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버티다가 부러지기 전에
* * *
꽤 많은 병력이 숲속에서 이동하고 있었는데 조용한 숲에는 그들의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리에티."
"알고 있습니다."
"잠시 정지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계속 전진합니다."
일루안은 리에티의 말에 뒤를 돌아봤다, 병사들과 기사들은 계속된 전투로 지쳐있었고 출발 전 멀쩡했던 기사단장들 또한 공적을 쌓기 위해 계속해서 무리했는지 얼굴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리에티."
"명령은 한 번뿐입니다."
"..."
리에티의 말에 일루안은 한숨을 쉬었지만 자신은 그저 껍데기뿐인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어길 수 없었다.
"이봐."
"네 일루안님."
"우리의 영지병과 기사들에게 내 명령을 전달해."
"네, 말씀하십쇼."
결국 자신의 기사를 부른 일루안은 그에게 무어라 이야기를 한 뒤 멀리 떨어져 걷고 있는 칠러웨이에게 말을 몰아 다가갔다.
"칠러웨이."
"예 일루안님."
"괜찮나? 피곤해 보이는구만."
"예, 뭐 상관없지만... 조금 많이 무리를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됐습니까?"
칠러웨이의 질문에 일루안은 그저 고개를 내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패하셨네요."
"그렇지 뭐."
"어쩔 수 없지만 이 상황에서 대규모 공격을 받는다면..."
"얼마나 피해를 입을지 나도 상상이 안가네."
"...."
칠러웨이는 저 멀리 묵묵하게 말을 몰며 가고 있는 리에티를 슥 쳐다봤다.
"어찌하면 좋겠나?"
"이미 정답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흠..."
"그래서 기사를 불러서 따로 명령을 내리신 것 아닙니까?"
"그게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네."
"리에티 저 사람은 분명 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이곳을 서둘러 토벌해야 하는 이유가 있겠죠."
칠러웨이는 멀리서 들려오는 키메라의 소리에 검을 뽑아들었지만 이윽고 나타나는 모습들에 넋이 나가버렸다.
"이런."
일루안의 탄식이 귀에 들려왔지만 칠러웨이는 그까지 신경 쓸 수 없었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하라!"
"제기랄!"
칠러웨이는 갑작스럽게 양옆에서 나타나는 키메라들에 당황한 기사들을 뒤로 밀친 후 공격을 막아냈지만 상급 키메라인 듯 공격을 막아내기 벅찬 느낌이 들었다.
"파커!! 뒤로 물러나라!"
"그럴 수는...!"
"리에티를 말을 듣거라 파커."
피론마저 자신의 팔을 끌어당기자 파커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루안님과 후방을 지휘해! 기사들은 최대한 병력을 보호하며 후퇴를 준비해라!"
"명!"
리에티의 빠른 지휘 아래 순식간에 움직였지만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한 듯 명령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루안님!"
"어떻게 됐나?"
일루안의 명령을 하달한 기사의 갑옷이 키메라의 공격에 받은 듯 너덜너덜해져 있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다가왔다.
"명령에 따라 후퇴 준비를 마치고 퇴로를 확보해두었습니다."
"기사들에게 퇴로가 막히지 않도록 온몸으로 막으라 전하거라."
"예!"
"리에티! 일단 후퇴해야 하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예상했던 일입니다!"
"제길.."
일루안은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는 리에티의 모습에 짜증이 났지만 묵묵히 키메라를 상대하고 있는 칠러웨이를 돌아보고는 자신 또한 검을 들고 병사들을 보호했다.
"이래서는 토벌은커녕 전멸해서 시체로 돌아갈 겁니다."
"알고 있네 좋은 방법이 있으면 얘기해봐."
"후우... 후우.. 일루안님이 말씀을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칠러웨이의 눈빛을 바라본 일루안은 조용히 검자루를 꽈악 말아 쥐었다.
"전에 얘기한 '그 남자' 기억 나나?"
"예."
"모두가 릴 왕국에서 봤던 그 남자에게 감정이 있네 나 또한 그 전투에서 죽을 뻔했고.."
"...."
공격해오는 키메라들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매섭던 공격이 조금 잦아들자 일루안은 칠러웨이에게 무언가를 툭 던져주었다.
"이건?"
"그 전투에서 죽었던 내 아들의 목걸이네."
"...."
"원래 이 토벌대는 키메라들의 숫자를 줄이는 용도로만 만들어진 토벌대야, 리에티 또한 본대를 이끌고 오긴 했지만 교황님에게 '적당히'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곳으로 왔지."
일루안은 자신의 발밑에서 바둥거리는 키메라의 머리를 발로 밟아 터뜨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바지에 묻은 살점을 툭 털었다.
"하지만 그 구울들을 보고 지금 나를 포함한 지휘관 모두의 생각이 갑자기 바뀐 거네 그 남자를 잡기로."
"...."
"죽었던 친구와 동료를 두 번 죽이는 일을 몇 번이나 연속해서 겪은 리에티는 더더욱이 화가 나겠지."
"예.. 그렇겠네요."
"또 나머지 동의하는 사람들 또한 몇 년 동안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던 일을 잡았다고 생각이 드니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쫓아가는 거네."
"으음.."
칠러웨이는 그제서야 기사들과 병사들을 혹사시키면서까지 집착하고 있는 리에티에 대해서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귀족들은 어떻습니까?"
"피론과 파커.. 아니 에일렌이라 불러야 하나? 어쨌든 나라에서 힘 있는 공작가의 두 사람이 적극적으로 찬성하는데 반대할 수 있는 귀족 자제가 몇이나 있겠나?"
"없겠죠."
"만약 있더라도 리에티가 가지고 있는 검술의 재능과 지휘를 믿는 거지, 뭐 내 입으로 말하기에 부끄럽지만 나 또한 이 토벌대에 참가하고 있고."
"그나저나 일루안님은 왜 이 토벌대에 참여하시게 된 겁니까? 그 남자는 분명 여기 와서 아셨을 텐데.."
"음..."
일루안은 잠시 생각하더니 멋쩍은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뭐... 애국심..?"
"놀랍네요."
"하하하!"
"전방에 뭔가 있습니다!"
"뭔가 왔나 보군요."
"그래."
한 병사의 외침과 함께 느껴지는 살기에 두 사람은 얼굴을 굳히고 검을 뽑아들었다.
"굉장하구만."
"...."
눈앞에 벌어진 믿기지 않는 광경에 두 사람은 얼굴을 찌푸렸다.
"무덤까지 파해친 건가?"
비틀대며 걷는 구울들의 일부는 신체의 절반 이상이 썩어있었고 멀쩡한 구울들은 키메라에게 공격받아서인지 팔다리가 없거나 배나 머리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악랄하네요."
"내 말이 그 말이네, 일단 나는 다시 지휘를 하러 가볼 테니 자네는 리에티가 화내기 전에 너무 멋대로 행동하지 말게."
"되도록이면 노력해보겠습니다."
"살아서 만나지."
"예."
일루안이 말을 타고 기사들 틈으로 사라지자 칠러웨이는 구울들 속에 섞여 악취를 풍기는 한 물체를 바라보았다.
"저게 원인인가?"
인간으로 보이는 그는 악취뿐만이 아니라 찐득한 살기까지 내뿜고 있었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토벌대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 아아.]
오랜만에 말을 해보는 듯 목을 가다듬는 그의 입에서 거칠고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갑다.]
"릴 왕국과 전투 때 그 녀석인가?"
조용해진 숲속에서는 남자의 목소리와 리에티의 중얼거림만 들렸는데 그의 목소리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칠러웨이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음.. 많이도 모였군.]
"나는 리에티! 정체를 밝혀라!"
[... 리에티라.]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 남자는 말없이 가만히 서있더니 그들을 공격하려는 키메라들을 손짓해 정지시켰다.
[나는 사에트 이 키메라들과 구울들의 주인이다.]
"왜 이런 짓을 일삼는 거지?"
[왜.. 이런 짓을 하냐고?]
남자는 생각해 본 적 없는 듯 골똘히 머리를 굴리더니 이내 생각이 나질 않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인간들을 키메라와 구울들을 만드는 것 말인가? 뭐.. 얘기해 주자면 너희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함이겠지.]
".... 고통을 준다고?"
[그래.]
"네가 사람인가!"
[.... 웃기는군.]
리에티의 말에 남자는 낄낄대며 웃더니 토벌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희가 얘기할 건 아닌 것 같은데..]
"...?"
[키로스만을 섬긴 채 다른 신을 믿는 자들을 이교도라 칭하며 검으로 참살하고 우리들의 피아래 나라를 세운 너희를 보며 나는 어떤 생각이 들 것 같나?]
"이교도?"
[그래, 처음 너희가 그 나라를 세울 때 우리는 도움을 주었다 분명 모든 종교가 허락되는 나라를 만들겠다 약속했지만 결국 키로스만이 유일신으로 칭해지며 우리의 신인 타나스님은 버려졌지 우리도 마찬가지로 괴멸 수준에 가깝게 살아남았고.]
"...."
[그래도 우리는 긴 세월 간 너희를 지켜봤다, 이익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들의 생존이 먼저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들이 달라졌어 칠라렌 성국은 단 한 신만 믿게 강요했고 신분이 생기며 인간들에게서는 자유가 사라졌다... 또한 여기 모여있는 너희 귀족들이 릴 왕국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사치로 국고를 바닥내면서 나라가 휘청였다.]
"그건 우리의 잘못이..."
[너희의 잘못이다!!! 서로 다치게 하고 죽이며 정작 구해야 할 사람들은 구하지 않고 서로 뜯어먹게 만들며 저 길가에 죽은 채 방치해두는 것이 어찌 나라를 돌보는 너희의 잘못이 아니란 말이더냐!]
그의 말에 리에티는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말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진실이었으며 대부분의 말들이 반박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내 동료와 나는 너희 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 나라를 세우기로..]
"... 동료까지 있다는 말인가..?"
[후우...]
모든 걸 토해내듯이 말한 남자가 심호흡을 하고 로브를 벗어던지자 구울들은 그르렁 대며 토벌대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네가 궁금한 걸 물어봤으니 나도 물어보겠다.]
"...."
[내 동료는 어딨느냐?]
그의 질문에 리에티는 얼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기사들도 귀족들도 아무것도 모르는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혹시 키메라를 만드는 게 네 동료?"
[.... 맞다.]
하지만 갑자기 칠러웨이가 앞으로 나서서 질문하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정말? 그거 내가 죽였는데."
[뭐...?]
"아.. 그리고 뭐 듣다 보니까 새로운 나라를 세워서 인간들을 나쁜 환경에서 꺼내주고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뭐 이런 게 목표인 것 같은데 이미 너희들은 글러먹었어."
[이 새끼가...!]
칠러웨이의 말에 남자는 분노한 듯 얼굴을 붉혔지만 칠러웨이는 아무렇지 않게 전에 죽였던 남자의 반지를 툭 던져주었다.
"어차피 너희 사람들 막 죽이고 있잖아..? 보호, 구원.. 뭐 그딴 명분을 만드는 것 같은데... 개소리하지 마 그딴 건 이미 사람을 대량으로 학살한 시점부터 틀렸어."
키에에엑!
기다리지 못하고 앞으로 뛰쳐나온 구울 한 마리를 베어낸 칠러웨이는 검에서 피를 털어내고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희도 똑같은 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