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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화 〉 버티다가 부러지기 전에 (20/90)

〈 20화 〉 버티다가 부러지기 전에

* * *

[....]

검은 로브의 남자 사에트는 자신과 함께했던 동료의 반지를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맞군.]

"난 거짓말은 안 해."

칠러웨이의 당당한 태도에 사에트의 얼굴은 일그러지기 시작했지만 칠러웨이는 신경 쓰지 않고 이가 나간 검을 옆으로 툭 던져놓고 죽은 기사의 검을 주워들었다.

[감히..]

"감히?"

칠러웨이는 분노한 듯한 사에트를 피식 비웃고는 다가오는 구울을 단칼에 베어넘겼다.

"화나지? 나도 똑같아 내가 아는 사람이 그 녀석 때문에 키메라가 되는 걸 바로 앞에서 봤어."

[....]

"근데 지금 누가 누구보고 화를 내는 거야?"

[용서하지 못한다.]

"쯧, 공감이라고는 없는 자식."

자신들의 잘못은 생각하지도 않고 적반하장식으로 나오는 사에트를 보며 더 이상의 말은 소용이 없다고 느낀 칠러웨이는 일루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은 키메라의 발목을 잡고 병사들은 귀족들과 함께 구울들 위주로 처리한다!"

칠러웨이의 신호를 받은 일루안의 명령에 모두가 신속하게 움직였지만 구울들과 키메라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끄아아아악!"

키메라들에게 찢겨나가는 기사들의 비명소리가 숲에 울려 퍼지자 병사들은 두려운 듯 뒷걸음질 쳤지만 오히려 사에트를 노려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칠러웨이를 보며 그들은 마음을 다잡았다.

"일루안님!!"

칠러웨이의 부름에 일루안은 멍하니 사에트를 바라보고 있는 일루안의 팔을 잡아끌었다.

"리에티 정신 차려!"

"... 일루안님, 저희의 목표가 저기 있습니다."

"지금은 안되네!"

"잡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맞붙으면 아무것도 못해! 피로감과 공포감에 휩싸인 병사들이 안 보이는가! 저들은 괴물이야! 인간의 감정은 사라졌다고! 여기서 맞붙으면 백전백패네!"

"...."

하지만 일루안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리에티는 검을 뽑아들뿐 자신의 병사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리에티!!!"

"적을 눈앞에 두고 어찌 후퇴를 합니까! 기사의 명예를 위해서는 죽더라도 싸워야 합니다!"

"미친소리 하지 말게! 또 릴 왕국 사태를 만들려고 하는 건가!? 칠러웨이가 기사들과 시간을 끌고 있을 때 물러나야 하네!"

일루안의 외침에 리에티는 입술에 피가 주르륵 흐를 정도로 꽉 깨물었지만 그도 일루안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후퇴.. 합니다..."

"클라인!"

"예 일루안!"

"용병들에게 병사들과 함께 퇴로를 뚫으라 얘기하게! 내 기사들이 먼저 퇴로를 뚫고 있지만 아마 수가 적어 역부족일 거야!"

"알겠습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클라인은 병사들을 이끌고 뒤에서도 공격해오는 키메라들을 뚫어내려 달려갔다.

[.... 너희들은 모두 죽어야 한다.]

"닥쳐!"

사에티가 붉은 눈을 번쩍이며 키메라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지만 이미 잦은 전투에서 점점 늘어난 칠러웨이의 실력은 키메라들이 막아서기에는 무리였다.

[네놈...!]

"뒤로는 못 보낸다!"

"기사들은 병사들을 보호해! 키메라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라!"

칠러웨이와 함께 몇몇 기사 단장들이 명령을 내리며 상급 키메라들을 막아서고 있었지만 이미 분노에 가득 찬 사에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을 죽일 생각이었다.

"제길!"

"죽은 이들은 머리를 밟아 부활하지 못하게 막아!"

사에티의 주문에 구울들에게 죽은 기사와 병사들이 검은 안광을 내뿜으며 다시 일어나자 리에티는 당황한 듯 명령을 내렸지만 자신의 동료를 다시 죽일 수 없는 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갔다.

"제길! 땅속에서도 뭔가 나옵니다!"

"....!"

[우리가 이 숲에서 몇 십 년간 자리했던 이유를 알고 있나?]

"일루안님!!!! 퇴각을 서둘러야 합니다!"

사에티의 웃음에서 무언가를 알아챈 칠러웨이가 일루안에게 소리쳤지만 이미 땅속에서는 손이 뻗어져 나왔고 발목이 잡힌 병사들은 순식간에 땅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아직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너희 칠라렌 성국의 건방진 태도를 보니 짜증이 나서 못 참겠군.]

"얼마나 많은 시체들을 이 밑에 숨긴 거지...?"

[지금 너희들이 느끼는 고통만큼.]

칠러웨이는 징그럽게 땅속에서 기어 나오는 시체들을 보며 질려버린 듯 결국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일루안 또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후퇴하는 병력을 따라 이동했다.

"칠러웨이!!!"

"제길!"

"살려줘!!!"

자신과 함께 맞서던 기사들이 구울에게 뜯어먹히는 것을 보았지만 칠러웨이는 눈을 질끈 감고 사에티에게 등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모두 죽여.]

사에티의 말에 순식간에 키메라들이 달려나가며 버티고 있던 병사들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리에티!!!!"

".... 어찌해야.."

"어쩌긴 뭘 어째!"

칠러웨이는 말위에서 멍하니 죽어가는 기사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리에티를 끌어내리고는 그를 들쳐업고 뛰기 시작했다.

"놓거라!!"

"놓기는 뭘...! 상황 안 보여?"

"저들을 단죄해야 한다!"

"죄는 나중에 물어도 돼! 지금은 모두 사는 게 중요하지!"

칠러웨이의 말에도 리에티는 발버둥 치며 사에티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포기하게, 지휘관 권환은 내가 넘겨받도록 하지 지금은 무조건 후퇴다."

일루안도 칠러웨이의 말을 거들며 고개를 끄덕이자 리에티는 울컥하며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저 멀리 도망가는 기사들과 귀족들을 보며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꺄악!"

"....!"

"칠러웨이 멈추지 말게!"

"... 하지만.."

그 순간 에일렌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그녀가 한 구울에게 잡힌 것을 본 칠러웨이는 자리에 멈춰 섰다.

"가야 하네! 한 명을 구하려다가 모두 죽네!"

"....."

"살려줘요!!"

칠러웨이는 몸을 돌려 다시 뛰려 했지만 에일렌의 비명소리에 결국 눈을 질끈 감은 채 생각하더니 리에티를 바닥에 내려두고 그를 바라보았다.

"가."

"...."

"가라고 리에티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마."

"나는.. 나는...!"

"자기 여자조차 구하러 달려나가지 못하는 자식이.. 네 기사들과 병사부터 살려라."

리에티는 자신이 졌다는 것에 꽤나 충격을 받았는지 멍하니 칠러웨이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칠러웨이는 그런 그를 한심하게 내려다보더니 일루안을 바라봤다.

"일루안님."

"괜찮겠나?"

"이 멍청이를 데려가세요, 구해서 금방 따라붙겠습니다."

".... 멀쩡하게 보세."

"예."

일루안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칠러웨이는 검을 주워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꽤나 많은 구울들이 덤벼들었지만 능숙하게 피해내며 칠러웨이는 파커를 물려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구울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뛸 수 있습니까?"

"... 네.. 네!"

"가세요."

"....."

"얼른!"

칠러웨이의 외침에 에일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사들과 병사들이 도망치는 방향을 향해 뛰어갔다, 칠러웨이는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조금 섭섭한 기분을 느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탈출을 위한 방안을 생각했다.

"후우."

"가.. 감사합니다..!"

붙잡힌 몇몇 기사들과 병사들을 풀어준 후 칠러웨이는 달려드는 구울들의 머리를 베어내며 멀리 보이는 사에티에게 검을 던졌다.

[....!]

칠러웨이가 잘 조준해서 던졌지만 검은 빗나갔고 사에티의 귀만이 살짝 찢어져 그의 왼쪽 볼에 피가 주르륵 흘렀다.

"아깝네 그 잘나신 머리에 정확히 꽂을 수 있었는데."

[... 개 같은 자식이..]

사에티가 다시 한번 팔을 흔들자 키메라와 구울들의 시선이 칠러웨이에게로 몰렸다.

"오우.."

예상한 일인 듯 칠러웨이는 빠르게 움직이며 키메라들의 다리를 베어냈다.

'거의 다 빠져나갔나?'

그가 벌어준 잠깐의 시간은 잡혀있던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그들은 사에티가 만들어낸 구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말거라.]

"암요, 당연하죠."

자신을 비꼬듯이 칠러웨이가 고개를 까딱거리자 사에티는 볼에 흐르는 피를 슥 닦아내며 자신의 동료가 남긴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너의 원수는 내가 갚으마.]

"....!"

[죽여라!!! 사지를 찢어서 이 숲 곳곳에 뿌려두리!]

"칠러웨이.."

그가 명령을 내리는 순간 키메라 세 마리가 앞으로 쓰러지며 한 사람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아르웬!"

"돌아.... 가라니까..."

조금 화가 난 듯 아르웬은 칠러웨이를 노려봤지만 그는 어깨만 으쓱할 뿐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왜.. 말을.. 안 듣는 거야...?"

"저는 돌아간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아르웬."

"...."

칠러웨이보다 깔끔하고 능숙하게 적들을 베어내며 푸른 안광을 내뿜고 있는 아르웬의 모습에 사에티는 기분이 나쁜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 유명한 성녀 중 하나인가?]

"대답할.. 의무.. 없어..."

[그러시겠지, 잘 나신 성녀님이니까 뭐.. 상관없어 저년도 죽여서 데려와라.]

상급 키메라들이 순식간에 아르웬을 덮치며 짓뭉겠지만 그녀의 신체적인 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크에에에엑!

"비.. 켜!"

"훠우.."

키메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튕겨낸 아르웬은 공중으로 뛰어올라 사에티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사에티는 능숙하게 검을 피해내고는 아르웬의 배에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커억!"

아르웬의 허리가 젖혀지며 그녀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지만 사에티는 그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비웃더니 이어서 그녀를 걷어찼다.

"하아.."

겨우 자리에서 일어선 아르웬은 비틀대며 검을 휘둘렀지만 이미 계속된 전투로 지쳐버린 아르웬의 몸은 정신이 아니었다.

[겨우! 너 같은 잡것이 나를 죽이겠다고!]

"끄으윽.."

"그만해 인마."

[.... 어느새..!]

그녀를 계속해서 걷어차던 사에티는 순식간에 다가와 검을 휘두르는 칠러웨이에 놀란 듯 뒷걸음질 쳤다.

"이 새끼가.."

[....]

칠러웨이는 사에티를 보며 당장이라도 벨 기세였지만 자신의 옆에 쓰러져서 눈조차 겨우 뜨고 있는 아르웬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길.. 어디로..'

아르웬을 구하려 앞으로 나섰지만 칠러웨이는 뒤쪽의 낭떠러지를 보며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 빠져나가고 이 여자를 구하고 목숨을 건지려면... 어찌 됐던 해야 해.'

"후우.. 후우..."

칠러웨이는 아르웬을 조심스럽게 안아들고 긴장된 얼굴을 한 채 숨을 몰아쉬었다.

"다음에 보자."

[....!]

다시 한번 그에게 검을 던진 칠러웨이는 아르웬을 들고 키메라들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도망 가다니!!]

칠러웨이가 낭떠러지로 아르웬과 함께 몸을 던지자 사에티는 화가 난 듯 몇몇 구울들의 머리를 터뜨렸지만 이내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동료의 반지를 바라보았다.

[네 복수는 잠시만 미루마... 조금만 기다려라 모든 일들을 끝마치고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여주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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