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잡았다!
* * *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남자는 당황했다.
아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땅을 사러 왔다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갑자기 자신을 감시한 것처럼 누가 왔는지, 계약금을 받았는지를 줄줄이 언급했으니까.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죽는다고 말하는 건지.
귀족.
그 무서운 말까지 왜 하필 나오는 건지.
"분명, 사업가라고 말했습니다!"
"귀족은 사업가 하면 안 됩니까?"
하벨은 반문했다.
"계, 계약금도 줬습니다!"
"당신이 소문을 내길 바랐겠죠. 갑자기 죽으면 이상하잖습니까. 땅 부자가 돼서 어딘가로 떠났다. 그러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잖아요. 그 뒤는 알게 뭐예요."
하벨의 말투가 살짝 거칠어졌다.
"토지 계약서 놔두고, 지금 바로 돈 들고 떠나라니까, 왜 알아먹질 못합니까?"
"맹세코 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남자가 겁에 질린 모습에 하벨은 한숨을 내쉬더니 가방을 열었다.
탁.
"돈입니다. 돈만 들었죠. 값도 제대로 치렀고, 그냥 땅 주인만 바뀌는 겁니다. 알아들었습니까?"
"…예, 예."
"정신 차리십시오."
하벨이 탁자를 가볍게 치자 남자가 허둥지둥하다 차를 쏟았다.
"죄송합니다! 죄송……."
"이렇게 위협적으로 말을 꺼낸 건 미안합니다. 하지만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맞아. 대장은 너를 죽이지 않는다구.]
아라가 남자의 이마를 '꽁'하고 때렸다.
"……."
남자는 알 수 없는 부드러운 감각에 놀라 그제야 하벨을 제대로 보았다.
순간 밀려드는 압박감에 그가 커 보였을 뿐, 이제야 제대로 저 남자가 보였다.
"나는 당신을 살리러 왔습니다."
하벨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는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땅도 사고, 기왕이면 땅 주인도 살리면 좋지 않겠는가.
"혹시 가족이 있습니까?"
"어, 없습니다."
"잘됐습니다. 이대로 돈만 들고 밖으로 나가십시오. 흔적이 될 만한 무엇도 건들지 말고요."
"누가… 누가 절 죽이는 겁니까?"
"모스튼 벨."
하벨은 남자를 위해 진실을 알려주었다. 그는 이 사실을 들을 자격이 있었으니까.
"왜 이렇게 절 도와주는 겁니까?"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어쩌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십시오."
하벨은 의미를 담지 않았다.
자신에게 저 남자를 구해야 하는 당위성 같은 건 없었고, 자신이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땅이었으니까.
"정 찝찝하거든, 사소한 변덕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남자는 이어진 하벨의 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고, 가방을 쥐었다.
"고맙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남자는 그대로 부리나케 달렸다.
그가 나갔음에도 랜턴의 불꽃은 변함없었다.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은 채 달라지지 않은 걸로 봐서 이 방법이 아니든, 무언가 더 필요하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자신은 이게 옳다고 생각했다.
"죽이는 편이 나을 텐데요."
토지 계약서를 확인하던 카샬이 입을 열었다.
"모스튼 벨을 만나지 않을 거라면 그편이 네 말대로 훨씬 좋았을 거야. 물론, 그 이외에도 죽음으로 입을 막는 게 좋지."
하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카샬.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죽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이어지는 말에 카샬은 주춤거리며 고개를 올렸다.
왠지 가슴이 뜨끔거리는 말이었다.
하벨은 자신을 빤히 보는 아라를 의식했다.
아라는 자신에게 무언가를 배우고자 했다. 그렇다면 제대로 알려줘야지.
"당연히 목숨을 위협하는 자들에게 더한 고통을 줘야지. 악에는 악으로, 선에는 선으로."
[악에는 악으로, 선에는 선으로?]
아라는 귀를 쫑긋거렸다.
"그런데 원래는 그 목숨도 사실 앗아가면 안 된다는 걸 기억해야지. 그 사실만 기억한다면 절대로 악에 물들 일은 없을 거야, 카샬."
사람들이 흔히 '바른길'이라 말하는 그곳을 벗어나면 기다리는 건 지독한 괴로움뿐이었다.
사후 세계는 없었다.
죽으면 끝이기에 남은 삶 동안 얼마나 괴로울 수 있는지는 결국 자신의 행동에 따라 달라지곤 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도련님."
카샬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이제 다음 땅을 사러 가야죠. 아직 지갑 든든하죠, 형님?"
하벨은 가면을 올려서는 씩 웃었다.
"당연히 아직 멀쩡하지. 겨우 먼지만 턴 수준인데."
라르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지 계약서를 챙기던 카샬은 걷다 말고 잠깐 하벨을 바라보았다.
'…스승님께서 하시던 말씀을 도련님한테서 들을 줄이야.'
―카샬아. 손에 피를 묻히는 걸 두려워하지 말거라. 하지만 그 피의 무게는 두려워해야 한다. 네 목숨을 위협한 자들 역시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거라.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너는 사람이 아닌 괴물이 되어버리겠지.
'도련님께서는 대체 자신을 뭐라고 알고 있는 거지?'
카샬은 보면 볼수록 알쏭달쏭했다.
'음식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자유가 억압된, 속에 뱀이 수천 마리 있는, 으음, 견문이 넓은 사람……?'
자신이 생각해도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그냥 가볍게 웃었다.
* * *
촤르륵.
가방을 열었다.
"최고가의 1.5배로 사겠습니다."
"좋습니다!"
하벨은 일단 라르웬을 살피며 말을 던졌다.
사야 할 땅은 많으니.
다음.
"최고가의 2배 가격으로 사죠."
"3배.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죠. 좋은 거래 하시길 빌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다시 생각해보니까 2배도 괜찮을지도."
"1.5배. 싫으면 가겠습니다."
"…1.5배요? 아까랑 말이 다르잖습니까."
"딱 3초 주죠."
하벨은 손가락 세 개를 펼쳐 하나씩 접어갔다.
손가락 하나가 접히자 상대방은 다급히 말을 꺼냈다.
"하, 하겠습니다!"
"좋은 거래 하신 겁니다."
욕심을 부려봤자 어차피 최고가에서 더 쳐주는 사람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건 당연했다.
토지 매매 계약서를 챙긴 후에 하벨은 이 말을 잊지 않았다.
"도망가십시오. 귀족이 쫓아올 테니까요."
괴물을 피해가야 하지 않겠는가.
쪼르륵.
하벨은 휴식을 위해 잠깐 테이블에 앉아 빨대로 음료수를 마시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꾸 누가 날 보고 있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시선을 느낀 건 처음 땅을 샀을 때부터였다.
처음에는 미행당했나 싶어 라르웬과 카샬한테도 몇 번 물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아니'였다.
'지금도 느껴지는데.'
순간, 밀려오는 현기증에 하벨은 이마를 잡았다.
당장 망토를 젖혀 정화 장치를 확인한 카샬은 망설임 없이 주사를 꺼냈다.
"도련님께서는 오늘 이만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정화 장치에 거품이 일어나고 있었다.
"카샬 말이 맞아. 나머지는 나랑 카샬이 살 테니깐 너는 임시 장소로 돌아가 있어."
"몇 개만 사면 됩니다. 애초에 놈이 가진 땅을 다 살 생각도 없었고요."
하벨은 다시 가면을 제대로 써서는 테이블에 얼굴을 기댔다.
[대장, 지쳤어?]
아라가 하벨이 쓴 가면을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몸이 무겁고, 힘이 빠지고, 눕고 싶다고 느끼면 지친 겁니까?"
하벨은 육체적으로 지쳐본 적이 없어서 이 낯선 느낌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치기만 했겠어? 쓰러지기 전이네. 안 되겠다, 오늘은 여기서 접고 집에 가자."
라르웬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하벨을 부축했다.
하벨의 체력이 물의 저주 때문에 계속 갉아 먹힌다는 걸 알기에 중간중간에 쉬었지만, 역시 부족한 모양이었다.
"카……."
[라르웬.]
아라에게 다가가 장난을 치려던 루룸이 그대로 멈춰 라르웬을 불렀다.
"그래. 저기서 쳐다보고 있네."
라르웬은 카샬에게 고갯짓을 했다.
진짜 티가 나게 숨어서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예. 이제 가시죠."
카샬은 라르웬의 신호를 받았지만, 단번에 덮쳐야 하기에 모르는 척 앞장섰다.
'이상하네.'
땅을 사려면 주변을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하벨의 체력을 생각해 근처 가게에 잠깐 들린 참이었다.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가면을 쓴 모습은 너무 눈에 띄니 일부러 한적한 곳으로 잡지 않았던가.
'미행당한 건가. 아니야. 그러기에는 발소리가 너무 거칠어.'
카샬은 생각하다 이를 부정했다.
미행당했다면 자신은 물론 라르웬이 몰랐을 수가 없었다.
'다른 건 다 속여도 정령의 눈을 속일 수는 없지.'
그저 누군가 자신들을 찾고 있었고, 우연하게도 마주했다는 게 더 자연스러웠다.
그렇다면 대체 왜?
"꽃님아. 그게 무슨 상관일까."
하벨의 목소리에 카샬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가면을 썼는데도 어떻게 안 걸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품을 때가 아니었다.
따라 오던 발소리가 갑자기 멀어졌다.
카샬은 당장 연기는 그만두고 먹이를 쫓는 들짐승처럼 달렸다.
탁.
두 걸음.
타탁!
다섯 걸음.
허벅지 근육이 솟구치는 만큼 단숨에 적을 따라잡은 카샬은 그대로 물고기를 낚아채는 작살처럼 손을 뻗어 나갔다.
휘이익.
또 바람 소리를 닮은 소리가 들려왔다.
'왼쪽.'
카샬은 바뀐 적의 움직임에 당황하지 않고, 발을 오른쪽으로 옮긴 후 뒷다리로 적의 배를 공격했다.
"커헉……!"
차아아악!
적이 배를 잡고 뒤로 나자빠졌다.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맹세코요!"
주먹을 쥔 카샬이 다가오자 적은 얼른 양손을 위로 높게 뻗었다.
"그건 차차 알아가는 거고."
파악!
카샬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적의 얼굴을 걷어찼다.
* * *
"…헙."
남자는 눈을 다급히 떴다.
곧 팅팅 부어오른 얼굴을 느끼며 고통을 호소했다.
낡은 오두막.
그곳에 가면을 쓴 남자들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킁킁.
아라는 하벨을 쓱 보더니 남자에게 다가가 냄새를 맡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거 지지야. 이리 와, 아라야.]
루룸이 아라에게 손짓하자 아라는 여전히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루룸에게 향했다.
[뭔가 맡아본 냄새가 나는 것 같고, 아닌 것 같고. …으음, 모르겠어.]
"넌 누구지?"
라르웬은 자신을 쫓아왔던 남자를 향해 물었다.
"어, 그러니까…… 아, 감사합니다."
하벨이 갑자기 내민 물을 받더니 남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꿀꺽꿀꺽.
아무런 의심 없이 물을 마시자 하벨은 넌지시 말을 꺼냈다.
"독이 들었는데."
푸흡!
남자는 그대로 다급히 물을 내뱉었다.
놀란 눈으로 하벨을 보다 말고 얼굴에 밀려오는 고통에 신음했다.
"왜 우릴 노린 거지?"
왕 이후로 랜턴에 환한 불꽃이 붙는 건 오랜만이었기에 하벨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 크기가 점만큼 작았어도 검은 불꽃과 반대라면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사람이 아닐 텐데.
"…진짜 독이 들은 거 맞습니까?"
남자는 오히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물었다.
"태연하네?"
"일단 살았잖습니까?"
하벨이 묻자 남자는 실실 웃었다.
"한 대 더 치지 그랬어."
하벨이 카샬을 향해 말하자 그 역시 아쉬움을 드러냈다.
"일단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적당히 쳤습니다. 지금 쳐도 됩니까?"
"내가 칠게. 왠지 뺀질거리는 게 열 받네."
라르웬은 주먹을 움켜쥐다 펴기를 반복했다.
"자, 잠깐만요!"
남자가 다급히 외쳤다.
"제가 평소에 '맥 빠진 놈'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그런 겁니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 인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평화를 사랑합니다."
"평화고 뭐고 왜 쫓았는지 말해보라니까? 귀가 먹었어?"
카샬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땅을 사셨잖습니까."
툭 하고 남자가 꺼내는 말에 모두 침묵했다.
"그… 모스튼 벨이 사려고 했던 땅 중에 마나가 되게 많은 곳 말입니다."
남자는 곰곰이 생각하다 다시 말을 바꿨다.
아무래도 이건 알아듣지 못할 듯했다.
"어……. 그, 욕심 되게 많아 보이는 사람 있었잖습니까."
태연하게 이어가는 말에 라르웬과 카샬이 내는 분위기가 조금씩 무거워졌다.
자신들이 마나가 가득한 땅을 샀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남자는 말을 꺼내다 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이러면 또 헷갈리겠네요. 그러니까 위치가 어디냐면……."
"마법사였어?"
하벨이 묻고, 카샬이 당장 목에 검을 겨눴다.
마법사는 위험했다.
"맞습니다. 저는 마법사입니다."
남자는 뒤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알렸다.
라르웬마저 남자를 경계하며 루룸을 쳐다보았다.
하필 와도 마법사라니.
"그래, 마법사. 다 좋은데 자꾸 같은 말 하게 하지 않았으면 해. 왜 쫓아왔어?"
살짝 낮아진 하벨의 목소리에 남자는 이상할 정도로 압박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 땅이 필요합니다. 샀던 가격의 네 배를 치르겠습니다. 제게 팔아주십시오."
"싫어."
"그, 그러면 다섯 배를 주겠습니다."
"그 땅 밑에 금덩어리가 매장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 고작 다섯 배에 사겠다고?"
"원래 제가 사려고 했습니다."
"틀렸어. 떼 부리지 마. 원래 소유하려고 한 자는 귀족이었고, 넌 그걸 알고 있었어."
촤악.
하벨은 물이 담긴 병뚜껑을 열어 그대로 끼얹었다.
언제든 처참하게 죽일 수 있게.
"돈도 없고, 거짓말쟁이에, 심지어 감시까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하벨은 숨을 잠깐 골랐다.
"나는 도리를 모르는 놈도 싫지만, 너 같은 것도 싫어해. 옆에서 기회만 노릴 줄 아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척하는 놈 말이야."
루룸의 가시에 손바닥을 댔다가 뗐다가 반복하던 아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하벨을 보았다.
가면에 얼굴이 가려져 있다고 해도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게 느껴졌다.
당장 하벨에게 다가가 찰싹 달라붙었다.
[대장. 화내면 몸에 안 좋다고 헤레스가 말했어. 아, 심호흡! 이 몸을 따라 해. 후. 하. 후. 하.]
하벨은 얼굴을 타고 밀려드는 폭신함에 화를 누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만요!"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남자는 다급히 소리쳤다.
"사려고 했던 건 정말입니다! 돈은… 네, 딱 최고가의 두 배밖에 모으지 못했습니다. 거짓말해서 미안합니다. 아무리 급했어도 그러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며 미안함을 드러냈다.
"뭘 말해도 핑계처럼 들릴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맹세코 감시하려던 게 아니라 부탁을 하려고 했는데, 이게 말을 걸 틈이 보이지 않았고 뭔가 감시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도중에 도망치다 잡힌 겁니다."
"그럼 그 땅이 왜 필요한 건데?"
하벨의 물음에 남자는 몇 번이고 우물쭈물하다 모든 걸 내려놓다시피 하며 말했다.
"…마법사 협회에 대항하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