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이영] 전남편의 귀환
1화 수상한 남편
“이혼해요.”
도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를 향해 있던 주완의 고개가 반대로 돌아갔다. 도희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는 그의 얼굴을 집요하게 훑었다.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을, 아니 도희를 짓눌렀다. 거실 벽면 정중앙에 크게 걸려 있는 두 사람의 행복한 웨딩 사진이 불과 일 년 만에 끝나 버린 결혼 생활을 비웃는 듯 보였다.
“이럴 거면 이혼해요.”
도희가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이 말을 하기까지, 수천 번 수만 번 고민했다. 결코 쉬운 말이 아니었기에 도희는 울지 않으려고 부릅뜬 눈으로 주완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낱낱이 살폈다. 잠시 멈춰 있던 주완이 뒤돌아섰다. 그는 곧 덤덤하게 마른세수를 하더니 숨을 고르고 말했다.
“말하기 어려웠는데. 고마워.”
도희의 심장이 쿵, 곤두박질쳤다. 그간 미루고 미뤄 왔던 남편의 변해 버린 진심을 들어 버린 순간이었다. 참아 왔던 분노가 한순간에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하! 그렇게 이혼하고 싶었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끝까지 착한 척하고 싶었나?”
“그럴 리가. 이미 못된 놈인데.”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중얼거리는 주완은 뭔가 사연이 있는 사람처럼 처량해 보였다. 도희는 그런 주완의 ‘척’에 질려 버렸다. 다정한 척, 위하는 척, 속내를 꼭꼭 숨기고 드러내지 않더니. 이혼을 말하는 이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이 상처받은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저 희망 고문에 여태 속았지. 도희는 더 이상 그의 연기에 속아 줄 마음이 없었다.
“다신……, 다신 내 인생에 나타나지 말아요.”
도희는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슬픔을 꾸역꾸역 억누르며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이혼을 말한 건 도희였지만, 마치 이혼을 당한 기분이었다.
주완은 낮게 한숨을 뱉었다. 슬픔에 일그러진 도희를 응시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침착했다.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아 숨쉬기조차 버거운 그녀와 달리 여유가 엿보이는 그의 태도가 도희에게 더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최대한 빨리 서류 정리할게.”
고작 그게, 주완의 마지막 대답이었다.
그동안 뭐 때문에 그토록 나를 갉아 가며 노력했을까.
도희는 자신을 두고 집을 나가는 주완의 뒷모습을 보며, 점차 변해 가던 그를 떠올렸다.
* * *
결혼식을 올린 지 6개월.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어느 시점부터 주완은 일을 핑계로 도희와 서서히 멀어졌다.
둘도 없이 가깝게 느껴지던 주완이, 어느새 남보다 더 대하기 어려워졌다. 자연스레 도희가 눈치 보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일 땐 말을 시키지 않았고, 피곤해 보일 땐 잠을 자게 두었다. 처음엔 그게 주완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전쟁터 같은 회사에서 신경을 곤두세웠을 그를 쉬게 해 주고 싶었다.
그 배려의 끝이 설마 ‘이혼’일 거라곤 상상치도 못했지만.
드라마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도희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집 안의 공기는 싸늘했다. 도희는 어둠이 익숙한 듯 구두를 하나씩 벗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깜짝…… 아.”
분명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불을 켜자마자 거실 소파에 힘없이 늘어져 있는 주완이 보였다. 주완은 눈부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눈두덩이 위로 성의 없이 한쪽 팔을 얹었다. 정확히 열흘 만에 보는 아내의 얼굴은 볼 생각 없다는 듯이.
도희는 소파에 누워 있는 주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곤 그를 내려다보며 조심스레, 그러나 딱딱한 말투로 물었다.
“언제 왔어요?”
“좀 전에.”
마지막 통화하고 열흘 만이었다. 언제 들어올지 모르겠다고, 바쁘단 핑계만 남기고 전화를 툭 끊어 버린 그는 그사이 연락도 받지 않더니 꼬박 열흘 만에 집에 들어왔다. 그래 놓고 눈인사 한번 없이 누워 있다니. 부정적인 말들이 자꾸 목까지 차올랐다. 열흘간 연락 한 통 해 줄 수 없을 만큼 바빴는지, 뭐 때문에 그렇게 바빴는지 다그치고 싶었다.
하지만 도희는 또다시 심호흡을 했다.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서운했지만, 싸우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도희는 애써 상냥한 말투로 물었다.
“많이 바빴어요?”
“응.”
도희의 복잡한 심경과 달리 간단한 대답이 떨어졌다.
“피곤한가 봐요.”
주완은 대답할 기운조차 없는지 말이 없었다.
‘그래, 숨 막힐 만큼 바빴나 보지.’
늘어지듯 소파에 누워 있는 주완을 보며 도희는 어느덧 안쓰러운 마음을 품었다. 잠시간 지친 기색이 여력한 그를 보고 있자니 서운함은 뒤로 밀려나고, ‘얼마나 피곤했으면 저럴까.’, 하는 이해가 스스로를 누그러트렸다.
“보고 싶었어요. 얼굴 좀 봐요.”
도희의 사랑은 그랬다. 자신의 기분보단 언제나 주완의 기분이나 몸 상태가 먼저였다. 도희는 상대를 끊임없이 살피는 것을 사랑이라고 여겼다.
도희의 뜬금없는 고백에 주완이 상체를 느릿하게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에 도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나도 보고 싶었어.”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이게 원하는 대답이었나?
분명 그의 관심을 원했고, 듣고 싶은 대답이었을 텐데. 주완의 딱딱한 대답을 듣는 순간 도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뒤로 미뤄 뒀다고 생각했던 서운함은 다시금 그의 사랑을 의심하는 데 쓰였다. 초췌하고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뱉는 주완의 대답은 예전처럼 도희를 달뜨게 하지 않았다.
결혼한 지 고작 육 개월.
도희는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바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도희는 주변에 많은 조언을 구했다. 주로 결혼 후 변했다고 느낀 남자에 관한 얘기였다. 일하는 바닥이 바닥이니만큼 도희는 믿을 만한 몇몇에게만 이를 물었는데, 반응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그런 느낌이 들 땐 오히려 다그치지 않고 내버려 둬야 빨리 제자리를 찾는다는 사람도 있었고, 일이 바쁘면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가 모르고 저지르는 실수일 수도 있으니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놔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도희는 삼 개월 동안 많은 시도를 해 봤다. 신경을 끈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고, 애교를 부리기도, 무슨 일이 있냐며 말로 은근슬쩍 떠보기도 했다. 모든 게 며칠을 끙끙 앓다가 고민 끝에 한 행동이었는데, 주완은 그 노력을 묵살해 버리기라도 하듯 모두 귀찮은 태도로 일관했다. 물론 촬영장에 밥차나 커피를 보내거나 이따금 도희를 챙기는 행동을 하긴 했지만, 단둘이 있을 때 확연히 다른 그의 행동이 신경 쓰였다.
다들 결혼하면 변한다던데. 이게 바로 결혼한 남자의 실체인가.
쓸쓸한 생각을 하며 빈집에 들어온 도희는 불을 켜자마자 거실 한가운데 걸려 있는 결혼사진을 말없이 응시했다. 몸매 굴곡이 잘 드러나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검은색 턱시도를 차려입은 그와 마주 보고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나랑 결혼하자.’
‘싫어요.’
‘뭐?’
‘내 처지 알잖아요. 내 직업, 우리 엄마…… 당신한테 피해만 갈 거예요.’
‘피해 안 가. 안 오게 할게. 믿어 봐.’
도희는 처음 그에게 청혼받았던 일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곤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거실 한가운데 서서 주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느덧 시간은 새벽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응, 어디예요?”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그가 전화를 받았다. 도희는 평소와 다름없이 주의를 기울이며 물었다.
-하, 도희야.
그런데,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건 그의 짜증스러운 한숨이었다.
“……네.”
-당분간 바쁠 거라고 했잖아.
“아직도 회사라고요?”
도희는 자신의 질문이 의심처럼 들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물었다. 점점 도희 역시 인내력에 한계가 오고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싸움을 피하고 싶었지만, 전화를 받자마자 짜증부터 내는 주완에게 굳이 친절하게 질문하고 싶진 않았다.
-어. 회의 들어가야 해. 끊을게.
질문이 날카로워서였을까. 주완은 더는 통화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다는 듯 짧은 말을 뱉곤 곧장 전화를 끊었다.
도희는 그의 무심한 음성을 듣곤 더욱 괴로워졌다. 문제가 있다면 얘길 해 주면 좋을 텐데. 그는 도희와 어떤 얘기도 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도희와 서먹해진 관계를 풀려고 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도희가 서운함을 티 내며 그에게 멀어진다고 한들 관심조차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뭐라도 해야겠다.’
주완의 그런 태도는 도희의 일에 지장을 주었다. 웃으며 해야 하는 광고 촬영도 잘 나오지 않고, 촬영 중 대사를 틀리거나 한번 터진 울음이 잘 멈추지 않는 날도 생겼다. 연예계 생활을 시작한 열아홉부터 지금까지, 실수라곤 거의 하지 않는 도희에게 주완의 방해는 상당히 큰일이었다.
도희는 다음 날, 오랜만에 회사로 주완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 * *
주완은 가끔 도희가 말없이 회사로 찾아오는 걸 좋아했다. 다른 일정이 있더라도 주완은 자신을 찾아오는 도희를 항상 우선시했고, 도희도 자신의 방문을 기뻐하는 주완을 보는 게 좋았다. 도희는 일에 방해되지 않게끔 간간이 그를 찾아가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부엌을 엉망으로 만든 도희가 유일하게 깔끔한 도시락을 닫으며 활짝 미소 지었다. 도희는 주완의 점심이 되어줄 수제 도시락을 보며 뿌듯해했다. 맨 위 과일까지 4단으로 된 도시락은 꽤 무게가 나갔지만, 도희는 가녀린 한 손으로 도시락을 가뿐히 들었다. 전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도희의 머릿속은 오직 도시락을 받고 좋아할 주완의 얼굴로 가득 차 있었다.
회사에 들어서자마자 도희를 향한 수군거림이 점차 커졌다. 모자와 마스크로 가린다고 가렸지만, 그녀의 아우라를 숨길 순 없었는지 도희가 주목받는 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희는 빠르게 걸어가 로비에 살짝 얼굴을 보였다. 직원들은 놀라면서도 당연하다는 듯 출입증을 내밀었다. 이미 여러 차례 있던 일이라 출입증을 내미는 직원의 손도 익숙했다. 손쉽게 출입을 허락받은 도희는 직원에게 공손한 묵례를 한 뒤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청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입을 벌린 채 넋 나간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는 직원들을 뒤로한 채 도희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어?”
그때, 엘리베이터 앞에서 등지고 서 있던 보안 직원 한 명이 도희의 얼굴을 보자마자 소리를 냈다. 도희는 그가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줄 알고 황급히 열림 버튼을 눌러 주었지만, 직원은 도희를 흘긋거리며 급히 어디론가 무전을 보내며 몸을 틀었다.
“……?”
그대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이상하긴 했지만 대수롭게 여길 만한 일도 아니었다. 도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본부장실이 있는 꼭대기 층을 눌렀다.
도시락을 들고 가는 건 처음이라 도희는 잔뜩 긴장되었다. 손에 들린 도시락을 다소곳이 두 손으로 꼭 쥐었다. 기뻐할 주완의 얼굴을 상상하니 흐뭇하게 미소 지어지기도 했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가 되기도 했다. 층수가 바뀔 때마다 도희의 심장이 기대감과 긴장감에 쿵쿵 뛰었다.
문이 열렸을 때 바로 앞에 있던 비서 두 명이 몸을 일으켰다. 두 비서는 도희를 보자마자 곤혹스러운 얼굴로 어설프게 고개 숙였다. 어색한 기류를 눈치채지 못한 도희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다가가자, 두 사람이 서로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뭐지?’
그제야 도희는 이상한 낌새를 감지했다. 도희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봤던 직원과 비서의 태도를 수상하게 여기며 그들에게 물었다.
“들어가도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