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아리아나 세이타리디스 : 무도회 2
* * *
홀에서 나오자마자, 아그네스 영애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바람을 쐬러 다녀온다던 아그네스 영애는, 홀 앞에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아그네스 공작 영애?”
“……네?”
아그네스 영애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제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저와 함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니콜라스 왕자님을 찾고 있는 모양입니다.
“니콜라스 왕자님께서는 안 계세요. 메인 홀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니까요.”
“……그렇군요.”
그 말을 듣자마자 아그네스 영애는 눈물을 마저 닦고 표정을 고쳤습니다. 그리고 뻔뻔한 표정으로 돌아와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그네스 영애는 왜 울고 계셨나요?”
“울지 않았어요.”
“바람을 쐬러 나가신다고 하시고 여기서 울고 계셨나요?”
“전혀 아니에요.”
“제가 니콜라스 왕자님과 어울렸던 게 슬퍼서 그런가요?”
“당치도 않아요.”
아그네스 영애는 자신이 울었다는 사실을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자신이 울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일까요.
“저,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 공작 영애는 전혀 운 사실이 없습니다. 정말로 바람을 쐬고 왔어요. 그리고 아리아나 세이타리디스 후작 영애가 저보다도 더 니콜라스 왕자님에게 어울린다고도 생각하고 있어요.”
앙겔로풀로스 공작의 이름까지 빌려서 부정하니 저로서는 더 추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니콜라스 왕자님에 관한 이야기는 저도 당황스러웠습니다.
“말도 안 되는 말씀하지 마세요. 약혼자는 아그네스 공작 영애님이시잖아요.”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제게 니콜라스 왕자님은 감당하기 힘들지도 모르는 분이니까요. 아리아나 영애가 아마 저보다 더 사랑하실 수 있을 거예요.”
어째서 아그네스 영애가 저에게 니콜라스 왕자님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를 시험하고 있는 걸까요.
“그런 말씀은…….”
“아리아나 영애는 계속해서 자신의 사랑은 관철하면 좋아요. 전 언제든지 니콜라스 왕자님이 원하면 파혼할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요. 힘들거나 불가능한 사랑이라고 생각해도, 제가 도와드릴게요. ……오늘 이야기는 필요하다면 전부 잊으셔도 괜찮아요.”
그렇게 말한 아그네스 영애는 제게 여러 의문을 남기고 메인 홀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아그네스 영애와 니콜라스 왕자님의 관계에 의문이 생겨서, 다시 메인 홀로 들어갔습니다.
메인 홀로 돌아간 아그네스 영애는 흐르고 있는 곡이 끝날 때까지 니콜라스 왕자님과 사담을 나누다가, 새로운 곡이 나오니 서로 손을 잡고 무대의 중앙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곡이 다시 연주되기 시작하자, 발을 맞추어 두 사람이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화려한 왕자님의 외모와 의상 묻혀 수수한 아그네스 영애의 모습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니콜라스 왕자님의 독무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두 사람이 춤을 추는 동안 아그네스 영애는 전적으로 니콜라스 왕자님의 움직임을 따라가기만 할 뿐, 절대 자신이 주도하여 움직이는 안무를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아그네스 영애가 어째서 자신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자랑하는 대신, 니콜라스 왕자님에게 묻히듯이 어울리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의상이 간소하면 안무로라도 눈에 띄고 싶어질 텐데, 그런 모습도 전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을 때, 니콜라스 왕자님이 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제 약혼자가 오늘 당신 같은 옷차림을 하고 나타날 사람이었다면, 전 그녀를 약혼자로 고려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말을 기억해내고 나니, 지금까지의 의문이 해결되는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니콜라스 왕자가 왜 자신의 약혼자를 돋보이게 하지 않고 자신의 그림자와 마찬가지인 존재로 만들었는지, 춤을 추는 내내 아그네스 영애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혹이 서서히 풀려갔습니다.
니콜라스 왕자는 사실 극한의 나르시시스트였던 겁니다. 왕가 주최의 무도회라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신보다 자신의 약혼자가 눈에 띄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자신의 약혼자에게 수수한 옷차림과 옅은 화장을 시키고, 자신의 춤을 따라오게만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저에 대해 화내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무도회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었는데, 저처럼 화려한 옷차림을 가진 사람이 춤 상대라면 시선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분노했던 겁니다. 심지어 춤도 니콜라스 왕자를 돋보이게 하는 춤이 아니었으니까요.
진실을 깨닫고 나니, 지금까지 니콜라스 왕자에게 가지고 있던 호감은 거품처럼 가라앉았습니다. 니콜라스 왕자는 화려한 외모와 왕자라는 신분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권위주의적인 나르시시스트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약혼자까지 희생시키는 여자의 주적이었습니다.
‘아리아나 영애가 저보다도 더 니콜라스 왕자님에게 어울린다고도 생각하고 있어요.’
‘제게 니콜라스 왕자님은 감당하기 힘들지도 모르는 분이니까요.’
이제야 아그네스 영애가 니콜라스 왕자에 대해 했던 말의 진의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그네스 영애도 왕자의 약혼자로 사교계에 첫 데뷔를 하는 오늘 같은 날 마음껏 꾸미고 화려한 춤을 추고 싶었지만, 니콜라스 왕자의 압박 때문에 가엾게도 꾸미지도 못하고 수수한 옷차림으로 나타났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아그네스 영애는 울고 있었던 걸까요. 분명 저라면 니콜라스 왕자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기뻐했을 텐데 말입니다. ……어쩌면 그 눈물은,
“아그네스 님…….”
그 눈물은 제가 니콜라스 왕자를 상대하게 되었을 때, 제 걱정을 하며 흘린 눈물인 것 같습니다. 이런 옷차림을 하고 나타난 제가 니콜라스 왕자를 상대하면 당연하게도 왕자의 심기가 좋지 않을 것이고, 그로 인해 제가 받게 될 마음의 상처나 집안에 가해지는 압박을 걱정하셨던 겁니다.
저를 상처 입지 않게 하시려고 니콜라스 왕자의 춤 상대를 양보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분명 아그네스 님의 험담을 시작하며 물러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행위는 결국 저와 제 가문에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을 겁니다.
거기까지 예상했던 아그네스 님은 어쩔 수 없이 그 자리를 양보하고 뒤에서는 걱정하고 계셨던 겁니다. 그런 고귀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아그네스 님의 생각을 저는 읽을 생각도 하지 않고 헐뜯고 있었습니다.
저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하며, 니콜라스 왕자와 아그네스 님이 춤을 추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쉬지도 않고 네 곡이나 무용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시종일관 니콜라스 왕자의 움직임에 아그네스 님이 따라가는 방식입니다.
자신의 명예욕을 위해서라면 파트너가 지치는 것조차도 용납하지 않는 것일까 싶었는데, 아그네스 님이 니콜라스 왕자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니콜라스 왕자가 미소를 짓는 것도 보았습니다.
다섯 곡, 여섯 곡, 일곱 곡……무도회의 대단원까지 두 사람은 춤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그네스 영애가 귓속말한 이후로는 서로 대화를 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그네스 영애의 지친 모습이 보임에도 춤을 멈출 생각은 없고 휴식하겠냐는 말조차 걸지 않는다는 것은, 아마 아까 전의 귓속말을 통해 무언가 이야기를 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이 무도회에서 마음껏 왕자님을 돋보이게 해드릴 테니, 아그네스 님도 자신의 부탁을 들어달라는 거래가 아닐까 예상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그네스 님이 한 행동과 성격을 보았을 때, 그 부탁이라는 것은 아마……아마…….
“아, 아그네스 님…….”
오늘 제가 저지른 일에 관해서 이후 저를 추궁하거나 저희 집안에 압박을 넣지 말아 달라는 말씀일 겁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목이 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만나자마자 무시하고 결례를 저지르며 실수했는데도, 아그네스 님은 저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시고 제 잘못을 덮어주기 위해 희생하고 계십니다.
아그네스 님의 마음씨와 품격을 느끼며, 제가 지금까지 갖고 있던 것들은 모두 허영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그네스 님이야말로 귀족 영애의 본보기고 저는 발톱만큼도 따라가지 못하는 이기적인 소녀에 불과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그네스 님에게 은혜를 입었으니, 반드시 보답해야 합니다. 아그네스 님이 가장 바라고 계신 것은 니콜라스 왕자와의 파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마 이 나라 안에서는 왕자의 입김이 닿아 불가능할 겁니다.
그렇다면 답은 외국으로 도망가는 겁니다. 아무리 차기 국왕이라도 외국에서까지 영향력을 끼치기는 힘들 겁니다. 제가 아버지의 일을 더 배워서, 다른 나라에 입지를 구축하고, 어느 정도 기반이 마련되면 아그네스 님을 데리고 외국으로 도망가는 겁니다!
다른 영애라면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상업 귀족 가문의 장녀인 저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그네스 님은 저와 함께 평생 행복하게 지내실 수 있습니다.
제가 아그네스 님에게 품은 이 감정은, 니콜라스 왕자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힘들고 불가능한 사랑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리아나 영애는 계속해서 자신의 사랑은 관철하면 좋아요. 힘들거나 불가능한 사랑이라고 생각해도,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그네스 님의 말씀을 회상하고 결의를 굳혔습니다.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아그네스 님을 행복하게 만들어 드리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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