

그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하고 싶었다.

다시 그 희망을 맛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

[어떻게 하려고?]

아라를 잡으러 돌아다니던 루룸이 그대로 멈춰 하벨에게 다가갔다.

다른 이야기도 아니고 거대 정화 장치 이야기였다.

"왕실은 지금 회복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

라르웬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귀족들이 멋대로 들쑤신 자리를 원래대로 돌리는 작업에만 몰두해도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 왕실이 과연 협력할 여유라도 있을지.

"그냥 들쑤실 수 있게 허락을 받을 겁니다. 그 정도는 해주지 않겠습니까?"

"…들쑤신다고요?"

카샬은 하벨이 꺼낸 심상치 않은 단어에 놀랐다.

"그래. 저번 거대 정화 장치 일에 마법사가 개입되어 있었어."

[아! 이 몸도 알아! 거대 정화 장치가 검은 물을 막 뿜었어!]

"나는 이참에 마법사 협회도 무너트릴 겁니다."

"……!"

라르웬은 이어진 하벨의 말에 입을 벌렸다.

"마, 막내야?"

"예, 형님."

"아까 내가 말한 거 다 잊었어? 무리하지 말라고 했지?"

"이미 마법사 협회는 내 적입니다. 나는 거대 정화 장치를 고치려고 하고, 마법사 협회는 그 반대에 가깝잖습니까?"

하벨이 실실 웃자 라르웬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마법사 협회는 정말 커."

"귀족들도 컸습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마법사 협회는 다른 나라들과도 연결된 상태라니까?"

"저번에 들어서 압니다."

"아직 확실하지도 않고. …하. 겁이 없는 거야, 무서운 게 없는 거야?"

"나는 날 건든 놈을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너무 오래 참았거든요."

하벨은 아주 잠깐, 왕좌에 얽매였던 자신을 떠올리다 입꼬리를 올렸다.

"아, 내 잠을 방해한 죄도 추가하겠습니다."

"뒤끝이… 늘었다?"

살짝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워진 하벨의 눈빛을 보았기에 라르웬은 말꼬리를 늘어트렸다.

"어쨌든, 슬슬 포탈이 보입니다. 실례하겠습니다."

카샬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밧줄을 꺼냈다.

"아, 깜박 잊을 뻔했네."

바로 하벨의 두 손을 붙잡은 라르웬은 미리 사과했다.

"미안하다, 막내야."

"아닙니다. 이건 어쩔 수 없죠. 놀라지 마, 아라야."

포탈 부작용이 심한 걸 직접 보았기에 하벨도 마음 준비부터 했다.

마차가 포탈로 들어선 순간, 하벨은 또 멋대로 창문을 향해 나아가는 머리를 느꼈다.

푹신한 감각이 머리를 스치고,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충동이 가슴 끝까지 차올랐을 때,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가야, 아가야.

순간, 하벨의 몸에 힘이 빠졌다.

'……?'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갑자기 가슴팍까지 슬픔이 가득 차올랐다.

사무치게 그리운 저 목소리는 대체 뭔지.

"하.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저택이 보이……."

카샬은 숨을 돌리다 말고 그대로 멈췄다.

하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지 않은가.

[대, 대장! 갑자기 아파?]

아라가 하벨을 꼭 안았다.

"도련님? 혹시 아프셨습니까?"

"내, 내가 너무 세게 쥐었어?"

라르웬까지 당황하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벨은 멀리서 보이는 티에라 가문 저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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