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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53화 (53/415)

53화. 뭐라고? 깨어났다고?(2)

* * *

가뜩이나 티에라 가문에 숨겨둔 자들이 모조리 내쳐진 상황에 하벨 티에라가 죽지 않았다니.

티에라 가문의 감시 체계가 더 강하게 바뀌어 이제는 첩자를 심을 수도 없는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피나토 님."

"그래, 비헨."

"아무래도 거짓 정보가 잘 흘러간 모양입니다."

부서진 펜을 버리고 새로운 펜을 쥐던 피나토의 손이 멈췄다.

"말해보게. 제대로."

"조만간 하벨 티에라가 왕실을 방문할 거라고 합니다."

"하벨 티에라가……?"

"예. 룬델이 직접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독을 뿌린 게 왕실이라는 사실이 먹힌 게 아닙니까?"

"아니야. 아직은 몰라. 룬델, 그놈이 제 아들을 순순히 왕실에 보낸다?"

피나토는 눈을 반쯤 감았다.

자신이 아는 룬델은 제 자식을 끔찍이도 생각하는 자였다.

특히 덜떨어진 막내가 귀족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게 꼭꼭 숨기고 있지 않았던가.

아무리 독살 사건을 왕실과 엮었다고 한들 이렇게 쉽게?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웅크렸던 티에라가 드디어 밖으로 나오는 게 아닌가.

"계속 지켜보게. 조금 수상하니 말일세."

"알겠습니다."

"그것보다 비헨."

"예, 피나토 님."

"이 소문은 얼마나 퍼졌는가?"

"이제 곧 크게 퍼질 겁니다. 룬델 티에라가 직접 언급한 일이니 막기는 힘듭니다."

"알겠네. 그럼, 뮈에르 진젤을 처리하게. 고통스럽지 않게. 나와 닿았던 흔적까지 모조리. 알고 있겠지?"

피나토는 명령을 내린 뒤 서류를 마저 보았다.

자신이 건드렸든 어쨌든, 뮈에르 진젤이 큰 역할을 한 건 사실이니 고통은 줄여줘야지.

"…저, 피나토 님."

"왜 그러는가?"

"아르에느 마을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주인이 바뀌었다?"

"예. 바뀌었습니다."

"누구로?"

"뮈에르 진젤의 아들이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뮈에르 그놈은?"

"사라졌습니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말입니다."

바헨이 꺼낸 대답에 피나토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뮈에르 진젤이 사라졌다니.

탁!

피나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에 핏줄을 세웠다.

"당장 찾아! 무조건!"

뮈에르가 입을 벙긋하는 날에는 자신의 이 자리를 노리려는 귀족들에게 어떤 꼬투리를 잡힐지 몰랐다.

* * *

[…오! 대장! 일어났어?]

하벨을 빤히 바라보던 아라가 그에게 안기며 꼬리를 흔들었다.

하벨은 눈을 몇 번 감은 뒤에야 아라를 볼 수 있었다.

눈가에 눈물 자국이 보였다.

'지금 운 건 아닌 것 같은데…….'

"저, 정신이 들더냐, 하벨아?"

룬델은 물을 따르다 말고 다급히 침대 옆자리에 앉아서는 하벨의 손을 꼭 잡았다.

"내가 누구인지 알겠더냐?"

초조함이 섞인 그 목소리에 하벨은 사과부터 했다.

용왕의 힘 때문에 하벨 티에라의 몸이 망가질 뻔하지 않았던가.

"…미안해요."

마치 바짝 마른 낙엽이 바스러지는 것처럼 들려와 룬델은 안타까움에 하벨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하벨아.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단다."

왜 사과부터 꺼내는 건지.

이렇게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하지만… 제가 이 몸을 소중히 하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사과해야 합니다."

[이 몸도 왜 대장이 사과하는지 모르겠어.]

아라가 귀를 꿈틀거렸다.

옆에서 룬델이 얼마나 하벨이 깨어나길 바랐는지 알기에 정말로 궁금했고, 가장 가까이서 본 자신이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하벨은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

왜 서로 기뻐하지 않는지.

"난 하벨이 아니니까."

하벨은 미소를 지었고, 룬델은 다급히 고개를 돌려 일그러지는 표정을 숨겨야 했다.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제가 얼마나 잠들었습니까?"

꽤 오래 잠에 빠진 듯했다.

아쉽게도 꿈은 꾸지 못했지만.

"3일이구나."

"벌써 3일이나 지난 겁니까?"

[응! 이 몸이 대장이 언제 깨어나나 계속 지켜봤다?]

아라는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룬델이 말하는데 단계를 넘어버리면 원래 잠에 빠진대.]

"그래. 정령사라면 누구든 겪는 당연한 일이라 내게 미안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 거였단다."

룬델은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지자 아라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하벨을 달랬다.

"그럼 거대 정화 장치 주변은 어떻게 됐습니까?"

하벨은 그제야 부자연스러운 왼쪽 팔을 느껴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슬슬 익숙해진 링거가 보였다.

[아파?]

아라가 묻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몸이 무거웠다.

"뮈에르가 잡힌 와중에 하벨, 네 명령이 아니면 그곳에 들어올 자가 없다는 걸 알지만, 일단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주변을 통제했단다."

"그럼 이제부터 좀도둑한테 맡기면 되겠네요. 아, 불러주신다면 제가 잘 말하겠습니다. 좀도둑이 제법 사납거든요."

페트리오의 힘이라면 룬델이 꼼짝하지 못할 기억을 읽어버릴 수도 있으니.

페트리오가 유일하게 기억을 읽지 못하는 자가 바로 자신이라 물릴 일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카샬이 페트리오를 부르러 갔단다. 아마 곧 도착할 테지."

"역시 빠르십니다."

하벨은 번거롭게 여러 번 말하지 않아도 되어 기뻤다.

룬델이 가진 행동력은 이미 이전에도 확인했지만, 정말 빠른 편이었다.

그렇기에 하벨은 룬델에게 물었다.

"거대 정화 장치 이야기를 들으셨을 겁니다. 충격이 클 텐데 괜찮습니까?"

"거대… 정화 장치 일은 솔직히 음, 충격이더구나."

룬델은 예상대로 거대 정화 장치 일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만약 이곳뿐만 아니라 다른 곳까지 퍼져 있다면 룬델이, 아니 티에라가 향하는 방향 자체가 틀어질 수도 있는 큰 문제였다.

"그곳을 관리하는 자가 대체 누구입니까?"

"귀족들이란다."

"…진짜 어디든 문제네요. 완전 사고뭉치야."

"상황이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은 몰랐다."

"정확히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까?"

하벨은 핵심을 물었다.

"정령들의 탄생이 늦어진단다. 정령사는 정령들의 탄생과 함께 영혼에 각인이 되지. 이는 누구도 건들 수 없는 선택이란다."

루룸한테 저 말을 들은 적이 있기에 하벨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물의 오염을 막을 수단은 정화제뿐이고. 정령들도, 정령사도 줄어들면 만들어낼 수 있는 정화제까지 덩달아 적어지지. 그럼 물의 오염이 더 심각해진단다."

"악순환이라는 거죠?"

"그래. 이 고리는 계속 이어져 왔고, 이를 끊어내려 애를 쓰는데도 잘… 안 되는구나."

룬델은 가볍게 탄식했다.

저 고리를 끊어내려 수많은 티에라들이 도전했지만, 결국 다 실패하고 말았다.

"루룸한테 지금 그나마 상황이 유지가 된다고 들었습니다."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단다. 여기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

―세상이. 이 세상이… 멸망할 겁니다.

한탄하듯 꺼내는 룬델의 목소리와 하벨 티에라의 간절한 목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하벨. 이게 네가 말하던 세상이 멸망할 거라는 의미인가?'

하벨은 마치 하벨 티에라가 자신을 압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꾸만 하나씩 알아가다니.'

이 세상이 궁금했기에 다가갔을 뿐인데 원치 않게 파멸의 원인을 하나씩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하벨은 고민에 휩싸였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세상이 멸망한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 지금 원인을 하나 알게 된 후는 그 무게감이 달랐다.

"…하벨아?"

하벨의 표정에 웃음기가 사라지고 심각해지자 룬델은 그를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귀족을 반드시 처리해야겠습니다."

모르면 몰랐지, 하벨은 알아버린 이상 자신이 어차피 하려던 그 일을 조금 더 진지하게 다가가고자 했다.

결국, 둘 다 이어져 있지 않은가.

자신이 원하던, 관료들의 목을 따는 일과 거대 정화 장치 일이.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제가 정말로 목을 베어드리겠습니다, 가주님."

"나는… 그런 걸 바란 적이 없다, 하벨아."

누군가 귀족들을 치워주기만 해도 상황이 좋아지는 건 알지만, 이는 '에르티안'이라는 작은 나라 하나로 한정될 뿐이었다.

세계에는 여러 나라가 있었고, 그들이 사용하는 거대 정화 장치가 어떨지 아무도 몰랐다.

하벨에게도,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압니다. 가주님께서는 제게 무엇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하벨아. 나는 너한테 늘 요구한단다."

룬델은 조심스레 하벨의 상체를 들어 앉힌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전에 따랐던 물이 담긴 컵을 가져왔다.

"무사하게. 무탈하게. 건강히. 다치지 말고. 언제나 행복하길."

룬델이 꺼내는 말 하나하나에 담긴 짙은 감정과 번져가는 따스한 미소가 하벨의 마음에 닿았다.

마치 신에게 빌 듯 절박함마저 보였다.

왜?

하벨은 룬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많은 요구이지 않더냐?"

룬델은 미소를 지으며 하벨에게 물을 건넸다.

"사실상 가장 어려운 요구임에도 하벨 너는 내가 바라는 걸 거의 들어주고 있구나. 늘 고맙단다."

하벨은 어떤 말도 못 하고 그저 룬델이 건넨 물로 입가와 목을 축였다.

'…아버지, 인가?'

처음으로 그 단어가 무겁게 느껴져 마음이 불편했다.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다고 자만할 수 있었다.

하지만 룬델에게는 달랐다.

그에게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만 같아 하벨은 처음 그랬듯 룬델에게 고백했다.

"저는… 하벨 티에라가 아닙니다."

"억지로 말을 꺼내지 않아도 괜찮단다."

"……."

하벨은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 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깨어냈으니 됐다. 이제 편안히 쉬거라."

룬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사적으로 꺼낸 하벨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아 더는 표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가주님."

"그래."

"고맙습니다."

무얼 고맙다고 하는 줄 몰라도 하벨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 보였기에 룬델도 그제야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쉬렴, 하벨아."

룬델이 밖으로 나가자 아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하벨을 쳐다보았다.

[대장은 룬델을 좋아하는데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내가 하벨 티에라가 아니니까. 나는… 룬델의 아들이 아니야. 너도 알고 있잖아?"

[이 몸은 하벨 티에라를 보지 못해서 몰라. 이 몸이 아는 건 대장의 이름이 하벨 티에라고, 용왕이라는 사실이야. 사실 이 몸에게 그것도 중요하지 않아. 하벨은 이 몸의 대장이고, 제일 좋아해!]

아라의 눈이 포근히 감겨 눈꼬리가 길어졌다.

하벨도 배시시 웃으며 아라를 쓰다듬었다.

찌르르.

교감이 느껴졌다.

"아, 맞다! 아라 너랑 나랑 나이가 같지."

[응! 14일!]

아라가 꼬리를 흔들며 하벨에게 달려들었다. 그대로 고개를 위로 올려서는 물었다.

[그런데 대장은 하벨이 아니라 용왕이라며?]

"맞아."

[얼마나 오래 살았어?]

"글쎄. 나이를 세다가 말았거든. 뭐가 됐든 여기에서는 나도 14일이야. 네가 탄생한 그 날, 나도 이 몸에 들어왔어."

[응응! 이 몸도 대장이랑 나이가 같은 게 좋아.]

아라가 속닥거리듯 웃음을 흘렸다.

[이제 안 아파? 이 몸이 말한 거 잊지 않았겠지?]

"나한테 말한 거라니……?"

[아이참. 이 몸이 함부로 음식을 주워 먹지도 말고, 함부로 어디 가는 것도 조심하라고 말했잖아.]

"그거… 꿈 아니었어?"

아라를 토닥이던 하벨의 손이 멈췄다.

[꿈이라니? 이 몸이 대장하고 말을 나누려고 얼마나 힘을 냈는데!]

아라가 금세 실망해서는 하벨의 손가락을 물었다.

똑똑.

라르웬은 문을 열고 난 뒤에 하벨의 손가락을 문 아라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안녕, 하벨, 아라!]

루룸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라는 루룸을 본체만체했고, 하벨이 덩달아 손을 흔들어주려다 라르웬의 고갯짓에 이불만 잡았다.

이게 왜 좋은지 몰라도 루룸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방금 아버지께서 오셨더라. 몸은 어때, 막내야?"

라르웬은 룬델이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아서는 물었다.

"배가 많이 고픕니다."

"그럴 줄 알고 주방장한테 준비하라고 시켰어. 아, 물론 아버지께서 정령들을 붙여 감시하고 있으니 안심해."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나도 그렇고 다 안 괜찮아서 그래. 또 독이 나온다면 아버지가 뭘 하기 전에 내가 사고 칠 것 같거든. 참, 카샬이 어디 갔는지 아버지께 들었어?"

"좀도둑 만나러 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먼저 말을 꺼낸 건 카샬이었어."

"카샬이요…?"

라르웬은 입술을 몇 번이고 움직여서야 진짜 꺼내기 싫은 말을 내뱉듯 얼굴까지 구겼다.

"…걔가 좀 많이 유능해."

"그런 사람이 왜 하벨 티에라의 집사가 된 겁니까? 유능하다면 관료가 되면 되잖습니까?"

"그거야… 음, 자기 마음 아니겠어?"

라르웬은 팔짱을 끼며 머뭇거렸다.

"어쨌든, 막내야."

"예, 형님."

"아버지께서 네 이야기를 밖으로 퍼트리셨어."

"어떤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가 그렇게 귀족 세계로 나가고 싶다고 했잖아."

"…제가 살아났다는 말을 퍼트리신 겁니까?"

하벨은 창백한 얼굴로 정말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그 모습에 라르웬은 뒷말을 꺼내기가 참 싫었다.

"맞아."

"그럼 피나토 웬이 이 소식을 아주 빠르게 물었겠네요?"

"그자는 의심이 많아."

"그래도 물었을 겁니다. 그만큼 매력적인 정보가 아닙니까?"

아르에느 마을의 귀족이었던 뮈에르 진젤 뒤에 피나토 웬이 있었다.

독을 사용했다는 사실 역시 알았겠지.

그런데 독에 중독된 하벨 티에라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테니 기분이 어떻겠는가.

"…그리고 뒤이어 들은 소식에 아마 깜짝 놀랐겠죠. 어쩌면 지금 다급함에 속이 탈지도 모르겠습니다."

뮈에르 진젤이 사라지고 그의 아들이 가주 자리에 올랐으니.

"잘됐네요. 좀도둑이 딱 좋은 순간에 날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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