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왕실로 간다
* * *
―왕실을 내버려 둔 건 전대 가주 때부터야. 아버지는 되돌리려고 했어. 하지만 물의 오염이 심각해졌고, 둘 중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는 순간이 왔어.
라르웬이 말했던 것처럼 룬델이 물의 오염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뿐, 룬델이 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가 물의 오염에 손을 놓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면 뭔들 못 할까.
귀족들이 왜 자꾸만 뒤에서 하벨 티에라를 깔짝거리고, 페트리오와 같이 언제든 쓰고 버릴 자들만 골랐겠는가.
"정말… 준비되셨습니까?"
페트리오의 눈에 걱정이 어리자 하벨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룬델 티에라는 무섭고, 티에라의 분노를 받기는 싫고, 그렇다고 내버려 두려니 신경 쓰이고. 딱 그런 상태잖아?"
"그렇겠지. 필요하다는 사실은 인정하되, 어떻게든 자기들 발밑에 두고 싶을 테니까."
라르웬이 동의했다.
더럽고, 칙칙한 귀족들의 속마음은 하벨이 말한 사실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하면 더 했지.
"내가 피하고 외면해도 제2의 좀도둑은 무조건 나올 거야. 계속, 계속. 정말 그걸 원해?"
하벨이 묻자 페트리오는 손을 천천히 움직여 옷자락을 잡았다.
그의 손을 본 하벨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널린 게 사람이니 방패막이로 보낼 사람은 많아. 그렇게 보내다 정말 낮은 확률로 이번에는 성공할 뻔했고. 우쭐한 놈들이 지금보다 더 설쳐대겠지. 그럼 이번에는 과연 어디까지 꿰뚫고 올까?"
못을 박는 말에 페트리오는 어깨에 힘을 뺐다.
"맞습니다. 분명 놈들은 그럴 겁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던 결국, 티에라를 잡아먹고자 할 테죠."
페트리오가 항복하자 하벨은 승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보는 제 머릿속에 있습니다. 직접 적어 카샬을 통해 전달 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그러니 도련님께서는 이제 안심하시고 그만 편히 쉬셨……."
"아니, 이제부터 바빠질 거야."
"이제부터 바빠지다뇨? 지금까지는 그냥 준비였단 말씀입니까? 진짜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카샬이 질겁했다.
나갔다가 업히고 돌아오고, 또 나갔다가 업히고 돌아오고.
이게 대체 몇 번째인지, 팔에 아직도 보이는 링거 자국이 몇 개인지.
"일단 왕자를 찌르고 올 거야."
아라의 눈이 커지자 하벨은 아라가 오해하기 전에 뒷말을 이었다.
"아, 사람을 죽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건드려본다는 말이었어."
[대장은 말을 알쏭달쏭하게 해. 이 몸도 알아듣기 쉽게 말해줘.]
아라가 입을 삐죽 내밀자 하벨은 아라의 입술을 건드렸다.
"제가 그동안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페트리오가 허공에 하벨의 손이 움직이는 걸 보며 물었다.
"내 목적이자, 네 복수이기도 해. 그럼 넌 뭘 할 거야?"
"저라면 뒷세계를 건드릴 겁니다."
"그래. 당연히 건드려야지. 그런데 이번에는 경우가 조금 달라."
"그렇지. 다르지. 네가 포섭한 뒷세계 수장들을 내버려 두는 건 티에라를 위해서였잖아?"
"맞습니다, 형님. 하지만 다른 곳은 아니죠. 다시 안 할 줄 알았는데 한 번 더 해야겠습니다."
"…설마, 아니시죠?"
카샬이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목소리도, 얼굴에도 간절함이 엿보였다.
"꽃님아. 나랑 작업 좀 하자."
꺄르르.
아라가 좋아하며 발을 동동 흔들었다.
[꽃님이가 출동하는 거야? 이 몸은 꽃님이라는 이름이 너무 좋은데.]
"이런…!"
하벨이 웃자 카샬은 이성의 끈을 간신히 잡으며 속으로 욕을 씹어먹었다.
"막내야? 그, 가면단으로 또 움직일 거야?"
라르웬이 귀를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리듯 물었다.
"물론입니다. 호수에 돌멩이를 던져 파문이 일으켜야죠."
"겨우 돌멩이 가지고 되겠어?"
"아, 돌멩이는 접니다. 퐁당퐁당, 물속에 빠지지도 않고 심지어 움직이는 돌이죠. 얼마나 많은 파문을 일으킬까요?"
하벨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네가… 음, 뭘 어떻게 할지 상상도 가질 않네."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아야 말리든 말든 할 텐데.
라르웬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카샬을 힐끔 보았다.
"거창한 일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왕자를 만나러 가는 것도 일단 내가 얼마나 먹음직스러운지 귀족들이 봐야 하기에 가는 겁니다."
"비유가… 좀 그렇네요."
카샬이 곤란해하며 말했다.
"진짜 큰일을 낼 것만 같습니다. 지금도 도련님을 노리시는 자들이 있잖습니까. 무얼 하시는지 몰라도 그 생각에 절반 이상을 자중하길 요청합니다."
하벨은 이미 '검은 달'이라 불리는 집단에 거액의 암살 의뢰가 걸린 상태였다.
이를 막으러 티에라 마을에서 만난 '레디나 컬'을 보냈어도 카샬은 좀처럼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걱정하지 마. 이미 엄청 덜어냈어. 거대 정화 장치 일로 미안한 마음이 크니까."
지금까지 하벨의 행보를 아는 라르웬도 카샬도 저 말을 믿지 않았다.
[왜 덜어? 나는 안 덜어도 된다고… 읍읍!]
철없는 루룸의 말에 라르웬은 당장 입을 막았다.
"조용히 해, 루룸. 한 번 더 하벨에게 그딴 말 하기만 해."
간신히 마음을 잡은 하벨에게 더 하라고 손뼉을 치면 대체 얼마나 날뛸지.
루룸이 너무 좋아하며 라르웬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좀도둑."
하벨은 실실거리며 페트리오를 불렀다.
라르웬과 카샬의 시선이 따가웠기에 페트리오는 뭔가 잘못을 한 사람처럼 자꾸만 움츠러드는 자신을 느꼈다.
"그사이 너는 귀족들의 허리를 끊어낼 자가 누구인지 추려내고 알려줘.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가장 위에 있는 자들을 처리하면 쉽다는 걸 알지만, 현실은 달랐다.
위를 베면 그 위를 노리고 있던 자들이 달려들 게 뻔했다.
그러니 위에 있는 자들이 늦게 눈치챌 수 있는, 귀족들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자들부터 처리해야 위를 베어내도 뒤탈 없이, 일이 한결 수월해질 테지.
"아, 원한다면 미리 밑 작업에 들어가도 괜찮아. 자발적인 행동을 말리는 건 아니니까. 대신 보고는 해줘."
"알겠습니다."
"그럼 카샬, 언제 움직이면 좋을지 헤레스한테 물어봐 줘."
"지금 그 말을 하면 저는 헤레스 씨한테 멱살을 잡힐 겁니다. 아니, 머리카락을 쥐어뜯길지도 모르죠."
"그럼 내가 갈게. 적어도 멱살은… 잡히진 않겠지?"
하벨이 이불을 젖히자 카샬은 자신의 이마를 때렸다.
"그냥 제가 가서 잡히고 오겠습니다."
"고마워, 카샬."
"진짜… 얄미운 거 아십니까?"
하벨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자 카샬은 차마 욕도 꺼내지 못한 채 문으로 걸어갔다.
차라리 진짜 못됐으면 나았을 텐데. 어정쩡하게 못된 바람에 뭐라 말도 못 하고.
"아, 배고프시죠?"
카샬이 손잡이를 돌리기 전에 하벨을 보며 물었다.
"그래. 엄청, 배고파."
"아까 확인하니 둘째 도련님께서 이미 주방장에게 말씀하셨더라고요. 식사도 함께 내오겠습니다."
카샬은 페트리오를 힐끔 바라보다 허리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럼 저도 정보를 쓰러 가겠습니다."
페트리오 역시 하벨과 라르웬에게 인사한 뒤에 나갔다.
꼬르륵.
"형님."
하벨은 굶주린 배를 만지작거리며 라르웬을 불렀다.
"왜?"
"왕실은 멉니까?"
"아니. 안 멀어."
"어느 정도 걸립니까?"
"…음, 한 1~2시간?"
"예? 정말요?"
"맞아. 적어도 우리는 말이야."
라르웬은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 * *
빼꼼.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
문을 열자마자 헤레스가 보여 하벨은 깜짝 놀랐다.
[히익!]
아라도 덩달아 놀라 뒤로 튕겨갔다.
"그, 음, 운동을 잠깐 할까 싶었네."
[아닌데? 대장이 이전에 그 신기한 정화제가 만들어지는지 아닌지 확인하러 간다며?]
아라가 하벨을 빤히 보자 그는 더 어색하게 웃었다.
거짓말은 나쁘다고 아라에게 가르쳤는데 정작 자신이 거짓말을 하다니.
"아니, 밖에 나갈 셈이었네."
하벨은 금세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헤레스가 방긋 웃었다.
"확실히 벌써 3일이 되셨으니 좀이 쑤실 만하십니다."
"그래, 그렇지. 이해해줘서 고맙다네."
헤레스의 시선이 하벨의 링거에 고정되자 그는 입술을 찰흙 반죽하듯 움직였다.
"그럼 저랑 같이 걷겠습니까?"
"……?"
하벨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다 방긋 웃고 있는 헤레스를 보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도련님."
같이 걷겠냐고 제안했던 헤레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려간 이후에도, 정원까지 걸어오는 와중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꺼낸 말이었기에 하벨은 저절로 긴장됐다.
괜히 가을의 향이 묻어난, 붉은 꽃을 만지러 간 아라를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이신 겁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하벨의 눈동자가 빙그르르 돌아갔다.
"처음 보는 흔적에 제가 정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가주님께 알려야 하는지, 아니면 도련님께만 말씀드려야 하는 문제인지. 그래서 이렇게 시간이 걸렸고요."
"어떤 흔적을 말하는 건가?"
"도련님께서 앓으시는 물의 저주 증상 중 하나가 바로 몸에서 자라는 불순물입니다. 그러니까……."
"혹시 푸른 돌을 말하는 건가?"
"……아셨습니까?"
헤레스는 걸음을 멈추고 미안한 표정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물의 저주에 걸린 상태로 그 최후가 어떤 건지 알게 됐네. 몸 속이라 불순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싶었는데 정답일 줄이야."
지금 아라가 꽃향기를 맡으러 곁에 없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맞습니다. 몸에서… 푸른 돌이 자라납니다. 증상이 심해지시면 그 푸른 돌의 영향으로 피부도 푸르게 물이 들지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푸른 돌 일부가 녹아내렸습니다. 도련님께서 무언가를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여 묻겠습니다, 무얼 하셨습니까?"
하벨은 헤레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하벨의 시선이 무겁다고 생각을 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꼭 들어야 하는가?"
"예. 어쩌면 이게 해답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쪽 호기심인가?"
"당연히 주치의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가 마법사라고 한들, 목숨으로 장난치는 일은 맹세코 없을 겁니다."
"물을 정화했네."
"……?"
"정령들하고."
"……!"
"그리고 신기한 정화제가 하나 만들어졌는데, 그 정화제를 만지니 이렇게 된 것 같네."
헤레스는 하벨이 자신에게 무얼 말했는지를 머리로, 가슴으로, 그리고 넘실거리는 고마움에 주먹을 꽉 쥐었다.
저 말은 무조건 새어 나가면 안 될 비밀이었다.
"저는 주치의로서 도련님께서 제게 알려주신 모든 말씀을 비밀에 묻어둘 것을 맹세합니다."
헤레스는 허리를 숙였다.
"고맙네, 헤레스."
"저야말로… 정말 감사드립니다."
헤레스의 목소리가 먹먹해졌다.
하벨이 자신을 믿어주었고, 물의 저주를 해결할 수 있는 해답이 정화제 속에 있었다니.
"계속 하벨 티에라를 잘 부탁하네."
고개를 들자 하벨은 활짝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씁쓸함이 엿보였다.
'…자아의 혼동.'
헤레스는 입 안에서 혀를 굴렸다.
언젠가 말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룬델에게도, 라르웬과 카샬에게도 들은 하벨은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으니.
"도련님."
"그래."
"이전에 제게 위협을 보는 불꽃을 말씀하신 적이……."
"그래. 이 팔찌라네."
"역시 그랬어요. …그때, 너무 놀라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팔찌를 빼낼 때, 어떤 경고 같은 게 느껴졌어요."
"경고라니?"
"건드리지 말라는, 정중한 부탁이 담긴 목소리였습니다."
목소리라니.
자신은 그런 목소리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혹시 그 뒤로 빼려고 시도하신 적이 있습니까?"
"몇 번 있었네. 빼진 못했지만."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 팔찌가 무엇인지 확실해질 때까지 억지로 빼내시는 건 좋지 못할 듯합니다."
헤레스는 간곡함을 담아 부탁했다.
자신이 들은 그 목소리,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소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아직 확실하진 않았다.
* * *
"…으함."
하벨은 하품을 크게 내뱉었다.
아직 곤히 잠든 아라를 쓰다듬으며 해도 뜨지 않은 창문을 바라보았다.
무슨 꼭두새벽부터 깨우는지.
"…카샬."
하벨은 다시금 하품하며 그를 불렀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도련님. 그럴수록 시간만 지체됩니다."
"카샬, 그냥 평소처럼 입으면 안 돼? 나 화려한 거 싫어해."
"안 됩니다. 지금 도련님께서는 티에라의 얼굴이십니다."
"형님도 같이 가는데?"
"둘째 도련님께서는 이번만큼은 두 번째 얼굴이십니다."
"그럼 지금 형님도 이러고 계신 거야?"
하벨은 자신에게 달라붙은 시녀와 시종을 눈으로 가리켰다.
대체 저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만큼 방에 우글거렸다.
어쩌다 시선이 한 번 맞으면 왜 겁을 먹은 듯 고개를 내리는지.
"예. 아마도 상황은 비슷할 겁니다."
"그것참 마음에 드는 말이네. 그런데 카샬."
"예, 말씀하시죠."
하벨은 제 얼굴에 뭘 바르는 시녀의 손이 덜덜 떨리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너, 저들한테 뭐라고 말을 했어?"
"자, 잘못했습니다! 제가 감히 도련님의 얼굴을 빤히 보고 말았습니다."
시녀가 바로 무릎을 꿇자 하벨은 흠칫 놀랐다.
자신은 하품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 저들 사이에 제 평판이 아주 나쁩니다. 아마 그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카샬의 눈이 휘어지자 이상하게 분위기가 가라앉는 듯했다.
"네 평판이 나쁘다고? 왜?"
저 입만 제외한다면 카샬에게 딱히 흠잡을 만한 곳이 없어 하벨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잘못한 건 없습니다. 은연중에 깔렸던 도련님을 향한 무시와 업신여김을 직접 느끼셨잖습니까?"
"그랬지."
하벨은 이제야 생각이 난 것처럼 반응했다.
그 모습에 카샬은 새어 나올 뻔한 한숨을 삼켰다.
어쨌든,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으니.
"지금까지 가주님께서 봐주시는 것도 모르고 설치다 이번에 제대로 쫓겨나거나 죽는 모습을 봤으니 사람이라면 간이 떨리지 않고는 못 참죠."
비수를 입에 문 것처럼 날카로운 말로 카샬은 그들을 짓눌렀다.
"잘못한 게 많으니 어쩌겠습니까. 도련님 덕에 목숨이라도 구한 걸 천만다행이라 생각해야죠."
"내가?"
"도련님이 관련 있는 자만 처벌해 달라고 가주님께 부탁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러긴 했지. 일단 내가 생각하는 선을 넘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그러니 놀라지 말게. 자기 자신에게 찔릴 일을 하지 않으면 충분하네."
하벨이 시종을 일으켜주며 싱긋 웃자 순순한 그 웃음에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저 웃음에 속네. 속에 뱀이 몇천 마리가 있는 줄도 모르고.'
카샬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도련님."
"왜?"
"오늘만큼은 다른 팔찌를 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안 빠져."
"…그렇게 마음에 드십니까? 알겠습니다. 적당히 숨겨보겠습니다."
"아니. 안 빠진다니까."
똑똑.
"다 끝났어, 막내야? 포탈은 이제 작동 중인데."
한껏 차려입은 라르웬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등장에 하벨을 제외한 전부 고개를 숙였다.
옷이 불편한 건 라르웬도 마찬가지인지 움직임이 어색해 보였다.
"오, 형님. 평소와 다릅니다."
하벨이 감탄하자 라르웬은 괜히 목깃을 만지작거렸다.
"꾸몄는데 평소랑 똑같으면 슬프지. 그것보다……."
라르웬의 시선이 하벨에게 고정됐다.
그가 꾸민 모습을 얼마 만에 본 건지.
들어왔을 때 왜 시녀들이고 시종들이고 하벨의 얼굴에서 시선을 놓지 못했는지를 이해했다.
"놀랍지 않습니까?"
카샬이 키득거렸다.
"확실히 놀랍네. 팔찌만 빼고."
라르웬은 당장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