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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용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50화 (50/92)

〈 50화 〉 카펠라의 마탑

* * *

카펠라가 애런에게 반지를 구매한 것은 마왕 토벌 이후 인간계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용사님, 마왕 토벌도 하셨으니 저희 왕국에서 공주랑 결혼하고 사시는 건 어떻습니까?”

오르도 왕국의 왕이 두 손을 비비면서 말했다. 하지만 애런은 별로 관심이 없었는지 거절했다.

“용사님, 칼리고 제국에 있는 절세미인의 호문쿨루스들을 모두 드리겠습니다. 저희 제국으로 오시는 건 어떠신지요?”

하얀 제복을 입은 제국의 황태자가 물었다. 역시 애런은 거절했다.

“용사님, 성녀님은 어떠신가요? 같이 마왕성까지 기시면서 사이도 각별해보시던데요.”

앙겔로크라티카의 보좌주교가 실실 웃으면서 물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가고 있던 카펠라는 흠칫 놀라며 애런을 바라봤다.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누구 마음대로 팔려는거야?”

마계의 건조한 바람에 백금발을 휘날리고 있던 성녀, 아리아나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렇다네요.”

애런의 대답도 듣고 나서 카펠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리아나 정도라면 애런도 마음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럼 베네쿠스의 대마법사…”

“시끄러워요.”

옆에서 카펠라를 팔려고 했던 마법사를 노려보며 입을 다물게 했다.

막상 물어봤다가 애런에게 거절당하는 것이 두렵기도 했고, 그런 건 직접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애런이 여자에게 너무나도 흥미가 없어보인다는 것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상 그 무엇에도 흥미가 없어 보였다.

저 눈동자에는 무엇을 보는 것인지 항상 공허했고, 감정도 웬만해서는 드러내지 않았다.

혹시 로봇이 아닐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체온이나 따뜻한 배려는 그도 마음이 존재하는 인간임을 알려주었다.

“애런, 마왕도 토벌했겠다 이제는 조금 행복하게 사는 게 어때?”

아리아나가 남들은 듣지 못하도록 나지막히 물었다. 애런은 텅 빈 눈동자로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글쎄요… 과연, 마왕을 죽였다고 해서 인간을 위협하는 것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걸까요?”

그는 단신으로 마왕의 목을 베고도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바라보는 카펠라는 그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조금 무방비하게 웃고, 놀고, 자면 어떤가. 이제 마왕은 죽였는데.

“너 혹시 고자인 거니?”

“...”

애런은 벙찐 표정으로 아리아나를 바라봤다. 그건 카펠라도 마찬가지였다. 농담삼아 물어보기에는 무례한 질문이 아닌가?

“하하… 그렇게 보이실 수도 있지만, 저도 성욕은 있어요. 다만 조절을 하고 있을 뿐이죠.”

“그래? 마계에서 꽤 오랜 시간을 지냈는데, 나나 카펠라나, 다른 여자들에게 손대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착각했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곳에서 긴장을 놓을 수는 없잖아요?”

그 말은 맞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마족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기들의 영역에 침입한 인간들을 죽이기 위해서 습격해왔으니까.

그래서 쉴 틈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피곤에 찌든 얼굴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성욕에 지는 것은 서큐버스들이 습격할 때 뿐 일테였다.

“나는 이렇게나 고생한 우리는 그만큼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그렇죠.”

“그런데도 너는 고독을 고집하는구나.”

아리아나는 애런의 등을 툭툭 치고 앙겔로크라티카의 성직자와 이단심문관들과 함께 돌아갔다.

각자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애런만은 홀로 서서 마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펠라는 마법사들을 먼저 돌려보낸 뒤 애런의 곁에 섰다.

“뭘 그렇게 봐요?”

“... 나는 돌아갈 곳이 없구나 싶어서.”

칼리고 제국, 오르도 왕국, 앙겔로크라티카, 베네쿠스도 모두 용사인 애런을 이용하고 싶어 하는 곳이지, 편안하게 쉴만한 곳은 아니었다.

카펠라는 쓸쓸한 표정으로 얘기하는 애런을 올려다보며, 돌아갈 곳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베네쿠스에 있는 마탑으로 돌아가 같이 마법 연구를 하는 것도 좋지만, 그건 애런이 싫어할 것 같았다.

애런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없는 곳이 좋을 것 같다. 예를 들자면 어느 나라에도 포함되지 않은 마을에 작은 집을 지어서 둘이서 같이 산다던가…

‘내가 무슨 생각을…!’

얼굴에 열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 카펠라는 뺨을 손으로 두드렸다. 하지만 생각을 멈추지는 않았다. 만약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최연소 마탑주라는 명예도 포기하고 당장 달려갈 수도 있었다.

명예와 부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런 것들이 없더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면 좋은 거지. 문제가 있다면 카펠라에게는 그걸 말할 용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말해...! 말을 안 하면 기회조차 없는 거라고.’

카펠라는 자기 살을 꼬집으며 생각하는 것을 말하라고 재촉했지만, 입에는 자물쇠가 걸렸는지 열리지가 않았다.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카펠라를 보고 애런은 피식 웃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마족들이 인간계로 넘어오지 않도록 용의 협곡 근처에 있는 숲에서 감시하면서 살려고.”

“네…? 마왕도 죽였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요.”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야.”

애런도 이유를 몰랐다. 그냥 직감이 그러라고 시켰기에 그렇게 할 뿐이었다. 카펠라는 이대로 있다가는 애런이 숲에서 홀로 살아갈 것 같아서 우물쭈물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도 도와드릴까요?”

“도와준다고?”

“그… 용사님이 강하기는 해도 혼자 있으면은 쉴 때도 불안하잖아요? 외롭기도 할 테니 혼자서 지내는 것보다는 둘이 낫지 않을까요?”

둘러서 말한거기는 했지만, 카펠라는 부끄러움으로 귀까지 빨개진 채로 말했다. 애런은 카펠라의 머리를 흐트릴 정도로 쓰다듬었다.

“고마워, 그래도 카펠라는 자기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이런 삶을 사는 건 나 하나로 족해.”

“...”

그렇게까지 말해버려서 같이 사는 것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다만, 애런이 혼자라고 느끼지는 않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용의 협곡에서 얻은 마석으로 반지를 만들지 않았어요?”

“아, 그거 말이야?”

애런은 주머니에서 푸른 빛을 띠는 마석이 박힌 반지를 꺼냈다.

“남들은 이 마석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못 알아보던데, 너는 다르게 보이니?”

“뭐, 완전히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는요. 그래서 그 반지를 제가 사고 싶은데 금화 2000닢이면 살 수 있을까요?”

솔직히 카펠라가 보기에 금화 2000닢이나 할 정도의 마석은 아니었다. 하지만 숲에 살더라도 가끔씩 넘쳐나는 돈을 쓰기 위해 인간 세계로 나와주기를 바라며 평생 쓸 수 있을 정도의 거금을 값으로 부른 것이었다.

“금화 2000닢이나 내겠다고? 내가 보기에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아니요, 솔직히 말해서 금화 2000닢으로도 부족한 것 같아요.”

“아니아니 괜찮아. 어차피 혼자 살 거니까 그냥 공짜로 가져가도 돼.”

카펠라는 마다하는 애런의 손에 금화 주머니를 강제로 쥐어주고, 끼고 있던 반지도 빼서 넘겨줬다.

“이 정도면 얼추 값어치가 맞겠네요.”

“카펠라, 이 반지 비싼 아티팩트잖아. 진짜 이만큼 필요한 건 아니니까 도로 가져가.”

“이건 선물이에요. 혼자 지내면서 외롭다고 생각되면 이거 보고 제 생각이나 가끔 해주세요.”

단호하게 모든 것을 넘겨주고 달랑 반지 하나를 가져가는데도 만족스럽게 배시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애런도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베네쿠스로 돌아온 카펠라는 금화 2000닢 이상을 지불하면서 애런에게 산 반지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손가락에서 빠지지 않는 마법을 부여했다.

하지만 어이가 없게도 반지를 끼기 전에 웬 빌어먹을 새가 물고 도망쳐버린 것이었다…

그 이후로 반지를 찾기 위해서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찾지 못하고 시간만 흘렀다. 그러다가 용사가 탄생했다는 얘기를 듣고 확인하기 위해서 간 모노크롬에서 아일라가 반지를 끼고 있는 모습을 봤던 것이다.

*

과거와 다르게 카펠라는 애런에게 반말을 하며 화를 내고 있었다. 이따금씩 분을 참지 못하고 애런을 때리기도 했지만, 힘을 실어서 때린 것은 아니었다.

“내가 혼자 숲에 틀어박혀서 살겠다는 사람을 위해서 그만큼이나 해줬는데… 내 반지인걸 알고 있으면 돌려주러 와야 하는 게 정상 아니냐고.”

“금화 2000닢에 샀던 게 그런 의미인 줄은 몰랐네.”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카펠라가 그런 생각을 했을 줄은 몰랐던 애런은 감동을 하며 품속에 든 금화 주머니를 꺼냈다.

“금화 2000닢 조금 안 되지만 이걸로 갚으면 될까?”

“...”

카펠라는 돈 때문에 이러는 줄 아는 애런에게 화가 나는 것을 넘어서 어이가 없어졌다.

“내가 고작 금화 2000닢을 받자고 이런 얘기를 한 게 아니잖아. 그냥… 하아…”

“너도 나이를 먹다 보니 한숨이 늘었구나. 지금까지 살아있으면 네 나이가 몇 살이더라?”

전생에 봤던 카펠라의 나이와 그 이후로 흐른 시간을 손가락을 접어가며 세는 애런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지마.”

“... 알겠어.”

살짝 놀려볼 생각으로 말했던 거였지만, 카펠라가 진심으로 정색을 하며 살기를 뿜어댔기에 그만뒀다. 전에는 놀려도 가만히 있는 순한 성격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니 성격도 조금 바뀐 모양이었다.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는 뭐예요? 이제는 평범하게 살 생각이 들었나?”

“평범하게 살고 싶었지만 그렇게 잘 되지는 않더라.”

“그게 무슨 소리에요?”

당연히 평범하게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운명에 애런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도 알잖아. 내 동생이 용사로 선택받은 거.”

“잘 알고 있지. 내가 걔한테 마법 가르쳐주고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마왕을 죽이려고.”

“뭐… 대체 왜? 이제 평범하게 살 수 있으면서.”

전생에 그만큼이나 고생을 해서 지금의 평화를 만들어놨으면서, 보답도 받지 못한 채 죽었으면서, 왜 자신이 일궈놓은 평화를 누리지 않고 그런 힘든 길을 가려고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아일라한테만 짐을 지게 할 수도 없으니까. 아, 생각난 김에 아일라 하고 연락해도 돼?”

“그건 나중에 해도 되잖아요. 어쨌든 나는 반대야. 용사도 아니면서 마왕? 터무니 없는 소리잖아. 그렇게 개죽음 당하는 모습 난 못 봐요.”

“그런 점은 여전하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용사나 성녀를 걱정해주던 어린 대마법사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마치 전생 때로 돌아간 듯한 익숙한 분위기는 오랜만에 느끼는 평온함이었다.

“아니, 웃지마요. 걱정해줬더니 왜 웃어?”

애런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을 보고 있자니, 걱정을 해줬던 게 무안해져서 카펠라가 괜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카펠라, 전생부터 나를 봐왔던 너니까 내 성격 잘 알잖아. 난 이미 결정했으니까 그걸 바꿀 생각은 없어.”

“그래도 안 돼. 이젠 스스로 행복해지는 길을 골라요.”

“이미 충분히 행복해.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고, 귀여운 여동생도 있었고, 친구도 만들어봤고, 너랑도 다시 만났잖아.”

“그걸로 만족해요? 내가 보기에는 아닌 것 같은데.”

애런에 대해서 너무 잘 아는 카펠라는 그의 연기를 금방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전생과는 달리 생기가 있는 눈은 감정을 읽기가 너무나도 쉬웠다. 그리고 그 눈은 평범하고, 평화로운 삶을 바라고 있었다.

진심을 들킨 애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카펠라를 지긋이 쳐다봤다.

“하아… 왜 이렇게 고집불통인지.”

카펠라는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대신 마왕 죽이러 갈 때에는 나도 불러. 혼자 갈거다 그러면 진짜 화낼거에요.”

“고마워. 나중에 보답을… 해주고는 싶은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있을지는 모르겠다.”

“보답?”

“천천히 생각해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다 해줄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뒀던, 애런이 용사였던 전생에는 이루지 못 했던 바람을 하루라도 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다 해준다고 했다? 나중에 말 바꾸지 마요.”

“안 바꾸니까 걱정하지 마.”

애런은 처음 보는 카펠라의 앙큼한 미소를 보고 조금 불안한 마음이 생겼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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