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카펠라
* * *
애런과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기억. 카펠라는 어렸을 때의 자신이 저지른 창피한 일을 떠올리고는 얼굴에 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용사인 애런이 죽을 때까지 묻어두겠다던 그 사건. 분명 오래된 일이라 잊고 지냈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생각하지 않고 잊으려고 노력했었다.
마탑주가 되고, 대마법사가 된 카펠라의 삶에서 지우고 싶은 흑역사는 애런이 마왕을 죽이러 가기 전에 일어났다.
*
적색의 대지, 햇빛은 들지 않지만 어두워지지는 않는 하늘. 마계는 사람에게는 친절하지 않은 환경이었다.
“카펠라, 괜찮니?”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백금발을 흩날리며 앞서가고 있는 전 성녀의 자색 눈동자에 카펠라가 비쳤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카펠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아… 후우… 괘, 괜찮아요. 아마도.”
카펠라는 그 손을 잡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려고 했으나, 발이 미끄러지며 넘어지고 말았다.
“아으.”
마계의 거친 흙은 연약한 피부를 가차 없이 찢어놨고, 그 상처에 피가 맺히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어, 어?”
백발의 미남, 전생의 애런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카펠라를 등에 업었다.
마계까지 따라올 정도로 마법사로서 높은 경지에 올라있던 카펠라는 애도 아닌데 어부바를 당하는 것이 창피했다.
거기다 어린 카펠라는 용사인 애런에 대한 동경, 그의 완벽한 외모와 배려 넘치는 행동에 연심을 품고 있었다.
그것들이 겹쳐지며 토마토처럼 빨개진 얼굴과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숨기기 위해서 애런의 등에 얼굴을 박았다.
“성녀님, 치료 좀 해줘요.”
“응.”
따스한 빛이 카펠라를 덮었다. 상처는 금방 나았고 오히려 전보다 몸 상태가 좋아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이 정도로 뭘.”
성녀답게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카펠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애 취급을 당하는 것은 싫지만, 성녀의 따스한 손길은 항상 기분 좋았다.
하지만 그런 기분을 만끽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마계는 인간들을 내쫓기 위해서 끊임없이 마족을 내보내고 있었고, 마족들은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셋은 아무런 상의도 없이 자신들이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애런은 정면의 마족들을 베었으며, 성녀는 왼쪽에서 오는 마족들에게 정화의 불을 날렸다.
“Tairk oyao lop.”
카펠라의 영창이 끝나자 공중에 적색의 작은 태양들이 생겨난다. 작지만 그 온도는 모든 것을 녹여버리기에는 충분했다.
“Vialu sua.”
콰아아아! 작은 태양들은 오른쪽에서 오고 있던 마족들을 향해 날아갔다. 크기가 점점 커지더니 다가오던 마족들을 전부 집어삼킬 정도가 되었다.
“역시 용사님하고 성녀님이 있으니 무적이네요.”
카펠라는 애런의 등에 업힌 채로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이 험난한 마계에서 웃을 수 있는 것은 전부 든든한 애런과 성녀의 덕이었다.
“그래도 방심하면 안 돼.”
“알고 있어요.”
몇 걸음을 옮기지 않았는데 다시 마족들이 몰려온다. 다시 그들을 죽이고 전진한다.
몰려오고 죽이고 몰려오고 죽였다. 그것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이제 눈앞에는 하늘까지 닿을 듯한 거대한 검은 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왕성.”
그걸 보고 셋은 동시에 말했다.
인간들이 마계로 오게 된 이유. 마왕성에 있는 마왕을 죽이고 마족들이 인간계로 넘어오지 않게 하는 것이 인간들의 목표였다.
이 인류의 공동 목표를 위해 칼리고 제국의 과학 병기, 앙겔로크라티카의 이단심문관, 오르도 왕국의 기사, 베네쿠스의 마법사들이 모두 힘을 합쳤다.
그리고 결국 인류는 마왕성까지 도달한 것이었다. 인류의 목표가 멀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몸도 마음도 지쳤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마왕성은 또다시 넘어야 할 산으로 보이지 않고,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결승선을 지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저기에 가서 마왕을 죽인다면 끝을 보이지 않던 마족들도 더는 보지 않아도 되겠지. 잠을 자면서도 긴장을 놓지 않아야 했던 불편한 밤도 끝이 나겠지.
“얘가 방심하지 말라고 방금 그랬는데.”
“아야.”
애런이 손가락을 튕겨서 실실 웃고 있는 카펠라의 이마를 때렸다.
그 순간 세상이 어두워졌다.
“어?”
모든 것이 사라졌다. 눈앞에 보이던 마왕성도, 옆에서 걷고 있던 성녀도, 카펠라를 업고 있던 애런도 사라졌다.
카펠라는 갑자기 일어난 사태에 잠깐 당황했지만, 금방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분석하기 시작했다.
“Hyrk la viive.”
화아아악! 밝은 빛이 카펠라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며 어둠을 밝혔다. 어둠이 사라지고 보이는 적색의 대지, 기분 나쁜 하늘은 이곳이 아직 마계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용사님?”
주위를 둘러보며 같이 있었던 애런을 불렀다.
“성녀님?”
옆에서 걷고 있던 성녀를 찾아봤지만 없다. 둘을 믿으며 버티고 있던 카펠라의 마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침착해… 정신 차려야지 살 수 있어.”
손으로 볼을 치고는 씩씩하게 걷는다. 다른 사람들과 떨어진 것일 수도 있다 생각하며,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걸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걸어도 애런이나 성녀의 흔적도 보이지 않고, 마왕성조차 보이지 않는다.
“Tairk oyao lop.”
계속해서 덤벼드는 마족들은 어렵지 않게 쓰러뜨리고 있다. 그러나 카펠라의 작은 불안감은 순식간에 불어나 몸을 떨게 했다.
“왜, 왜 아무도 없는 거야…”
언제까지 혼자서 마족들의 습격에서 버텨야 하나. 피곤하다. 눈이 감길 것만 같다. 하지만 잘 수는 없다. 지금 곁에는 잠을 자고 있을 때 지켜줄 애런이나 성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며칠 동안 자지도, 쉬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몸이 한계에 봉착했다.
반쯤 감긴 눈에 보이는 광경은 지진이라도 일어났는지 과도하게 흔들렸다. 실제로는 땅이 흔들리는 것이 아닌 카펠라의 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지만.
“크르르르르…”
멀리서 짐승의 소리가 들렸다. 이때까지 상대했던 마족과는 달리 강해 보이는 녀석이었다.
사자의 갈퀴에 고릴라의 얼굴, 곰 같은 몸에 용의 꼬리를 가지고 있는 괴물이었다.
“... tairk…”
영창을 하려고 해도 말이 나오지 않는다.
“크와아아아아!!!”
땅을 울리는 괴물의 포효에 카펠라의 다리가 풀렸다. 털썩 땅에 주저 앉아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괴물을 올려다봤다.
‘영창을… 해야 해.’
쿵! 쿵! 쿵! 괴물이 땅을 디딜 때마다 진동이 카펠라에게도 전해진다. 하지만 파르르 떨리는 입술은 영창을 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아…”
죽는다. 몸은 움직이지 않고 마법도 사용하지 못한다. 어린 카펠라는 죽음을 앞두고 몸을 떨며 울음을 터뜨렸다.
“싫어… 죽기 싫어…”
눈물이 시야를 일그러뜨렸다. 괴물의 몸이 흐느적거리며 카펠라를 향해 뛰어온다. 눈앞에 있는 죽음을 보고 싶지 않았다. 카펠라는 몸을 둥글게 말고 눈을 질끈 감았다.
“용사님… 도와주세요.”
콰앙!!
그때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거대한 괴물에 밟혀 죽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카펠라는 눈을 살짝 떠서 괴물이 있던 곳을 바라봤다.
괴물의 상반신은 일렁이는 공간에 베어져 재가 되어 소멸하고 있었고 하반신은 땅에 쓰러져있었다.
“용사니임…”
흘러나오는 눈물을 옷 소매로 닦아내자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애런이 보였다.
“괜찮아? 마왕이 사용한 마법 때문에 혼자만 다른 공간에 격리되었었던 것…”
“용사님!”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죽을 뻔한 상황에서 애런이 구하러 와준 것. 그 사실에 터질 것만 같이 커졌던 불안감이 사라졌다.
카펠라는 벌떡 일어나서 애런을 향해 달려가 두 팔을 벌리고 꽉 껴안았다. 그러니 다시 안정되는 것 같았다.
“무서웠어요…”
“이제 괜찮아.”
“...”
진정되고 나니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왜 이렇게 팬티가 축축할까. 믿기 싫은 사실에 카펠라는 그쳤던 울음이 다시 터질 것만 같았다.
“아, 아니에요! 이건… 그러니까 이건… 이건 마법에 실패… 해서 이런 거… 에요.”
스스로 말하고도 어이가 없었다. 애런을 올려다보니 멋쩍게 웃고 있었다. 그걸 보니 오히려 죽는 편이 나았을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달라붙어 있던 탓에 애런의 바지도 축축해졌다. 카펠라는 애런의 진해지는 바지색을 보며 거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카펠라는 치맛자락을 꾹 누른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굴을 못 들 것 같았다. 창피해서 죽고 싶다.
“마법으로 말리면 되니까 너무 신경 쓰지는 마.”
“죄, 죄송해요!”
애런이 바지에 손을 대자 바람의 정령들이 나와서 축축했던 바지를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말렸다.
“팬티 말려줄 테니 잠깐 벗어줄래?”
“... 네…”
축축해진 팬티를 벗어서 건네주면서 얼굴이 터질 듯이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용사님… 조금 전 일은 부디 잊어주세요.”
뽀송뽀송해진 팬티를 입으며 카펠라는 말했다.
“걱정마. 죽을 때까지 묻어둘게.”
“제발 잊어주세요..! 안 그러면 저 창피해서 죽을지도 몰라요…”
사실 애런이 잊는다고 해도 카펠라의 머릿속에서 이 기억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왜 그런 짓을 저질러서 이러냐고 카펠라는 자신을 탓했다.
“무슨 일 있었어?”
애런이 가른 공간으로 나가자 성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카펠라를 쳐다봤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직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상태여서 대답을 하다가 음 이탈이 일어났다. 카펠라는 그것도 부끄러워서 입을 꽉 다물었다.
“성녀님, 카펠라랑 있어 주세요. 여기서부터는 혼자서 갈게요.”
애런은 업고 있던 카펠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용사님 제가 방해돼서 그러는 거예요..?”
“그건 아니야. 나 혼자서도 충분해서 그래. 여기서 쉬고 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카펠라는 그 말이 진심이면서도 다른 진심을 숨긴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왕의 마법에 내가 또 당할까 봐…’
살면서 자신의 실력을 의심한 적은 없지만, 지금만큼은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꽉 다물었다.
“괜찮겠어?”
성녀도 물어봤지만 애런의 대답은 똑같았다. 혼자서 마왕을 베고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 단신으로 마왕성에 쳐들어가 마왕의 목을 베었다.
남들은 역시 용사는 다르다며 애런을 찬양하기에 바빴지만, 카펠라는 자신이 저지른 짓이 자꾸만 떠올라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
분명 둘만이 아는 기억이지만 만약 애런이 환생했다면, 이 기억은 잊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걸 어떻게 말해. 대마법사인 내가 오줌을 지려서 용사의 바지를 젖게 한 것도 창피해 죽겠는데, 그 사람이 내 팬티까지 말려줬다고 어떻게 말해.’
그리고 대마법사의 자존심이 있지 용사가 아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이런 처음 보는 애들한테까지 이 사실을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카펠라는 대답할 생각이 없다.
“알려주세요..! 그래야지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을 할 것 아니에요?”
“확인은 내가 할 거야. 내가 찾아가든지, 네 오빠가 나한테 찾아오든지 하면, 그때 확인하면 돼.”
아무리 애원하며 부탁해도 얘기해주지 않자 결국 아일라는 포기하고 의자에 축 늘어졌다.
“아일라 님, 말 못 할 기억일 수도 있으니까 이해해 주세요.”
“그래도… 제 오빠가 환생한 사람일 수도 있는데.”
이자벨라는 아일라가 왜 저러는지 알 것 같아서 입에 초콜릿을 하나 넣어주고는 말한다.
“애런 님은 애런 님이잖아요? 환생한 사람이라면 갑자기 남이 되나요?”
“... 그건 아니긴 한데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카펠라는 조용히 말을 되뇌었다.
“애런… 애런..?”
분명 전생 용사의 이름도 애런이었다. 용사가 유명해지면서 흔해진 이름이기도 하지만 과연 이것이 우연일까. 적어도 카펠라는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정말 환생한 거야…”
카펠라는 아일라의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보며 말했다.
“생각이 바뀌었어. 내 반지 내놔.”
죽은 사람이 아니라면 애런에게 샀던 반지를 남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