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영애는 왕자님을 양보하겠습니다-84화 (84/86)

〈 84화 〉 일일 데이트 주간 ­파노스­ (2)

* * *

왕도에 있는 서민의 옷 가게, 게임에서는 주인공이 일상복을 변경할 때 많이 사용하는 가게입니다.

서민의 옷 가게라고는 하지만 귀족들이 입을 법한 드레스나 정복도 취급하고 있습니다. 비록 정품이 아닌 모조품이라서 가격은 조금 저렴하지만요.

게다가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해 놓고 중세 유럽에는 절대 나오지 않았을 만한 현대식 의복도 종류별로 취급하는 곳이죠. 사실, 제작자들의 욕망이 많이 반영된 가게니까요.

이 옷 가게는 게임 내에서 여러 가지 공략에 활용됩니다. 어두운 옷을 입고 눈에 띄지 않는 옷차림을 변신해서 특정 공략 대상을 미행한다거나, 일상복으로 공략 대상의 취향에 맞는 옷을 갖춰서 호감도를 올린다거나, 일부러 모조품 옷을 산 뒤 무도회에 참석해서 망신을 당하고 공략 대상이 구해주는 이벤트를 노리는 등 다양하게 활용됩니다.

하지만 오늘 할 일은 앞서 말한 것 중 그 무엇도 아닙니다.

그저, 제 충실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왔습니다.

“파에톤! 다음엔 이거! 이거 입어 줘!”

“아네스, 벌써 열 벌째인데. 언제까지 날 갈아입혀야 직성이 풀릴 거야?”

“아, 앞으로 두 벌! 아, 아니! 세 벌만 더!”

“참…….”

파에톤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참을 수 없으니까요.

게임 속에서 보던 그 파노스가 지금 제 애인인데, 어떻게 넘어갈 수 있겠느냐고요! 공략 대상 중 육체미만큼은 단연 1등인 파노스, 아니, 파에톤의 이런저런 옷차림을 보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요!

결국, 열다섯 벌 정도를 갈아입히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멈출 수 있었고,

“아…….”

곧바로 제가 방금까지 정신을 놓고 해온 것들이, 사실 엄청나게 염치없는 행위였음을 깨달았습니다.

“미, 미안해, 파에톤. 내가 너무 흥분해서…….”

어, 어떡하죠. 너무 제 욕망에 충실한 대로 행동해버렸는데, 이거 파에톤이 제게 완전히 정나미가 떨어져 버릴만한 행동 아닌가요?

일일 데이트의 첫날부터, 그만 욕망을 참지 못하고 실수를…….

“괜찮아, 아네스. 네 심정은 이해하니까.”

“고마워…….”

다행히 파에톤은 제 수치스러운 모습에도 개의치 않은 것 같습니다.

잠깐, 심정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설마…….

“나도 둘러보면서 아네스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몇 벌 봐뒀는데, 입어줄 거지?”

……부끄럽지만,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겠죠.

파에톤이 골라준 옷을 하나씩 갈아입었습니다.

첫 번째 옷. 민소매 티와 미니스커트.

“정말 예뻐, 아네스.”

“고, 고마워, 파에톤.”

두 번째 옷. 허벅다리가 드러날 정도로 아래가 짧은 치파오.

“매력적이야, 아네스.”

“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세 번째 옷. 축제 날 아리아나가 입었던 것과 비슷한, 치마가 짧은 메이드 복.

“귀여워, 아네스.”

“귀, 귀여운가……?”

네 번째 옷. 와이셔츠와 짧은 정장 치마.

“사랑스러워, 아네스.”

“사실, 내가 뭘 입어도 다 좋은 거 아니야?”

다섯 번째 옷. ……스커트가 달린 비키니.

“……지금 당장 침대에 눕히고 싶어.”

“그, 그건 안 돼!”

어머니가 말한 혼전임신 금지를 떠올리고, 서둘러 파에톤을 제지했습니다. 애초에 다섯 번째는 더는 일상복조차 아니잖아요!

“파, 파에톤은 이런 스타일의 옷을 좋아하는구나.”

파에톤이 골라준 옷은 전부 예쁘고 귀여웠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응. 사실 부끄러워서 숨기고 있었는데, 아네스가 먼저 부끄러움을 참고 취향을 고백해 줘서, 용기를 내서 말할 수 있었어.”

다섯 벌 모두 치마가 짧아서, 다리와 허벅지가 상당히 많이 드러나는 옷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도 부끄럽지만……. 파에톤이 좋다면 나도 좋아…….”

사실, 미니스커트는 전생에서도 입어본 적이 없습니다. 공부만 하느라 사복을 많이 입을 기회가 없기도 했지만, 다리를 드러낸다는 것이 조금 부끄러웠으니까요. 당연히 비키니 수영복 같은 저돌적인 의상도 마찬가지고요.

“아네스. 아네스가 입었던 옷은 이미 다 사놨으니까, 그대로 입고 돌아가도 괜찮아.”

“이, 이런 꼴로 길거리를 돌아다닐 리가 없잖아!”

비키니 수영복으로 거리를 돌아다녔다가는 보통 치태로 끝날 일이 아니라고요. 심지어 아직 여름까지는 한 달 가까이 남았다고요!

원래의 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뒤, 저 또한 계산대에서 파에톤에게 입혔던 옷을 전부 결제했습니다.

“짐이 많으니, 배송을 부탁드릴게요. 주소는…….”

“아네스, 괜찮아? 너무 많은 돈을 쓴 거 아니야?”

파에톤이 우려하듯이 제게 물었습니다.

“딱히 파에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해서 사 주는 거니까. 대신 다음 데이트에는 내가 사 준 옷을 입게 할 거야.”

“그 말은, 나도 다음 데이트에서 오늘 네게 선물한 옷을 입고 나오라고 해도 된다는 이야기지?”

“그야 물론……아, 비키니는 안 돼! 비키니는!”

“아까웠네. 확답을 받아 놓을 수 있었는데.”

파에톤은 이제는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도 않고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단둘이 있을 때만이라면 입어줄 수도 있고.”

“……진짜?”

“아, 그, 그래도! 야한 건 안 돼! 스무 살 전까지는!”

각자의 욕망이 가득 담긴 옷을 서로에게 선물하는 것을 끝으로, 옷 가게 데이트는 마무리되었습니다.

파에톤, 아니 파노스는, 데이트의 마무리로 저를 추억의 장소로 데려왔습니다.

밤이 되면 은은한 불빛에 비친 장미꽃들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왕궁의 장미 정원입니다.

“파에톤, 아니, 파노스와 이곳에 온 것은 벌써 세 번째네요.”

“……애칭을 부르는 시간은 벌써 끝인가요?”

“저와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으셔서 이곳으로 부른 게 아닌가요? 그렇다면 본명으로 이야기하는 게 더 진정성이 있겠죠.”

파노스와 이곳에서 만날 때마다, 항상 중요한 이야기를 해왔으니까요.

첫 번째는, 아직 어린아이였던 파노스를 한 명의 남자 구실을 할 수 있는 조언을 해드리고, 다음에 만났을 때 춤 권유를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하고.

두 번째는, 파노스에게 준 아그네스 1회 이용권을 사용해서 아스토리아 기초학교에 입학하겠다는 서류를 작성한 뒤, 달빛 아래에서 지칠 때까지 춤을 추고,

오늘은, 정식으로 파노스와 애인이 되는 첫날입니다.

“맞습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해서, 마지막에는 영애님을 이 장소로 모셨습니다.”

파노스는 자신의 손수건을 벤치에 펼쳐 놓고, 저를 그 자리에 앉혔습니다.

“영애님, 이 장소는 사실 올해 초에 한 번 엎어질 뻔했던 것을 아십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이렇게 예쁘고 소중한 공간이, 왜 없어질 뻔했던 걸까요.

“이곳은 아름답고, 저와 영애님을 포함해서 일부 사람들만 아는 비밀 공간입니다. 하지만 너무 비밀 공간이라서, 사용하는 사람이 적죠.”

“그렇군요.”

“그래서 일부 연인들의 밀회로만 가끔 사용되는 이 공간을 없애는 것이 어떻겠냐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확실히, 장미꽃은 정원사의 손이 많이 가는 식물이니까요. 열심히 관리해도 봐주는 사람이 적으면 아쉬우시겠죠.

“하지만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은, 파노스가 무언가 손을 쓴 건가요?”

“네. 정말로 ‘손’을 쓰고 있습니다.”

파노스는, 장미 정원의 장미꽃 하나를 쓰다듬으며 제게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가 나온 이후, 장미 정원의 모든 것은 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파노스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발언에, 잠시 놀라 얼어붙을 뻔했습니다.

“그렇다면, 요즘 가끔 학생회에 방문하지 않았던 것도…….”

“전부 이 정원을 지켜내기 위해서입니다. 다행히 왕궁과 학교는 그리 멀지 않아서, 수업이 끝나자마자 마차를 타고 오면 관리할 시간은 충분히 생겨나니까요.”

“이 장소는 확실히 저와 파노스의 추억의 장소이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지켜야 할 이유가 있나요? 정 그러면 다른 정원사를 한 명 더 고용하더라도…….”

“아니요. 이 장미 정원은, 오늘 이후로 폐쇄할 예정입니다.”

“……오늘이요?”

“원래대로라면 슬슬 힘에 부쳐서 정원사를 고용할까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장미 정원에서, 제 마지막 목표가 이루어질 것 같으니까요.”

파노스의 장미 정원에서의 마지막 목표가 뭘까, 하고 생각하는 도중. 파노스는 어느새인가 제가 앉은 자리의 왼쪽에 와서 앉았습니다.

그리고 오른팔로 제 오른쪽 어깨를 잡은 뒤, 제 몸을 틀어서 단숨에 가까워졌…….

“……!!”

파노스는 저와 얼굴을 맞대고 10초가량이 지나서야, 겨우 제 몸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습니다.

“……파, 파노스…….”

“제 마지막 목표는, 이 장소에서 아그네스 영애님과 첫 키스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파노스는 드디어 고대하던 목표를 이뤘다는 듯, 시원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전……,

“마,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달라고요!”

“설마, 제 키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그, 그건 아니지만요! 저도 처, 처, 첫 키스였단 말이에요!”

너무 예상치 못한 공격이라서 심장이 터져버릴 뻔했어요! 게다가 당사자인 파노스는 왜 이렇게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계시는 거냐고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저의 부끄러운 투정에 파노스는 굉장히 기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드디어 형님에게 이겼네요.”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