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자유를 갈망하는 새는 날지 못한다
* * *
"엘로나."
"응."
".... 말투가 많이 바뀌셨네요?"
"뭐..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왜?"
"저.. 떨어지시면 안 됩니까?"
불편한 표정을 한 칠러웨이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가고 있는 엘로나를 바라봤지만 전과 같이 후드를 뒤집어쓴 엘로나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페르온 혹시 엘로나가 여자라는 것.. 알고 있었습니까?"
"대충은요, 이름은 처음 알았지만?"
능글맞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페르온을 보며 칠러웨이는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지금 페르온을 때린다고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 않았기에 한숨을 내쉬고 숲속을 조용히 가로질렀다.
"잠깐."
갑자기 손을 번쩍 든 엘로나의 신호에 맞추어 페르온과 칠러웨이는 검자루를 쥐었고 엘로라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무언가를 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원래 숲속은 조용하지 않습니까?"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가장 시끄러운 게 숲속이야.. 동물의 잔 울음소리와 기어 다니는 벌레들.. 하지만 들어봐 바람 소리를 타고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칠러웨이는 엘로나의 말이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하프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청력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그렇다는 건 무언가 이 근처에 있다는 건가요?"
".... 아마.. 페르온 잠시 주변을 정찰해 주겠어?"
"물론입니다."
페르온이 조심스럽게 허리까지 자라난 풀들을 헤치며 사라지자 엘로나는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
엘로나가 나무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거미들이 거미줄을 타고 내려오듯 순식간에 내려온 적들은 엘로나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푹.. 푸욱..
"끄윽!"
"칠러웨이!"
하지만 칠러웨이는 자신의 온몸으로 엘로나를 감싸듯 막아주었고 검들은 자비 없이 그의 몸을 후벼파고 들어왔다.
"엘로나! 처리하세요!"
칠러웨이의 외침에 엘로나는 화살촉을 그들의 목에 꽂아 넣었고 칠러웨이 또한 몸에 박힌 검들을 뽑아 무지막지한 힘으로 그들의 머리통에 검을 박아 넣었다.
"괜찮아!?"
"예예.. 대충은."
아무리 죽지 않는 몸이라 해도 고통은 그의 머릿속에 똑똑히 박혀들어왔고 칠러웨이는 심호흡을 하며 참아냈다.
"괜찮으십니까!?"
상황이 모두 끝나고 저 멀리에서 달려온 페르온은 두 사람의 몸을 살폈고 온몸에 구멍이 뚫린 칠러웨이를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괜찮아요."
"이게 무슨... 이 정도면 치명상입니다!"
"침 바르면 다 낫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여기 어디쯤에 아르웬이 있을 겁니다."
"잠깐만! 지혈이라도...!"
페르온이 칠러웨이의 어깨를 잡았지만 마치 흐르는 피가 제자리를 찾아가듯 칠러웨이의 몸속으로 들어가자 그는 자리에 멈춰 섰다.
"하핫.... 데브라님과 제 예상이 맞았군요."
".... 저도 제가 뭔지 모르는데 예상한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정말 당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네요."
페르온은 칠러웨이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고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빠르게 길을 따라가는 칠러웨이에게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없었다.
"페르온."
"... 예."
"뭘 알던지 그 성녀가 먼저야."
"저분에게는 그렇겠죠."
엘로나의 말에 페르온은 동의하며 칠러웨이의 뒤를 따라 걸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오는 공터 앞에 쭈구려 앉은 칠러웨이를 볼 수 있었다.
"데브라님의 말이 진짜네요."
"자유기사로 몇십 년을 살았는데 이 정도는 기본입니다."
칠러웨이는 조용히 고개를 들고 공터를 살폈다, 공터의 한가운데는 '캉'이라 불렸던 남자들이 기절한 아르웬의 주위로 앉아있었고 일황자는 입맛을 다시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저년만 데리고 돌아가면 황제 자리는 내 것에 가깝겠지."
"예."
"롤란, 길의 눈은 어떤가?"
"좋지 않습니다 꽤나 깊게 박혔어요, 그나마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녀석이라 저렇게 멀쩡히 앉아있는 겁니다."
"쯔쯧.. 돌아가면 포상을 내릴 테니 몸들 잘 추스르고 있거라."
일황자는 그 말을 끝으로 푹신한 천을 깔고 눈을 감았고 그의 기사들은 뜬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불이 꺼지지 않게 계속해서 나무 장작을 넣었다.
"어떻게 할까요 엘로나?"
"나한테 물어봤자..."
"페르온님은?"
"일단, 칠러웨이님이 캉들을 맡으셔야 할 겁니다.. 저는 저들의 갑옷을 뚫을 만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당신의 힘이라면 가능할 겁니다."
"예."
"저는 최대한 호위 기사들의 시선을 끌며 막을 테니 아르웬님은 엘로나 당신이 구해주세요."
"그래."
"빠르게 끝내는 게 관건입니다, 구해낸 후에는 바로 톤 왕국으로 넘어갈 겁니다."
페르온이 수풀 속을 빠르게 뛰쳐나가자 그에 맞춰 엘로나는 화살을 빠르게 기사들의 머리에 박아 넣었다.
"적이다!"
롤란이라 불린 캉의 기사단장은 순식간에 갑옷을 챙겨 입고 빠르게 뛰어나와 페르온을 막으려 했지만 어느새 눈앞에 나타나 있는 칠러웨이의 주먹에 깜짝 놀라 겨우겨우 건틀릿을 찬 두 팔을 들어 올려 막을 수 있었다.
캉!
"그 갑옷에서 나는 소리 보니까 캉 맞네!"
".... 죽으러 쫓아왔는가?"
"그때처럼은 당하지 않을 거야."
칠러웨이는 오른쪽에서 덮치듯 달려드는 길을 밀어낸 뒤 롤란의 무릎 관절을 발로 찼다.
"큭!"
까앙!
롤란의 다리가 무거운 갑옷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리자 칠러웨이는 검으로 투구의 옆면을 때렸고 롤란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고막이 터져나가 일어서지 못하고 풀썩 주저앉았다.
"길! 막아라!"
길이라 불린 남자는 거대한 덩치로 칠러웨이를 압박하려 덮쳤지만 이미 당해봤던 방법이라 그런지 능숙하게 피해내고는 투구가 벗겨진 길의 머리를 걷어찼다.
"고통은 못 느껴도 기절은 하나보지?"
정확하게 칠러웨이의 발은 길의 관자놀이에 타격을 입혔고 길은 휘청거리더니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럼 아르웬 성녀는 우리가 데려간다."
"잠깐!"
"...."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칠러웨이는 고개를 돌렸고 일황자 파울로가 그를 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성녀를 톤으로 데려가면 전쟁이다."
"헬하임은 안 그런가?"
"나는 달라!"
"다르기는! 헬하임의 힘을 키우려 성녀를 앞에 내세우는 작전이잖아!"
"나는 그저 황제의 자리를 가지려 성녀를 데려가는 거다! 톤 왕국으로 데려간다면 가장 크게 후회할 건 네 녀석이다!"
"빨리 와! 칠러웨이!"
"먼저 가세요!"
파울로의 말에 칠러웨이는 발걸음을 멈췄고 어느새 아르웬을 등에 업고 저 멀리 가있는 엘로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더 얘기해 봐."
"그래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야지 그치?"
파울로는 칠러웨이가 두렵기도 했지만 자신의 검을 내려두고 그를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걸 표현했다.
"톤 왕국의 목표가 뭔지 알아? 정확히는 브라이언 공작의 목표."
".... 몰라."
"나라의 부흥이다, 그 녀석은 충신 중에 충신이지 그 녀석은 왕을 신으로 받들고 모시고 있어 절대명령에 거역하지 않지... 그런 미치광이들이 가장 원하는 게 뭔지 아나?"
"...."
"전쟁이야 나라를 더 크게 키우기 위해서는 성녀의 힘이 필요하지 겉으로는 없어도 되는 척하지만 모두 술수에 불과해 그저 성녀는 '도구'로 이용될 뿐이다."
조용히 파울로의 말을 듣던 칠러웨이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당신은 다른가? 아르웬을 '도구'로써 보지 않는다는 점이?"
".... 뭐?"
"똑같지 않나?"
".... 똑같냐고 물었나?
파울로는 조용히 생각을 하더니 입가를 움직이며 피식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어찌 됐던 성녀는 신의 도구로 만들어지지 않았나? 인간들과 자신을 연결하는 존재로 그들을 만들었지."
"...."
"그 신이 내린 도구를 이용하는 게 잘못된 게 아니잖아..? 어쩌면 원래 그런 운명이었을 수도? 크큽..."
결국 파울로가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자 칠러웨이는 조용히 다가가 그의 뒷머리를 잡았다.
쩌억!
"끄으으윽!"
그대로 파울로의 머리를 바닥에 내려찍은 칠러웨이의 이마에는 핏줄이 돋아났고 그의 살기는 어느 때보다 짙게 흘러나왔다.
"야 꼴통 새끼야."
"가.. 감히...!"
"움직이지 마 머리를 박살낼거니까 그대로 잘 들어 꼴통."
"끄으윽..."
파울로가 아직까지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을 노려보자 칠러웨이는 그의 머리를 터뜨릴 듯한 힘으로 짓눌렀다.
"신이 무슨 이유로 그녀를 만들었건 개 같은 소리 하지 마."
"... 신... 성.. 모독인가...?"
"한 번만 더 내가 말할 때 얘기하면 꼴 보기 싫은 이 머리통을 박살 내 줄게."
"....."
"그러니까 입 닥치고 들어, 나는 키로스건 성국이던 모두 이골이 난 사람이야... 내게 손을 내밀어 줬던 사람은 죽었고 그 사람이 구해달라고 얘기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 중이고."
"...."
"나에게 남은 사람들을 더 이상 잃지 않기로 결정했으니까 나는 아르웬을 구한다 만약 톤 왕국에서도 너처럼 아르웬을 대한다면 분명 브라이언 공작이건 왕이던 싸울 거다."
"멍청.. 한.. 쉬운 길을 내버려 두고..."
파울로가 힘겹게 얘기하자 칠러웨이는 손에 조금 힘을 푼 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너도 그저 황제라는 자리를 얻고 싶어 하는 탐욕이 가득한 돼지 새끼일 뿐이야 그렇다면 겉으로라도 그런 척하지 않고 나와 아르웬을 반겨주는 사람에게 가는 게 맞는다고 생각이 들지 않나? 내가 나 같으면 너에게 아르웬을 넘겨주고 조용히 가겠냐는 걸 묻는 거다."
"그게... 쉬운 길...이니까 도구는... 도구로써.."
"내 말을 아직까지 이해 못 했구나 머저리 같은 자식아, 나는 너 같은 꼴통과는 달리 그녀를 도구가 아니라 제대로 된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거다."
"이... 자식이.."
"네가 황제가 되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될지 참으로 뻔해 등신아."
"으득..."
결국 파울로는 칠러웨이를 실력으로도 이기지 못하고 말로도 이기지 못하자 제 화를 이기지 못한 채 어금니 하나를 부러뜨려버렸고 입에서 피가 줄줄 세어 나왔다.
"그래... 뭐... 네 말이 모두 맞다고 하지... 하지만 후회하지 말거라 절대 브라이언은 성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
"그리고 나 또한 이 치욕을 잊지 않을 거다.. 꼭 사지를 갈라 대륙의 여기저기에 뿌릴 거다!"
"그러던가."
칠러웨이는 더 이상 싸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머리를 놓아주고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일어나!!!!! 그것 하나 지키지 못하고 바닥에 누워있어!? 심지어 내 몸에 손을 대게 해! 니들이 이러고도 기사더냐!"
"쯧쯧.."
"이이이익!"
혀를 차며 쿨하게 뒤를 돌아가는 칠러웨이를 보며 파울로는 쓰러져 있는 자신의 기사들을 걷어차며 분풀이를 했지만 차마 칠러웨이에게 검을 휘두를 용기는 없었다.
"롤란!"
".... 예."
자신을 부르는 파울로의 목소리에 롤란은 귀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몸을 일으켰고 그런 그가 마음에 드는지 파울로는 그의 가슴팍에 무언가 던졌다.
"이건..?"
"이걸 그분께 가져다드려라, 그리고 내 호위 기사들에게 전해라 모든 영지에 '톤 왕국의 거친 태도에 불만을 가져 헬하임으로 오려 했던 칠라렌 성국의 성녀가 톤 왕국으로 납치됐다.'라는 소문을 내라고."
"명 받들겠습니다."
"모든 일들은 빠르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 멍청한 동생 놈이 물을 끼얹어 불이 꺼지기 전에 활활 타도록."
"예."
롤란은 자신의 모든 갑옷을 벗어던지고 누워있던 길을 일으켰고 길 또한 정신을 차리고 롤란에게 얘기를 들은 뒤 빠르게 어디론가 달려갔다.
"후..."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파울로는 엘로나의 손에 목숨을 잃은 호위 기사의 등에 털썩 주저앉아 씨익 미소를 지었다.
"큭... 킥.. 풉... 내가 이런 꼴이라니... 그것도 자유기사 나부랭이에게.. 킥... 킥 풉... 킥..."
킥킥대는 파울로의 웃음소리는 소름 끼치게 숲에 퍼졌고 그는 칠러웨이와 아르웬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자신의 단검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그래 모두 갚아줘야지... 모든 건 이렇게 처리하고.. 아... 그래 이렇게 저렇게 해서... 음... 그래."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듯 중얼거리던 파울로의 눈빛이 갑자기 싸늘하게 바뀌었고 파르르 떨고 있는 자신의 호위 기사의 머리에 자비 없이 단검을 꽂았다.
"이렇게 일이 망가지면 안 되지.. 암.. 누가 세운 계획인데... 나만 알아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