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왕실로 간다(2)
* * *
평소 하벨이 앳되었다면 오늘은 한 사람으로서 제 몫 이상을 할 만큼 듬직했다.
서 있는 자세나, 눈빛,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어오르는 이유 모를 무게감이 그를 더 주목하게 했다.
"저도 둘째 도련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하지만 도련님께서 너무 좋아하십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막내가 좋아하는 걸로 해."
"아니……."
하벨은 말을 꺼내려다 말고 그냥 속으로 삼켰다.
팔찌가 안 빠진다고 해도 믿질 않으니.
"평소에 머리를 높게 묶으셨지만, 오늘은 차분한 분위기를 원하셔서 땋아봤습니다. 옷에 어울리는 장식품만 다신다면 곧 끝납니다."
카샬은 짤막하게 설명을 이어 나가며 오늘의 주인공인 하벨을 다시 바라보았다.
자신이 보아도 흠잡을 곳 하나 보이지 않아 뿌듯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오늘, 제대로 난리가 나겠네."
라르웬은 씩 웃었다.
시선을 확실히 끄는 건 물론, 에트리안 왕국을 떠나 다른 나라까지 하벨 이야기가 퍼져나갈지도 몰랐다.
"정말 괜찮습니까?"
하벨은 거울을 바라보아도 별 흥이 돌진 않았다.
아직 인간들이 말하는 미의 기준이 뭔지 알지 못했으니까.
제 눈에는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망토가 달린 옷이며, 이미 주렁주렁 달린 장식품이니 죄다 반짝거려 눈이 아팠다.
여기서 뭘 더 달 게 있는지.
'그냥 하얀색이든, 검은색이든 무늬 없이 입으면 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렇게 반짝거리는 옷을 입었음에도 전체적으로 본다면 분위기가 차분해 신기했다.
"괜찮냐고? 괜찮은 수준이 아닌데? 장담하건대 오늘 무조건 네가 주인공이야."
라르웬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오늘 하벨 티에라가 온다는 말에 귀족들이 그를 보러올 겸 한껏 꾸몄다고 한들, 하벨을 이길 자는 아무도 없었다.
* * *
[우와! 우와! 우와아아!]
아라의 끊임없는 소리에 하벨은 제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아라야."
하벨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속삭였다.
[응, 대장! 왜?]
"이제 그만 놀라는 게 어때?"
[왜? 아직 백 번이나 더 놀랄 건데? 세렌이랑 루룸도 봐봐. 다들 입 벌어졌어. 이 몸이랑 비슷하잖아!]
아라는 날갯짓조차 하지 않고 멍하니 하벨을 보는 세렌과 이상하게 하벨을 경계하는 루룸, 그리고 그를 구경하러 온 정령들의 시선에 의문과 놀람이 섞여 있자 신이 났다.
[…아니, 루룸. 인간들은 원래 이래?]
세렌이 루룸을 보며 물었다.
[아니. 꾸미기 전과 꾸민 후의 라르웬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이상하네. 땟국물을 벗겨놓은 것 같잖아?]
[그렇지? 뭔가 다른 게 느껴져. 눈에 이채도 달라졌고. 며칠 전, 골골거렸을 땐 몰랐는데 말이야.]
[어? 세렌 너, 지금 하벨을 칭찬한 거야?]
[내, 내가 미쳤어? 그 가벼운 입이나 놀리지 말라고, 루룸!]
세렌이 기겁해서는 루룸을 날개로 건드렸다.
'흥. 아마 단계 하나를 넘어섰기 때문이겠지. 그래, 그것 때문일 거야.'
자기 자신을 달래는 생각과 달리 세렌의 시선은 여전히 하벨에게 향했다.
시선을 따라가던 루룸이 웃음을 터트렸다.
매번 느꼈지만, 세렌은 참 솔직하지 못했다.
"하벨아. 오늘 참 훌륭하구나. 내 이 모습을 이리 짧게 봐 안타깝기 그지없단다."
워프 앞에서 기다리던 룬델은 더는 참지 못하고 하벨에게 뛰어왔다.
누군가 체통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오늘 좀 잘 꾸며진 모양입니다. 여기저기 칭찬이 마르지 않아서… 아주 그냥 미치겠습니다."
"물론이지. 완벽하단다."
룬델은 싱글벙글했다.
어딜 보아도 자신의 두 아들보다 나은 자가 없을 정도라 느낄 만큼 자부심이 넘실거렸다.
하벨은 괜히 장갑을 낀 손을 만지작거렸다.
환호도, 호응도, 입에 발린 소리조차 신물이 날 만큼 익숙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받은 관심은 익숙하던 환호와 달랐다.
그냥 처음 듣는 말 같아 속이 간지럽고, 낯짝이 뜨겁고, 어디든 뛰쳐나가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마음마저 들 지경이었다.
"조심하렴. 왕실로 향하는 이 포탈이 있는 이유가 바로 너를, 그리고 우리를 노리려는 자들 때문이란다."
"오늘 왕자만 간단히 보고 올 건데요. 아, 호위도 있잖습니까?"
하벨은 룬델 뒤에 놓인 신형 마차와 마차를 둘러싼 정령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하벨 티에라의 몸에 들어온 이후로 이렇게나 많은 인원이 움직이는 건 처음이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하지만, 자신을 감시하던 호위대가 떠올라 살짝 숨이 막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포탈 너머로 이어진 곳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문제는 그 너머란다. 내 관할 구역도 아닌, 네가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의 입속이라는 걸 잊지 마렴. 함부로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고, 누가 따라가자고 하면……."
[룬델. 그 정도는 알아서 하겠지. 쟤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너 그러다 빨리 늙어. 적당히 좀 해. 널 보는 나까지 조바심이 든다니까?]
세렌이 룬델의 팔을 부리로 콕콕 찍었다.
원래도 걱정이 많은데 유독 하벨에게는 그보다 배는 더 늘어났다.
에헴.
아라가 헛기침을 하며 룬델 앞에 섰다.
[룬델, 걱정하지 마. 이 몸이 대장한테 잘 말해줄게. 벌써 먹는 거랑 가는 거랑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말해줬어!]
아라가 포근히 미소를 짓는 룬델의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고맙구나, 아라야. 하벨을 지켜주렴."
[물론이지. 이 몸만 믿으라구.]
아라는 자신을 쓰다듬는 룬델의 손길에 배시시 웃다 하벨에게 날아갔다.
"라르웬, 카샬……."
"아버지. 제가 중간에서 하벨을 잘 말리겠습니다. 휩쓸리지 않게요."
하벨이 사건에 휩쓸려 상처받지 않게.
자신의 아버지라면 분명 그 부분을 걱정할 테지.
룬델은 라르웬을 기특하게 바라보자 라르웬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전 다 컸습니다. 아직 덜 큰 막내한테 제 몫까지 그렇게 바라보시면 됩니다."
"너도 내 눈에는 언제까지나 아이란다."
"돌아오면 술 한 잔 어떠십니까? 제가 비싸고 맛 좋은 걸로 사 오겠습니다."
"당연히 좋지. 언제든지 환영이란다. 나는 말이다……."
"당연히 알고 있죠. 아버지께서 달달한 술을 좋아하시잖습니까?"
라르웬은 키득거렸다.
"그래. 다녀오렴, 라르웬."
룬델은 라르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예, 다녀오겠습니다."
하벨이 먼저 신형 마차에 올라타자 라르웬이 그 뒤를 따랐다.
카샬이 룬델에게 고개를 숙인 뒤에 조용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두 도련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겠습니다."
"그래. 누가 되었든, 내 아들을 건드리는 자가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죽여버리거라. 뒤는 지금까지 그랬듯 내가 책임지마."
방금까지 볼 수 없었던 싸늘한 룬델의 눈빛에 카샬은 익숙하게 반응했다.
"물론입니다. 그걸 위해 진짜 암살자가 따라오잖습니까?"
카샬은 그대로 뒤돌아 마차로 걸어갔다.
그의 시선은 다른 마차로 향하던 시녀 한 명에게 향했다.
"레디나."
카샬은 검은 달에서 임무를 받고 돌아온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 왔어요. 도련님의 첫 번째 신도, 레디나 컬이요.
어젯밤 시녀 복장을 한 레디나는 자연스럽게 하벨의 방으로 들어와 반갑게 인사했다.
"예, 집사님."
목소리는 고분고분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잘 벼려진 날과 같았다.
"도련님께 미리 전해 들었으니 안심해."
레디나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하벨의 지시는 간단했다.
―바로 합류하고, 수상한 자가 있으면 조용히 끌고 와.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도련님께서 내린 지시를 잘 따르길 바라네."
"물론입니다. 맡은 바 열심히 임하겠습니다."
집사와 시녀의 자연스러운 대화에 누구 하나 의심하는 이가 없었지만, 둘의 시선에 신경전이 잠깐 펼쳐졌다.
카샬은 그대로 마차에 올라탔다.
"레디나는?"
하벨이 묻자 카샬은 곧바로 대답했다.
"도련님의 지시를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
"아버지께서 다 골라내셨을 텐데?"
라르웬이 묻자 하벨은 깍지 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했다.
"혹시 모르잖습니까. 숨죽여 기다린 자들도 있을 테니까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마차에 다가가자 랜턴에 검은 불꽃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좋은 징조가 아니었기에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긴 그렇지.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탕탕.
출발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마차가 움직였다.
그저 대문 근처에 있는 조각상이라 생각했던 곳이 포탈을 사용하는 장소일 줄이야.
하벨은 레이저처럼 쏘아 완성된 검은 공간을 바라보며 신기함에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아차, 도련님."
마차가 포탈에 닿기 전, 라르웬의 눈짓에 카샬은 다급히 무언가를 떠올렸다.
"왜, 카샬?"
"아무래도 포탈이 공간을 축약시켜놓은 마법이다 보니 부작용이 올 수 있습니다."
"부작용이라니?"
"누구나 부작용을 겪습니다. 참고로 저는 귀가 간지럽습니다."
"나는 검지가 따끔거려."
라르웬이 손가락을 굽혔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럼 이 몸은?]
아라가 기대하며 묻자 루룸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정령은 그런 거 없어.]
[…칫.]
아라는 자신의 꼬리를 꽉 끌어안아서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럼 이 몸은?"
하벨은 하벨 티에라의 몸을 가리키며 물었다.
"도련님께서는 부작용이 제법 있으십니다."
"뭐길래… 밧줄을 꺼내?"
하벨은 갑자기 밧줄을 꺼내는 카샬과 이미 자신의 두 손을 잡은 라르웬의 행동에 눈을 말똥말똥 떴다.
"미안하다, 막내야."
라르웬은 미리 사과했다.
"아니, 대체 뭐길래 이러는 겁니까?"
"긴장하지 마. 금방 끝나니까."
마차가 포탈로 들어서는 순간, 하벨은 갑자기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아차 하던 순간, 이미 제 머리가 창문을 향해 박치기를 시도했다.
탁.
카샬이 미리 쿠션을 꺼내 막았기에 푹신한 감각이 머리에 닿았다.
[대장……?]
아라가 앞발을 꼭 잡으며 크게 뜬 눈을 깜빡거렸다.
"이거… 이거 이상한데요?"
하벨은 하벨 티에라의 몸을 통제하지 못한 상황에 깜짝 놀랐다.
머리로 창문을 깨려 했고, 답답함에 손이 제 목을 긁으려고 했다.
단지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충동에 몸이 이렇게 될 수 있는가.
'내가 하벨 티에라의 몸 통제까지 뺏겼다고?'
하벨은 충격적인 상황에 금방이라도 넋을 잃을 것만 같았다.
"…역시 나타나네."
라르웬이 팔에 힘을 주며 밧줄로 묶인 하벨의 손이 그의 목을 향하지 않도록 꽉 잡았다.
"이게 네 부작용이야. 포탈을 지나가는 동안 부작용은 아무도 통제할 수 없어."
하벨이 억지로 버텨보려고 애를 쓰자 카샬이 그의 머리를 붙잡은 상태로 다급히 말했다.
"포탈만 지나가면 됩니다. 나중에 근육통처럼 욱신거림이 올 수도 있으니 그냥 저항하지 마십시오. 몸에 힘을 빼고 계시면 됩니다."
아라가 허둥지둥거리다 하벨의 팔을 라르웬과 같이 잡았다.
[부작용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그러면 안 돼, 대장! 아프잖아!]
아라의 외침과 함께 하벨은 행동을 멈췄다.
창문 밖을 바라보니 울창한 나무의 모습이 보였다.
"…하, 됐다."
라르웬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하벨의 손을 놓아주고, 카샬은 조심스레 하벨을 앉혔다.
"많이 놀라신 거 압니다. 괜찮으십니까? 미리 설명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 …카샬. 그거보다 이 행동을 왜 하는 거야? 갑자기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는데?"
하벨은 자신의 감정이 아닌 남의 감정을 생생하게 느꼈기에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함에 휩싸였다.
"공간 압축으로 발생하는 부작용이라는 것 이외에는 알지 못합니다."
"이게?"
"예. 도련님께서 유독 심하신 편입니다."
"그래도 이건 좀… 이상한데? 정말 이상해."
분명 포탈을 넘어가는 시간은 짧았지만, 하벨은 갈망에 가까운 감정 때문에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다.
[맞아. 이 몸도 이상하다고 생각해. 너무 이상해.]
아라가 하벨을 꼭 안아주며 말했다.
'아니,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충동은 그렇다고 치는데 편안함은 왜 느끼는 거지?'
갈망 뒤에 숨은 편안함.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감정 때문에 하벨은 낯선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벨 티에라. 너, 좀 이상하다.'
굳이 파고들려고 하지 않았을 뿐, 생각하면 하벨 티에라의 수상함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 * *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에 하벨은 에그타르트를 먹으며 고개를 돌렸다.
바사삭.
아라가 귀를 쫑긋 세워서는 에그타르트를 바라보았다.
"미리 알려드린 것처럼 갈아탈 마차 중 하나입니다."
카샬이 입을 열었고, 라르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실 근처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포탈 위치는 일정 주기로 바뀌었지만, 이 또한 비밀이기에 번거롭긴 해도 여러 번 마차를 바꿔 타 감시자의 눈을 돌려야 했다.
"먹을래, 아라야?"
[응!]
하벨의 제안에 아라가 기뻐하며 에그타르트를 한입 베어먹었다.
우물거리다 말고 이상한 표정이 되어서는 그대로 내뱉었다.
[에엑…….]
하벨은 아라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뒤에서 무언가를 질질 끄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령 기사들은?"
하벨이 묻자 레디나가 싱긋 웃었다.
"저 오기 편하게 일부러 이곳에서 기다리신 거 아닌가요?"
"맞아. 그런데 겨우 한 놈이야?"
하벨은 에그타르트를 마저 먹으며 물었다.
"아뇨. 세 놈이었는데 말할 입은 한 명이면 충분한 것 같아서 두 놈은 죽였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는 말에도 하벨은 레디나의 말을 기다렸다.
"당연하지만 옷에 피가 튀지 않게 했어요. 제가 잠입했던 시녀 복장 중에서 제일 예뻤거든요. 마음에 들었어요."
레디나는 곤죽이 된 시종 한 명을 내던지며 활짝 웃었다.
"받아요, 도련님. 제 선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