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86화 (86/120)

〈 86화 〉 일주일

* * *

“.......근데, 엘리사.”

“예, 아가씨.”

“전에 나타났던 타이렌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지는 않겠지?”

여행을 결정하기 전에 나에게는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 나에게 가장 큰 위협은 다름 아닌 타이렌이 속한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타이렌은 자신을 세 번째 심복이라고 소개했다. 그 말을 뜯어보자면 그의 위에 그와 같은 인물이 두 명이나 있다는 뜻이겠지.

엘리사를 막아섰던 검은 존재도 한 명이 아닌 10명이 넘어갈 정도로 많은 숫자가 있었다.

그들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었지만, 그들이 상당히 큰 규모의 조직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엘리시아에 관광을 갔을 때, 나를 노리고 그들이 다가오지는 않을까. 나는 그런 무서움이 생겼다.

만약 엘리시아에서 그들을 마주치게 되면 저번처럼 좋게 넘어갈 수 있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소니아도 노엘도 카밀라도 없이 괜찮을까. 엘리사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엘리사가 누군가에게 패하는 것이 상상되지 않았다.

다만 내가 한 번이라도 긴장을 풀 경우의 수 때문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혹여나 타이렌이 다시 자스민을 불러오겠다고 별의별 지랄을 하면 어떡하지. 이런 두려움이 내가 안전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게 했다.

기껏 마음을 다잡았는데 이상한 이들에게 나라는 존재가 유린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리사는 내 등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이번 방학 동안 저희에게 접촉해 오지 않을 겁니다.”

엘리사의 말에는 확신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에게 그들이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나는 그 확신의 출처가 궁금했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약조를 했기 때문입니다.”

약조를 했다. 누구와? 타이렌하고?

“타이렌하고?”

“네. 그 사건 이후 그와 대면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아가씨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조건을 내세웠고, 그도 그들의 기지를 파괴하지 말라는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그와 미리 합의해 두었기에 아가씨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엘리사의 말에 몸에 힘을 풀면서 묵힌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 나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 하나가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기쁨의 웃음을 지으면서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엘리사는 고민이 많은 듯 얼굴이 어두웠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니 괜스레 다시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들만 없으면 나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내 예상을 벗어날 정도로 암울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내 어깨가 계속해서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럼 한동안은 괜찮은 거야……?”

나는 엘리사에게 의문문으로 물어보았다. 지금 심각한 상황인데 들떠있는 내가 눈치가 없었던 걸까.

사실 지금 나는 이곳에 짱박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내 머릿속에는 셀 수도 없는 여러 가지의 생각들이 휘젓고 있었다.

“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엘리사는 이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짜증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녀의 그런 표정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 있어 짜증의 원인이 된 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아가씨에게 해가 될만할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그래? 근데 왜 얼굴이 죽상이야.”

내 지적에 그녀는 표정을 찡그렸다. 저 표정은 무언가 생각하기 싫은 것이 있을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주로 카밀라 얘기가 나올 때 저런 표정을 지었다.

“다만 귀찮은 것들이 들러붙을 수 있기에……….”

“귀찮은 것들?”

귀찮은 것들이라. 엘리시아에 우리에게 귀찮음을 줄 만한 이들이 있을까? 물론 내가 아는 것보다 회귀자인 그녀가 아는 것이 훨씬 더 많겠지만, 나로서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여행에 지장을 줄 정도야?”

“아뇨, 그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미칠 듯이 시끄러울 뿐이죠.”

엘리사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가 이 정도로 질색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살짝 엘리사가 말하는 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내 인생에서 한 번 정도는 마주쳐도 되지 않을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고방식으로 이루어진 사고지만 말이다.

엘리사와 엘리시아의 어느 곳을 둘러볼지 많은 시간 동안 열띤 대화를 나누었다. 엘리사는 엘리시아 에 관해 매우 상세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처음 목적지는 엘리시아 서쪽에 있는 포렌치노라는 도시였다. 사람이 많지 않은 작은 해안 도시인 포렌치노는 매우 아름다운 도시라고 한다.

보통 다른 사람들은 엘리시아의 해안 도시라고 한다면 다른 곳을 택하지만, 나는 엘리사를 믿었기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사람이 북적북적한 관광지보다는 잔잔한 소도시가 훨씬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사의 열정적인 설명 덕분에 나는 순조롭게 여행 계획을 짤 수 있었다. 모든 계획을 짠 후에 내가 한 것은 결정한 것 밖에 없다고 느낄 정도도 엘리사의 도움이 컸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바로 엘리시아로 출발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엘리시아로 가는 마부를 구하는데도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내 신분이 문제였다.

브레토니아 귀족이라는 벨리타 자스민이라는 신분.

엘리시아와 브레토니아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을 생각만 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두 나라를 옥죄는 여러 상황과 나라들이 아니었다면 이미 이 대륙은 통일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대륙은 현재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런 균형의 추 사이에서 내가 움직이는 것은 상당히 예민한 문제였다.

엘리시아는 브레토니아의 귀족이 관광을 오겠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보통 적국의 귀족 영애가 그렇게 순수한 목적일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보통이라는 단어로 포함하기에는 살짝 어려운 사람이었다. 내 목적은 정말로 관광이었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엘리시아 쪽에서는 가이드를 한 명 붙이는 조건을 내걸었다. 말이 가이드지 사실상 여행 동안 감시를 하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가이드를 우리 쪽에서는 정할 수 없고 무조건 엘리시아 쪽에서 골라주는 대로 따라야 한다고 한다.

엘리사 쪽에서 암울해 했던 것도 이 가이드에 관한 것 같았다. 아마 이 가이드로 선정될 인물이 누군지 대충 예상이 가는 거겠지.

누군가는 나에게 그냥 불법으로 들어가면 안 되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다.

사실 불법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엘리시아로 들어갈 방법은 넘쳐날 정도였다. 보통은 목숨을 걸어야 하지만 엘리사가 있으면 무조건 넘어갈 수 있다고 했다.

다만 문제는 역시나 나, 벨리타 자스민의 존재였다.

엘리사의 말에 따르면 그곳에서 자스민을 알아보는 이가 무조건 한 명 이상은 나올 것이라고 했다.

국경을 어떻게 넘어가냐에 관계없이 엘리시아에는 자스민을 알아볼 수 있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그들에게 걸리면 내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에 차라리 대놓고 갈 것이라고 공표하는것이 더 났다는 것이 엘리사의 설명이었다.

나는 저번과 같이 나에게 모르는 누군가가 달려드는 일을 겪고 싶지 않았기에 엘리사의 판단을 존중했다.

가이드를 붙이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않았다.

내가 엘리시아에 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의 서류가 필요했는데, 그중에는 벨리타 가문의 가주인 벨리타 가필드의 인장이 찍힌 서류가 필요했다.

그 말은 벨리타 자스민의 아버지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기절하는 줄 알았다. 하필이면 내가 가장 보기 꺼리는 사람의 허락이 필요하다니.

그냥 가지 말까.

여행을 포기할 정도로 나는 그와 마주치기 싫었다. 내 존재는 그에게 있어서는 죄악이었기에 얼굴을 마주 보는 것 조차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엘리사가 자신이 편지를 보내겠다고 말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편지 하나가 도착했다.

편지에는 많은 말이 적혀있지 않았다. 하지만 문장 한마디 한마디가 많이 고민해서 적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세심함이 나를 상처입혔다.

‘편지 내용을 요약하면 허락해 줄 테니 여행 끝나고 집에 좀 들려라.’ 였다. 나로서는 여행을 가지 않고 그를 보지 않는 것이 더 좋았지만, 어차피 방학 중에는 한번 들려야 한다는 엘리사의 설득에 감사하는 답장을 간단하게 적어 보냈다.

방학식 이후 일주일이 지나서야 모든 서류가 모일 수 있게 되었다. 왜 이리 복잡한 건지. 나는 한숨을 쉬며 방문을 열었다.

엘리시아로 가는 마부는 고용했다. 엘리시아로 가는 데에는 상당히 큰 비용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귀족 영애인 자스민에게는 그 정도 돈은 푼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가필드가 보냈던 편지에는 여행 경비가 동봉되어 있었기에 돈에 관한 걱정을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 돈은 쓰지 않기로 굳게 다짐했다.)

나와 엘리사는 포렌치노로 가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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