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검은 탑과 두 기사
* * *
"여기가 아니잖아요!!"
"난들 아나! 거기가 여기 같고 여기가 거기 같은데!!!!"
"아이씨!"
참지 못한 남자는 검을 집어던지며 씩씩댔지만 손에 검버섯이 있는 노인은 혀를 차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니! 톤 왕국 방향도 제대로 모르면서 왜 앞장선다고 했어요!!!!"
"네놈이라고는 길을 잘 아나 보지!? 그럼 먼저 가!"
"..... 그건 아닌데..! 그래도 헬하임 제국 사람이라면서요!!!"
"십오 년 전에 감옥에 갇혔는데 인마!"
"아니 왜 때려요!!!"
돌을 주워 자신의 머리를 노인이 내려치자 남자는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쭈!? 으디 어른을 보는데 눈을 그렇게 떠!"
"내 맘이에요!"
"네놈 부모는 그리 가르쳤냐!?"
"부모 없어! 그리고 그쪽은 뭐 잘 가르쳐서 그 모양입니까!?"
"이 자식이 말에 따박따박 대꾸를 해! 안 계시면 더 잘해야지!"
"당신은 왜 그 모양인데!"
"이이이이익!!!"
두 사람이 계속해서 티격태격하며 숲을 걷자 주변에서 갑자기 살기가 느껴졌다.
"숨으세요."
".... 괜찮나 혼자서?"
"그럼 같이 싸워주시게?"
"... 그건 못하지 나는 자네랑 달리 평범한 사람이라 말이지.."
"옆에서 그럼 자꾸 말 걸지 말고 가요!"
"고생하게 칠러웨이."
"이럴 때만...!"
칠러웨이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거대한 곰의 팔을 막아내며 검을 들어 올렸고 그 모습을 노인, 구레드 드 펠테로는 풀숲에 숨어 지켜봤다.
"자네."
"말 걸지 마요!"
"뭐 좀 알려줄까?"
"뭐요!"
"그 녀석들 보아하니 무릎이 약점 같은데 나 믿어보고 한 번 걷어차보게."
"그게 쉬운 건 줄 압니까!"
빠각!
곰이 거대한 몸을 들어 덮치려 하자 칠러웨이는 빠르게 뛰어가 무릎을 걷어찼다.
그워어어어!
거대한 소리를 내며 곰의 몸이 중심을 잃었고 칠러웨이는 그 틈을 타 두개골의 가운데에 검을 박아 넣었다.
"후우.. 후우..."
이제는 이가 빠져버린 검을 옆으로 집어던진 칠러웨이는 구레드 드 펠테로에게 엄지를 치켜들었고 그 또한 칠러웨이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고생했네."
"하아.... 이놈의 길.. 진짜 생각 안 나는 겁니까?"
"....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네, 아마 내가 알던 길은 숲에 뒤덮였거나.. 뭐.. 없어진 거겠지."
"제길.. 그럼 어쩔 수 없네요, 구레드 드 펠테로 일단은 우리 강 쪽으로 걸어가 봐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마을 하나라도 나오겠죠.."
"구레드면 됐네,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동료끼리 이름 전부 부르는 것 아니야."
"이럴 때만.. 방금 곰 잡은 거 보고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붙으시는 거죠?"
"큼..."
칠러웨이는 구레드를 이끌고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고 혹여나 만날 헬하임 제국의 병사들을 생각해 허리춤에 찬 단검에 손을 올렸다.
"거 막 던지지 말고."
"제가 구레드님인줄 압니까?"
"실전 경험이 많은가?"
"어느 정도는요, 칠라렌 성국의 내전..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도 참가했었구요."
"성국이?"
"예."
구레드는 칠러웨이의 말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고 칠러웨이는 왜 그러냐는 듯 그를 바라봤다.
"단합력 하나로 먹고 살아온 칠라렌 성국에서 내전이 일어나다니... 나 참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을 다 겪는구만."
"... 뭐.. 내전이라기보다는 한 쪽의 일방적인 학살.. 비슷한 겁니다, 남은 사람들은 톤 왕국으로 도망쳤구요."
"자네 또한?"
"예."
"그 일이 일어난 이유가 궁금해지는군."
"성녀가 네 명이나 더 나타나고 나서 원래 있던 성녀의 힘이 약화됐거든요."
".... 네 명?"
"예."
구레드가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껌벅이며 자신을 바라보자 칠러웨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생각나시는 거 있으십니까?"
"칠라렌 성국의 성녀는 대외적으로는 한 명으로 알려져 있지 맞나?"
"예 과거에는요."
"하지만 성녀는 본래 여럿이 있어도 되는 존재야, 열이 됐던 스물이 됐던..."
"예?"
구레드의 입에서 나온 말에 칠러웨이가 놀란 듯 그의 어깨를 붙잡자 구레드는 그의 악력에 어깨가 아픈 듯 다시 칠러웨이의 머리를 내리쳤다.
"아악!!"
"뼈 다 부러질 뻔했다! 그놈의 힘 조절은 어떻게 안되는 거냐?"
"... 죄송합니다."
"쯧쯧.. 젊은 것들은 이래서 안 돼."
"그래서 얘기는 안 해주실 겁니까?"
".... 내가 알고 있는 게 잘못된 걸 수도 있지만 칠라렌 성국은 교황과 성녀, 추기경, 그리고 나머지 귀족들로 권력이 배분되어 있는 구조일세."
"음... 라티에니 교황과 다섯 성녀... 그리고 리에티... 맞는 것 같네요."
"다른 나라들은 여러 명의 공작과 중앙집권의 왕이 권력을 나눠가지는 반면 특이한 구조이긴 하지."
구레드는 더 이상 걷기 힘든 듯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고 칠러웨이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불을 지폈다.
"하지만 성국은 신앙심이 깊어서 성녀의 권력이 특히나 강하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성녀일수록 그 권력은 극대화되지."
"성국은 과거에는 약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신의 힘을 받는 성녀가 약하면 약할수록 사람들의 믿음도 약해지니까."
"...."
"여기서 문제 뛰어난 성녀가 하나라면 어떨 것 같나?"
"... 성녀 위주로 나라가 돌아가지 않을까요?"
"그렇지 나 때만 해도 성녀가 능력을 가지지 못해 힘이 없었지만... 나라가 굴러갈 정도라면 자네의 시대에 이르러 제대로 된 성녀들이 나온 모양이구만."
구레드는 칠러웨이가 건네는 마른 음식을 씹으며 음산한 숲을 둘러봤다.
"믿음은 성국의 힘이야.. 그들은 사람들과 팔라딘, 신관들의 믿음이 없다면 나라를 제대로 굴리지 못해."
"그렇겠죠."
"성국은 과거부터 생각했지, 그 믿음이 약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교황..? 귀족..? 추기경들..? 과연 누구의 힘을 키워야 할까."
"셋 다 아니겠죠."
"그래, 기적의 힘을 행하는 성녀를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해 하나의 힘이 약하다면 여럿이면 되는 것 아닌가?"
"....."
"믿음이 필요한.. 그러니까 성녀가 많이 필요한 시대가 또 있지."
"무슨..."
"평화가 아닌 혼돈이 찾아올 때."
칠러웨이가 자신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고 얼굴에 주름을 만들자 구레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교황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야겠지.. 라티에니가 어떤 교황인지 알고 있나?"
"... 모릅니다 자세히는.."
"그는 평화를 가장 중요시 여겼던 사람이야, 어느 상황이더라도 힘의 균형을 맞추고 유지하는데 힘써왔지.. 과거에 그가 성녀를 찾지 않았던 이유는 기적의 힘이 약했던 이유도 있지만 그다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필요 없다는 말은.."
칠러웨이는 과거 칠라렌 성국은 약했지만 엘라의 노력으로 인해 성국의 힘이 조금은 돌아왔었다는 아빌론의 말을 떠올렸다.
"성국은 약해지던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는 거야 성국은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중립이고 키로스 신의 가호 아래 탄생한 나라를 먼저 선제공격할 멍청한 나라는 지금 존재하지 않아."
".... 그래도 혹시 모르잖습니까 라티에니가..."
"힘을 위해 성녀들을 들였다? 말도 안 되는 얘기야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는 사람이 죽어나가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인물이었으니까."
칠러웨이가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듯 구레드는 고개를 내저었고 칠러웨이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그래 라티에니는 무언가 알고 있었겠지, 왜냐면 과거 로드웰의 악행을 보고 있던 우리에게 일만이나 되는 신관과 팔라딘을 비밀리에 파견해 줬으니까."
"..... 우리라는 말은.."
"감옥의 위층에서 봤겠지? 가이덴 폴 겐 그 미친놈은 나와 함께하던 친우였네."
"우리가 전멸하고 하나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었겠지, 로드웰이 긴 시간을 준비할 동안 그도 준비할 것들이 많이 필요했을 거야."
"결국 황제 로드웰이... 무언가 일으킨다는 말입니까?"
"나도 모르지!"
구레드가 씨익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자 칠러웨이는 화가 치밀었지만 한숨을 쉬며 화를 삭였다.
"모든 건 라티에니만 알뿐이야! 그를 만나야겠군."
"죽었습니다."
"뭐? 다시 얘기해 봐!"
칠러웨이의 말에 구레드는 먹던 육포를 떨어뜨리고 칠러웨이의 멱살을 잡았지만 칠러웨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추기경으로 있던 리에티의 손에 목이 떨어졌다 들었습니다."
"제길! 그를 지키던 팔라딘들은 도대체 무엇을 한 거야!"
".... 첫 번째 성녀인 엘라에게 힘을 실어준다 하여 많은 팔라딘들을 자신의 수하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이런... 이거 일이 귀찮아졌구만... 성녀들은?"
"후우..."
구레드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묻자 칠러웨이는 한숨을 쉬었다.
"다섯 번째 성녀인 아르웬은 톤 왕국에 무사히 대피했지만 나머지는..."
"제길, 십오 년 만에 감옥에서 나와 로드웰 그 녀석을 박살 내줄 생각에 좋아하고 있었는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구만."
"어디 가십니까?"
"따라오게."
"아니 길도 모르는 사람이 어딜 가냐는 겁니다!"
칠러웨이의 외침에 씩씩대던 구레드는 다시 돌을 집어 들었고 칠러웨이는 머리를 감싸 쥐고 손을 흔들었다.
"아니 잠깐만! 어쩌실 생각인지는 얘기해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지금쯤이면 다음 세대의 녀석이 나왔을 거야."
"다음 세대..?"
"그래 다음 세대!"
"그러니까 누구 말하는 겁니까!"
"용사라고 들어봤나?"
"장난하시는 거 아니죠?"
"뭐?"
"용사.. 그거 이세계식 농담 아니었습니까?"
"이세계식 농담?"
"아.. 아닙니다.."
칠러웨이가 자신을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구레드는 다시 한번 열이 확 올라왔지만 화를 가라앉히고 칠러웨이의 허리춤에 매달려있던 지도를 뺏어들고 바닥에 펼쳤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여기.. 여기 보게."
".... 뭐요?"
"여기 보라고!!"
"...."
칠러웨이가 말없이 숲 지대를 보며 실눈을 뜨자 구레드는 답답한 듯 가슴을 두어 번 치더니 그의 뒤통수를 갈겼다.
"말은 그만하고 출발하자고."
".....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