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78화 (78/415)

78화. 유언장이 공개되다(3)

* * *

* * *

"…이런 미친!"

남자는 오늘 새벽에 부랴부랴 전해진 소식을 듣고는 이를 갈았다.

그렇지 않아도 미간과 이마에 어린 주름이 깊어졌다.

어제 말도 안 되는 쪽지 하나가 전달됐다.

―존경하는 재무부 장관님. 제가 재무부 장관님을 위해 한 가지 알려드릴 사실이 있습니다.

자신만만한 시작에 자신은 코웃음을 쳤다.

―자문관은 당신을 배신했습니다.

이어지는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무시하며 이 쪽지가 자신의 책상에 놓일 때까지 몰랐던 시종들을 질타하기 바빴다.

"…그런데 모스튼 벨, 그놈이 이걸 터트리고."

재무부 장관이 꺼내는 목소리에 소식을 전한 시종이 그의 눈치를 보았다.

새벽에 잠을 깨운 소식은 모스튼 벨이 터트린, 클로이 체닐라의 유언장이었다.

귀족들 사이에 골칫거리였던 '거대 정화 장치'일과 백성들이 가장 예민할 '정화제' 일이 유언장을 통해 퍼져나갔다.

귀족들 사이에 뿌려진 이 편지는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이미 수도 곳곳에 널려버린 사실만큼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가장 골치 아픈 건, 모스튼 벨이 터트려버린 편지 마지막 문구였다.

―…클로이 체닐라의 유언에 적힌 이들은 고작 일부분일 뿐입니다. 이 모든 걸 벌인 자는 다름 아닌 현 '재무부 장관'입니다.

"이런 상황에 자문관은 갑자기 병에 걸려 죽어간다고……?"

하.

재무부 장관은 헛웃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거지 같은 개소리도 없었다.

무조건 놈이었다.

자문관 그놈이 작정해 자신을 배신하고는 이 사실을 터트린 게 분명했다.

'어제 왔던 저 쪽지를 내가 조사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분명히 저 쪽지를 보낸 자는 자신을 위해 '자문관'을 경계하라 알려주었다.

이를 무시한 건 자신이었기에 더 속이 뒤집혔다.

'빠져나가야 한다. 놈이 날 끌어내리기 위해 설치한 이 덫에서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해.'

똑똑!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집사가 들어왔다.

"가주님!"

다급한 음성에 재무부 장관은 올 게 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무슨… 일인가?"

"지금 가주님을 만나기 위해 여러 귀족이 찾아왔습니다."

"이런 젠장……."

자신을 끌어내릴지 말지, 그 판단을 위해 기가 막히게 냄새를 맡고 찾아온 이리들에게는 어떤 먹이도 주고 싶지 않았다.

"가주님."

집사는 시종을 의식하며 입을 열었다.

"넌 물러나 있어."

재무부 장관은 시종을 물린 후에 집사를 재촉했다.

"또 무슨 일이 터지기라도 한 건가?"

"그게 아니라 이 쪽지가……."

착!

재무부 장관은 집사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쪽지를 낚아챘다.

그 쪽지일지도 몰랐다.

자신을 도와주려 했던 그자가 보낸 쪽지.

"…하아."

재무부 장관은 숨부터 크게 내쉬었다.

'존경하는 재무부 장관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쪽지를 보자 어질거리던 머리와 메스껍던 속이 가라앉는 듯했다.

―아직 희망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방법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방법이라고……?'

마치 마법 같은 문장에 재무부 장관의 눈동자에 희망이 차차 어려갔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자문관을 죽이십시오. 그리고 죄를 덮어씌우면 됩니다. 자문관을 죽일, 뒷세계 놈과 자문관까지 말입니다.

꾸깃.

재무부 장관은 종이를 구기며 당장 집사를 쳐다보았다.

왜 쪽지에 대놓고 '뒷세계'라고 적혀 있는지 재무부 장관은 아주 쉽게 이해했다.

쓰고 버리기 좋은 말, 그게 뒷세계가 존재하는 이유가 아닌가.

뒷세계를 만들었으면 써야지.

"뒷세계로 가서 자문관을 죽일 쓸 만한 놈을 구해. 돈은 얼마가 됐든 상관없어. 구해와. 누구든! 당장…!"

자문관의 저택에 있는 비밀 통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남은 건 이 상황을 전환할 수 있는 사건 하나였다.

자문관의 죽음.

* * *

"…알겠습니다. 이 정도 금액이라면 받아들이지요."

페트리오는 선금으로 내민 돈을 가져갔다.

"여기 위치입니다."

의뢰인은 종이를 꺼내 밀었다.

"이대로 들어가 죽이면 되는 겁니까?"

"맞습니다."

"정말 제대로 된 길이 맞긴 한 겁니까? 실패하면 저야 죽는 것밖에 없다지만, 당신들은 아니잖습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적힌 대로만 한다면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움직이죠."

페트리오의 말에 의뢰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가 몇 번이나 강조한 뒤에 밖으로 나갔다.

스르르 페트리오 뒤쪽에 있던 문이 열리더니 하벨이 걸어 나왔다.

"아라야. 재미있었어?"

하벨은 자신의 꼬리를 안고 계속 배시시 웃는 아라의 모습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응응! 이 몸은 숨바꼭질이 싫지만, 오늘은 좋아! 이 몸과 대장을 못 찾았잖아? 세상에, 숨바꼭질이 이렇게 재미있는 거라니! 다른 정령들도 이 몸을 못 찾았으면 정말 재미있을 텐데.]

킁킁.

아라는 코를 벌름거렸다.

[오오옵! 혹시, 혹시 이 몸이 가진 금화 때문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이 몸은 이 금화는 포기할 수 없어. 이 몸이 정말 좋아하는 금화야, 헤헤.]

"그나저나 대체 어디에서 발견한 거야?"

적어도 하벨 자신은 아라에게 저 금화를 준 기억이 없었다.

아라가 틈틈이 금화를 자랑해서 보곤 했지만, 확실히 시선을 끌만큼 아름다운 건 사실이었다.

[대장 방에서 발견했는데? …어어!]

아라가 말을 꺼내다 말고 그대로 굳어졌다.

하벨의 방에서 나온 물건을 하벨이 모른다?

주인도 모르는 물건을 가져가는 건 도둑질.

[이, 이 몸이 도둑질하고 말았어! 이 몸은 도, 도둑이야! 어떡해!]

"하하하!"

하벨은 소파에 앉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페트리오와 그의 뒤에 호위처럼 서 있던 카샬이 어리둥절했지만, 하벨은 배를 잡으며 웃었다.

"…즐거우십니까?"

페트리오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아, 즐겁지. 아주 즐거워."

하벨은 가면을 벗으며 한껏 올라간 입꼬리를 보였다.

"두 놈이 알아서 비밀 통로를 알려줬잖아?"

재무부 장관과 자문관.

한쪽은 갑자기 터진 클로이 체닐라의 유언장을 막기 위해서.

다른 한쪽은 재무부 장관이 자신을 죽일 걸 알기에 이 기회를 노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결국, 두 사람 다 다급한 상황에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했고, 저들에게 보낸 쪽지를 믿어버렸다.

"뒷세계가 통일됐다는 사실을 과연 어떤 귀족이 믿을 수 있을까?"

가면단 이야기가 퍼져나갔겠지만, 연회를 앞두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귀족들에게 있어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하벨은 페트리오가 내민 종이를 보며 발을 까닥거렸다.

"다리를 꼬는 건 좋지 않습니다."

카샬이 자세를 지적하자 하벨은 바로 앉아서는 입을 열었다.

"혹시 이놈은 꼭 죽이고 싶다는 사람 있어? 일단 자문관부터 죽이고 재무부 장관을 죽이려고 하는데."

"역시 도련님께선 현명하십니다. 문이 쉽게 열리는 쪽은 자문관일 테고, 챙길 게 많은 건 재무부 장관 쪽일 테니 놈을 후자로 죽이는 편이 좋죠."

카샬은 벌써 뭘 가져가야 할지 생각하니 당장 손바닥이 기분 좋게 간질거렸다.

"……?"

하벨은 입을 살짝 벌렸다.

"거기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자문관은 여기에서 멀고 재무부 장관은 더 가까워서 선택했을 뿐이야. 머리가 돌아가는 방향이 참 다르네."

"몰래 슬쩍해도 됩니까?"

카샬은 하벨이 비꼬든 말든 행복함을 드러내며 물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어차피 놔둬봤자 그 돈이 왕실로 들어갈 텐데, 미리 가져가야 하지 않겠어?"

[오오옵! 대장, 그거 도둑질 아니야?]

아라가 눈을 크게 뜨며 묻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아라야. 주인 없는 재물은 도둑질이 아니지."

재무부 장관이 사라질 텐데, 주인이 어디 있겠는가.

[아! 주인이 없으면 도둑질이 아니었어!]

아라는 새로운 사실에 눈을 반짝였다.

사아아아.

연기와 함께 등장한 레디나가 하벨 옆에 살포시 앉았다.

"이제 누굴 죽이면 되겠어요?"

"더 안 자고?"

하벨이 묻자 레디나는 하품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은 이제 다 잤어요. 감시하느라 눈이 빠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죽이는 건 우리끼리 해도 충분해. 넌 조금 더 쉬……."

"안 됩니다!"

카샬이.

"불가능해요."

레디나가.

"한 번만 더 생각해보십시오."

페트리오까지 바로 하벨을 말렸다.

하벨은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은 안 돼요. 이건 전문가인 제 의견이에요."

레디나는 뒤이어 다시 강조했다.

"일단, 여기 자문관 저택에 있는 비밀 통로를 통과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요."

레디나의 손가락이 의뢰인이 남긴 쪽지를 향했다.

"너무한 거 아니야?"

"상당히 객관적으로 본 결과랍니다. 게다가 도련님 자체로도 위험 요소가 높고요. 이건 제 전문이니 제게 맡겨 주세요."

"진짜 많이 순화했네요. 체력도 나쁘시고, 물의 저주라는 불안정한 요소와 반사신경도 좋지 않으시고, 발소리도 죽이지 못하시는 도련님께서는 무조건 '암살'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카샬은 레디나가 생략한 말을 직접 꺼냈다.

이건 집사로서의 일이기에 하벨을 위해 현실을 알려줘야만 했다.

"너무 하네요, 카샬. 도련님께서 상처받으시면 어떡해요?"

레디나는 입을 살짝 가렸다.

"다들 뭔가 즐거워 보인다?"

하벨은 입을 가린 레디나나 싱글벙글한 카샬의 표정에 기가 찼다.

"에이,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레디나와 달리 집사로서의 조언이었을 뿐입니다. 오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도련님."

"그럼 저는 시녀로서 조언이었다고 할래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같이 포함하지 말아 주십시오."

카샬과 레디나를 보던 페트리오의 한쪽 눈썹 살짝 올라갔다.

"그래, 이해는 하지."

하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도 저들과 의견이 다르진 않았다.

여러 가지 불안정한 조건들이 있으니 내심 속으로도 걸렸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그래도 얼굴은 꼭 봐야겠어."

"정말로 꼭 얼굴을 봐야겠습니까?"

페트리오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래. 사냥감의 얼굴도 보지 않고 죽이는 게 더 이상하잖아?"

재무부 장관이든 자문관이든 얻어야 할 정보가 남아 있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이상 멈추지 않을 셈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목을 가져올게요. 깔끔하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레디나의 말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은 채로 말고, 산 채로 말이야."

하벨은 벗었던 가면을 손에 쥐었다.

"좀도둑. 넌 여기에서 가면단을 억누르고 있어. 지금 승리에 취해 제정신이 아닐 테니까."

"…알겠습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해야 할 순간이니, 무조건 자제시키겠습니다."

재무부 장관과 자문관이 죽고 난 뒤에 뒷세계가 이번 사건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는 조용히 있는 게 최선이었다.

"또 알고 있지, 좀도둑?"

하벨이 실실 웃으며 물었다.

"물론입니다. 이번 임무를 맡기기 위해 찾아왔던 의뢰자를 본 이들 모두 찾아내 입단속을 시키겠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페트리오는 이를 해내겠다고 말했다.

"형님이 돌아오시면 한번 물어봐."

라르웬이 부탁했던 정령들이 눈이 되어줄 수 있을 테니.

"도련님."

페트리오는 자리를 떠나려는 하벨을 붙잡았다.

"왜?"

"나중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간을 내주셨……."

"가져가도 돼."

하벨은 어떤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가져… 가라뇨?"

"연회가 열리는 날, 비발체 가문이 다시 등장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네. 가면단은 네 힘이 되어줄 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아직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하벨은 페트리오가 꺼낼 말을 먼저 언급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페트리오가 놀라자 하벨은 키득거렸다.

"이제 피나토 웬과 가까워졌는데 네가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순 없지."

"제가 정말로 모습을 드러내도 되겠습니까?"

페트리오는 조심스레 물었다.

―넌 이제 잠깐 죽은 거야, 좀도둑.

그날 마차를 절벽에 떨어트리며 하벨이 그러지 않았던가.

자신은 죽었다고.

"애초에 죽은 것도 네 선택이었으니 돌아오는 것도 네 선택일 수밖에. 내가 봐도 이제 살아올 때가 됐어. 그러니 당연히 비발체 가문이 다시 일어나도 되지 않을까 싶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페트리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하벨을 쳐다보았다.

하벨은 평소처럼 웃고 있었다.

'…허락을 받았다고? 정말로?'

얼이 빠진 페트리오의 모습에도 카샬은 오늘은 입을 놀리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특별한 날이 존재했다.

오늘은 페트리오에게 그런 날이겠지.

"잘해봐, 페트리오."

하벨이 처음으로 이름을 불러주자 페트리오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토닥토닥.

누군가 등을 두드려주는 듯했다.

또각.

밖으로 향하는 세 개의 발소리를 이어 문이 열리고 닫혔다.

탁.

그 적막감과 함께 페트리오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뚝.

다리 사이로 비가 내려왔다.

'이렇게… 이렇게 빨리?'

자신의 잘못으로 가문이 무너져내렸을 때, 다시는 그 이름을 쓰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이제, 도련님께서는 이 비발체의 유일한 주인이십니다.

비가 내리던 날, 자신의 집사가 꺼낸 그 말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유일하게 남은 자신이라는 흔적, 비발체 가문.

그 흔적까지 바스러져 내릴 때, 자신도 똑같이 무너져 내렸다.

혈육도 남아 있지 않은, 자신의 유일한 흔적인 가문을 그 누구보다 높게 세우려는 게 문제였을까.

그게 왜?

너무도 억울해 증오가 섞인 말도 수천 번 토해냈었다.

'감사… 합니다.'

페트리오는 얼굴을 쥐었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모든 건 자신의 잘못이었다.

잘못이 부메랑이 되어 모든 걸 앗아버렸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페트리오 비발체,

세상에 살아 있음을 알리는 흔적이 하벨에 의해 다시 돌아왔다.

가문을.

가문을 이끌 힘을.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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