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선물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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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오늘의 주인공인 저희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 누님의, 탄생일 축하 선물 증여식이 있겠습니다.”
제이스의 진행으로 오늘의 메인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부모님의 선물 이후 제이스의 선물을 받는 것으로 끝날 행사였겠지만, 새로 참여하게 된 인물들이 있으니 순서를 다시 지정해야겠죠.
어떤 순서로 할지 고민하다가, 공식적으로 가족에 가까운지를 기준으로 결정했습니다. 즉, 아리아를 시작으로 파노스 왕자, 니콜라스 왕자. 부모님, 제이스의 순서가 되겠죠. 사실, 가족에 더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면 제이스보다는 부모님이 마지막이 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원래부터 이 행사는 제이스가 전할 선물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아그네스 님, 여덟 번째 탄생일을 축하드려요.”
“고마워요, 아리아나 양.”
“제 선물로는, 침의를 준비했어요.”
침의라는 것은 잠잘 때 입는 옷, 즉 잠옷입니다. 아리아나의 머리카락 색과 같은 밝은 하늘색 비단 소재로 된 잠옷입니다.
비단은 알렉산드로스 내에서는 거의 생산하지 않고, 조금 먼 나라까지 가서 수입해야 합니다. 교역의 발이 넓은 세이타리디스 후작 가문에서 준비했다는 느낌이 많이 나네요.
“기쁘게 받을게요. 고마워요, 아리아나 양.”
그리고 귀족 사회에서 침의를 선물한다는 것의 의미는, ‘나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아리아나가 만약 남자였다면 프로포즈와도 마찬가지인 선물이지만, 저와 같은 여자아이니까 두 사람 간의 강한 결속을 의미하는 선물로 받아들이는 편이 맞겠죠.
추가로는 세이타리디스 가문이 확실하게 앙겔로풀로스 가문의 세력으로 들어왔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앙겔로풀로스는 공작 가문이지만 다른 귀족들과의 결속은 많지 않은 편이니까요. 저희 가문의 강점은 아버지의 영지 운영 수완으로 만든 경제력과 오랜 역사로 인한 많은 분가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세이타리디스 가문이 앙겔로풀로스 세력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저희 가문의 서열이 상당히 높아짐을 의미하겠죠. 특히 상업 능력이 뛰어난 세이타리디스 가문이기에 더 의미가 큽니다. 장사꾼은 누구보다도 처세를 잘하는 인물들이니까요.
첫 선물부터 엄청난 의미가 있는 물건을 받아버렸습니다. 원래는 이런 목적으로 만든 행사가 아니었지만, 아리아나의 선물로 갑자기 이 장소가 최근 정세의 중심 현장이 되어버렸네요.
“아그네스 영애님, 제 선물은 이것입니다.”
파노스 왕자가 준비한 선물은 제법 부피가 있네요. 푹신한 것을 보니 인형이 아닐까 생각하며 선물 포장을 열었더니 들어있던 물건은……베개였습니다.
“미쳤냐, 파노스.”
“제정신이에요?”
제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니콜라스 왕자와 아리아나가 파노스 왕자를 문책했습니다. 다행히 무대 위에서만 들릴 정도의 소리라서 다른 손님들에게는 들리지 않은 것 같네요.
베개 선물은 상당히 직설적인 뜻을 가집니다. ‘당신과 밤을 지새우고 싶습니다’……도저히 일고여덟 살 아이들이 할만한 선물은 아니죠. 그것이 다른 약혼자가 있는 상대라면 더더욱 용납될 수 없는 일이고요.
파노스 왕자가 베개 선물의 의미를 알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베개를 선물했다는 것보다 더 큰 문제도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베개의 색깔입니다.
“보라색…….”
보라색 염료는 엄청난 가격을 자랑합니다. 바이올렛이나 라일락색 같은 보라색이 아닌, 진짜 퍼플의 보라색 염료를 만들려면, 이 시대의 기술력으로 1g당 1만 마리의 고둥이 필요하니까요. 이 정도 크기의 베개를 염색하려면, 최소 200만 마리의 고둥을 희생시켜야겠죠? 그 가격은 기술직 전문가의 1~2년 연봉과 거의 맞먹을 정도니까, 현대를 기준으로 하면……최소 1억 이상입니다.
이 베개 한 개가……최소 1억…….
게다가 보라색은 일반인은커녕 귀족도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염료가 아닙니다. 그 희귀성 때문에 왕족만이 쓸 수 있는 왕족 전용의 색깔이니까요.
“아그네스 영애님은 추후 왕족이 되실 몸이니까, 사용하셔도 괜찮습니다.”
파노스 왕자가 속 편한 소리를 하고 있네요. 하필 이 물건을 선물한 대상이 파노스 왕자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차라리 니콜라스 왕자가 준 선물이면 약혼자 간에 건네받은 선물이니, 약혼자 간의 관계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는 긍정적인 해석도 가능하겠죠.
하지만 이 선물을 파노스 왕자가 줬다는 것이……그게……이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해하는 순간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으니까요. 만약 이해한다고 해도 이미 제가 수습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어요.
“……성의는 받겠습니다.”
답답한 가슴을 가라앉히고 단전에서 겨우 대답을 끌어올렸습니다. 거절하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좋아하지도 않고,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다는 선에서 감사의 인사 정도만 말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대처법이겠죠.
손님들 사이에서는 아리아나의 차례일 때보다도 눈에 띄게 어수선해지는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다들 표정이 좋지 않으니, 서둘러 다음 차례로 진행해야겠네요.
“니콜라스 왕자님께서는, 무엇을 준비해주셨나요?”
제발, 제발, 제발. 이 상황을 종식할 수 있는 선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정상적인 것으로 부탁드릴게요.
“아그네스 영애, 왼쪽 손을 제게 내밀어 주실 수 있으신가요. 가능하면 눈도 감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또 손인가요. 설마 니콜라스 왕자도 마술을 준비한 것은 아니겠죠? 파노스 왕자의 선례가 있어서 조금 머뭇거렸지만, 결국에는 니콜라스 왕자의 말대로 눈을 감고 왼쪽 손을 드렸습니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제 왼손을 니콜라스 왕자가 잡는 느낌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손가락도 쓰다듬고 계시네요. 니콜라스 왕자는 대체 무엇을 하는 거죠?
“되었습니다. 이제 눈을 뜨셔도 됩니다.”
눈을 뜨고 왼손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 아닌가 순간 생각했다가, 손가락에서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습니다.
왼손 약지에 백금 반지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백금으로 만든 약혼반지입니다. 제 마음을 담았습니다.”
반지의 의미는 ‘영원히 나와 함께 해주세요’. 특히 백금 반지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색이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광택이 변화하면서 고급스러워지는 것으로 유명하기에, 진정한 의미로 백년가약을 맺는 데 사용되는 물건입니다.
평소대로라면 니콜라스 왕자에게 약혼반지 같을 걸 받았다면, 사실상 약혼 파기가 불가능해지기에 수갑이나 마찬가지로 여겼을 물건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좋네요. 파노스 왕자가 만들어 놓은 논란을 잠재우려면 이 정도의 의미가 있는 물건은 되어야죠.
“감사합니다, 니콜라스 왕자님. 정말 기쁜 선물이네요.”
마음 한편에선 앞으로의 일을 걱정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조건 기쁨을 표현해야겠죠. 지금 여기에서 어중간한 태도를 보이면 파노스 왕자와의 은밀한 관계가 있다는 추문이 돌 테니까요. 차라리 니콜라스 왕자와 죽고 못 사는 사이라는 소문이 도는 편이 백배 낫습니다. ……그만큼 파혼은 힘들어지겠지만요.
“아그네스 영애가 기뻐하시니 저도 정말 기쁩니다.”
파노스 왕자 덕에 손쉽게 제게 목줄을 채우셨으니 기쁘지 않을 리가 없죠. 역시 빈틈없는 왕자, 평소라면 제가 온갖 핑계를 대며 거절했을 약혼반지를 기어이 제 왼손에 끼우셨네요.
“아그네스, 이번에는 저희 선물이에요.”
“이 물건을 네 생일에 주려고 준비를 많이 했다.”
이번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차례네요. 두 분께서는 선무로 조금 부피가 있고 무거운 선물을 건네주셨습니다. 포장지를 열어보니, 내용물은 상당히 두껍고 큰 책이네요.
“앙겔로풀로스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비전이에요. 영지 경영과 귀족 간의 처세, 사용인을 고용하는 방법 등 세대를 이어온 지식이 담겨 있어요.”
“책의 뒷부분은 빈 장이니까, 아그네스가 적고 싶은 걸 마음대로 적으면 된단다.”
대대로 이어온 책이라기에는 표지는 새것처럼 깨끗합니다. 첫 장을 열어보니, 제 여덟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글귀가 어머니의 글씨체로 적혀있었습니다.
이어서 책장을 넘기다 보니, 일부분은 어머니의 부드럽고 편안한 문체가, 또 일부분은 아버지의 진하고 선명한 문체로 적혀있었습니다. 앙겔로풀로스 가문의 비전이니만큼 사용인에게 맡기지 않고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한 장 한 장 직접 필사하신 것 같네요. 이 정도의 양이라면 상당히 오랜 시간 전부터 준비하신 물건임이 틀림없겠죠.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아버지께서 적은 탄생일 축하 메시지가 적혀있네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오늘 받은 선물 중 가장 가치가 큰 물건인 것 같네요.
게다가 책을 선물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신뢰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질적으로 가치가 있는 선물보다도, 부모님께서 언제나 저를 신뢰한다는 의미를 전해주셨다는 사실이 더 감격스럽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머님, 아버님. 제게 물려주신 이 지식은 제 목숨보다도 중요하게 여기고, 어느 순간에도 신중하게 사용하겠습니다.”
비전을 가슴에 안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제 오늘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네요. 바로 제이스가 주는 선물이죠. 어떤 선물을 전해주려고 하는지는, 사전에 살짝 들어서 어렴풋이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이스가 앙겔로풀로스에 온 뒤, 첫 번째 연구 성과를 발표하겠다고 했으니까요.
‘아름다움의 비약’일까요? 아니면 ‘지혜의 영약’일까요? 일주일에 한 번씩 제이스가 연구하는 것을 도와주기는 했지만, 약물 관련 지식이 없는 저는 어떤 물약을 만드는 건지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으니까요.
“아그네스 누님, 먼저, 정말로 죄송한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죄송한 부탁이라니 뭘까요. 아, 혹시 연구 성과의 임상 시험을 부탁하려는 걸까요. ……살짝 걱정되지만 괜찮겠죠. 게임 후반에 나오는 ‘그 물약’이 벌써 완성됐을 리는 없으니까요.
“네, 얼마든지요.”
“그렇다면, 오른쪽 손의 장갑을 벗어서 손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
무대 위의 사람들 사이에서 약간의 어색한 기류가 흘렀습니다.
당연하게도, 제가 장갑을 끼고 있는 오른손에는 제법 큰 화상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제이스의 연구실에 난 불을 끄다가 입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방에서 입은 상처라고 둘러댄 그 상처입니다. 그리고 무대 위에 있는 사람 중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파노스 왕자밖에 없고요.
“제이스 군, 그런 말은……”
“알겠어요.”
니콜라스 왕자가 말리려고 했던 것 같지만, 제가 결단을 내렸습니다. 저는 제이스를 믿으니까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여기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제 약점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죠.
오른손의 장갑을 벗고, 손등에 난 화상 상처를 꺼냈습니다. 제 오른손의 상처를 처음 본 손님들이 수군거리는 게 느껴지네요. 무대에 같이 서 있는 파노스 왕자도 놀란 표정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고요. 이왕 보여드리게 된 거 확실하게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손등을 관객석 쪽으로 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아그네스 누님. 그렇다면, 이번에는 손을 제게 주셨으면 합니다.”
제이스에게 오른손을 내밀었습니다. 제이스는 왼손으로 제 오른손을 손등이 위로 향하게끔 잡았습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무언가 액체가 든 병을 품속에서 꺼내고 있네요.
마시는 약인가 싶었는데, 제이스가 갑자기 제 오른손 손등에 그 액체를 붓기 시작했습니다.
제이스가 붓는 물약이 닿는 손등을 따라 아래로 흐르고, 화상 부위에서는 살짝 따뜻한 감각이 느껴졌습니다. 온기가 느껴지고 있는 제 오른손에서 벌어지는 일에, 저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상으로 흉한 상처가 남았었던 제 오른손이, 서서히 치유되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
…….
홀 안에 있는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과정을 숨죽이고 지켜보았습니다. 저도, 니콜라스 왕자도, 아리아나도, 파노스 왕자도,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도, 손님으로 오신 귀족들도, 사용인들도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기이한 광경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제이스가 갖고 있던 액체를 모두 따르고 나니,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던 제 오른손 손등의 피부는 새것이나 마찬가지인 모습이 되었습니다.
“제이스, 이게 어떤 약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제가 앙겔로풀로스의 자식이 된 이후, 처음으로 만들어 낸 연구 성과인 ‘화상 치료의 물약’입니다.”
제이스의 설명 이후 홀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수선해졌습니다. 귀족들은 귀족들끼리, 사용인은 사용인들끼리, 무대 위에 올라와 있는 왕자들도 제이스의 연구 성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네요.
“고마워요, 제이스. 제 화상 상처를 걱정해서 이런 물약까지 만들어 주고, 정말 최고의 생일 선물이었어요.”
“아닙니다. 아그네스 누님에게 드리는 탄생일 선물은 이 ‘화상 치료의 물약’ 하나가 아닙니다.”
이미 충분히 대단한 선물인데, 여분의 물약이라도 더 주려는 걸까요?
“아그네스 누님에게는, 이 ‘화상 치료의 물약’에 대한 모든 권리를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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