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편지를 엄청 많이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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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왕자의 탄생제로부터 사흘 뒤, 다섯 번째 요일이 되었습니다.
평소와 같은 다섯 번째 요일이라면 니콜라스 왕자가 방문하고, 적당한 근황이나 이야기를 조금(4시간 정도) 하기 위해 방문하시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방문하기 힘드시겠죠.
탄생제의 피로가 아직 가지 않으셨을 테고, 축제의 뒷정리도 하루 만에 끝나는 일은 아니니까요. 본인이 손수 치우는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니콜라스 왕자를 통해서 실행해야 하는 일들이 있을 테고요. 무엇보다도 니콜라스 왕자가 직접 이번 주는 방문하기 힘들 것 같다고도 말하기도 했으니 적어도 오늘 방문할 일은 없겠죠.
오랜만에 교육도 없고, 손님도 없는 평일 오후이지만, 그런데도 저는 오랜만에 생긴 휴일을 전혀 즐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 방 테이블에 쌓여 있는 이 수십 통의 편지 때문입니다,
“아그네스 님, 오늘 분의 서신입니다.”
거기에 마리가 방금 새로운 편지를 스무 개 정도 추가했습니다. 전부 세어 보니 무려 50통이네요.
갑자기 제게 이렇게 많은 편지가 오게 된 이유는, 얼마 전 제이스에게 탄생일 선물로 받은 ‘화상 치료의 물약’ 때문입니다.
제이스가 제 탄생일에 선보였던 ‘화상 치료의 물약’은 공개되었을 때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두근거림의 묘약’이 처음 발표됐을 때의 현장을 가본 적은 없지만, 아마 비교도 안 되겠죠. ‘연애를 조금 쉽게 만들어주는’ 물약보다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고치는’ 물약이 훨씬 가치가 높을 테니까요.
게다가 제이스가 화상 치료의 물약을 소개한 제 탄생일에는 기사 시절에 전투 중 화공을 당한 변경백이나, 화약을 연구하다가 손과 얼굴에 사고를 입은 자작, 뜨거운 음식에 혓바닥을 크게 뎄던 부인 등이 마침 손님으로 와 계셨습니다. 현장에 있었던 다른 화상을 입었던 분들도 상처가 치료되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중계되었으니까 적어도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더 의심하지는 못하겠죠.
그렇기에 화상 치료의 물약을 확보하려고 그 권리를 가지고 있는 제 앞으로 편지가 잔뜩 오게 된 것입니다. 다행히 공작이라는 지위와 니콜라스 왕자의 약혼자라는 뒷배경이 있으므로 수십 병의 약을 싼값에 넘기라는 등 무리한 요구를 하는 내용의 편지는 없지만…….
지위가 높은 귀족, 특히 이웃 나라와의 국경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는 일이 많은 변경백들의 서신도 많아서 무시하기가 힘듭니다. 어떤 사람은 어렸을 때 눈꺼풀에 입은 화상 때문에 거의 평생을 외눈이나 마찬가지로 살아왔다는 사람도 있고, 딸이 얼굴에 화상을 입어 파혼 직전이라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미리 값을 치르겠다며 적지 않은 돈을 편지와 같이 보낸 사람도 있습니다.
우선 제이스에게 인도받은 화상 치료의 물약을 제가 만들 수 있는가 하면, 만들 수 있습니다. 마침 어제기 제이스의 연구를 도와주는 날이었기에 마침 기술 이전도 받을 수 있었고, 재료의 손질이나 가공도 어렵지는 않아서 만드는 데 문제가 되지는 않으니까요.
다만 재료를 준비하고 가공하는 과정이 꽤 번거로운 데다가 숙성까지 시켜야 해서, 양은 둘째치고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게 가장 큰 단점입니다. 제이스의 연구실 시설을 빌리는 것도 한정되어 있어서, 실질적으로 제가 만들 수 있는 약은 일주일에 약 10개 정도로 예상되네요.
게다가 언제까지고 제이스의 연구실을 빌려서 생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매주 넷째 요일에 제가 하는 것은 제이스의 감시가 아니라 제이스의 연구 도움입니다. 제가 화상 치료의 물약을 만들겠다고 제이스의 연구를 뒷전으로 미룰 수는 없으니까요. 넷째 요일이 아닌 다른 요일에 연구실을 같이 빌리는 것도 매우 번거롭겠죠. 무엇보다 제가 옆에 있으면 제이스도 불편할 테고요.
일단 지금은 편지를 보낸 사람의 명단 정도만 정리하고, 준비가 덜 되었으니 기다려 달라는 내용의 답장을 쓸 수밖에 없겠네요. 제 생산력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이 쳐도 전체의 20% 정도니까요. 수중에 있는 10개 정도만 먼저 보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어떤 기준으로 나눠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불만을 토로할 겁니다.
심지어 앞으로도 이런 편지가 더 올 거라고 예상되고요. 제이스가 권리를 제게 준 것이 오히려 다행이네요. 제이스가 이 모든 편지에 대응했으면 연구의 진척이 얼마나 늦어지게 될지 가늠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받은 편지를 한 장 한 장 읽으며 내용을 정리하다가, 특이하게도 화상 치료의 물약에 관한 내용이 아닌 편지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빅토르 솔론 남작이 보낸 편지네요.
「앙겔로풀로스 가문의 아그네스 공작 영애에게
안녕하십니까, 앙겔로풀로스 가문과 교류가 오래된 솔론 남작 가문의 빅토르입니다.
일전에 저희 딸인 에리자 때문에 아그네스 님의 탄생일에 실례를 끼친 것에 사과드립니다.
또한, 선물로 주신 두 벌의 드레스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저희 아이들도 새로운 옷이 생긴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가족들도 아그네스 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하니, 바쁘시겠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솔론 가문에 방문해주시면 성대하게 맞이하겠습니다.
솔론 남작 가문 대표 빅토르 솔론 올림」
흠, 어떡할까요.
이 이벤트는 아마 게임과는 관계없는 이벤트겠죠. 일단 아그네스의 탄생일 때 아그네스와 에리자 영애는 만나지도 않았으니까요. 제가 개인적으로 빅토르 솔론 남작과 친분이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요.
제이스와 에리자 영애를 인사만 시키려고 했는데, 또 예기치 못한 변수가…….
뭐, 그래도 이 정도는 딱히 문제가 되는 수준도 아니네요. 에리자 영애는 제이스의 약혼자(예정)고, 제이스의 공략 루트랑 아그네스는 별로 접점도 없으니까요. 실수로 파노스 왕자를 유혹시켜버렸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변수죠.
미래의 올케가 될 사이이기도 하고 미리 친해져서 나쁠 건 없겠죠. 평일은 아마도 일정이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방문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날은 다음 주 여섯 번째 요일이 되겠네요.
「빅토르 솔론 남작에게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입니다. 보내주신 친서에 대해 답장을 드립니다.
에리자 영애와의 친교를 목적으로 드린 선물이 마음에 들었다니 저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도 솔론 남작 가문과의 교류를 원하고 있으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돌아오는 여섯 번째 요일 오후에 믿을 수 있는 사용인 한 명만을 데리고 방문하겠습니다.
혹시 그 시간이 안 된다면 다시 답장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 드림」
그리고 제 예상이 틀릴 수도 있지만, 빅토르 남작이‘그 비밀’에 관하여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니까, 듣는 사람은 가능한 적은 편이 좋겠죠. 마리는 믿을 수 있고, 마차도 운전할 수 있고, 호위도 가능하니까요.
답장을 한 개 썼으니까……이제 49개만 더 쓰면 되겠네요.
결국, 모처럼 생긴 평일의 오후 여가를 다 쓰고 나서야 모든 답장을 다 쓸 수 있었습니다. 매주 한 통씩 파노스 왕자에게 답장하는 것도 지치는데, 이렇게 많은 편지를 연속으로 쓴 것은 처음이네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부분의 답장은 거의 같은 내용이라는 걸까요. 상대의 신분이나 친분 등에 따라서 예절을 조금씩 다르게 적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틀은 정해져 있으니까요. 그래도 50편이나 되는 편지를 자필로 쓰는 것이 힘든 것은 마찬가지이지만요.
마지막 편지를 봉납하고 나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내일도 아마 비슷한 내용의 편지가 올 것 같지만, 그래도 오늘까지 쌓인 분량은 정리했으니까요. 집을 비운 사이 쌓여 있었던 편지가 조금이라도 더 많았거나, 귀찮게 생각해서 써야 하는 특별한 사람에게 온 편지 같은 게 껴 있었으면 오늘 내로 끝내는 건 불가능했겠죠.
“아그네스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와요.”
문밖에서 마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식사시간이네요. 점심 식사를 끝내자마자 답장을 쓰기 시작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까지 지나갔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일단 오늘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식사와 목욕이 끝나면 일찍 자고, 내일은 느긋하게 늦잠이라도 잘까요.
“곧 저녁 식사 시간이라서 모시러 왔습니다. 그리고…….”
마리가 양손에 들고 온 것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살 의지를 잃어버릴 정도로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후 중에 아그네스 님 앞으로 33편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참고로 파노스 알렉산드로스 님 편지도 한 편 있습니다.”
……잠은 지옥에서 실컷 자겠네요.
그리고 어느덧 시간은 흘러, 빅토르 솔론 남작에게 방문하겠다고 한 날짜가 되었습니다. 참고로 그때까지 일주일 동안 추가로 도착한 편지의 장수는 무려 193편이었습니다. 이전 분량까지 전부 합하면 총 276편이네요. 심지어 그 와중에 파노스 왕자도 편지를 한 편 더 보냈습니다.
죽을 거 같아요. 빨리 어떻게든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끝이 없겠어요. 대충 어림짐작해도 밀려오는 요구에 화상 치료의 물약 개수를 맞춰주려면 최소 일주일에 100개 이상은 생산해야 합니다. 어떻게든 대량생산을 하지 않는 이상 해결될 기미가 없는데, 시설을 만들 만한 장소도, 기술을 믿고 맡길 만한 사람도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네요.
물론, 가장 쉬운 해결법은 있습니다. 제조법을 공표해버리고 공공재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제이스가 제게 준 선물로서의 성의를 무시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잘못 만들었다가 부작용이 생겼을 때 그 책임도 저에게 돌아오게 될 위험도 있고요.
어느새인가 솔론 가문의 영지에 진입한 것 같네요. 아주 어렸을 때도 한 번 와본 적이 있지만, 여전히 굉장히 인기척이 없는 곳이네요. 듣기로는 지반이 단단한 데다가 희토류가 많이 섞인 땅이라서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잘도 이런 영지를 운영하는 빅토르 솔론 남작의 수완이 대단하다고 생각할 무렵, 마차를 운전하던 마리가 저를 불렀습니다.
“아그네스 님, 솔론 가문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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