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뭐라고? 깨어났다고?
* * *
"말씀은 고맙지만, 지금 하벨을 데려가야 합니다."
라르웬은 등에서 느껴지는 하벨의 떨림에 단호히 거절했다.
정화 장치를 보니 아직 괜찮았지만, 피를 많이 흘리지 않았던가.
"…형님."
하벨은 라르웬을 말렸다.
몽롱한 기분이 덮쳐 힘이 없을 뿐, 아프진 않았다.
정령들이 무얼 보여주고자 하는지 몰라도 꼭 보고 싶었다.
무조건 물과 관련된 일일 테니.
"둘째 도련님. 더는 도련님을 말리지 마시고 보러 가는 게 어떠십니까? 도련님이시라면 나중에 요양 도중이라도 도망쳐 이곳에 올 테니까요."
카샬은 하벨을 말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자신이 아는 지금의 하벨을 떠올리니 라르웬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
하벨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할 수 있다면 카샬을 마음껏 비웃고 싶을 정도였다.
"웃지 마십시오. 지금 도련님의 머리카락을 뜯어서라도 말리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으니까요."
카샬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지금 자신의 꼴이 어떤지 보이지 않으니 저러고 웃고 있는 거겠지.
"지금 도련님의 모습을 보신다면 가주님은 물론, 헤레스 씨까지 기겁할지도 모릅니다."
"아마, 너 당분간 꼼짝도 못 할 거다."
라르웬까지 경고를 퍼붓자 하벨은 억울했다.
못된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억울해하지 마라, 막내야. 칭찬받아야 할 일이지만, 네 꼴을 보면 그런 마음이 싹 사라져서 어쩔 수 없네."
물소리가 가까워질수록 하벨의 떨림이 신기하게도 멎고 있었다.
라르웬은 그제야 편안하게 웃었다.
"막내야."
하벨은 대답 대신 얼굴을 라르웬의 등에 살짝 박았다.
"잘했다."
이어지는 라르웬의 칭찬에 하벨은 입꼬리를 또 올렸다.
[여기야.]
정령들이 멈추자 아라가 눈을 크게 떴다.
[우와!]
물이 내려오는 곳에 뭔가가 빙글빙글 돌고 있지 않은가.
자세히 보니 반짝이는 보석이 물속에 떠 있었다.
'…저게 뭐지?'
하벨도 보석을 보며 호기심을 느꼈다.
"뭔가 반짝이고 있습니다."
카샬은 물살을 따라 흘렀을 때 유난히 반짝이는 곳에 시선을 뒀다.
일반 반짝거림이 아니었다.
"저게… 뭡니까?"
라르웬이 정령들에게 묻자 그들은 배시시 웃었다.
[정화제야!]
"정… 화제라뇨? 저런 정화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도 그래. 하지만 정화제가 맞아. 오염된 물을 없앨 수 있는 건 오직 정화제뿐이니까.]
"하지만 저건 보석이잖습니까?"
라르웬은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화제가 맞아, 라르웬.]
루룸까지 정령의 말을 긍정하자 라르웬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놀란 눈으로 루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형태의 정화제였다.
[나도 처음에 정말로 내 눈을 의심했다니까? 그런데 만져봤을 때 정화제가 맞았어.]
"보석이요? 제 눈에는 반짝거림만 보일 뿐 보석은 보이지 않습니다."
카샬이 연신 눈을 찌푸렸지만, 보석을 볼 순 없었다.
그 말에 라르웬이 경악했고, 루룸이 실실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진짜 특별한 정화제잖아? 정령사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정화제라니. 심지어 이것도 반영구적인 정화제인데.]
"뭐……?"
라르웬은 제 귀를 의심했다.
세상에 반영구로 사용할 수 있는 정화제가 있다면 정령사들이 왜 지금도 정화제를 만들고 있겠는가.
[놀랐지? 놀랍지? 그러니까 이건 기적이라고!]
루룸은 앞발을 하늘로 번쩍 올리다 서둘러 하벨에게 날아가 그를 쓰다듬었다.
[우연히든 뭐든 티에라 가문이 생긴 후 처음으로 오염된 물에게 뺏기지 않은 곳이 생겼어. 다 네 덕이야, 하벨.]
[물론이지! 우리 대장이 진짜 열심히 했다구. 대장이, 어, 흘린 피가, 음… 하여튼 많아!]
대장을 보필하는 부하처럼 아라가 더 신나게 떠들어댔다.
[잘했어, 대장! 착해!]
아라는 루룸을 의식하며 하벨의 머리를 더 쓰다듬어주었다.
"…형님."
계속 보석에서 눈을 떼지 못한 하벨은 라르웬을 불렀다.
"왜?"
"보석, 만져도 됩… 니까?"
긴가민가했기에 하벨은 확실히 확인하고 싶었다.
"저 보석에 손을 대도 되겠습니까?"
라르웬은 일단 정령들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게 먼저였다.
[물론이지! 저건 하벨이 만든 셈이니까. 하벨은 우리 허락을 받지 않아도 돼. 너희도 괜찮아.]
그릇 없이 정화제를 완성할 수 없듯 하벨이 그릇이 되었기에 지금 저렇게 완벽한 정화제가 나올 수 있었다.
라르웬은 하벨을 내려놓고, 카샬과 함께 부축하며 물속으로 발을 디디던 차, 정령이 말했다.
[우리가 도와줄게.]
강의 깊이와 폭이 길었기에 정령들은 하벨을 위해 다리를 만들어주었다.
보석으로 다가갈수록 하벨은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
기대감이 천천히 차올랐다.
하벨이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보석을 만지자 물의 저주로 몸에 쌓인 불순물이 아주 조금 녹아내렸다.
'……?'
낯선 반응에 깜짝 놀란 것도 잠시, 하벨은 손가락이 닿는 부분에서 밀려오는 감촉에 가슴이 뭉클거렸다.
'내 힘이…….'
날 리가 없는 바다 내음이 났다.
'느껴진다.'
오염된 물에 죽은 정령들을 보고 분노했을 때, 머릿속에 끊어졌던 실이 연결되면서 자신이 가진 용왕의 힘이 샘솟는 걸 느끼지 않았던가.
그때의 감각이 아주 조금 흘러들어오며 하벨 티에라와 자신.
결코, 이을 수 없는 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육체는 달랐다.
심지어 하벨 티에라는 용왕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런데 저 정화제의 영향으로 소실됐던 용왕의 힘이 아주 조금 돌아왔다.
만약 실이 저대로 방향만 맞춰 이어진다면 이 몸으로도 용왕의 힘을 온전히 끌어올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벨은 당연히 자신의 힘이 돌아오는 게 반가웠지만, 그 사실이 얼떨떨했다.
'내 영혼이 용왕의 영혼이라 가능한 건가?'
무엇도 이 상황을 설명해주진 않았다.
하벨은 추측으로밖에 이어 나갈 수 없는 상황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정확하진 않아도 정령과 함께 물을 정화함으로써 용왕의 힘이 돌아온 건 사실이었으니.
하벨은 정화제를 쓰다듬으며 활짝 웃었다.
역시 가장 기쁜 건 정화제였다.
우연히든 뭐든 모두를 기쁘게 할 희망이 만들어지질 않았던가.
'계속 돌아가거라. 멈추지 말고.'
자신의 바람에 반응한 것처럼 정화제가 잠깐 반짝인 것 같았다.
"이제… 돌아갑시다."
하벨은 만족스러워하며 눈을 살포시 감았다.
이제 정신을 잡지 못할 것만 같았다.
[잠깐만.]
정령들이 하벨을 붙잡았다.
[이대로 보낼 순 없어. 우리가 지금 얼마나 너한테 고마운지 모를 거야.]
[우리의 축복은 널 강하게 해주겠지?]
[맞아. 축복은 대장을 강하게 해줄 거야. 이 몸한테도 필요하고.]
아라가 하벨을 대신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벨이 가진 속성이 늘어난 만큼 아라 자신의 힘 역시 덩달아 늘어났다.
하벨에게 건넨 정령수로 만들어진 힘이 마치 자신에게 돌아와 하나의 기록이 되었으니.
[고마워, 하벨. 몇 번을 말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정말 너한테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
정령들은 하벨을 쓰다듬었다.
하벨의 눈이 구불구불 감겨왔다.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들려 하벨은 억지로 의식을 붙잡았다.
축복을 받기 전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지.
하벨 티에라의 몸을 이렇게 만들었으니 적어도 손에 뭘 쥐어야 하벨에게 덜 미안하지 않겠는가.
[정령사가 우리의 축복을 받는다고 해서 무조건 우리의 힘을 가져올 수 있는 건 아니야.]
정령이 속삭이듯 말했다.
'무조건… 가져올 수 없다고?'
하벨은 지금까지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교감을 나눌 때마다 힘이 하나씩 생기는 걸 경험했다.
독과 식물을 얻지 않았던가.
[인간의 말을 빌리자면 단계가 존재하고, 그 단계마다 고비가 찾아와. 이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우리의 힘을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자연의 존재에 가까워진다는 의미니까.]
[하벨, 네가 가진 순환의 길에 정령수를 넣어 알게 됐어. 너는 단계 끝에 서 있다는 걸.]
물론, 그 단계의 높이가 다른 인간과 비교하면 이상할 만큼 낮다는 사실을 정령들은 알려주지 않았다.
자만심.
인간에게 위험한 감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
하벨의 시선이 라르웬에게 향했다.
"맞아. 단계를 객관적인 수치로 나타낼 수는 없지만, 고비가 존재해. 축복을 받아도 그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거야."
자신이 지금 딱 그 상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저 정화제를 만진 뒤로 그 답답함 느껴지지 않았다.
교감과 다른, 위대한 자를 만난 기분에 라르웬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하벨을 위해 설명했다.
"이를 뚫을 방법 역시 축복인데, 어느 정도의 축복을 넣어야 그 위로 올라갈 수 있는지는 축복을 내려주는 정령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거야."
라르웬은 '축하해'라는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정말로 정령들이 이를 해줄지 아닐지 몰라 아직은 입을 다물었다.
무엇보다 지금 단계를 뚫기에 정령들의 숫자가 적어 보였다. 이것보다는 많아야 할 텐데.
[맞아. 어느 정도로 축복을 해야 단계가 뚫리는지 우리 눈에는 보여. 지금 너의 단계를 뚫어줄 만큼 우리가 있어서 다행이야. 시작할게.]
정령들이 꺼낸 말에 라르웬의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정령들은 결코 책임질 수 없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미쳤다. 이건 미친 거야.'
하벨이 해낸 일이 그만큼 대단했지만, 정령들이 주는 보상 역시 만만찮았다.
아마 어떤 정령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일이라 단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라르웬은 힘없이 늘어진 하벨이 더 측은해 보였다.
지금 제정신이었다면 얼마나 기뻐하고 있겠는가.
[우리가 책임지고 도와줄게, 하벨.]
정령들은 재차 말을 꺼냈다.
자신들은 거대 정화 장치 속에 갇혀 언제 먹힐지 모르는 불안감과 두려움에 맞서 싸웠어야 했다.
그 과정 동안 자연의 힘을 얼마나 많이 썼던가.
날짜를 기다릴 필요 없이 하벨을 위해, 자신들을 위해 축복이라는 과정이 필요했다.
"감사합니다. 제가 동생을 대신해 감사의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라르웬은 입술만 벙긋거리는 하벨을 대신해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고개를 숙일 필요 없어. 이건 당연한 일이니까. 우리를 위해서도 하벨을 위해서라도.]
정령들은 활짝 웃으며 하벨의 주변에 몰렸다.
라르웬과 카샬이 거의 동시에 손을 놓고 물러서자 정령들이 하벨을 천천히 눕혀 주었다.
정령들이 하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가슴에서 주먹만 한 물이 몽글몽글하게 일어났고, 검지 정도의 크기를 지닌 독이 거품을 물 듯 나타났으며 작은 새싹 하나가 허공에 피어나 가볍게 흔들렸다.
'……?'
하벨은 처음 보는 광경에 활짝 웃고 싶었지만, 입꼬리를 올릴 힘조차 없었다.
[놀라지 마, 대장.]
아라가 하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정령들은 대장이 무슨 힘을 가졌는지 볼 수 있어. 그래서 지금 그 힘들이 한 곳으로 올라온 거야.]
'…성장은 언제나 신기하구나.'
유창하게 말을 꺼내는 아라의 모습이 여전히 적응되질 않았지만, 자신을 쓰다듬는 아라의 손길만큼은 여전했다.
참 작고 말랑했다.
[맞아. 지금 하벨 네가 가진 힘이야. 우린 그 힘을 볼 수 있는 권한이 있고.]
정령들은 아라의 말에 동조하며 세 무리로 나뉘기 시작했다.
무리는 물과 독, 식물에 빙그르르 둘러싸여서는 춤을 추듯 천천히 돌며 흥겹게 노래를 불렀다.
가벼운 멜로디.
물이 천천히 모여 주먹 두 개를 합친 크기만큼 커졌다.
'물의 양이… 늘어났어.'
하벨은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곧 그는 시선을 돌렸다.
독의 양 역시 늘어났고, 물과 달리 여러 개로 증식됐다.
빨강, 보라, 검정. 이렇게 세 개로 나뉘어 그 쓰임새가 몹시 궁금했다.
'독의 힘도 성장했고.'
하벨은 둥글게 도는 정령들 사이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미는 식물을 바라보았다.
분명 새싹이었거늘, 줄기가 생겼다.
[저기 새싹이 하나 더 생겼어.]
아라가 얼른 위로 날아가 하벨을 위해 알려주었다.
'원래 새싹이 자란 것도 모자라 새로운 새싹이 생겼다고?'
하벨은 의식이 흐릿한 와중에도 정신이 없었다.
자신이 가졌던 힘 자체가 남김없이 성장했다.
단계를 뚫는다는 게 이런 의미였을 줄이야.
이상할 정도로 잠이 몰려왔다.
의식을 놓아버릴 것 같은 느낌과 달랐다.
[노랫소리가 좋다, 헤헤.]
아라는 발을 동동 흔들며 노래에 빠져들었다.
'그러게. 정말 아름답네. 노래도, 정령들도.'
빙그르르 도는 정령들이 빛깔을 뿌리듯 반짝거렸다.
하벨은 천천히 눈을 감았고, 편안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 * *
"…다시 말해봐."
남자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벨 티에라가 깨어났다고 합니다."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기사로 보이는 자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독을 먹고 사경을 헤맨다고 하지 않았는가?"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송구합니다, 피나토 님."
"그런데?"
"기적이라고 하더군요. 지금 상태를 회복하는 중이라고 룬델 티에라가 직접 말을 꺼냈습니다."
"…망할, 티에라. 이 기회에 무너졌어야 했는데."
피나토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부러트렸다.
빠직.
독을 먹고도 깨어났다니.
계획이 일그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벨 티에라.
빠드득.
피나토는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