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유언장이 공개되다(2)
* * *
어떻게 그 모습을 잊을 수 있을까.
무릎을 꿇은 건 데미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를 호위하러 온 이들 모두 바안을 보더니 고개를 조아렸다.
데미트는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감동의 물결을 도무지 이겨내질 못했다.
"저하, 그때와 달리… 정말 많이, 많이 자라셨습니다."
"데미트 트리에나 경."
바안은 그 이름을 꺼냈다.
왕실을 위해 쓰러져간, 진짜 에르티안 왕국의 귀족들을 어떻게 잊겠는가.
어릴 적, 조심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녀의 손길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예, 저하."
데미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경을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경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로요."
바안 역시 목소리가 떨렸다.
평소처럼 비정기적으로 오는 하벨의 연락을 받았다.
―저하. 오늘 소개해 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절 위해 움직이는 자입니다.
바안의 고개가 하벨을 향했다.
'…달님과 가면단이라.'
하벨에게 그런 세력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왜인지 달님이라는 사람이 참 낯설지가 않았다.
'랜턴이 고장 난 게 아니었다니.'
하벨은 소맷자락을 힐끔 보았다.
바안의 등장과 함께 랜턴에 환한 빛이 타올랐다.
그 불꽃은 이전보다 더 몸집을 키운 상태였다.
"이제 내 소개가 확실해진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하벨은 재회의 순간을 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자신은 물론, 저들까지도 연회를 위해 움직여야 했으니.
"물론입니다. 저하의 사람들이라니. 이걸 알았으면 더 빨리 만났을 텐데요."
데미트가 울먹이며 말하자 바안은 정확히 선을 그었다.
"아닙니다. 저 사람들은 나의 사람이 아닙니다."
"저하의 사람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의 사람이란 말입니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우리의 아군이라는 것만은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바안의 말에 하벨은 부담을 느꼈고, 아라는 뭐가 재미있는지 발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배시시 웃었다.
[대장, 너무 재밌다. 막 눈 감고 술래잡기하는 것 같아! 그런데 왜 대장인지 모르지? 이 몸은 대장이 가면을 써도, 막 얼굴을 가려도 알 수 있는데.]
자신감 넘치는 아라의 말에 하벨은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아라야, 너는 내 옆에 붙어 있으니 당연히 알지 않겠는가?'
가면을 썼다는 전제하에 목소리와 옷으로 덩치를 바꾸는 수준만으로도 충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하벨은 왜인지 웃음을 참으려 고개를 살짝 돌린 카샬을 곁눈질로 살피다 말을 꺼냈다.
"이렇게 확인했으면 됐습니다. 어떻게 만났는지, 어떻게 살아 있는지는 나중에 모든 게 끝나면 하십시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잖습니까?"
뼈를 때리는 말에 바안도 데미트도 곧 정신을 차렸다.
"노려야 하는 건 이번 연회입니다."
힘이 있는 귀족들이 거의 모이는 자리.
원래라면 귀족들이 하벨 티에라를 잡기 위한 자리였지만, 자신은 다르게 보았다.
"당신들이 해줘야 하는 건 간단합니다.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두 팔과 두 다리가 잘린 왕자 바안과 재무장관과 자문관에게 쫓겨 대부분 죽거나 무너져내린 왕정파 귀족들.
저 둘의 신세는 같았다.
누군가 일으켜주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을 만큼 망가진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하벨이 바라는 건 거의 없었다.
"세력을 끌어모으십시오. 모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무얼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남은 돈이든, 자존심이든 하물며 피나토 웬의 힘을 빌리든.
하벨의 고개가 데미트에서 바안을 향했다.
"저하께서는 얌전히, 죽은 듯이 있으십시오. 저들 세력을 아우를 수 있게 연회 전까지 살아 있어야 합니다."
바안은 저들 세력의 구심점이자 에르티안 왕국의 마지막 희망이 되어야 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왕실이 귀족에게 힘을 뺏기면서 벌어지지 않았던가.
"적당한 순간까지 가면단이 뒤에서 봐 드리겠습니다."
권력이 귀족에서 바안의 손으로 넘어가는 데까지.
하벨은 거기까지 어떻게든 가면단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다시 이 짓을 하고 싶지 않았으니.
* * *
"…달님이라고 했습니까?"
바안이 마차에 내려앉은 침묵을 깨고 물었다.
"들었으면서 왜 물으십니까?"
하벨의 말투는 살짝 거칠었다.
방금 저 말로 생각이 깨지고 말았다.
피나토가 어떻게 나올지.
재무부 장관과 자문관의 사이가 자신이 생각한 것만큼 틀어졌는지.
클로이 체닐라의 유언장 발표 시간까지 무얼 할 수 있는지.
생각할 것들이 많은데.
"…미안합니다."
바안은 꽃님이라 불리는 자에게서 내뿜어져 나온 압박감에 옷자락을 세게 쥐었다.
지금 자신은 호위 하나 없이 오로지 하벨 티에라의 믿음으로 움직였지만, 이상하게도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명 아버지든, 자신의 집사든 위험했다며 잔소리를 한 바가지 듣겠지만.
"뭘 물으시려고 그러는 겁니까?"
하벨이 묻자 바안은 마치 이때를 기다렸던 것처럼 말을 터트렸다.
"하벨 공과 어떤 관계입니까?"
"그게 왜 궁금합니까?"
"제게 은인이자 조언가 같은 존재입니다."
"조언가라기에 하벨 티에라의 나이가 어리지 않습니까?"
"적어도 나는 위아래에 있어 나이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스승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래서요?"
하벨은 아직 어린 티가 빠지지 않은 바안의 눈동자에 피식 웃었다.
"하벨 공이 이런 일을 벌일 정도로 제법 거친 부분이 있다 싶어 묻지……."
"푸흡."
카샬은 더는 참을 수 없는지 기어코 웃음을 터트렸다.
바안이 데미트를 만났을 때부터 하벨 본인을 눈앞에 두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누군가 자신의 겨드랑이와 등을 미친 듯이 간질이는 기분이라 참기가 어려웠다.
정작 하벨 본인은 얼마나 힘겹겠는가.
그 생각을 하니 웃음이 마르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꽃님이가 발작 증세가 좀 있습니다."
하벨이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덮자 이번에는 페트리오가 숨을 죽이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발작이라니.
그 말이 뭐라고 왜 이렇게 웃긴지.
페트리오는 얼굴로 올라온 열기를 느끼며 필사적으로 소리를 억눌렀다.
"별님이는 어깨 운동을 좋아하죠. 가끔 저러니 그냥 무시하면 됩니다."
"좀… 특별한 분들이네요."
바안은 처음에 어색하게 웃다 곧 소리를 냈다.
"아, 미안합니다."
뒤늦게 사과하지만, 바안의 웃음은 멈추질 않았다.
드넓은 왕실보다 지금 마차 안이 편안하다니.
그 사실이 마냥 우스워 견디기가 어려웠다.
"…하벨 공이 참 부럽습니다."
겨우 웃음을 멈춘 바안이 목소리를 냈다.
"부러울 게 뭐가 있습니까?"
하벨은 저 말에 바로 되물었다.
다 쓰러져가는 왕국이라도 일단 왕자가 아닌가.
하벨 티에라가 누렸던 것들을 바안이 누리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됐다.
"달님 경 같은 분을 옆에 두었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큰 세력을 남몰래 숨긴 것도 대단하고, 귀족들의 이목을 숨긴 것 역시 대단합니다."
[응응. 물론이지. 우리 대장은 이 몸이 봐도 대단해. 바안 네가 보는 눈이 좋아. 이 몸이 인정해 줄게.]
아라가 바안을 쓰다듬자, 그는 갑자기 흠칫 놀라며 주변을 살폈다.
괜히 뒷덜미가 곤두서는 기분에 하벨은 팔짱을 낀 손에 힘을 꽉 쥐었다.
자신까지 저 웃음의 소용돌이에 참가하고 싶지 않았다.
'영광이다, 아라야.'
하벨은 숨을 짧게 골랐다.
"빙 둘러 이야기하지 마시고,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보십시오. 이제 다시 얼굴을 보기도 힘들 테니까요."
"왜… 에르티안 왕국을 위해주는 겁니까?"
"푸핫."
하벨은 기어코 마지막 허들을 넘지 못하고 웃었다.
저 웃음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는 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그는 바안이 민망할 정도로 크게 웃다가 '뚝'하고 웃음을 멈췄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바안이 고마워 꺼낸 말이라는 걸 알지만, 하벨은 그의 의도를 일부러 보지 않았다.
자신은 지금 하벨 티에라로서 바안 앞에 서 있는 게 아니었다.
"이번 일은 날 위한 일이지, 결코 저하를 위한 게 아닙니다."
다시 달님으로서 바안을 볼 일은 없을 테니, 하벨은 명확한 선을 그었다.
"같은 이유로 저하와 엮이는 일은 앞으로 웬만하면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 아쉽습니다."
바안은 하벨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정말로 아쉬움을 담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나를 찾아오세요. 지금은 힘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그대를 도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벨 덕이나, 바안은 달님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달님 덕에 무참히 짓밟히고 사라졌던 왕정파 귀족들을 만날 수 있지 않았는가.
등에 날개를 단 기분이었다.
이대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조금씩 차올랐다.
"그런 말은 다 끝나고 하는 게 어떻습니까?"
하벨은 바안의 자만심을 건드렸다.
그가 왜 그랬는지 하벨은 이해했다.
한 번도 힘을 가져본 적이 없기에 힘이라고 하는 달콤함에 취해버린 것일 테지.
하지만 이게 겨우 힘이라는 걸 손에 넣어본 수준밖에 되지 않은 바안이 꺼낼 말은 아니었다.
이제부터가 진짜인데 이렇게 달콤함에 빠져든다면 에르티안 왕국의 미래가 살짝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왕자가 한 명이라는 사실이 아쉽네.'
하벨은 바안을 지그시 보았고,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왔는지 바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 아닙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당황함이 섞였던 바안의 표정은 차츰차츰 진지해졌다.
"나는… 지금 내 주제를 압니다. 오늘 그대가 아니었으면 이 만남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었을 테지요."
"그 사실을 안다면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페트리오가 목소리를 냈다.
하벨이 하고자 하는 계획의 중심에는 바안이 있었다.
그가 바로 서지 않으면 하벨이 했던 노력이 헛수고가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잊지 않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예. 그거면 됩니다. 이제 대충 눈이나 감으십시오."
하벨은 대충 말을 던지고는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날이 참 좋았다.
모가지 두 개를 날리기 좋은 날.
'…아차, 세 개였지.'
하벨은 천천히 콧노래를 불렀다.
* * *
"…흐으음."
레디나는 자리에 앉아 신나게 발을 흔들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났다.
무언가를 적던 모스튼 벨의 손이 멈추고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들었다.
"왔다, 왔어."
레디나가 콧노래를 부르며 얼른 문을 열자 집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잠깐만 기다려주실래요? 금방이거든요."
레디나는 모스튼을 가리켰다.
모스튼의 앉은키만큼 쌓인 편지를 보더니 집사는 괜히 마른 침을 삼켰다.
얼굴에 핏기는 물론, 살도 빠지고, 광대까지 길게 내려온 눈 그림자에 이어 그의 손에는 펜이 흘러내리지 않게 천으로 돌돌 말려있었다.
꼭 전염병에 걸려 죽음을 받아들이는 환자 같아 집사는 그간 모스튼에게 쌓여왔던 증오마저 싹 사라질 정도였다.
지금 이곳의 지배자는 우습게도 모스튼이 아닌 갑자기 그와 함께 나타난 저 여자였다.
―시… 키는 건 뭐든 해주거라.
그 모스튼이 그렇게 덜덜 떨며 말하지 않았던가.
"어서 쓰세요. 마지막 문장만 완성하면 되잖아요."
레디나는 아직 모스튼이 마무리를 짓지 못한 마지막 편지를 보며 그를 재촉했다.
자신이 필체를 베껴 적으면 금방이지만, 무조건 모스튼이 편지를 완성해야 한다며 하벨이 말하지 않았던가.
"사, 살려 주십시오. 시키는 대로 다 했잖습니까. …제발요."
모스튼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러지 마세요. 우리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잖아요."
콱!
레디나는 단검을 꺼내 책상에 꽂았다.
"너는 죽고, 나는 너를 고통 없이 보내주기로."
"제발요, 제발."
모스튼의 눈물이 점점 굵어졌다.
"모스튼."
레디나가 모스튼을 불렀다.
"조각조각 나서 죽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으면 잔말 말고 쓰세요."
"으… 으아악!"
모스튼은 갑자기 고통을 느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손가락이 사라져버렸다.
"소, 소, 손가락이이! 내 손가락이!"
"이제 겨우 하나인데요? 자, 마지막 편지를 써야죠. 하나씩 잘려가면서 죽기 싫으면 말이에요."
레디나는 친절하게 지혈했고, 모스튼을 보며 방긋 웃었다.
죽음의 공포가 드리우자 모스튼은 멈췄던 손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레디나는 편지가 완성되자마자 낚아챘다.
"…흠."
편지에 눈물과 피가 묻어 있었지만, 무슨 상관일까.
어차피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레디나는 편지를 봉투에 넣어서는 마지막으로 촛농을 떨어트리고 가문의 인장을 꽉 눌러 찍었다.
"자, 여기 있는 편지들을 모두 귀족들에게 보내면 된답니다. 많이 해본 거라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아시겠죠?"
레디나의 눈이 휘었다.
"아… 알겠습니다."
집사는 레디나가 짓는 섬뜩한 눈웃음에 몸을 부르르 떨다 저절로 허리를 숙였다.
"그럼."
레디나는 모스튼을 바라보았다.
탁!
모스튼이 당장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곧 고통을 호소하며 울부짖었다.
다리 한쪽이 왜 저쪽에 나뒹구는지.
"으아아악! 내, 내 다리가아!"
"도망가면 안 돼요. 나도 움직이는 표적을 바로 죽이는 건 어렵단 말이에요."
레디나는 쪼그려 앉아 단검을 모스튼의 목에 박아 넣었다.
푹!
"안녕."
작별인사를 해준 뒤, 레디나는 다시 일어나 집사를 보았다.
그의 다리가 덜덜 떨려왔다.
"클로이 체닐라의 유언장을 공개한 건 모스튼 벨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불의의 습격을 받아 죽은 거예요. 이것만 기억하면 된답니다."
하벨이 알려준 말을 꺼내며 집사에게 다가갔다.
"…허, 허억."
집사는 레디나와 가까워지자 숨을 몰아쉬었다.
"어려워요?"
"아, 아,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반드시 제대로 잘 보내겠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레디나는 집사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는 여유롭게 문을 빠져나가려다 그를 보며 씩 웃었다.
집사는 기어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무섭다.
그 외에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