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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9화 (9/415)

9화. 너희구나(3)

* * *

* * *

"…도련님께서는 꽤 유명하십니다. 하여 지금처럼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주셨으면 합니다."

페트리오가 뒷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경고부터 했다.

'겉보기에는 그냥 건물인데? 저기가 입구라고?'

하벨은 멀쩡하게 간판도 달려 있고, 사람들도 들락날락하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이곳은 '아카른'이라고 하는 자가 지배했는데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저 세계가 돌아가는 흐름을 그렇게도 잘 아는 사람이 그런 말에 속았다니. 믿을 수가 없네."

뼈를 찌르는 하벨의 말에 페트리오는 당황했다.

한껏 분위기를 잡고 있었기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해해. 간절하면 뭐든 잡고 싶으니까."

"…단지 간절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페트리오가 우물쭈물하다 말을 꺼냈다.

한순간 피어오른 그의 분노에 하벨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표정을 보지 않은 척 너스레를 떨었다.

"어차피 오늘 한 번 보고 말 사이도 아니니 천천히 들어보고."

"예……?"

페트리오는 제 귀를 의심했다.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라니.

살이 떨리는 말이 아닌가.

"계속 말해 봐."

하벨의 재촉에 페트리오는 할 수 없이 다음 말을 이었다.

"누가 말을 걸어도 제가 말을 꺼내지 않으면 무시하십시오."

"또?"

"제가 가게 안으로 들어간 뒤, 적어도 5분 뒤에 오십시오."

'내 너의 무엇을 믿고 먼저 보낼 수 있을까? 그자와 아는 사이인지, 아닌지 내 어찌 알고? 5분이라는 많은 걸 할 수 있는 시간이지. 날 납치할 작당을 꾸밀 수도 있을 거고.'

"5분이라면 날 팔아먹을 못된 짓을 꾸미기에 충분한데? 그렇잖아?"

지금 딱 분위기를 잡아야 하거늘, 왜 멋대로 의문을 담아 묻는지.

하벨은 이 망할 입을 뒤로한 채 눈빛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눈가에 힘을 주었다.

"…정령사의 추격을 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저 역시 압니다. 더불어 저를 믿어달라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이미 도련님께 목줄을 드렸잖습니까."

하벨은 페트리오의 약점을 쥐었다.

티에라 가문에 들어온 목적이자 삶의 이유인 그의 가문을.

귀족임을 증명하려고 들고 왔던 페트리오의 인장이 제 손에 들어왔다.

저 인장으로 계약서에 찍기만 해도 그의 가문은 이제 자신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더 경계해야지.'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없었기에 하벨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제가 저곳으로 향할 말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반드시 외우셔야 합니다."

"찔리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나 봐."

"빛과 어둠처럼 일반인과 아닌 자를 구분하기 위한 말일 뿐입니다."

페트리오는 하벨에게 말을 알려주었고 하벨이 다 외운 후에야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하벨은 가게 옆쪽 골목으로 향했다.

지금으로서 짜낼 수 있는 마지막 힘으로 물을 만들어내자 역시나 아라가 달려들었다.

[삐이잇!]

"안 돼. 집에 돌아가면 줄게."

하벨은 아라를 붙잡고는 물을 땅에 스며들게 했다.

개코까진 아니더라도 자신의 물 냄새는 추적할 수 있었다.

하벨은 비틀거리다 벽을 붙잡았다.

'죽을 것 같네. 이제 더는 안 돼. 아니. 조금 쉬면 괜찮으려나?'

물 한 방울조차 없이 말라비틀어진 오징어가 된 기분이었다.

페트리오가 이다음에 자신을 배신할지 어떨지 몰라도 이 몸은 방향 감각이 그렇게 뛰어나진 않았다.

이 모든 건 다음을 위한 기약이었다.

'모르면 몸이 고생하면 되는 거지? 그렇잖아, 하벨?'

하벨은 어지러움이 가라앉을 때까지 벽을 붙잡다 뚝뚝 떨어지는 코피를 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건 불가피했다, 하벨. 나는 소중히 했는데 네 몸이 이상한 거다. 분명 바다를 담을 수 있는 몸인데 물을 담기만 해도 이렇게 부작용이 일어나다니.'

하벨은 억지로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을 터트렸다.

[삐.]

아라의 소리가 마치 위로처럼 들리자 하벨은 그제야 실실 웃었다.

"그래, 너도 내가……."

하벨이 말을 끝내기 전에 아라가 물이 묻은 흙으로 황급히 날아갔다.

쏘오오옵.

"…허."

[삐이?]

왜 그러냐는 물음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많이 먹으라고."

사실 아라가 정령이 아니라 살아 있는 스펀지가 아닐까 싶었다.

* * *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이야.'

하벨은 벽에 기대서 시계를 바라보며 뒷세계를 평가했다.

가게 주인에게 암호를 말하고 땅굴로 향하는 통로를 걸었다.

'이것도 이상하고.'

햇빛이 들어오지 않기에 불꽃놀이를 떠올릴 만큼 줄지어 늘어진 조명에 시선을 뺏긴 것도 잠시, 후드를 내리다 말고 랜턴에 불이 들어온 걸 발견했다.

평소에는 빨리 사라지던 불이 사라지지 않았다.

점보다 작은 검은 불꽃이 계속 보여 눈길이 갔다.

'냄새도 이상하고.'

내려갈수록 점점 코를 찌르는 이상한 냄새에 기분이 나빠졌다.

땅굴에 퍼진 전반적인 냄새에는 미약하나 여러 가지 독이 섞여 있는 듯 몸이 원하지 않아도 축 처졌다.

몽롱한 기분을 느끼며 하벨은 눈동자를 굴리기 바빴다.

암살자도 결국 뒷세계에서 사는 놈이기에 최대한 이 분위기를 눈에 담아야 했다.

'별난 걸 많이 파네.'

두 번째로 눈에 들어온 건 두 가게였다.

좋다고 소문난 모든 걸 쏟아부었다는 약을 파는 가게와 세상 모든 독한 걸 집어넣었다는 독약을 파는 가게가 마주해 있어 꽤 흥미로웠다.

'동시에 먹으면 누가 이기려나.'

다음으로 시선이 닿은 곳은 정령들이었다.

움직이는 게 느리다고 해야 할지, 비록 선처럼 보일 뿐이지만, 또렷한 형체가 없어 보이는 게 신기하다고 해야 할지.

티에라에 있는 정령들과 확실히 달랐다.

'아라처럼 정령이 또렷이 보이면 좋겠는데.'

하벨은 아쉬움을 느꼈다.

왜 같은 정령이라도 아라만 또렷하게 보이는 건지.

'뒷세계는 왜 또 이렇게 조용한지.'

시비도 걸릴 줄 알았는데 위보다 더 조용했다.

그렇게 상념에 빠지다 '가만히 있으면 뭐 하겠는가'라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가끔 일부러 머리를 긁적이는 척하며 정령을 만졌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확실히 정령과 닿기만 해도 불순물들이 아주 조금이라도 사라지네?'

유심히 봐야 할 만큼 적은 양이 사라졌지만, 하벨은 만족스러웠다.

[삐이이.]

좀 움직여!

그렇게 화가 난 듯 소리치는 아라의 목소리에 하벨은 다시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아까부터 아라가 자신의 옷자락을 당겼다.

아라와는 이미 효과가 다한 건지 이렇게 접촉을 했음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교감이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방향이어야 한다더니 사실이라는 걸 몸소 경험한 셈이었다.

"잠깐만."

하벨은 시계를 확인했다.

페트리오가 들어간 뒤 정확히 5분이 흘렀다.

'이제 움직여볼까?'

* * *

<아아. 지금 현재 시각 오후 2시를 알립니다.>

하벨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어디에서 낯선 소리가 흘러나왔다.

안에 사람도 한 명뿐이고.

[삐이?]

하벨 옆에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아라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쪽입니다."

페트리오는 기다렸다는 듯이 하벨을 향해 걸어왔다.

하벨은 페트리오보다 이 낯선 목소리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찾고 있었다.

"아. 저기 라디오에서 들리는 겁니다."

페트리오는 하벨을 위해 손가락을 들어 카운터를 가리켰다.

<현재 강수 확률은 15% 미만입니다. 하지만 비구름의 경로 중 현재 이곳 '티에라'를 포함하고 있사오니 멀리 움직이시는 분들은 우산을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강수 확률이 15%라고? 개소리 지껄이고 있네."

카운터에 앉아 있던 한 여성이 짜증이 난 목소리를 터트렸다.

"저번에는 온종일 화창하다고 하더니 망할. 비가 쏟아져서 죽을 뻔했다고."

"저게 뭔가?"

하벨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춰 페트리오에게 물었다.

"일기 예보입니다. 밖에서는 당연하되, 흔한 일이죠."

페트리오가 언급한 '밖'이라는 건 티에라 가문 밖이라는 사실을 하벨은 바로 눈치챘다.

'하긴. 자연의 존재에 가까운 정령들이 있는데 뭐 하러 일기 예보를 들을까?'

당연한 소리였다.

정령들은 자연 그 자체의 존재들이고, 일기 예보는 사람이 날씨를 맞히는 행동에 불과하니 누가 더 정확하겠는가.

"…아."

카운터에 앉아 있던 여성은 곧 자신을 바라보는 두 남자를 보며 자신의 입을 가렸다.

순간, 정확도가 떨어지는 일기 예보에 열이 받아버리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이제 들어가시지요."

'한가한 건가, 아니면 급한 건가.'

가게 분위기를 살피던 하벨은 의문을 느꼈다.

"아라야. 그거 먹는 거 아니야."

하벨은 페트리오를 따라가려다 말고 라디오에 매달려 '아그작' 소리를 내는 아라에게 따끔히 말했다.

[삐이?]

아라는 여전히 '아그작'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 닮아 저러는지.'

하벨은 속으로 혀를 찼다.

* * *

탁.

남자는 하벨과 페트리오를 보더니 대뜸 코팅된 종이를 건넸다.

"우선 가격표부터 보시죠, 손님. 요새 하도 뒷말이 많아 의뢰 별 가격대를 정확하게 확인하는 걸 권장합니다. 물론, 의뢰 시 난이도에 따라 가격이 변동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페트리오는 종이를 받았고, 하벨은 남자의 말에 잠깐 눈을 깜박거렸다.

이곳이 뒷세계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물건을 사러 왔다고 착각할 정도로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렇구나. 여기에서 사람의 목숨은 하나의 물건인 셈인가?'

하벨은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자 페트리오가 건넨 종이를 받았다.

"그럼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남자는 잠깐 자리를 비켰다.

의뢰 종류는 꽤 다양했다.

A. 일반 암살 의뢰 – 기본금 5천 델부터.

B. 일반 조사 의뢰 – 기본금 천 델부터.

C. 수집 의뢰(사람이든 물건이든 찾아서 데려와 드립니다.) ― 기본금 3천 델부터.

제일 인기 있는 목록인지 가장 위에 있었고, 고급 암살과 조사 의뢰나 기타 의뢰 역시 존재했다.

'천 델이면 얼마지?'

용왕일 때도 신하들이 알아서 해준 터라 하벨은 돈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하벨은 잠깐 기다렸다.

분명 자신은 몰라도 하벨 티에라는 알 테니까.

"이걸 하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페트리오는 하벨의 고민이 길어지자 슬쩍 B를 가리켰다.

'천만 원 정도라고?'

하벨이 미간을 찌푸렸다.

천만 원은 또 얼마인가.

"B."

하벨은 남자가 차를 들고 돌아오자 '에라, 모르겠다'라는 마음으로 의뢰를 언급했다.

하벨의 고민 시간이 생각보다 짧았는지 몰라도 남자는 완벽한 미소를 지으며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

"참고로 일반 조사 의뢰이기에 귀족 나리나 관리 나리들은 안 됩니다. 이 점 동의하십니까?"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적은 암살자이니 당연히 둘 다 아닐 테지.

하벨의 고갯짓에 페트리오는 검은 달의 흔적이 가득 묻은 옷자락을 건넸다.

"오. 흔적을 쫓을 물건이 있으면 속도는 더 빨라질 겁니다. 몸에 떨어진 지 얼마나 됐습니까?"

"하루 됐네. 아직 옷에 묻은 흔적들이 많을 터. 뭐든 쫓아주게."

페트리오의 대답에 남자는 장갑을 끼고는 옷자락을 쥐어 냄새를 맡았다.

냄새를 느껴보려는 듯 잠깐 감긴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다 눈을 뜬 남자의 눈에 당황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한순간이었기에 남자는 곧 활짝 웃었다.

'…당황했다고?'

하벨은 그 순간을 포착했다.

"예. 아직 냄새가 싱싱하게 묻어 있습니다. 이 냄새를 마법을 통해 흔적으로 바꾸려면 하루 정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계약서부터 들고 오겠습니다."

'종이라면 저기에 있는데 계약서를 들고 온다?'

자연스럽되,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모습에 하벨은 미소를 흘렸다.

왜 냄새를 맡자 당황하겠는가.

왜 계약서를 들고 오겠다며 자리를 뜨겠는가.

"…너희구나."

하벨의 잔잔한 목소리에 페트리오도 남자도 잠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상할 정도로 거대한 압박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찾았다, 검은 달.'

이렇게 빨리 찾을 줄 몰랐지만, 이놈들이었다.

하벨의 목소리에 남자의 눈가가 잠깐 떨렸다.

하지만 그는 웃었다.

"무얼 말씀하시는 겁니까?"

"몰라?"

"예. 저는 손님께서 말씀하시는 걸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하벨은 소맷자락을 걷어 올렸다.

"일단 맞고 시작하자. 맞다 보면 기억이 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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